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ild Who Defied the Waves RAW novel - Chapter 11
11장. 여름에 만난 남자
첫 기억은 놀란 간호사의 얼굴 뒤로 뛰어 들어온 엄마의 얼굴과 백화점 1층 향수 냄새였다. 연신 하나님을 찾은 엄마는 나를 떠는 손으로 안아 줬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퇴사하고 집, 편의점, 집을 반복하던 내가 왜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영문을 몰랐다. 편의점 주먹밥을 대량으로 사서 쟁여 두고 먹다가 몇 주 지나서는 그조차 귀찮아 끼니를 걸렀으니 영양실조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회진하고 있는 담당 의사를 만나고 나서야 병명을 물을 수 있었다. 간호사는 어려운 말로 돌려 하고, 의사는 최대한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레 말해 주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자살 시도요?”
엄마는 ‘자살’의 ‘자’ 자도 듣기 싫은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상하다. 나는 퇴사하고 할아버지의 짐을 여유 있게 정리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팔목에 봉합된 상처와 기록들은 담당 의사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혼수상태로 몇 개월이라니.
“수치도 좋고요. 내일 검사 결과에서 특별한 것 없으면 퇴원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는 1350호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가망이 없을뿐더러 오늘내일하는 몸 상태였는데도 눈을 떴단다. 심지어 깨어나고부터 병원 밥을 잘 먹어서 그러한가 없던 어지럼증이 생긴 것 빼고는 특별히 몸 상태에 지장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팔찌를 가난뱅이 미신으로만 치부하던 엄마가 그 무당인지 도인인지 참으로 용하다고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탓에 할아버지가 절에 다니고 무당을 믿는 걸 가장 반대하고 나섰던 게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네.”
“혹시 저랑 어디서 만나신 적 없으세요?”
깨어나서 엄마 다음으로 인상이 강하게 남은 건 담당 의사였다. 저 뿔테 안경, 그리고 하얀 가운을 분명 어디서 보았었다. 오다가다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에게 혹시 M 대학을 나왔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정인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가 웃는 얼굴로 내게 노란색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너 퇴원 선물.”
전화를 해도 받을까 말까 했던 엄마는 사람이 백 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경마장과 강원도로 도박 원정을 다니느라 바쁜 아빠도 내가 이렇게 되고선 몇 번 병원에 들렀다고 했다. 할아버지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자식이 죽을 지경이 됐다고 변했을 리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왜 이제 와서 이러냐며 거부하진 않는 중이었다. 먹던 병원 밥을 한쪽으로 치우고 엄마가 가져온 선물 상자를 열어 보았다. 최신으로 나온 핸드폰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엄마는 뿌듯한 얼굴로 기능이 어떻다는 둥 저장 공간이 어떻다는 둥 어려운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선물 상자를 닫고서 엄마를 바라봤다.
“전에 핸드폰은? 거기에 할아버지랑 통화 같은 거 다 녹음되어 있는데.”
“잠시만.”
엄마는 핸드백을 열어 거기에 보관하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액정이 깨진 핸드폰을 보면서 나는 서글픈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네가 그런 건 아니지?”
엄마의 물음에 한 기억이 생생히 번쩍였다. 편의점에 들러 장을 보고 돌아온 날 신호등에서 무단으로 과속하는 차를 피하려다가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자동차 뒷바퀴가 무참히 핸드폰을 밟고 떠났던 게 생각난다. 엄마는 액정이 깨진 핸드폰을 건네면서 말끝을 흐렸다.
“네가 그런 거 아니지?”
“사고 났었어. 가벼운 뺑소니.”
“웬만한 건 살려서 옮겼어. 너무 걱정하지 말구.”
“네. 고마워요, 엄마.”
“너무 말랐다, 정인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토마토 주스…….”
“토마토 주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생전 토마토 주스를 먹어 보고 싶었던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 맛이 그리워서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잠시 당황한 눈치로 눈을 깜빡이다가 핸드백을 닫고서 나갈 채비를 했다.
“바로 가서 사 올게.”
“엄마.”
“어, 더 필요한 것 있어?”
“엄마 가족은 어떻게 하고 왔어?”
중학생 때 무슨 부모님 동의 여부 때문이었나, 고지서 때문이었나. 안 받아서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고 엄마 남편이 전화기 너머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찍 일어나 유치원을 가야 되는 어린아이도 있는데 밤늦게 전화질이나 하는 불량아라고 말이다. 그때 말 한마디 제대로 응수 못 하고 굽신거리던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잠깐 표정을 굳히더니 금방 웃는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해. 너는 신경 쓰지 마.”
엄마가 토마토 주스를 사러 나가고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원 밥이라도 먹으니 말을 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기력이 생겼다. 병원을 하루빨리 퇴원하고 싶었는데 내일이 퇴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자취방 보증금을 빼두었고 퇴직금도 있으니 당분간은 먹고 사는 걱정이 없었다. 집은 할아버지 집이 있고 취직도 다시 하면 된다. 그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해 놓은 사망 보험금은 되도록 건들고 싶지 않았다.
목이 마른 느낌에 일어섰지만 냉장고에 물이 보이지 않는다. 직접 병에 정수기 물을 뜨며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낫다 싶어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왜 이렇게 병원이 갑갑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옥상에 환자를 위한 작은 정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물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갔다 오자고 생각했다. 정수기를 찾기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가려는 차였다. 익숙한 뒷모습이 엘리베이터 통로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응, 우리 딸. 숙제는 다 했어?”
엄마의 또 다른 딸. 또 다른 우리 엄마. 우리 엄마가 아니라 남의 엄마. 엄마는 나한테는 정인이라고 하지 우리 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활달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재잘재잘 통로를 메웠다. 엄마의 입가에는 한 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 엄마 금방 갈게. 응, 엄마 친구 거의 다 나았어.”
엄마 친구. 신경 쓰지 말라고, 알아서 한다고 하더니만 나를 엄마의 친구로 만든 모양이었다.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막 저녁이 되고 있는 병실에서는 다른 간병인들이 하나둘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튼을 치고 환자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간병인들 속에서 나 혼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네?”
“주스 좀 먹을래요?”
그러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선물로 들어온 오렌지 주스를 옆자리 간병인이 건넸다. 아무 말 없이 받아서 손에만 쥐고 있자 간병인이 엄마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다가 커튼을 쳤다. 각자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예전이었으면 이 오렌지 주스가 연민의 상징 같아서 꼴 보기가 싫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당류가 30g이라니 높군,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엄마의 우리 딸 소리도 나를 눈물 나게 하던 것들이었는데 왜 그럴 수 있지 싶을까. 한 번 죽다가 살아났다고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마음이 조금은…….
“정인아.”
엄마가 토마토 주스 박스를 들고 웃으면서 병실로 들어와 커튼을 쳤다. 엄마는 박스에서 토마토 주스를 꺼내 미니 냉장고에 넣었다. 내일 퇴원인데 뭐 하러 많이 사 온 거냐 그랬더니 마시고 싶을 때마다 실컷 마시란다. 뚜껑 따서 내 손에 한 병을 쥐여 주고 엄마는 간병인 의자에 앉았다.
“날이 점점 더워진다. 이제 병실에도 에어컨 틀 때 안 됐나.”
“겨울이 아니고?”
“겨울?”
엄마는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저 반짝반짝한 도시에는 하얀 눈송이가 더 어울릴 것 같지. 베개에 등을 기대며 엄마가 따준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넘겼다. 그것만으로도 내 안에 꺼끌거리며 남아 있는 감정이 저 아래 심연으로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맛있게도 먹네.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응. 고마워요.”
엄마는 연신 손목시계를 보았다. 엄마는 하루도 내 옆에서 자고 간 날이 없었다. 아침 일찍 와서 시간이 괜찮으면 면회 금지 시간인 오후 9시까지 있다가 들어가곤 했다. 혼수상태일 때 가끔 들렸다는 아빠는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무 연락이 오지 않는 새 핸드폰을 바라보며 웃었다. 괜찮았다. 원래도 이랬다.
“엄마. 할 말 있어.”
“아, 정인아. 엄마가 이제…….”
“나는 엄마가 다치거나 그래도 절대 아는 아주머니라고 안 하고, 엄마라고 할 거야. 친한 아주머니도 아니고 오다가다 만난 아주머니도 아니고. 우리 엄마. 그리고 엄마가 나을 때까지 간호도 해 줄 거야.”
황급히 일어나려던 엄마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엄마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마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사이 많이 늙었다. 엄마는 여러 감정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나는 엄마의 삶에서 밀려났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남인 게 아니었다.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닌 게 아니었다. 죽는다는 소식에 달려와 나를 간호한 게 당신의 숙명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도 돼. 나 이제 안 죽을 거야. 그 말 하려고 그랬어.”
“내일 퇴원하는 날…….”
“나 혼자 갈 수 있어. 여유 없을 텐데도 병원비를 다 내줬으니까, 그걸로 됐어.”
“……전화해.”
엄마는 울음을 꾹 참는 얼굴로 내 손을 쓸었다. 언젠가 죽음을 바라며 쓰러졌을 때 그 암흑 속에서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시집을 와서 나같이 아픈 딸을 두어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지금 겨우 행복을 찾았는데 나 때문에 또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미안해. 미안했어. 너 그렇게 누워 있으니까, 엄마, 진짜, 죽고 싶었어.”
엄마가 처음으로 성인이 된 나를 껴안았다. 그래도 가망 없다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비몽사몽 눈을 떴을 때 살아 줘서 감사하다고 울었다. 그거 하나만으로 나는 엄마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낳아 준 엄마를 언제까지나 증오로 품고 살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놓아줄 것을 놓아주지 못해서 내 작은 그릇이 깨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엄마 이제 전화 안 피해. 그러니까, 꼭 전화해.”
“가요, 엄마.”
나를 놓아주면서 머리를 쓸어주는 엄마의 손길. 엄마한테 나는 알아서 혼자 잘 사는 아이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울지 않고 혼자 장례식까지 치르는 아이. 전화 안 해도 투정 한번 없고, 자기를 버린 부모한테 왜 나를 버렸냐고 따지는 법도 없는 아이. 그렇게 알아서 혼자 잘 살아 줬음 싶은 아이였을 텐데 미안하게 됐다. 떠나가는 엄마의 어깨가 작아 보였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눈을 감았다. 큰 짐을 덜어 낸 기분이 들었다.
띠링, 잠이 들려는 그 순간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핸드폰을 켠 나는 오랜만에 알림을 울린 범인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 잘 지내? ]나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답을 보냈다. 보통 연락처에 저장이 된 사람은 톡으로 보낼 텐데. 번호의 주인을 알지도 못하면서 알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1분도 안 돼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떨리는 손으로 문자함을 누른 나는 번호 주인의 이름을 보고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 나 박동섭. 번호 지웠구나. ]“박동섭이 누구지.”
스팸 문자이거나 잘못 보낸 문자인가 보다. 어쩐지 김이 팍 샜다. 도심의 야경이 아름다운 창밖을 보면서 성의 없이 답장을 했다.
[ 잘못 연락하셨어요. ]이와 같은 야경을 어디서 본 것만 같다. 한 고층 빌딩에 설치한 주황빛 조명이 인상적이었다. 퇴원하는 내일이 기대됐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 박동섭이란 사람이었다. 정말 자기가 아는 번호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거절을 누르고 핸드폰 전원을 껐다. 이러면 자기도 잘못 전화한 것을 곧 알겠지.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주황색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난 그날 꿈속에서 주황색 불빛이 깜빡이는 거리를 걸었다.
༺♥༻
퇴원 수속을 마치고 버스를 탔다. 할아버지의 아파트 앞 정류장에서 내려 엄마에게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다행히 오랜 기간 집을 비웠음에도 집주인에게 따로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이 아파트에 세를 주고 자기는 서울에서 산다더니, 그 무심함이 때로는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밀린 관리비만 통장에 들어 있던 돈으로 해결하고 나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세상이 조용해졌다.
아직도 이 무더운 날씨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천천히 낡은 경비실을 지나치고 차들이 묘기 부리듯 주차된 주차장을 지나쳐 광고가 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웃을 일도 없고 즐거울 일도 없는 하루. 그런데 왜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댁 비밀번호가 그대로인 것도, 몇 달을 비웠는데 생각보다 깔끔한 집안 상태도,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뻐하며 청소를 시작했다. 락스로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할아버지의 짐을 모두 박스에 담았다. 할아버지의 방은 말끔히 치운 다음 내가 쓸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고 티비 옆에 할아버지의 사진을 두었다. 살아 있어 다행이었다. 이대로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저세상에 갔다면 여긴 왜 왔냐며 구박이나 받겠지 싶었다.
“나 돌아왔어, 할아버지.”
그리고 습관처럼 팔찌를 매만지는데 방울 소리가 조금 약하게 들렸다. 팔을 내려다보니 방울 두 개 중에 하나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이 부서졌을 때 나도 모르게 하나가 도망간 모양이었다. 나를 지켜 주는 부적이라더니 정말 방울 하나가 도망가자마자 일이 터졌다. 그래도 사람이 큰일을 겪으면 성장한다는 말은 진짜인가 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를 때보다 많이 괜찮아졌다. 입맛이 돌고 끼니때만 되면 메뉴를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그 밖에 무엇을 먹고살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안에 쓸만한 재료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씹을 것 말고 조금 달달하고 시원한 주스가 당겼다. 아파트 일층 상가에 단골 커피숍에서 파는 쿠키와 토마토 주스가 생각이 났다. 지갑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옆집의 문이 쿵, 닫히는 게 보였다.
이 8층 복도에는 우리 집하고 맨 끝에 있는 쌍둥이네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마침 옆집의 문이 닫히자마자 쌍둥이네 아주머니가 쓰레기 봉지를 들고나오고 있었다. 집에서 나와 무표정한 얼굴로 쓰레기 봉지를 들고 가던 아주머니는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는 엘리베이터를 먼저 잡고 기다려 주었다. 우리는 깍듯이 예의 차려 웃고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타 1층으로 내려갔다. 거의 1층에 다다랐을 즈음에 아주머니는 내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얘기 들었어요.”
“아, 네.”
“좋으신 분이었는데. 우리 소영이랑 소진이 가끔 아이스크림도 사 주시고. 자기 손녀 같다고.”
아주머니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내게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하고 쓰레기장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못했다. 1층에 십분 간 서 있었다. 아직 할아버지는 내게 이 정도 영향력이 있나 보다. 할아버지가 쌍둥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는 모습을 상상한 뒤 내리기 위해 열림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벌써 누가 버튼을 누른 모양인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잉,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1층을 눌러 봤지만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한 번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지, 뭐. 어깨에 멘 가방끈을 꽉 쥐고 한숨을 내쉴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다름 아닌 8층에 도착했다.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세상에 가끔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낙엽을 걸고 내기하는데 유난히 내가 고른 놈만 늦게 떨어지고, 눈송이 하나가 내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그 찰나가 영원 같고,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자체적으로 슬로 모션이 걸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열린 뒤 나의 몸은 전율하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단순히 남자가 잘생겨서가 아니었다. 살면서 잘생긴 남자를 한두 번 보았지만 그때마다 이렇지 않았다. 무심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1층을 누르는 손, 닫힘 버튼을 누르는 손, 짧은 진갈색 머리카락, 선이 고운 쌍꺼풀 없는 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는 그 몸짓까지. 평범한 행동임에도 무언가 달라 보였다. 그는 내가 1층에서부터 타고 온 것을 알면서도 왜 내리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있는지 관심 없었다. 메고 있는 저건 기타 가방인가. 음악 하는 사람?
그때 엘리베이터에 있는 거울 속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를 훔쳐보고 있던 게 들킨 것 같아 착 눈을 내리깔았다. 고작 8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데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8층이니까. 내가 없는 동안 8층에 새로운 사람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까 그 옆집에 이사 온 남자인가. 802호에 그에게 이사 오신 거냐고, 저는 803호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뗀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쌩하니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나갔다. 까만 기타 가방을 메고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를 따라서 조용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급하게 아파트 밖으로 나와 어지러운 주차장을 둘러보았지만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연애가 하고 싶나. 마음 좀 추슬렀다고 연애 같은 게 하고 싶은가 보다. 이렇게 내 마음이 나아지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같은 층에 사니까 언젠가는 다시 한번 보겠지.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허기가 나를 보챘다. 나는 아쉬운 걸음을 돌려 일 층 상가에 있는 단골 커피 가게로 들어갔다. 슈퍼 바로 옆에 있는데 좋은 원두를 들여오는지 커피 맛이 괜찮아 우리 할아버지도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간판을 한 번 바라보다 유리문에 붙은 A4용지를 보았다. 아르바이트 모집한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평일 오전 아르바이트. 경력자 우대. 입으로 글자를 읽으며 카페 문을 열었다. 손님을 위해 벌써 에어컨을 틀어 놓으셨는지 발을 들이자마자 온몸의 찝찝한 습기가 휘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설거지하고 있던 사장님이 나를 힐긋 보고는 바로 고무장갑을 벗고 계산대로 뛰어왔다. 언제 봐도 참 토끼같이 열심히 사는 분이었다. 사장님은 정말 반가운 사람을 보듯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웃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오셨어요. 할아버님도 요즘 잘 안 보이시구.”
“음, 그게.”
“왜요. 지난번에 드린 대추차가 별로셨대요?”
“아, 그게. 돌아가셨어요. 몇 달 전에.”
충격적 소식인지 입을 틀어막은 사장님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지셨다. 항상 할아버지가 카페에 오시면 지극히 맞아 주던 분이라서 더욱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일찍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내 마음이 그럴 상태가 아니었다. 매장 안에 나는 그윽한 커피 냄새를 마시면서 슬픔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햇볕이 무지갯빛 무늬로 쏟아지는 창가가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남자까지.
“연락하시지. 할아버님 장례식은 갔어야 하는데. 어디에 안치해 두셨어요?”
“수목장했어요. 근처에 있는.”
“아, 자연원인가 거기요.”
“네.”
그 뒤로 사장님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하셨다. 매장 안에 흐르는 재즈 음악과 오븐처럼 뜨거운 햇볕이 남자와 잘 어울렸다. 뜨거운 머그컵에 있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차례 침묵의 시간이 끝난 후에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남자, 자주 와요?”
“누구요?”
사장님은 계산대 밖으로 목을 빼고 내가 말한 남자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고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얼마 전부터 자주 오시더라구. 덕분에 매출이 막, 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기 좋잖아요?”
“네에…….”
“뭐 드실래요?”
“토마토 주스, 있나요?”
“네에.”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밀고 그사이 남자가 떠났을까 봐 초조한 눈빛으로 창가를 훑었다. 아직 다행히 남자가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돌려줄 때 사장님은 웃으며 자리로 가라고 고갯짓했다.
“오늘은 특별히 내가 가져다줄게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미리 알려드리지 못한 것도 죄송스러운데 이렇게 따듯하게 대해 주시니 감사했다. 이분도 내가 죽었으면 그날 하루는 참 마음이 그랬겠지. 할아버지 가고 나도 그렇게 가 버렸으면.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보지도 않았다. 정신 차려 보니 까만 테이블이 눈앞에 있었다. 그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정신을 놓고 걸어와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바투 붙은 앞 테이블에 허둥지둥 앉았다.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자는 내가 적잖이 이상했는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첫인상부터 망했다. 그의 눈길이 가시로 변해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시선이 하도 따가워 무시하는 건 힘들었다. 나도 고개를 슬쩍 돌리는 척하면서 그를 보았다.
커피잔을 들고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보는 남자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게 웃은 것이지만 남자는 오히려 눈길을 피했다. 볕을 받아 그의 콧날 옆에 생긴 그림자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생전 안 해도 되는 오지랖을 부렸다.
“여기 커피 맛있죠.”
뭐 하는 남자인지, 나이는 몇인지, 직업은 있긴 한 건지. 바로 옆집에 사는데 이상한 사람은 아닌 건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나는 그냥 남자가 궁금했다. 사람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첫인상에 좋은 느낌만을 주는 사람. 미소 없는 얼굴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별로.”
오늘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그런 날은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눈치 없는 입과 손이 쉬지 않고 얘기를 걸고 싶어 했다.
“토마토 주스 나왔습니다.”
내 자리에 토마토 주스를 가져다준 사장님은 떠나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쓸면서 떠났다. 그러고는 남자가 혹시나 오해를 할까 싶어서 살갑게 말을 거신다.
“여기 손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가져다드린 건데.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남자는 별 상관없다는 양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은 새 손님을 받기 위해 계산대로 뛰어갔다. 다시 이 창가 자리에는 우리 둘만이 남았다. 토마토 주스를 빨대로 섞고서 한 입 마시는데 남자의 시선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봤을 때 아까보다 조금은 유해진 남자의 시선이 보였다. 나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주눅 든 것 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예전부터 나를 아는 사람 같이 말이다. 남자와 시선을 섞는 일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겁다.
“우리 같은 층에 사는 거 알아요?”
“몰라요.”
“이웃인데,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도 돼요.”
남자도 내게 호감이 있었다. 다년간 헛다리만 짚은 나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단짝으로 지내다가 결혼과 함께 소식이 끊긴 동창을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핸드폰을 꺼내서 보았다. 기다리던 연락이 왔는지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는 남자가 떠나는 길에도 내 쪽을 한 번 보았다. 시선끼리 만나는 그 순간이 더 길었으면 좋았을 터다. 기다란 기타 가방을 들고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기억에 멋대로 저장됐다. 나는 남자가 떠나가고 없는 빈자리를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괜히 목이 말라 토마토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혀가 바뀐 것처럼 달지 않았다. 날씨도 그렇다. 남자가 가자마자 하늘에 구름이 드리웠다.
“오랜만에 왔는데 캐러멜 마키아토는 안 드세요?”
남자가 떠난 테이블에 소독약을 뿌리는 사장님이 웃으며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마신 거라곤 토마토 주스밖에 없었다. 나는 웃으며 토마토 주스의 빨대만 만지작거렸다.
“사람이 입맛이 변하나 봐요.”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네.”
“제가요?”
“응, 조금 더 차분해졌어. 옛날에는 말도 많이 하고 엄청 바빠 보이고 그랬는데.”
신기하게도 사고가 나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장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내가 방금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누군가에게 대시하듯 말해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들었어도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 머리 풀고 달려드는 일은 없을 텐데. 남자가 앉았던 자리를 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사장님, 아르바이트 구하셨어요?”
“아뇨. 왜요, 관심 있어요?”
“저 직장 관뒀어요. 이제 여기서 살고요. 뛰면 오 분도 안 돼서 바로 올 수 있고 카페 알바도 해 봤어요.”
갑작스러운 나의 어필에 사장님은 당황한 듯이 눈을 굴리다가 가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이미 내정자가 있으신 것인가 싶어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 가게 문 앞에 붙여 놓았던 공고물을 떼는 게 보였다. 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해결됐다. 남자를 만나고 내 마음에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그가 앉았던 자리로 떠나갔다. 내일도 저 남자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눈을 뜨자마자 머리를 감고 소풍 가기 전날처럼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간단히 시리얼을 말아 아침을 먹고 커튼을 걷은 다음 오늘 날씨를 확인한다. 햇볕이 건강하니 좋았다. 퇴근길에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와도 좋을 날씨였다. 장에 들러 오늘 먹을거리도 사 올 생각이었다. 오늘은 파를 송송 썰어 넣은 매콤한 라면이 땡겼다.
세일해서 반값에 사 온 클렌징폼을 짜서 얼굴에 바른다. 씻고 난 뒤에는 스킨로션, 크림, 화룡점정으로 튀는 색깔의 립스틱을 발랐다. 복장은 최대한 깔끔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뒤 현관문 앞에서 기다렸다. 10시 20분. 그때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보다 19분이 되자마자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면 운명처럼 옆집의 문도 열리면서 우리 둘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요 일주일간 그랬던 것처럼 웃으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직 이름도 알려 주지 않은 그는 어제와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매일 들고 다니는 커다란 기타 가방 대신 운동 가방으로 보이는 것을 맸다. 그는 나를 발견한 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운동 가세요? 어디서 운동하세요?”
그리고 나의 이상 현상 한 가지. 이게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생긴 부작용인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를 보면 내 날씨는 봄으로 변했다. 모든 새싹이 나의 팔과 다리에서 움트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남자 덕분에 나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었다. 이런 나의 노력에 못 이긴 것처럼 남자도 나의 말에 몇 마디 응수해 주었다. 내 마음에 드는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남자. 나의 상상 속 남자의 직업은 거리에서 노래하는 버스킹 밴드부였다. 매일 내가 일하는 카페에 와서 따듯한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을 시켰다. 그와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마다 나는 함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는 상상을 했다.
오늘은 예감이 좋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은 남자는 내려가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타고 나서야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나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남자는 말 없이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다. 가장 안쪽에 있던 나는 슬금슬금 걸어 나와 그의 옆에 섰다. 남자는 무심한 눈길로 옆자리까지 온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제부터 준비해 둔 멘트를 자연스럽게 꺼냈다.
“향수 뭐 쓰세요?”
띠링, 야속하게도 1층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나와 열리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먼저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다급히 쫓아 나가며 그의 옆에 섰다. 남자는 쫓아 나온 나를 보고 처음으로 배꽃 같이 웃었다.
“강아지 같아.”
“네? 무슨 종류요?”
남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워낙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를 빠져나가서 쫓기가 힘들다. 하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남자와 나의 목적지가 같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아지라. 저 남자도 은근히 나를 신경 쓰는 것일까. 강아지 같은 말은 보통 호감 가는 사람한테 쓰는 말 아닌가. 그가 눈여겨볼까 싶어서 발라 본 립스틱이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음 세일 때 비슷한 색으로 몇 개 더 사 봐야겠다.
카페의 문을 열고서 들어가면 웃으면서 맞이해 주는 사장님과 자기 지정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편하게 입은 그의 까만 티셔츠는 단순한데도 맵시가 좋아서 따라 사고 싶었다.
사장님께 인사하고 남자의 주문임이 틀림없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만들었다. 사장님은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캐러멜시럽을 짜는 나를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이거 얼음 끝내고 만들라고 그랬는데.”
“이것만 시키시니까.”
“오, 뭐야, 뭐야. 둘이?”
사장님이 빛나는 눈으로 나를 추궁했지만 남자가 아파트 이웃이라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어 머쓱히 웃기만 했다. 사장님은 젊은 남녀라서 그런지 말을 아낀다고 서운해했다. 하지만 정말 나와 남자 사이에는 뭐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푼수데기 이웃일 뿐이었다. 다 만든 캐러멜 마키아토를 픽업대에 올려 두고 남자를 부르려 했다.
“캐러멜 마키아토…….”
남자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기 전부터 나왔다는 사실에 설렐 일이 하나 없음에도 설렜다.
“나왔습니다.”
남자는 한 박자 늦은 대응이 재밌는지 웃으며 커피를 가져갔다. 남자가 내가 훔쳐보기에 편한 자리를 고집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손님이 없으면 항상 걸레를 들고서 그의 근처에서 알짱거리거나, 설거지하는 척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나 혼자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그는 커피 한 잔을 몹시 천천히 마셨다. 동네 사람이 거의 주 손님인 이곳은 매장에서 마시고 가는 손님보다 배달이나 포장 손님이 훨씬 많았다. 가끔 학부모 회의라고 대형 손님들이 오시기는 하지만 그 외에 자주 매장을 찾는 손님이라고 하면 저 남자가 거의 전부다.
그래서 좋았다. 10시 30분부터 4시까지. 허리 때문에 병원을 다니는 사장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와 나의 시간이었다. 가끔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서 가방을 챙기는 남자를 보면 서로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는 연인 같아 기분이 좋았다. 분리수거를 하는데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매장에 트는 노래도 전부 사랑 노래였다.
조용히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그를 구경하다가 오전에 내가 먹으려고 사 둔 초코 쿠키를 꺼내어 접시에 담았다. 마침 한차례 배달 음료 만들기가 끝나고 다른 손님이 한 명도 없었기에 말을 붙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남자에게 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서 대화를 이어가 보려고 했다. 남자의 옆에 서서 슬쩍 내용을 훔쳐보는데 웬 한자가 가득했다.
“혹시 외국인이세요?”
남자는 책을 보던 눈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혹여 내가 부담스러워 다신 여기에 오지 않을까 봐 급히 쿠키 접시를 그의 앞에 놓았다.
“서비스예요. 단골이니까.”
“눈치코치도 없이.”
“네?”
“단 거 안 좋아해요.”
그러면서 다디단 캐러멜 마키아토는 아껴서 마시고 있었다. 안 먹는다는 뜻인 줄 알고 쿠키 접시를 치우려고 할 때 그의 손이 나보다 빨리 쿠키를 집었다. 단 것을 싫어한다는 말은 정말인지 한약 먹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을 보니 사람의 성의를 아는 남자였다.
“다음에는 안 단 걸로 드릴게요.”
대화의 물꼬를 틀 기회도 안 주는 남자를 흘겨보고 떠나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나와 똑같은 기종이었다. 반가워서 아는 척을 하려는 차였다. 실로 연결해 둔 핸드폰 고리가 독특했다. 요즘 시대엔 핸드폰 고리를 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저렇게 멋없는 빨간 줄에 낡은 방울 하나만을 달아 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터였다. 한문책도 그렇고, 핸드폰 고리 취향도 그렇고, 여러모로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방울이 눈에 익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많이 봐 온 것이었다. 분신처럼 차고 다녔던 팔찌에 단 방울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이거, 어디서 났는지 물어봐도 돼요?”
내가 방울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 그가 핸드폰을 가져갔다. 짤랑, 우는 방울 소리가 내 팔찌에 달린 것과 똑같았다. 그는 가져간 핸드폰을 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어쩐지 내가 낳은 아이가 납치당한 기분이 들어 그의 테이블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한 번만 보여 주실 수 있어요?”
“싫어.”
“왜요?”
“내 거니까.”
남자의 말이 심하게 짧았다. 예의를 밥 말아 먹는 남자는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세상에 이 방울이 딱 두 개뿐인 것은 아닐 테지만, 마침 내가 잃어버린 뒤에 똑같은 방울을 달고 다니는 사람을 발견한지라 의심이 되었다.
“나한테 중요한 물건이라서 그래요.”
“나한테도.”
“누가 준 건데?”
“내 정인이.”
남자는 내 이름을 모를 터였다. 그런데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나를 아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내가 낯설지 않았다.
그때 앞치마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 중요한 시간을 방해한 것이 누구인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 이름을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제발 좀 나타나라고 빌 때는 남자가 없더니 신기하게 죽다 살아나니까 남자가 꼬였다. 박동섭. 자신이 내 전 남자친구라고 주장하는 또라이가 있었다. 며칠 연락을 씹으면 자연스럽게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끈질기게도 틈이 날 때마다 전화에, 문자에, 톡에, 거의 밥 먹다가 심심하면 연락하는 수준이었다. 번호를 바꿀까 싶었지만 엄마든 아빠든 번호를 바꿨다고 연락하기가 껄끄러워 포기했다. 또 바꾼 이유를 물으면 박동섭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는데 그것도 싫었다.
받을 때까지 울릴 것 같은 휴대폰을 바라봤다. 마지못해 남자의 테이블에서 떠나가 카페 밖으로 나갔다. 전화를 안 받으면 한동안 계속 나를 괴롭힐 것만 같아 이참에 확실히 끝내는 게 낫겠지 싶어서였다. 끊이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전화가 걸린 줄도 모르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 정인이니?
“말씀하세요.”
– 어디야. 잠깐 얼굴 좀 보자.
“박동섭 씨. 저 정말로 당신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 제 이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모인 증거로도 충분히 스토커로 신고할 수 있거든요?”
– 너 아직 거기 살지. 정본동.
할아버지 집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나를 아는 사람일 확률이 있었다. 학교 선배나 후배, 옛날 초등학교 동창 정도면 내가 까마득한 것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전 남자친구라면 내가 잊을 리 없었다. 나는 잊지 못해서 괴로운 사람이었다. 사고 후엔 떠오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그러니 박동섭이 만약 내 남자친구였다면 절대 잊을 리 없었다.
– 너한테 그때 상처 준 거……. 미안하다.
“…….”
– 한번 보자. 보고 싶다, 정인아.
만일 이 남자가 진짜 나의 남자친구였고, 내가 사고의 충격으로 그를 잊은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때 사랑했고 소중했던 것들은 떠나간 뒤엔 둘도 없는 원수로 변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직까지 소중하고 사랑했다면 나를 떠날 리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싫어요, 박동섭 씨. 안 볼래요.”
– 내가 보러 가도?
“오지 마요. 새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서로 안부 묻고, 이런 거 정말 싫어요. 날 진심으로 걱정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전화나 붙들고 가도 되냐 마냐 이야기하고 있지.”
– 내가 사정이 있어서…….
“계속 그 사정하고 있으세요. 난 잘살고 있으니까.”
전화를 끊고서 앞치마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담벼락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을 바라봤다. 목소리하고 하는 행동을 들으니 사고 때 잊어버린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덕분에 내가 지금 괜찮은 것일 수도 있었다. 내 삶은 그것일까. 할아버지가 하나님에게 부탁해서 얻은 두 번째 삶. 내 삶이 그렇게 거창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발자국 나아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쉽게 흥분하고 쉽게 우쭐했다. 후퇴만 하는 인생이다 보니 약간의 전진에도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더는 카페를 비워 둘 수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웬일로 커피를 남긴 남자가 보였다. 습관적으로 매장 벽에 달린 시계를 바라봤다. 3시. 남자와 이제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남자는 오늘도 제 할 일을 하려고 어디론가 갈 것이었다. 나는 일을 마치고 장에 들러 대파를 사고, 슈퍼에 들러 라면을 사고, 집에서 혼자 예능 프로를 보며 라면을 끓여 먹다가 지쳐 잠들며 내일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남자에게 전진하고 싶었다.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인정하면서 그의 앞에 서기까지 나는 수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만나 온 그 남자들처럼 이 남자도 다르지 않을 텐데. 죽었다가 살아난 게 뭐라고, 일찍 일어나서 씻고 무엇을 먹을지 기대하게 된 게 뭐라고, 그거 조금 용기가 생겼다고 일을 저질러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나의 입술은 성격이 급했다. 벌써 그를 향한 일엔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시되고 있었다.
“나랑 밥 먹어요.”
남자는 내 제의를 차갑게 거절하거나 애인 생각 없다며 망신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넋이 나간 것처럼 나를 보았다. 제 생에 이렇게 대시해 온 여자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나야 땡큐였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남자의 눈이 서서히 이성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거절하면 두 번 다신 서비스 없을 거라는 협박으로 그의 허락을 받아 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언제나 내 예상 밖을 벗어났다.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물론 날이 무더운 여름이긴 하지만 아이스크림 하나 먹자고 그에게 용기를 냈을 리가. 이번 만남으로 쐐기를 박을 생각인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먹고 싶은 것 있어요?”
“없어.”
왠지 쌀쌀맞은 게 아닌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그가 다급히 덧붙였다.
“너 좋아하는 걸로.”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다. 지금껏 내가 노력한다고 이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있었던가. 그의 말에 감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해져 있었다. 남자가 테이블에 둔 손을 가만두지 못하더니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하였어?”
“아니. 귀여워서.”
마음이 목구멍으로 화살을 핑 쏴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박동섭이 남긴 불쾌한 감정의 응어리는 내려가고 없었다. 나는 그의 앞에 있던 쿠키 접시를 치우고 커피잔을 치웠다. 남자가 치우지 말라는 듯이 손을 뻗을 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한 잔 내가 사서 줄게. 마시고 있어.”
이상하게, 연습하지 않아도 오래 본 친구처럼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돌아와 배달 들어온 음료부터 재빠르게 만들었다. 만들면서도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4시. 언제 4시가 되지. 배달 들어온 음료를 미리 만들어 두고 배달 기사가 올 동안 그의 캐러멜 마키아토를 만들었다. 우유를 붓고 얼음을 넣는데 그의 눈길이 픽업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생크림을 사심 담아서 두둑이 올린 커피를 그에게 가져다주려고 했다. 남자는 눈치를 채고 일어나 픽업대 쪽으로 다가왔다. 쟁반에 담아 전해 주면서 커피를 주제로 말을 걸었다.
“아이스도 있는데 왜 맨날 따듯한 것만 먹어?”
“이게 맛나서.”
“여름이니까 다음엔 아이스로 먹어 봐.”
그는 내 말에 알았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는 게 나중에 속 썩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엔 무표정이어서 되게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수줍음이 굉장히 많은 성격인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가서 4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그를 보니 가슴이 벅찼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하루라도 더 빨리 말할걸. 혼자 밥 먹는 것도 질리는 참이었는데 말이다.
남은 한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일을 했고 그는 그의 일을 했다. 나는 청소와 설거지로 바쁘게 움직이는데 그는 정적에 갇힌 사람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되어 있던 우리가 조금 있다가 같이 저녁을 먹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틈틈이 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핸드폰으로 무엇을 먹으러 갈지 검색했다.
이건 너무 매울 것 같고, 이건 너무 양이 적고, 이건 너무 분위기가 별로였다.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우면 흥이 떨어질 테고. 여러 메뉴를 지우고 지우다 보니 남은 것은 별로 없었다. 첫 만남부터 술 먹자고 그러면 너무 싫다고 그러려나. 거기다가 4시는 조금 이른 시간이니까.
“파전에 막걸리 어때?”
사장님이 들어오기 10분 전. 결국 한번 물어보자는 나의 용기가 일을 저질렀다. 남자는 내가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좋아.”
매장에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저 미소를 나만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10분, 9분, 8분. 시계 침이 돌아가는 소리에 안절부절못했다. 평소보다 뒷정리를 빨리 끝내고 앞치마를 걸어 두는 차에 사장님이 나타났다. 정확히 시간을 지킨 사장님이 카페로 들어오자마자 사조는 가방을 들고서 일어나 나갔다. 인사하고 나가는 그와 비밀 연애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풀러 다시 보기 좋게 묶은 뒤 사장님에게 인사했다.
“편하시게 다 정리했어요. 저 약속 있어서 가 볼게요, 사장님.”
“아, 저 손님 아침에 와서 지금까지 있던 거예요?”
“네.”
“왜에?”
음흉한 미소로 사장님이 나를 떠보지 않아도 카페 앞에서 서 있는 남자의 존재감이 워낙 컸다. 사장님이 뭐라고 하시기 전에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갔다. 창문에 들러붙어 우리를 훔쳐보고 있는 것을 알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다. 나는 남자에게 도로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굉장히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 이사 왔는지, 하필 왜 집값이 오를 일도 없는 정본동인지, 커피 맛도 별로라고 했으면서 왜 내가 일하는 카페에 출근 도장 찍듯 자주 오는 건지,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은 몇 명인지.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그와 걷고 있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냥 나는 이 남자와 이런 것을 하고 싶었다. 누구 하나 앞서가지 않고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고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누가 보아도 일행인 걸 알 만큼 붙어서 걷는 것. 여름이라서 낮이 길었다. 오후 4시임에도 햇볕 아래서 반짝이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좋은 것투성이라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파전 가게는 우리 아파트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서 있는 주상복합 건물 2층에 있었다. 남자는 내가 가는 곳을 군말 없이 따라왔다. 데려가는 데가 어딘지 묻고 참견할 법도 한데 묵묵히 따라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이번에도 2층 창가 자리를 골라서 앉았다. 누가 앉자고 한 게 아니었다.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 같아 운명 같은 유치한 것을 믿고 싶어진다.
“뭐 드릴까요.”
“해물파전이랑 주전자 막걸리요.”
“네.”
싹싹한 알바생이 떠나고 침묵이 흘렀다. 가게 한 벽면에 붙은 막걸리의 효능을 읽는 동안 남자는 물을 따르고 수저를 자리에 놓아 주었다.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걸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더욱 좋았다.
“이름 물어봐도 돼?”
남자에게 늘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남자는 물을 마시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물잔을 내려놓은 그가 서비스로 나온 어묵을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사조.”
“성은?”
“김.”
“난 안 물어봐?”
“송정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히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사장님한테 물어봤나. 아니면 아파트 부녀회장한테? 아니면 옆집 쌍둥이네에게? 아니면 사장님이 송정인 씨, 하고 부르는 걸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가 그만큼 나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일방보단 쌍방이 좋지. 그가 따라 준 물을 헛배가 부르도록 마셨다.
주문한 해물파전과 주전자 막걸리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창밖을 보며 기다렸다. 그것도 아니면 젓가락으로 얼마 남지 않은 밑반찬을 해치웠다. 가운데에 커다란 해물파전이 놓이게 됐어도 사조는 막걸리부터 들었다. 두 잔에 공평하게 막걸리를 채운 사조가 내 앞에 먼저 술잔을 놓아 주었다. 5시에 가까워지는데도 느낌으로는 한낮인 것 같았다. 우리는 소심하게 잔을 부딪히고 각자의 입으로 술을 넣었다. 이 집 막걸리가 맛있더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평소 막걸리는 잘 마시지 않아서 모르겠다. 먹을 만하지만 사조의 입엔 어떤지 몰라 전전긍긍 중인데 그는 엉뚱하게도 내 입술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김이라도 묻었나 싶어서 손등으로 쓰윽 닦는 찰나, 사조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연지 발랐네?”
그래서 뚫어져라 봤구나.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기분이 풀린 것처럼 그의 눈가가 선했다.
“안 발라도 어여쁜데.”
“지금, 그거.”
“응?”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
“너 아니면 누구 있어.”
사조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독특한 남자는 말 몇 마디로 나의 감정을 쥐락펴락했다.
연지라는,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까지 촌스럽다기보다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것인가. 나는 그와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남은 막걸리를 모조리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신기했다. 아까와 똑같은 술일 텐데 맛이 훨씬 달게 느껴졌다. 언제 이사 온 거야? 이 자리를 위해 준비해 둔 질문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사조는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채갈 듯이 바라봤다.
“밖으로 나가서 연락받을 만큼 친밀한 사이도 있었던가?”
“친밀한 사이…….”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릿속에서 바쁘게 생각했다. 사조는 대답을 기다리면서 자기 혼자 술을 따라서 마셨다. 연거푸 자작자음하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카페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은 게 기억이 났다. 그 남자를 말하는 거였구나. 얌전 떨고 앉아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감시하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났다.
“친밀한 건 아니고 그냥 이상한 사람이야.”
“어떻게 이상한 사람.”
“자기가 내 전 남자친구라고 그러는데 난 기억에 없어. 스팸이든 스토커든 둘 중 하나겠지.”
사고가 있었다는 둥, 나의 지겨운 과거에 대해 길바닥서 포 깔고 말리는 고추처럼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사조와는 그런 이야기 말고 밝고 생산적인 이야기만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현재와 미래 같은 이야기 말이다. 의외로 호기심 왕인 사조에게 술을 따라 주면서 물었다.
“처음엔 나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엄청 많네? 밥 사 준다고 하니까 바로 나오고.”
“너니까.”
가끔 사조가 보고 있는 게 내가 맞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지금과 같았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나를 위한 말이라기엔 그 감정이 깊고 진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단 말이다. 나는 먹기 편하게 파전을 쫙쫙 찢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한테 처음엔 되게 쌀쌀했잖아.”
미안한 표정을 짓거나 쑥스러워할 줄 알았던 사조는 되게 재밌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느 정도 저 혼자 웃고 난 뒤 입가를 손으로 쓸면서 여운을 없애려 했다. 하는 말에도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게 눈에 보였단 말이지?”
“응. 나를 이렇게 쫙 째진 눈으로 노려보던데. 커피 맛있다고 했는데 막 별로, 이러고.”
“하여 서운하였어?”
“조금?”
사실은 조금이 아니라 엄청 많이. 하지만 그것보다 얼른 이 사람하고 친해지고 싶다, 하는 감정이 먼저였다. 동시에 막걸리 주전자를 집으려다가 손끝이 부딪혔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손이 닿을 때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그와 손끝을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이상증세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이었다. 사조는 주전자를 잡고서 내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자 준비한 질문 리스트 중 하나를 뽑았다.
“요즘 기분은 어때?”
날씨 질문은 흔하고 뻔한 인상을 주었다. 이건 약간의 사심이 들어간 질문이었다. 요즘 기분은 어떠냐, 하는 일은 무엇이냐. 나는 그에게 일반적인 기준의 질문부터 사적인 기준의 질문까지 죄 물어보고 싶었다. 가만히 있으면 새록새록 생각이 날 정도로 그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사조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선 젖은 입술을 비뚜름하게 비틀었다.
“좋지 않아.”
“왜? 고민 있어?”
내가 해결해 줄까? 이건 얼마 보지 않은 사이에서 할 말도 아닌 것 같고 그의 고민이 아직 무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나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그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당장 내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사조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실 뿐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젓가락으로 파전에 있는 오징어를 들었다가 놓았다. 그가 이 자리를 별로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착잡했다. 나 혼자 마이크 들고 탬버린 들고 막춤까지 추는 기분이었다. 사조가 식탁을 톡톡 두들겼다. 그의 손가락 끝이 접시 바깥으로 나간 오징어를 지적하고 있었다. 아뿔싸,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니. 사조는 내가 탈출한 오징어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휴지 위에 올려놨다.
“먹는 걸로 장난치면 벌 받아, 나중에.”
“응, 알겠어.”
“농 아니고.”
“알았어. 장난 안 칠게.”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다. 잘하면 사조의 말 한마디에 발가벗고 춤도 추겠다.
“아, 맞아.”
사조의 핸드폰에 달린 작은 방울이 기억났다. 만약 사조가 내가 흘린 방울을 주워서 가지고 다닌 거라면 TV쇼에 운명적 커플 같은 사연으로 나가도 무리 없었다. 나는 분위기를 봐서 그의 앞접시에 파전을 올려 주며 운을 뗐다.
“그때 그 핸드폰에 달고 다니던 방울.”
한순간 떠올랐던 그 작고 소중한 미소마저 감춘 사조가 파전을 먹다가 말았다. 생각보다 적대적인 사조의 반응을 보고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돌려 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그게 내 것이 맞는지 묻고 싶어. 나한테 정말 소중한 방울이거든. 소리도 똑같고, 거기에 난 흠집도 똑같고. 정말 내가 흘린 걸 네가 주운 게 맞는지 궁금해서 그래.”
“네 것이 맞다고 하면, 가져갈 거야?”
가져간다고 하면 울기라도 할 기세였다. 감정의 동요가 심하여 질문한 나까지 쓸려가고 있었다. 당장 가져가겠다고 한 말이 아님에도 사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아무리 방울에 정이 들어도 그렇지 울기까지 하다니. 나는 당황스러워서 티슈를 팍팍 뽑았다. 사조는 처연한 얼굴로 받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지 않고 가랑가랑 맺혀만 있었다. 사연 있는 남자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 방울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저럴까 싶은 마음에 괜히 물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져가서 다른 이에게 주려고?”
“그럴 리가 있겠어. 절대 아니야.”
“한데 왜 물어. 꼭 다른 이에게 주기라도 하는 양.”
“아…….”
이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나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잖이 당황한 후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을 상상하며 자학하는 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답답한 심정을 그대로 비출 수 없어 막걸리 한잔을 한 번에 비웠다. 티슈로 입술을 닦는 걸 지켜본 사조가 나지막이 물었다.
“너는 어때.”
“응?”
“네 기분, 네 삶. 요즈음 어떤지.”
“좋아. 엄청.”
사실 그 좋은 것의 반 이상이 다 네 덕분이라는 말은 조금 많이 친해지고 나서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내게 호감이 있는 듯 보이니 지금 말을 해도 괜찮은 걸까.
“어째서?”
“어?”
어째서 네 삶이 괜찮은지 묻는 사조의 표정은 약간 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사조와 이야기할수록 나는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걸 수도 있었다. 나는 가방을 챙기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우리 일어날까?”
“어째서 좋으냐고 물었잖아.”
“사조야. 너 조금 취한 것 같아.”
부축해 주려고 하는데 사조는 알아서 두 발로 섰다. 거기에 내 손을 잡은 건 덤이었다. 갑자기 일어나 악수를 하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조의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간 놀림감이 되기 딱 좋아 손잡고 가게를 나섰다.
계산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는데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앞서서 걸어가는 나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정신없이 가게를 빠져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에게 주사가 이거냐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섬섬옥수같이 희고 예쁜 손과 종잇장같이 창백한 안색은 장난이 아니었다. 파란불이 켜졌다는 신호에도 우리는 건너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처음에는 그에게 조금 따져 볼 생각이었다. 왜 이러냐고. 왜 이리 이상하게 구는 거냐고. 혹시 나를 다른 사람하고 겹쳐서 보는 것 아니냐고. 지금 당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정말 나를 겨냥하고 하는 말이 맞는 것이냐고. 그러나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다. 그저 이 사람을 보듬어 안아 주고 싶었다. 그의 긴장, 슬픔, 원망이 향하는 주소지는 정확히 송정인이었다. 착각에서 나오는 감정이 저렇게 애달플 리 없으니까.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새 마음으로 살아 보고 싶은데 이 사람을 만나서 나는 더한 지옥으로 끌려가는 걸까. 파란 불이 끝이 나고 다시 빨간 불.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서 영원히 기다려 볼 사람처럼 내게 감정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끝내 떨어지지 않는 눈물을 눈에 달고서 말이다. 그 눈물을 얼려서 영영 내가 간직하고 싶었다.
“사조야. 내가 괜찮은 게 싫어?”
그는 최후의 항변을 거부하는 죄수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닫았다. 그러나 나는 저 벌려진 입술로 진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싫어.”
“왜 싫어?”
“네가 후회막심하여 울고 살았으면 하고 빌었거든.”
사실 사조는 나를 사랑하고 호감이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게 아닐까. 이젠 나도 내 기억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본 적이 없는데 이름을, 주소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김사조라는 사람을 802호 이웃으로 처음 만났지만,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사는 사람 중 사조가 포함된다면 이 모든 행동이 말이 됐다. 잃어버린 방울을 발견한 나는 기뻐했지만 사조는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지니고 다녔을지 모를 일이었다. 첫 만남부터 유독 쌀쌀맞았던 남자. 그러나 항상 내가 있는 곳에 나타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남자.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니?”
파란 불이 들어왔다. 장을 본 아주머니 한 분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을 보고 이만 우리도 건너야 한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뺨과 턱을 쓰다듬고 나의 입술이 어딘가로 잡혀갔다. 눈을 감은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입술이 먹힌 나는 느리게 숨을 뱉었다. 그러나 그 숨마저도 그의 입술로 들어갔다. 보드라운 혀가 나의 입안을 조심스레 살피어 다녔다. 그의 팔을 밀어내려던 나의 손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의 팔뚝을 세게 안듯이 움켰다.
그의 입은 조급하고 나의 입은 느려 터졌다. 그는 능숙하게 입맞춤을 주동하고 나는 처음 맛보는 것을 받아먹기에 바빴다. 나의 입술이 첫 키스를 배웠다. 애정이 넘쳐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의 귀에 쪽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즈음 빨간색으로 변해 있는 신호등이 보였다. 천천히 떨어지는 그의 입술이 후회 없는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누가 있든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조를 제외한 타인은 걸어 다니는 종이 상자처럼 느껴졌다. 몇 번째인지 모를 파란 불을 건넜다. 사조와 횡단보도를 건너고 인도를 걷고, 노상 걷던 그 길을 돌아서 걷는데도 새길을 걷는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나무가 그 어떤 나무보다 초록으로 보였고, 빡빡하게 주차장을 채우고 있는 자동차도 전시회에 있는 현대 미술 작품 같았다. 1층, 2층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내 자신이 초능력자라도 돼서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아니면 나도 모르던 순간 이동 능력이 있던지. 설설 끓고 있는 그의 애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8층에 도착하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8층에 도착하고 내리기 싫어 미적거렸지만 그와 손을 잡고 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파트 복도 길이가 짧았다. 우리 집이 한 100m 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했다. 내일은 하필 주말이었고, 카페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사조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이별이 아쉬운 나는 이 말이라도 전해야 했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좋아해.”
사조의 대답이 빠르게 들려올 줄 알았으나 아파트 복도에 던진 고백은 답을 받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그는 제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대신 그의 손이 문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누르지도 않았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손을 잡아당겼다. 사조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나한테 가진 감정이 증오인지 사랑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순순히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빛 한 점 없는 집 안은 문이 닫히자마자 두 짐승이 머물 동굴이 됐다. 그 문은 이제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