The Child Who Defied the Waves RAW novel - Chapter 1
*배경/분야: 현대 로맨스 판타지
*작품 키워드: 현대물, 판타지물, 초능력, 초월적존재, 동거, 기억상실, 재회물, 첫사랑, 소유욕/독점욕/질투, 운명적사랑, 직진남, 계략남, 능글남, 집착남, 절륜남, 짝사랑남, 순정남, 동정남, 사차원남, 철벽녀, 평범녀, 상처녀, 다정녀, 순정녀, 철벽녀, 외유내강, 잔잔물, 성장물, 힐링물, 애잔물, 이야기중심
*남자주인공: 사조 섬 가장 꼭대기에 사는 남자로 이상한 말투와 취향을 가졌지만 의외로 스스럼없이 남을 대하는 것에 능숙하다. 이상한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숨기는 것이 있어 보인다.
*여자주인공: 송정인 사람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지만 스스럼없이 남을 대했다가 상처를 입을까 싶어 경계심을 가진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상처가 많아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 · ─────── ·𖥸· ─────── · ·
그 섬에 가게 된 건,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팔찌가 고장이 나자 그 팔찌를 만들었다고 들은 섬으로 떠나게 된 정인.
겸사겸사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추억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곳은 무인도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내, 내가 할게. 괜찮아.”
“씻을 때도 그 팔찌를 차는가 봐.”
이상하게도 팔찌를 벗기는 것에 집착하는 한 남자.
“매일 그리 울면 얼마 안 가 섬이 잠기겠다.”
그리고 그는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정인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이별을 죽음처럼 받아들이는 그녀는 사랑을 멀리하려고 하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주위에서 맴도는데.
“외로웠겠구나.”
우습게도 그녀가 이 섬에 와서 가장 생각이 없고, 가장 들뜨고, 가장 우울하지 않을 때는 오로지 그의 곁에 있을 때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단 것을 아는데. 줄까?”
죽음과 닮은 남자와 이별을 보내지 못하는 여자는 그 섬에서 하루를 보내고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문리더] 검은색 배경화면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장. 나쁜 버릇
저마다 아무리 감추려고 애써도 감추어지지 않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재력이거나 타고난 기질, 혹은 부모일 수도 있겠으나 내 경우에는 사랑이었다. 사랑. 죽을 둥 살 둥 먹고 사는 와중에 하필 사랑이라니. 차라리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디서 파는지, 얼마를 치러야 할지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많고 많은 것 중에 사랑이라서 사는 내내 고달픈 육지 동물이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다섯 살 적부터 할아버지 손에 컸다. 육이오 전쟁 때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밑바닥부터 시작한 할아버지가 가나다라도 모르는 손녀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관심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팔십 먹은 할아버지와 사이가 돈독하니 좋았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할아버지에게 첫 번째로 소개해 주었고, 별반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해도 미주알고주알 나의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었다.
말수는 없지만 좋은 분이었다. 장이 설 때면 짜장면을 내 입에 물려 주고 돌아가는 길엔 한약재를 사서 찻물로 끓여 주었다.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자취하며 전화 통화로만 잘 지내시냐고 안부를 물을 적에도, 할아버지의 죽음은 회사가 내일 당장 휘청이는 것만큼 현실성이 없었다. 설에는 기차표를 구하는 게 하늘에 별따기니 봄에 꽃이 피면 내려가 볼까나 하던 중이었다. 당신에 관한 말씀을 거의 하지 않던 할아버지는 꽃이 피기도 전에 하늘로 소풍을 떠났다.
“저기.”
파도가 몰아친다. 뱃머리에 부딪혀 위로 솟구친 하얀 거품이 뺨에 튀었다. 배에 달린 엔진은 염소 울음소리를 내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어부는 그물로 어설프게 가려 둔 소품을 쏟지 않고 파도를 넘는 기술에 한해선 베테랑이었다.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어부의 굽은 등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오래 배를 몰아 본 사람답게 파도가 역정 내든 말든 한 치의 두려움이 없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상의, 검은 고무줄 바지까지. 검은색에 원수진 사람처럼 입은 어부는 누가 바닷사람 아니랄까 봐 피부가 거칠었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나요?”
“곧.”
말을 길게 해 주면 입병이라도 나나 보다. 배에 부딪히는 파도보다 눈살을 꼬집는 햇살이 성가셨다. 손 그늘을 만들자 팔찌에 달린 방울이 짤랑짤랑 울었다. 땟국 흐르는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은 어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그거. 어서 난 겁니까.”
어선 한 척으로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는 결정을 짓고부터 이때까지 밥 잡수셨냐는 인사조차 없던 양반이었다.
“이거, 모르세요?”
“내가 어떻게 압니까.”
“할아버지가 이 섬에 사는 분한테 샀다고 들었는데.”
사기당한 얼뜨기 취급하듯 어부의 이죽거리는 입술이 마중을 나왔다.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지.”
“그 섬에 사시는 분 아니세요?”
“아니. 난 거기 발도 안 들여.”
미소 짓는 어부의 앞니가 벌레 파먹은 양 새까맸다. 소일거리 삼아 여행객을 섬으로 실어다 주는 어부라 소개받았으나, 원체 기상천외한 일이 밥 먹듯 일어나는 사회인지라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는 말만 믿고 얻어탄 내 경계심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겁이 나 사면이 바다인 배 위에서 호신용품으로 쓸 만한 게 무언지 두리번거리던 차였다.
“세상이 좋아졌지. 예전에는 직접 손으로 배를 움직여 데려다주었는데.”
노 젓던 시절을 회상하는 어부의 눈은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배가 섬으로 도착하기 전까지 삼십 분가량 남았다. 어부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어 자동보단 수동이 매력 있는 거 아니겠냐고 떠들었지만 나의 신경은 온통 잠금장치가 고장 난 팔찌에 가 있었다. 십팔 년을 동업한 친우가 돈을 떼먹고 숨었을 때도 언성을 눅이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할쑥해질 때면 십중팔구 팔찌 때문이었다. 씻으려고 풀어만 놓아도 혼이 나며 큰 터라, 고등학교 올라가기 전까진 다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저 섬에 가면 고칠 수 있겠죠?”
돈만 쥐여 주면 팔찌 수리야 전국 어디에서나 할 수 있었다. 팔찌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핑계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49재가 끝난 지 석 달이 지난 지금도 과거에 매여서 살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둔 김에 해외여행을 가는 건 어떠냐는 부장의 말이 백번 옳았다. 할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나온 여행 책자 때문에 결정한 국내 여행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살아생전 당신께서 집까지 팔아 사 왔다는 팔찌가 여행 책자에서 소개하는 섬 출신이란 말이 있었다. 유럽의 수도원보다 나은 게 없는 섬을 택한 이유였다.
시장 북새통같이 시끄러운 마음이 지도상에 표기도 안 된 섬으로 가자고 꼬드겼다. 팔찌를 원산지서 고치고 말겠다는 똥고집을 부려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는 중이었다.
“팔찌. 잠깐 보여 줄 수 있나?”
제 아랫사람 대하듯 말을 깐 어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선 타는 사람치고 하얀 손바닥을 예의 있게 거절했다.
“풀어서 보여 드릴 순 없어요. 잠금장치가 고장이 나서요.”
“아쉽게 됐군. 일이 빨리 끝날 수도 있었는데.”
손에서 떼려면 언제든 떼어 낼 수 있었지만 절대 풀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당부가 몸에 밴 터라 남이 요구한다고 잠금장치를 풀 수 없었다. 파도와 실랑이 벌이는 배 위에서 지쳐갈 즈음 목적지인 섬이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섬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자전거로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은 섬이라고 들었는데 눈으로 가늠한 둘레는 그보단 커 보였다. 운전대에서 손을 놓은 어부가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지만 암만 그래도 자기 배인데 피우지 말라고 하면 겸연쩍을 듯싶었다. 목적지가 코앞이니 못 본 셈 치는 와중 어부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시선을 피하는 데에 재주가 없는 나는 어부와 눈을 맞췄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궁금한 게 있어서. 뭐, 이 섬에 들르는 사람들한테 다 묻는 말이지만.”
“어떤 게 궁금하세요?”
“다 큰 처녀가 이런 외딴섬에 혼자 온다는데.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시던가?”
담배를 빠끔대는 어부의 눈동자가 죽은 물고기 같았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남이 나에게 조그마한 관심이나 질문을 던져 주면 하루가 다 가도록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잘 지내냐는 가벼운 물음을 던진 학교 선배와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신 선배는 그날 이후로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자기는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배를 까고 드러눕는 강아지처럼 구는 내가 부담이겠거니 싶었다.
“부모님 이혼하셔서, 각자 가정도 따로 있으시고. 일 년에 연락하는 거 몇 번 되지도 않아요.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 안 하고……. 게다가 장례식에도 하루만 얼굴을 비춘 거 있죠? 자기 아버진데. 엄마는 오지도 않았고요. 아저씨가 보기에도 참 나쁜 사람들이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나보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 같다고 한다. 밝고 명랑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회사에 입사해서 수습 기간을 거칠 때도 우는 소리 안 한다며 사수의 평가가 좋았었다. 회식 자리에 가면 고이 자란 아가씨가 사회성까지 좋다더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귀 간지러운 말을 들을 때마다 오해가 커지기 전에 진실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식이 끝나고 사수에게 독대를 요청해 부모님의 이혼부터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다는 이야기까지 일러주고 나서야 속이 풀렸다. 친했던 친구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솔직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부모에게 사랑받고 큰 사람인 척했다가 나중에 들키기라도 하면 곱절로 창피할 뿐이었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부는 담배를 물고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쉬엄쉬엄 담배를 태우며 라디오 듣듯이 무표정하게 있었다. 쟤는 푼수처럼 떠드는 게 흠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몰라서 모르는 게 아니라 멈추는 법을 몰랐다. 시작점이 어디였는지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가씨.”
말을 딱 잘라 끊은 어부가 장화를 당겨 신었다. 담배를 발로 짓이긴 그가 배를 선착장 쪽으로 대었다. 뙤약볕에 익어가는 선착장에서 바다 비린내가 났다.
“내려.”
내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재촉하는 어부의 손에 붙잡혀 일어났다. 나는 상대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비치면 어쩔 줄을 몰랐다. 가방을 챙겨 배에서 내리는데 덜커덩하면서 배가 움직였다. 기본적으로 높이가 있는 배라서 넘어지지 않게 잡아 주는 어부의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무사히 배에서 내리자마자 떼어진 손이지만, 그 찰나 같은 온기에 꽁하던 첫인상이 사르르 녹았다.
항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주인 없는 초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막 상경하기 시작한 초여름의 냄새가 섬 곳곳에 웅크려 있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를 정비하는 어부에게 넌지시 권했다.
“저랑 밥 안 드실래요?”
시동을 건 어부가 까만 목장갑을 끼면서 인상을 썼다. 그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섬을 가리켰다.
“볼일이나 봐. 나한테 신경 끄고.”
출발하기 위해 자리에 앉은 어부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쭉 뺐다. 참 가지가지 한다는 듯이 혀를 차고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비 온다.”
“비요?”
나 역시 쨍쨍하기만 한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언제 비가 올 것 같으냐고. 혹시 비가 오면 배를 띄우는 것도 위험하지 않냐고. 나랑 섬에서 한숨 돌리며 밥 먹고 술 한잔하실 생각 없냐고. 하지만 갈 길이 먼 어부는 배를 돌려 선착장을 빠져나갔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제 딴에는 등쳐 먹기 좋은 내 걱정을 한다고 하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귀찮아서 예의상 하는 말인 거, 정말 모르겠어?’
나의 세상에는 말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날 때도 그 말들은 머릿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를 조종한다. 덮어 놓고 무시하다 보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야 만다. 대관절 이 말들에게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배가 떠나 버린 선착장에 10분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외딴섬에 타지인이 방문하면 자기네 민박으로 오라면서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섬은 어찌 된 영문인지 호객은 고사하고 적당히 한 끼 때울 식당도 보이지 않았다. 지붕의 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기는 하는 모양인 듯하다. 워낙 정보가 없는지라 미리 민박이나 숙소를 예약해 두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밥이나 숙박 같은 건 도착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거니 싶었던 게 문제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의 상태가 이렇다. 눈치는 없지만 꼼꼼하다는 평을 들었었는데, 장례식을 치른 이후로는 간단한 보고서조차 작성하지 못하는 바보가 돼 버렸다.
“전화가 어디 있지…….”
핸드폰을 찾기 위해 가방 속에 잡히는 물건을 모두 꺼내 보았다. 분명 여행 책자도 챙겨서 넣어 두었던 것 같은데, 손에 잡히는 거라곤 옷가지와 속옷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가방 안쪽 지퍼를 열어 뒤적거리자 네모난 핸드폰이 손등에 밀려 나왔다. 습기 찬 여름에 젖은 핸드폰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액정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타기 전까지 멀쩡했던 아이였다. 배에 타서도 가방을 무릎 위에 얌전히 두고 있었다. 엄지로 여러 번 화면을 두드려 봤지만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후였다.
“왜 이래, 진짜…….”
어부의 말처럼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려왔다. 섬 위에 반갑지 않은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삐 풀린 듯 출렁이기 시작하는 파도를 보자 겁이 났다. 뭍으로 떠난 어부가 가는 길에 잘못되면 어떡하나 싶었다. 나 때문에 바다가 그의 무덤이 될까 걱정이었다. 양말이 흠뻑 젖을 때까지 나를 에워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럼에도 길을 잃은 배가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
따개비처럼 두세 채씩 붙어 있는 집들은 모두 빈집. 창피를 무릅쓰고 대문을 두드려 봤지만 돌아오는 건 헛헛한 빗소리뿐이었다. 민가가 몰린 언덕 중턱에서 슈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으나, 그 역시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물건도 변변치 않았다. 라면 한 봉지조차 없는 슈퍼 안을 한참 둘러보다가 나왔을 때는 가느다랗던 비가 장대비로 변한 후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에 80년대에나 볼 법한 공중전화기를 발견했다.
고민 끝에 흥건히 젖은 공중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번호가 기억나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 생물학적 생모밖에 없었다. 이 먼 곳까지 데려와 달라는 말은 서로에게 부담이었다. 기종에 상관없이 개통된 핸드폰 하나만 부쳐 달란 부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엄마는 긴 문자로 본인의 사정을 호소했다. 시간을 내지 못해 미안하니 살다가 힘든 일 있으면 연락 달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생살 갈라 낳은 자식까지 버린 사람의 말은 믿을 게 못 되지만 당장은 기댈 곳이 그 문자밖에 없었다.
동전이 없어 콜렉트콜을 쓰려는데 전화는 이미 연결된 상태였다. 누가 쓰고서 남은 잔돈을 빼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기억에 저장된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나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슈퍼 처마에서 떨어진 빗물이 바닥 홈에 고일 즈음이었다. 콜렉트콜 번호라서 무시할 줄 알았던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는 삼시 세끼를 경마장에서 해결하는 아빠를 떠나 입맛도 성미도 까다로운 상대와 재혼했다. 아내는 밖이 아니라 집에 있어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졌으며 되도록 전 남편과 관련된 건 끊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단다. 아빠보다 서너 달 먼저 재혼한 엄마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 지 오래였다. 서류상에선 모녀로 엮이지만 엄마에겐 진짜 남편과 진짜 딸이 있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 정인이. 급해서 연락드렸어요.”
– …….
연결 상태가 불통인가 싶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차였다. 오십 먹은 엄마의 쉰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볼륨을 높인 것처럼 쨍하게 귀속을 관통했다.
– 흐, 으으으, 흐으…….
“엄마.”
– 정인아, 흐, 흐으…….
“무슨 일 있어요? 엄마, 엄마.”
갑자기 전화가 불통이 됐다. 다시 걸기 위해 전화를 끊고 잔돈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동전 박스는 토해 내는 게 없었다. 먹통이 된 공중전화는 다이얼을 수십 번 눌러도 무음으로 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짧은 지식으로 공중전화를 고쳐 보려다가 가망 없음을 깨달은 건 저녁때였다. 묵을 데도 없는데 빗줄기는 희롱하듯 거세졌다. 국내 여행 책자에는 관광하기 좋은 곳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재작년 한창 TV에서 강력한 태풍이 북상한다고 떠들어 댈 때 주민 전원이 뭍으로 떠났을 수도 있었다.
그때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언덕 끝에서 깜빡깜빡 빛나는 게 등대인 줄 알았으나 이 층짜리 일반 가정집이었다. 빗줄기를 뚫고 언덕을 올랐다. 앞머리가 젖는 바람에 앞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했다. 가자마자 염치 불고하고 욕실부터 빌려야겠다.
언덕 위 집은 값싼 자재로 석 달 내에 뚝딱 짓는 공장형처럼 보이진 않았다. 건축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설계부터 주인의 취향을 녹여 공을 들인 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 층까지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집은 보안이 필요 없는 양 대문을 달아 두지 않았다. 한옥 마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흙과 나무의 향이 짙게 나는 집이었다. 배를 타고 2시간 이상 들어와야 하는 작은 섬에 어떻게 이만한 집을 지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엄지로 묵직한 초인종을 누르자 새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집주인은 불을 켜 두고 집을 나간 모양인지 반응이 없었다. 이 섬사람들이 모두 모여 밤낚시라도 하러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안에 있음에도 여행객을 재워 줄 아량은 없는 것일 수 있었다. 집 근처를 배회하는 양 가방을 들고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자, 집 뒤편에 노숙하기 좋은 공간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옷의 물기라도 짤 요량이었다.
빛이 환해졌다. 마당으로 이어진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인지, 처연한 달빛인지 알 수 없었다. 뒷마당에는 평상, 보리수, 팔을 베고 잠든 남자가 있었다. 길쭉한 다리 선이 아름다운 남자는 후 불면 사라질 신기루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노르스름한 달빛에 삼켜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던 별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된 주택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어려 보이는 외모임에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 풍겼다. 우리나라에서 염색이 아닌 자연으로 밝은 머리칼이 날 수 있던가. 분홍빛으로 보일 정도로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이내 내 관심에서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남자의 눈이 새초롬해졌다. 쌍꺼풀 없는 눈매와 오뚝한 코가 매력적이라서 뭍으로 나가면 대성할 얼굴이었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 스물은 되었을까 싶은 남자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아, 저기.”
자기 집에 낯선 여자가 들어왔으니 놀랄 만할 텐데도 그는 뻗친 뒷머리를 정리하는 침착함을 보였다. 나는 황급히 여행객으로 보일 법한 짐가방을 들어 그에게 어필했다.
“내가 이 섬에 여행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놀라게 해서 미안해. 저,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이십 대 중반이라고 우기기에도 민망한 나이에 들어섰고 존댓말은 거리감이 있어 보여 반말을 썼다. 내 장황한 인사말을 들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잘생긴 눈썹을 구부린 남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갈 곳을 잃었구나.”
“아, 나?”
“머물 곳이 필요한 모양이지?”
남자의 목소리는 특이한 지점이 있었다. 낮다 싶은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감미로워져 듣는 사람의 머리칼을 쭈뼛 세웠다. 여타 이십 대 초중반의 남자보다 중후한 목소리로 들렸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설명하기엔 어려웠고, 목소리가 들어와 뇌에 구멍을 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티셔츠를 비틀어 짜면서 대답했다.
“섬에 사는 분들이 잠시 떠나신 모양이야. 내가 여기를 잘 몰라서……. 그런데 부모님 좀 뵐 수 있을까? 학생 말대로 머물 곳이 없어서.”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남자가 물 흐르듯이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곧은 다리를 뻗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지나친 남자에게서 매캐한 향기가 났다. 장례식장에서 삼 일 밤낮으로 맡아 본 향기였다. 향을 피울 때 나는 냄새가 그 애의 몸에서 났다. 사붓사붓 나무 옆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뒤를 놓칠세라 숨 가쁘게 따라갔다. 집을 안내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숙박업소가 맞는 모양이었다. 웬만한 유명 펜션보다도 시설이 괜찮은데 위치가 위치인지라 홍보에 적극적이지 않았나 보다. 시골구석에 박혀 있어도 경치 좋고 건물이 세련되면 소문 나는 게 우리나라니까 말이다. 비에 맞은 생쥐 꼴로 남자의 뒤를 따라서 현관문 쪽에 다다랐을 때였다.
기운이 빠져 가방의 끈을 놓쳐 버렸다. 섬의 꼭대기에 위치한 집이어서 아랫동네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내가 공중전화를 붙들고 씨름할 때까지만 해도 인기척 없이 깜깜하던 동네에 생기가 돌았다. 싹싹한 맛이 없던 비도 더는 내리지 않았다.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인 집집이 주황빛 전구를 켰다. 먹구름 가신 섬의 풍경에 코끝이 찡해졌다.
“아래쪽에 볼 일이 남았으면 보고 와도 좋고.”
말투가 예사롭지 않아 멋대로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한 게 틀렸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 알고 보니 서른이 훌쩍 넘었거나. 뻣뻣하게 굳은 걸음으로 남자가 열어 준 현관문을 넘었다. 입구부터 도로가 소나무의 향이 풍겼다. 겉은 한옥이어도 안은 현대식으로 꾸며 놓는 요즘 집과는 달리, 마루보다 한단 아래에 부엌을 따로 갖추어 놓았다. 거실에는 소파 대신 방석 몇 개, 옻칠한 제사 그릇을 둔 그릇장과 손님맞이용 교자상이 보였다. 방문도 미닫이문 형식이어서 사생활과 소음에 취약하겠지만, 지금 내 처지엔 지붕만 있으면 만사형통이었다.
남자는 민속 박물관 느낌이 나는 일 층 복도로 걸어가 양초에 불을 붙였다. 불을 켜기 위해 허리를 굽힌 남자가 성냥에 후, 바람을 불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게 없다더니 몸 누일 데를 찾자 생판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남은 것이 불편해졌다.
“저, 부모님은 언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닫이문이 바람을 만나 확 젖혀졌다. 쾅, 하고 문이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가슴을 부여잡았으나 다행히 오리처럼 꽥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방 안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 되어 있었다. 침대를 기대하진 않았는데 방 안 구조가 할아버지 집과 똑같았다. 장롱과 침대가 나란히 있고 창이 남쪽으로 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별을 구경하는 낭만까지 챙겨 준 셈이었다.
“고마워, 숙박비는 부모님 오시면 드릴게. 저기 그 전에 전화를 좀 쓸 수 있을까?”
“그보다 젖은 몸을 씻는 게 낫지 않을까.”
“아, 괜찮아. 수건으로 조금 말리고…….”
“나는 내 집 마루에 물기가 치덕거리는 것을 싫어해.”
“아……. 그래. 미안, 내가 생각이 없었어. 욕실이 어디니?”
그가 친절히 손가락으로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나와 보니 욕실 방향으로 온천에서나 쓸 법한 붉은빛의 조명이 어룽거렸다. 여러모로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인구수가 적은 섬, 머리 위에서 내려다볼 만큼 건장한 남성의 신체, 객관적으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다니는 여성 여행자에겐 위험한 조건이었다.
“고마워.”
나는 옷을 갈아입는 척하며 그와 나 사이에 있는 문을 천천히 닫았다. 남자는 문이 닫히기 직전임에도 붙박인 것처럼 떠나지 않았다.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자 남자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휘어진 그의 눈이 환영이 아닌 환송처럼 느껴지는 게 내 오판이었으면 했다. 문이 탁, 닫히고 나자 남자의 그림자가 얼룩 지워지듯이 사라졌다. 전력 질주를 하지 않는 이상 이토록 빨리 문 앞에서 떠나가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식 기술?
남자가 떠나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불어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서 있었다.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아도 그만한 키의 남성이 숨을 공간은 없어 보였다.
“비를 맞고 머리가 어떻게 됐나.”
첫날부터 남자와 둘이 남게 생겨 의심병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이것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생긴 병일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
“흐아.”
특가 세일에 반값을 주고 샀지만 방수까지 되는 가방이어서 그런지, 가져온 옷가지와 속옷은 젖지 않았다. 욕실은 최근에 리모델링한 것처럼 겨울을 대비한 첨단 난로까지 있었다. 씻겠다는 말에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인지 둥그런 나무 욕조 안이 온수로 가득했다. 천장을 터놓은 야외 욕조에 발을 담그자마자 피로가 싹 날아갔다. 신식 세면 시설을 들여놓은 욕실은 사용자의 마음대로 커다란 유리 천장을 여닫을 수 있었다. 만발의 준비를 한 펜션인데 오지에 있다는 이유로 괜한 걱정한 건가 싶었다. 샴푸나 린스 같은 목욕용품의 브랜드도 신경 쓴 티가 나서 기분이 좋아졌다.
몸에 물만 끼얹자던 계획은 욕조에 들어와 앉는 순간 폐기되었다. 욕실을 차지한 지 한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전화기를 잡고 흐느껴 울던 엄마가 생각이 났다. 엄마도 엄마지만 나도 그 못지않게 무심한 면이 있었다. 등이 따스워지고 나서야 그 일이 생각 난다니.
엄마와 결혼한 아저씨는 나이를 꽤 먹은 총각이었다. 첫 결혼이니 만큼 저쪽 시댁에서는 한 번 갔다 온 여자와 결혼시키는 게 탐탁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 눈총이 무서워 나의 존재는 거의 없는 것처럼 하고 산다고 웃으면서 말한 사람이 엄마였다. 성격이 불같아서 그렇지 평소에는 남편감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두둔하던 게 기억이 난다. 엄마는 내가 할아버지와 사니까 아무 말이나 막 해도 좋다고 생각했나 보다. 심지어 나는 어땠는가. 결혼 잘했다며 속없는 사람처럼 웃기나 했다.
평생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온 엄마의 꿈이 번듯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란 건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경마장 중독에, 자기가 일 순위인 아빠와 헤어져 어렵게 꾸린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렇듯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입장을, 상황을, 인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내가 그 사람이 돼 보는 것 외에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욕조 밖으로 나가서 물기를 닦고 가운을 둘렀다. 호텔 수준의 가운을 비치해 둔 펜션의 센스에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수건 한 장을 더 꺼내어 머리에 두르고 밖으로 나가 하얀 발 매트에 서서 눈을 깜빡였다. 문 앞에 개켜 둔 속옷과 잠옷이 보이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 서랍장에서 가운을 발견한 뒤 옷은 씻고서 챙겨가자며 바닥에 두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혹시 그사이 돌아온 집주인이 빨랫감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겠으나 거실까지 이어진 복도에는 촛불 그림자만 일렁거렸다. 만일 방에 두고 온 거라면 요즘 들어 심해진 건망증 탓을 해 보고 싶었다.
혼자 독채를 빌린 것이면 몰라도 혈기 왕성한 성인 남자와 함께였다. 가운의 허리끈을 단단히 여민 뒤 발을 뗐다. 욕실 문을 잠깐 열어 두었다고 복도가 습했다. 숙박 비용 문제로 남자가 아래층에 들를 가능성이 있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이 보이자마자 뛰듯이 걸었다. 다음부턴 남자가 외출하는 날짜를 따져서 욕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차였다.
“악!”
언제 왔는지 모를 남자가 어슷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복도를 밝히는 촛불이 전등만큼 밝진 않은지라 문 옆에 사람이 서 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깨 밑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감싼 수건이 떨어지면서 복도가 지저분해졌다. 마루가 치덕거리는 걸 싫어한다는 남자의 눈치를 봐서라도 가능한 한 빨리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핏물 빠진 것처럼 창백한 손이 다가와 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등 뒤에 감쳐 둔 마른 수건을 내 머리에 얹은 뒤 손을 흔들었다.
“내, 내가 할게. 괜찮아.”
“씻을 때도 그 팔찌를 차는가 봐.”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수건이 흘러내려 시야가 막혔다. 수건을 걷어 낸 나는 가운을 여미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끼는 거라서. 거의 몸에서 안 떼어 놔.”
젊은 여성이 옥으로 만든 팔찌를 차고 다니는 것에 관심 보이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던지라 대강 대답을 해 주었다. 가운 차림으로 서서 오래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었다.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문을 닫으려고 할 때 하얀 손가락이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나는 그의 손이 끼기 직전에 동작을 멈추었다. 문틈으로 건너오는 형형한 눈빛이 내 간담을 녹였다.
“하면 언제 떼어 놓지?”
“…내일 얘기하자. 그래도 되잖아.”
문을 닫기 위해서 힘을 주었으나 그의 손이 껴서 가로막고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을 보면서 나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속옷 없이 가운만 걸친 데다가 경찰도 없는 섬에, 그것도 알 것 다 알게 생긴 남자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고 싶어서 팔찌 찬 팔을 등 뒤로 숨겼다.
“이거 팔아 봤자 얼마 안 나와.”
“값은 중요치 않지.”
애늙은이 같은 남자의 말투에 마른 웃음이 픽 흘러나왔다. 나는 남자가 문에서 손을 떼자마자 어른스럽게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부모님 오시면 말해 줘. 그 전에 전화 어디 가서 쓰면 되니?”
“이 섬에 전화란 없어.”
“없어?”
뜻밖의 소식에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애걸하듯 말했다.
“그럼 네 핸드폰 빌려줄래? 간단한 통화 한 통이면 돼.”
“안타깝구나. 그것도 없어.”
“네 나이에 핸드폰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아, 내 나이가 몇인데?”
나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남자의 부모님이 오시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심신이 피곤해진 나는 안락한 침대가 그리워졌다.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
그러나 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문틈을 막고 있는 그의 손이 황당해 죽겠다. 낯빛 한번 바뀌지 않는 남자가 웃으며 재차 물었다.
“내 나이가 몇이냐 물었지 않아.”
혹시 어디 정신이 아픈 남자인가. 안 그래도 저만치 생긴 남자가 직장 없이 섬에서 사는 게 정상은 아니지 싶었다.
“모르겠어. 지금 좀 피곤해서…….”
문을 닫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자 남자는 포기한 것처럼 문에서 손을 떼었다. 매끄럽게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의 말소리가 스미듯 들어왔다.
“농 한번 한 것 가지고.”
문이 탁, 닫히자마자 남자는 또다시 특수 효과처럼 사라졌다. 새벽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있으니 가방을 문 쪽으로 세워 두는 게 나을까.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새벽 배를 구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 차였다. 발목에 부드러운 잠옷의 촉감이 착 감겼다. 가방에서 꺼내 둔 잠옷과 속옷이 방 한가운데에 파지처럼 버려져 있었다. 잘 개켜 놓은 걸 이리저리 헤집은 것만 같은 느낌에 꺼림칙했다. 히스테리에 젖어 방 안을 왔다 갔다 했지만 복도는 이 밤 내내 침묵이 흐를 것처럼 어둡고 조용할 뿐이었다.
༺♥༻
침대에 누워 새벽 2시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나마 든 선잠도 주전자 물 끓는 소리에 달아나고 말았다. 습관처럼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으나 잡히는 건 없었다. 망가진 핸드폰이 내 가방에 들어 있다는 건 헛손질을 10분이나 하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맨 먼저 한 일은 곱슬머리의 숙명과도 같은 머리 묶기였다. 날이 습해서 그런지 몸이 뻐근하고 축축 쳐졌다. 배꼽시계의 활동이 활발한 게, 자느라고 점심시간은 훌쩍 넘긴 눈치였다.
남자가 부엌에 물을 올려 두고 잊은 게 분명했다. 거실로 설렁설렁 나가는데 가스레인지 밸브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기어이 주전자의 물이 흘러넘쳤나 보다.
밤낚시를 끝내고 돌아온 남자의 부모를 마주칠 가능성이 있어 현금이 든 지갑을 꺼냈다. 카드 결제는 번거로울 듯해 미리 뭍에서 현금을 두둑이 뽑아 온 상태였다. 정 안되면 은행에서 이체한다는 생각으로 여행 자금의 반을 지갑에 넣어 두었다. 집주인을 만나기 전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의 일정은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배편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곳에선 더 볼 일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 볕이 잘 드는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부엌으로 갔다. 거실과 턱을 두어 구분 지어진 부엌은 기름칠한 듯 반지르르한 새 솥과 유기 반상 말곤 평범했다. 여기는 손님용으로 쓰고 주인이 요리할 때 쓰는 부엌은 위층에 마련해 둔 모양이었다.
“계세요.”
집주인은 숙박비 안 낸 여행객이 느지막이 일어나 제집을 구경하고 다님에도 나와 볼 생각이 없었다. 혹시 텃밭을 가꾸나 싶어 집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새벽부터 다 같이 짜고서 바다로 나간 양 섬 전체가 조용했다. 하는 수 없이 숙박비는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아랫동네 구경에 나섰다.
어제저녁 아랫동네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니 잘만 하면 섬에 사는 도민을 마주칠 터였다. 전화를 빌리고, 먹을 것을 해결하고, 생활에 필요한 용품을 사야 하고, 가장 중요한 배편도 있는지 알아야 하니 구경만 하는 게 아니긴 했다.
“계세요?”
그러나 들르는 곳마다 철거 직전의 폐가처럼 텅 비어 있었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 봐도 깨진 장독대와 세월이 야속한 세간 살림 몇 개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외지인이라서 대문을 걸어 잠갔다고 믿는 게 나을 뻔했다. 거기만 빈집인가 싶어 오후 내내 여러 집을 돌아보았지만 어떻게 된 게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똥개 한 마리가 없었다.
“뭐야…….”
간판이 기운 슈퍼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물건과 주인이 없었다. 슈퍼 안쪽에 골방이 하나 있어 들어가 봤지만 그 안에 생활 흔적이 보이는 용품은 양말 한 짝이 다였다. 슈퍼 주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티비나 여름철 필수품인 선풍기 같은 것도 없었다.
망한 지 몇 년은 된 구닥다리 슈퍼 같았다. 여기 사는 사람이라곤 그 남자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하필 핸드폰이 고장 나서 배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언덕 아래 선착장이 있는 곳까지 갔지만 정박한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내 마음을 모르는 파도만이 부딪혀 올 뿐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그럼 어제저녁에 내가 봤던 불들은? 뱃사람은 부지런하니까 새벽 댓바람부터 배를 끌고 나간 것 아닐까.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수심 깊은 바다로 나갔다가 오후 즈음에 돌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하루 더 머무르면 될 일인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휴양지로 떠나온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와 관련된 작은 단서를 얻고 싶어서 온 곳이 아니던가.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게 남은 건 시간, 어떻게 혼자서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삶밖에 남지 않았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할만한 일이 없어 멍하니 항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노을이 보랏빛으로 퍼졌음에도 섬은 돌아오는 이 없는 외톨이 신세였다. 더욱이 펜션 주인이란 사람들은 여행객이 어떻게 돌변하든 상관이 없다는 양 집 문을 열어 두고 다니는 대담함을 선보였다. 어제 그 남자가 무서운 한편 딱해졌다. 섬에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종일 바다만 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종일 잠만 잤을까.
펜션 냉장고 안에는 깻잎, 시금치 등 채소류가 칸칸이 들어 있었다. 된장을 비롯한 온갖 장들도 뒷마당 장독대에 보관 중이었다. 된장찌개를 끓일 수 있게 두부와 감자, 애호박 정도만 꺼내어 가스 불을 켰다. 다행히 밥통에 밥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일하러 가시면 보통 오후 10시 전후로 들어오시기 때문에 밥은 나 혼자 차려 먹었어야 했다. 간단한 달걀 프라이로 시작한 요리가 국, 찌개류로 발전하더니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어지간한 주부와 맞먹게 됐다. 하물며 사내놈이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단 소리를 듣고 자란 할아버지는 사골국 외엔 만들 줄 아는 음식이 없었다.
감자 한 알을 잘게 잘라 볶음을 하는 사이 된장찌개가 다 끓여졌다. 구석에 놓여 있던 상을 펴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놓았다. 냉장고에 있던 소주 한 병까지 꺼내 오자 멋진 한 상이 만들어졌다. 밥을 푸고 수저를 놓자마자 감자볶음이 푹 익었다.
어쩐지 휴양온 게 아니라 밥집에 취직한 기분이 들었다. 떨어진 밥맛을 살리기 위해서 바깥으로 상을 들고 나갔다. 마당에 놓인 평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 운치가 있다는 이유였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밥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긴 했다만, 문제는 평상에 주인이 있다는 거였다.
이제 보니 머리칼이 제법 길었다. 특히 여우 꼬리 같은 앞머리가 쌍꺼풀이 없는 눈 위까지 내려온 머리칼이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하얗고 편안한, 어떻게 보면 헐렁하다고 할 수 있는 티를 입은 남자에게서 국화꽃 향이 났다.
“저기, 안녕. 종일 안 보이더라. 계속 여기 있었니?”
밥상 위에 올려 둔 수저가 중앙으로 모이면서 잘그락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저녁때였어.”
남자는 내가 차려 온 밥상을 보고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배고파서 냉장고에 있는 것을 좀 썼어. 나중에 다 계산할게.”
“하도 분주하게 돌아다녀서 나는 부엌에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임을 앎에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세상 풍파란 풍파는 저 혼자 겪은 사람 같았다. 흉내 낼 수 없는 노련한 말투나 여유가 그냥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밥상 들고 온 사람을 쪄 죽일 것처럼 보는 그의 눈빛이 불편했다. 내게 쏟는 관심을 답례처럼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남자가 낯을 심하게 가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는, 밥은?”
아랫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경치가 좋고, 이웃집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남보다 빨리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평상 위를 고집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남자와 겸상하는 건 내 쪽에서 거절이었다. 어쩔까 말까 고민하는데 남자가 평상에서 훅 일어났다. 다가와 내 밥상을 뺏듯이 가져가 평상 위에 올려 두었다. 한 벌밖에 준비하지 않은 수저를 제 것처럼 들어 한술 뜨는 게 보였다. 어이가 없었으나 반찬값은커녕 숙박비도 안 낸 입장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밥 안 먹었구나.”
“밥이 질다.”
“질어?”
그럴 리가. 나는 질은 밥을 좋아하지 않았다. 밥 한 숟갈을 떠먹은 뒤 오물거리던 남자가 확인해 보라는 듯이 상을 밀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평상에 오르던 찰나 밥숟갈을 든 남자의 손이 다가왔다. 얼결에 벌려진 입으로 숟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충동적인 상대의 행동에 당황할 겨를 없이 달콤한 밥맛이 입안으로 퍼졌다. 고들고들한 쌀밥. 질퍽거리지 않는 쌀알들이 혀 위를 돌아다녔다.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니 남자가 개구지게 웃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상 펴 두고 올라올 생각을 안 하니까 말이야.”
“저, 그게. 내 수저밖에 안 가져왔어. 네가 밥 먹을 걸 생각을 못 해서.”
“허기가 진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나 보네.”
남자의 눈빛을 따라가 보는데 거짓말처럼 두 사람분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 분명 혼자 먹을 생각으로 차린 밥상이었기에 남자의 수저를 챙길 리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밥상 앞에 다리를 펴고 서 있었다. 그러자 숟가락을 물고 나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벌러덩 누울 듯이 앉아 말했다.
“동석할 요량이면 더 애태우지 말고 앉는 게 어떠할까.”
“그게, 내 밥이 없어. 더 퍼올게.”
죄지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평상에서 뛰어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통 안에 있는 하얀 쌀밥을 퍼서 거실로 이어진 창을 통해 나갔다. 스스로 명령받잡듯 빠릿빠릿 움직이는 나 자신을 명확히 이해 못 하는 상태였다. 섬까지 와서 나이 어린 남자의 밥 수발을 들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상대방이 올 때까지 밥상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남자한테 실은 따로 먹고 싶다는 본심을 꺼내지 못했다. 하물며 그 남자는 메인 요리인 된장찌개를 맛도 못 본 상태였다.
“허기져. 어서 와.”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든 그가 어서 앉으라며 재촉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평상 위로 토끼처럼 뛰어서 올라갔다. 운동화를 벗고 판판한 평상에 발을 펴고 앉았다. 실바람이 불어와 된장찌개 냄새를 섬 구석구석에 퍼트리고 다녔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집된장의 콤콤한 냄새가 났다. 남자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숟가락을 들더니 곧바로 된장찌개에 넣었다. 목구멍으로 타고 들어간 구수한 된장의 맛이 쓰린 속을 달래었다. 사람보다 음식이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누구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힐끔 눈을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내 손으로 끓인 된장찌개, 감자볶음을 게 눈 감추듯 먹는 게 신기했다.
“맛은 괜찮니?”
벌써 밥을 반이나 비운 그의 그릇을 눈으로 재며 물었다. 밥을 더 퍼 주어야 하나 싶었는데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뿐일까.”
밥 먹는 속도가 느려진 남자는 된장찌개를 밥공기에 퍼 담아 비볐다.
“좋은 맛이 나.”
좋은 맛. 식삿값 대신 내놓은 평가는 나의 얼을 빼갔다. 어느새 나는 밥을 먹는 것을 뒷전으로 하고 그의 입에 감자볶음이 몇 번이나 들어가는지 지켜보았다. 워낙 한창 시기라서 밥을 한 번 풀 때 많이 퍼서 먹는다. 반찬이 감자볶음밖에 없는 게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보다 보니 안쓰럽긴 했다. 그의 부모는 무얼 하고 있을까. 허우대 멀쩡한 아들을 이 섬에 박아 두고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관심이 있긴 할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런 막장 부모가 어디에 있냐고 하겠지만 그런 부모는 꽤 많았다.
“저기.”
얼굴을 든 남자의 얼굴에 하얀 밥풀 한 알이 붙어 있었다. 네가 흥부전의 흥부냐고 놀리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렸다.
“저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먹고픈 것?”
“섬이라도 물자를 실은 배나, 이런 게 들어올 거 아니야. 그때 나랑 같이 뭍으로 나가 볼래? 밥 사 줄게.”
아무리 봐도 어딘가 아파 보이는 남자. 섬에 버려진 게 정황상 확실한 남자. 이 섬은 여행 책자에 실린 것처럼 일상을 버리고 떠나 오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지는 않는 것 같은, 거의 무인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전기가 들고 수도가 멀쩡히 나오고 가스가 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만한 섬이 아니라 육지라 할지라도 사람이 없는 구석진 시골로 가면 온수가 나오다 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언제 틀어도 무리 없이 온수가 콸콸 나오는 정도라면 아직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봐도 좋은 걸까. 할아버지의 추억으로 가는 문은 열려 있다고 믿고팠다. 오랜만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혼자 밥을 먹는 건 먹는 것 같지 않아서 반 이상 남을 때가 많았다.
“너는.”
“응?”
“너는 먹고픈 것 없어?”
비워 낸 공기 그릇에 물을 따라 마신 남자가 먹고픈 것을 말하란다. 끽해야 짜장면일까. 이 외딴섬에 사는 남자가 먹고 싶을 만한 메뉴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역으로 받은 질문이 나를 벙벙하게 만들었다.
“나?”
“운이 좋구나.”
남자의 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들은 불어 수업을 연상케 했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기지개를 쭉 켠 남자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내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었는데도 육신이 멀쩡하니.”
“풉.”
웃지 않으려 했는데. 웃으면 기분이 상할 텐데. 이십 대 초반의 허세에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웃음, 기침, 사랑은 참으려 하면 할수록 더 부풀어져 나오는 법이었다. 어느새 양 볼에 공기가 빵빵하게 찬 내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간신히 웃음 폭풍을 가라앉히자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혀를 깨물면서 표정을 갈무리했다.
“난, 음,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내가 알기론 그것들도 종류가 여러 가지던데.”
“그 이렇게 쪼개 먹는 초코맛 아이스크림. 알아?”
할아버지는 손녀를 위해 집 앞 태양 슈퍼에 들러 비싼 콘 아이스크림이 대신 쪼개 먹는 초코 아이스바를 사다 주었다. 맛보다는 형편 때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커갈수록 콘 아이스크림보다 슈퍼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맛으로는 더 나았다. 할아버지의 절약이 나의 입맛을 길들인 것이다.
밥을 다 먹고 나니 남자와 할 말이 없어졌다. 멍하니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는데 아무리 섬에다가 외지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별이 많았다. 하늘에 연결된 가는 실을 잡아당기면 우르르 바다에 쏟아질 것 같았다.
뺨이 간질거려 팔로 쓰윽 닦았더니 물 같은 것이 묻어났다. 또다. 요즘 시답잖은 걸로 눈물이 났다. 티브이를 보다가 할아버지와 똑같은 중절모를 쓴 사람을 보면 울었고, 밥만 잘 먹다가 콩나물을 보고 처음 간 식당에서 곡하듯 운 적도 있었다. 정작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는 씩씩한 손녀인 양 울지 않았으면서 왜 툭하면 눈물샘이 터지는지 모르겠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 찾아오려나.”
남자는 나와 똑같이 고개를 젖히고 하늘 구경 중이었다. 의문 어린 시선에 답하듯 고개를 돌린 그가 내 눈물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람의 눈물을 모아서 비를 내리는 것,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
“매일 그리 울면 얼마 안 가 섬이 잠기겠다.”
이건 위로일까. 아니면 저 남자의 상상력이 풍부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꺼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두서없는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 뜻을 상상해 나를 위로하는 용도로 쓸 수 있었다. 차라리 이 남자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늘었으면 했다. 대화가 아닌, 서로 하고픈 말만 지껄이면서 보내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그 상상력을 썩히지 말고 시인이라도 되는 건 어떠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나도 저만할 때 뭐 해 먹고살 거냐고, 무엇이 될 거냐고 물어보는 어른들의 말이 참견으로 들렸다.
“상 치워야겠다. 벌레가 꼬이네.”
나는 벌레처럼 몰려드는 외로움을 손으로 휘휘 물리고 상 치울 준비를 했다. 수저를 모은 뒤 남은 물은 그릇에 부었다. 웬만큼 정리한 상을 들어서 옮기려는 차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 밥 더 줄까?”
고개를 젓는 것을 보니 밥이 모자란 것은 아닌 듯싶었다. 대신 그는 상다리 붙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별안간 일어난 일이라 대응할 새도 없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그가 가져간 내 손을 뒤집어 보았다. 퍽 시큰둥한 그의 눈이 손바닥 위를 돌아다녔다.
“타고난 연이 적어.”
용한 점집에서 손금 봐 주는 분위기였다. 타고난 연이 적다는 말보다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들한테 신이 들어 부모가 이 외딴섬에 버리고 간 것은 아닐까. 문득 할아버지가 무척 저명한 도인에게서 바가지 잔뜩 씌운 팔찌를 사 온 게 기억났다. 하지만 남자는 그 이야기 속 도인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어렸다.
“놓아…….”
잡힌 손을 돌리면서 빼내려 했으나 남자의 손아귀 힘이 장사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내렸다. 도톰한 입술이 닿자마자 놀란 어깨가 굳어갔다. 반듯한 입술은 내 손금 사이사이를 훑듯이 제 부드러운 모양을 남기며 비벼졌다. 그의 숨 냄새가 내 손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관능적인 행위에 압도되어 아무 말 못 하는 내가 만만했는지, 이 건방진 남자는 시키지도 않은 위로를 하려 들었다.
“외로웠겠구나.”
작정한 것처럼 쏟아붓는 말은 나를 두렵게 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나의 외로움을 이용하려고 했던 남자들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보던지, 나는 기죽어 다니는 여자만 골라서 노리는 갱단이 있는 줄 알았다. 상처가 많으면 귀가 얇아진다. 다가와서 아픔을 이해하는 척, 외로움을 이해하는 척하다가 쓸개까지 다 빨아먹고서 버리는 건 그네들의 수법이었다. 최근에 헤어진 그 녀석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대신 자기를 의지하라던 놈이 끝에는 그만 좀 징징거리라며, 대한민국에 가족 죽은 사람이 너 하나뿐이냐는 말을 하고 떠났다. 이런 기억은 시간이 아닌 수술로 지우고 싶었다.
나는 남자의 머리를 밀쳐서 떼 버리고 도망쳤다. 상을 치우다가 말고 떠나는데도 남자는 붙잡지 않았다. 나 또한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한테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 나쁜 버릇 때문에 수십 번 죽고 싶다가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나는 사람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먼저 보았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어렵게 사람을 잊었다. 사실 나는 한순간도 잊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니 나 같은 미련퉁이는 더 늘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이 나쁜 버릇이 도지기 전에 남자를 돌멩이 보듯 해야 한다.
현관문 손잡이를 당기는데 비가 쏟아졌다. 아랫동네엔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비가 오면 집으로 돌아가 불을 켜는 의식이 있나 싶었다. 아니면 비 오기 전에는 전기를 아끼려고 불을 켜지 않는 건가. 지랄 맞은 섬 날씨라는 말에 걸맞게 여름의 초장부터 먹구름과 친해지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앞을 지나쳐 아랫동네로 나갈 자신이 없어 외출을 포기했다. 내일 해야지. 급할 것도 없는데. 뭍으로 나간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타고난 연이 적어. 외로웠겠구나.
저렇게 어려 보이는 남자의 눈에도 보이는구나. 그래서 다들 내가 만만했겠구나. 아무도 안아 주지 않는 내 팔을 감싸 안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처연했다. 잠이 잘 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