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ild Who Defied the Waves RAW novel - Chapter 12
12장. 영원한 안녕
사람의 눈은 금방 빛과 어둠에 적응할 수 있었다. 나와 옆집이니 비슷한 집 구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아파트가 아닌 한옥에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품도 예스러운 물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안방에 있는 비단 이불과 나비 모양의 등불이었다.
“하아…….”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집을 다 둘러볼 순 없었다. 그냥 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사조의 취향을 파악할 뿐이었다. 들어오자마자부터 입술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숨은 그에게서 떨어질 때만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앉아 그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올라오게 된 것인지 그 정확한 정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페에서 데이트 직전 갈아입은 스커트 밑으로 들어와 다리를 더듬는 손이 느껴졌다. 그 손이 낯선 남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몸은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만큼 빠르게 젖고 있었다. 원래는 불감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었다. 이렇게까지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난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손이 속옷의 끈을 살며시 건드렸다. 나는 창피한 마음에 그의 입술을 놓았다. 사조는 내가 입술을 놓아 버리자 서느런 눈으로 이유를 묻는 듯했다.
“내가, 벗으면 안 될까?”
엄청난 변태로 찍힐 것만 같아서 불안불안했다. 사조는 내 부탁에 조용히 생각하다가 속옷 끈에 낀 손가락을 빼냈다. 조용히 젖은 속옷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불쑥 손이 들어왔다. 어어, 하는 사이에 속옷이 쑤욱 내려가 발목에 걸렸다. 그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아랫도리에 숨겨진 음부를 슬쩍 더듬었다. 스치기만 하였는데도 느껴지는 물기에 그의 눈이 경악을 담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워 그의 옷자락만 쥐고 있는데 사조가 갑자기 무릎을 굽혔다. 아래에 무언가 떨어진 것인가 했다. 내 허벅지를 잡은 손이 나를 앞으로 쑥 나오게 했다. 식탁 끝에 걸터앉아 있는 자세가 되었을 때 아래서 바람이 들어왔다.
긴 하얀 스커트 안으로 들어오는 사조의 머리카락이 잘고 고왔다. 허벅지를 지나는 그 부드러운 느낌을 느낄 새도 없이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말캉한 젤리 같은 입술이 내 맨살에 닿자마자 발가락이 발레리나처럼 굽었다. 사조는 조금 더 잘 빨기 위해서 허벅지를 잡고 나를 당겼다. 쩌억 벌어진 틈으로 사조의 혀가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나도 이성을 손에서 놓아주었다.
조심스럽게 시식하듯 혀가 벌어진 살의 틈을 느릿느릿 핥았다. 겉에 묻어나는 물기를 그가 후르릅 훔치듯 가졌다. 그 간질거리는 동작이 나를 열에 걸린 것처럼 끙끙 앓게 만들었다. 치마 아래 있는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조금씩 누르며 그의 혀가 안쪽까지 훑어 줬으면 싶은 나의 마음을 표현했다.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빠르게. 그러나 사조는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틈 사이에 살며시 혀를 넣었다가 뺄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흐, 아…….”
도리어 안달이 난 내가 허리를 움직여 그의 입술에 나의 아래를 물렸다. 조용히 입술만 움직여 내 아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고 있던 사조의 입술에 야한 것들이 잔뜩 묻었을 것이다. 치마 아래에 그를 숨기고 있으니 나 혼자 상상하게 되는 것들은 죄 야한 것들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어떨까. 내가 허리를 흔드는 것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안달이 나게 음부에 대고 빨아 당기는 시늉만 하는 그 때문에 내 허리 짓이 점점 과감해졌다. 천천히 그의 머리를 잡고 허리를 돌리자 그의 혀가 상을 주듯이 내 안에 고인 물을 퍼서 삼켰다.
“으읏…….”
얼마 전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는데 이게 뭐람. 데이트를 끝내고 그의 식탁 위에서 애무받는 장면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그의 혀가 들어오는 길이 막히지 않도록 어깨에 올린 발에 힘을 보냈다. 음부가 벌려진 틈으로 그의 혀가 오르락내리락 간을 봤다. 겉을 핥고는 언제 애타게 했냐는 듯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입을 맞추듯 안을 휘젓는다. 그가 손으로 아랫살을 벌림과 동시에 콧날로 음핵을 건드렸다. 들어와 입을 맞출 때부터 흥분해 있었던 나는 그의 머리를 잡고 안달 난 듯이 둔부를 들썩였다. 그의 혀가 들어올 때마다 나의 허리는 뒤로 빠졌다. 그의 혀가 빠져나가면 아쉬운 것처럼 허리를 흔들어 그를 졸랐다. 감질나는 애무에도 끝은 있었다. 그의 혀가 딱 붙어 나가지 않고 물을 빠는 소리를 냈을 차였다. 눈앞이 노래졌다.
“으, 아으!”
그의 얼굴을 허벅지 사이에 가두고, 있는 힘껏 조였다. 절정에 오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리가 떨리고 그의 입가와 코를 상당한 양의 물이 적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래서 나오지 않고 꿋꿋하게 입술을 박고 있었다. 자잘하게 떨고 있는 아래에 연신 입을 맞췄다. 절정을 겪었음에도 다시 더워진 나는 그의 식탁을 잡았다 허리를 젖히고 숨을 천장으로 띄웠다.
“흐, 아.”
더 했다가는 큰 실례를 범할 것만 같아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사조는 두세 번 더 내 아랫살을 빨고선 고개를 빼냈다. 예상대로 치마 속에서 나온 그의 입술과 코, 턱이 젖어 있었다. 상상보다 극적인 모습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드로즈에 드러난 그의 성기 모양을 보고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눈을 돌리고 있을 때, 갑자기 허벅지가 잡혔다. 쭈욱, 밀려 내려가다가 떨어질 기세였다. 그의 어깨를 잡자마자 안기게 됐다. 모양새가 야시시했다. 내려 달라고 말할 새도 없이 아래에 굵직한 기둥이 쓰윽, 쓰윽 비벼지고 있었다.
“흐, 읍…….”
그가 나의 뒷목을 잡고 입술을 부딪혔다. 한 번에 다 들어올 리 없는 것을 팍 집어넣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 들어왔다는 신호로 허리를 터는 그의 동작이 무례하면서 요염했다. 숨이 터져 나왔지만 그 역시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그 큰 게 푹 찌르고 들어와 마음껏 헤집는데도 내 음부는 어떻게 적응한 것인지 그의 것을 무리 없이 품었다. 더욱이 그가 처받는 대로 음부에서 물이 흘러 마루에, 식탁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지금 들리는 소리가 내 망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 너무, 으, 앗, 응!”
“하아…….”
그는 초장부터 봐주는 것 없이 퍽, 퍽 소리가 날 만큼 허리를 놀렸다. 그 와중에 나의 무게까지 감당하고 있으니 그의 체력과 근력이 비범할 따름이었다. 사조는 그 상태로 몇 번 박다가 자세가 불편했는지 손의 방향을 바꾸었다. 갑자기 몸이 뒤집혀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의 몸이 아닌 식탁이 내 눈에 보였다. 다급히 사조의 팔목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둘이 붙어먹고 있는 접합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의 모양이 흉한 성기는 음부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벌리며 덤비는 것에 가까웠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듯이 아래로 쑥 빠진 성기가 치고 올라왔다.
“아!”
시작점부터 약과 중은 사라지고 강, 강, 강하기만 했다. 그의 혀가 아래가 저릿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는데 그의 것으로 두들겨 치듯 내벽이 자극당하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절정의 고배를 마셨다. 그의 팔뚝을 꼬집듯이 할퀴며 미친 것처럼 도리질했다. 그의 가슴팍에 닿는 뒤통수를 비비적거리며 조금만 쉬었다 가자는 의미를 충분히 전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다리를 꼬면서 우는 것을 보았음에도 잠시만의 여유를 줄 뿐 제 허릿짓의 강약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조, 흐, 사조야…….”
“버텨 봐, 더.”
“사, 아, 우으!”
이미 허벅지를 타고서 흐르는 물조차 그의 성기가 틀어막고 있어 그 정도였다. 사조가 내 허벅지를 양옆으로 조금 더 벌렸다. 고개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구경하는 그가 보였다. 그는 그 상태로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그가 아래로 성기를 빼낼 때마다 아랫살이 열려 물을 떨궜다. 그는 애간장 태우듯 성기의 머리를 내 음부에 슬몃슬몃 비볐다. 그럴 때마다 떨어지는 물을 보고 사조가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 하지 마.”
“할 거야.”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느라 틈이 벌어진 음부에 계속해서 넣을 듯 말 듯 장난을 쳤다. 중간중간 내가 고개를 돌리면 내 귓불을 깨물거나 목을 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 반응을 이끌어 내려고 장난을 치는 그가 밉게만 느껴졌다. 마음과 달리 몸은 본능을 따랐다. 그의 성기 끝이 문질러질 때마다 허리가 흐느적거렸다. 내가 탈진할 지경이 돼서야 그는 방향을 틀어서 내벽에 성기를 꽂았다.
“아, 으으…….”
낯선 남자의 집에서 섹스를 한다. 병원에서 일어난 뒤로 내 삶이 미국 드라마처럼 바뀐 느낌이었다. 그 남자의 성격이 담백할 줄 알았던 나는 얄궂은 면모에 당황 아닌 당황을 했다. 거하게 사기를 당한 느낌이 들었다. 훌쩍거리며 코를 먹었다. 내 귓불을 깨물던 사조가 크게 신음했다.
“하, 울기는.”
“힘들어, 이 자세, 윽, 아으!”
퍽, 퍽, 퍽, 세 번을 연달아 세게 틀어서 박으며 온 방향을 찔러 댔다. 마지막에 푹 찔러 넣을 때는 그의 팔을 잡을 힘도 없자 서서히 그가 걷는 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가볍게 가 버린 나는 안방으로 안겨 가는 도중에도 물을 바닥에 흘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흔적이 다 없어지기를 바라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머리에 푹신한 베개가 닿았다. 하지만 등이 편해졌다고 안심할 수 없는 게, 그의 것은 아직 내 안에 있었다. 더욱이 단단하게 부풀어 있어 여간해선 빠지지 않을 것처럼 내 안을 휘젓는 중이었다.
“하, 좋다, 아…….”
나를 눕히자마자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사조는 눈을 감고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내려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잠자리를 꽤 해 본 사람 같았다. 내가 힘들 때마다 입을 맞추어 주는 것이나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것이나. 저 얼굴로 여자를 꼬시는 게 무엇이 힘든 일일까 싶으면서도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응, 아아!”
몇 번째로 가는 것인지 세기도 지쳤다. 그가 내벽 가장 안쪽을 찌르는 순간에 하반신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밀려오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더니 사조가 내 손을 장난스럽게 빼 버렸다. 그가 눈물이 고인 내 눈에 쪽, 쪽 입을 맞춘다. 입맞춤이 아주 후한 양반이었다.
“음, 으아, 아으, 응!”
입맞춤은 입맞춤 대로 벅찼다. 절정은 떠날 생각이 없는데 박아 오는 성기는 예민의 끝을 달리는 아랫살을 손으로 짓누르면서 나를 놀렸다. 푹, 박아 넣은 다음 살살 허리를 흔드는데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 이제, 그만……. 아, 아!”
입술이 막혔다. 동시에 허벅지가 들렸다. 살짝 위로 올라간 나의 몸을 끌어내리면서 제 허벅지를 가져다 붙인다. 그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찍어 올리기 시작하는 그의 성기가 내벽을 짓이기듯 들어왔다. 물이 흐르고 흘러 내 둔부와 그의 허벅지만 적시면 다행이었다. 감촉이 좋은 비단 이불을 손으로 쓸어 보다가 흥분으로 몽롱해진 정신을 다잡고 이걸 어떻게 세탁할지에 대해 고민해 봤다. 그것도 잠시, 숨이 모자라 그의 어깨를 퍽퍽 치자마자 그의 사정이 느껴졌다. 사정하면서 출납하는 일에 끝을 달리는 그 때문에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그간 잔잔하게 내 머리를 때린 절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악다구니 쓸 힘도 없이 뇌가 비었다. 그의 몸 아래서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이 감각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건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이 지독한 남자는 내 어깨에 기대 여운을 느끼면서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으, 하…….”
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빠져나오는 씨물을 느끼고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이윽고 쑤욱, 빠져나오는 그의 성기에 진득한 것이 묻어 있으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사조는 내 옆자리에 누워 내 허리에 손을 둘렀다. 기분이 좋은 것처럼 내 목에 파고드는 그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조는 엄지로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억울하여서 우는 거야?”
사조는 허리를 안은 손을 조금 더 당겨서 완전히 나를 제 팔에 눕게 만들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헐떡임이 진정되고 있을 때 사조의 손은 부드럽게 허리부터 내 둔부까지 쓸어서 만졌다. 나는 아래서 흐르고 있는 것들을 생각한 뒤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다 하면 안 되잖아…….”
비록 술도 조금 들어갔고 정신은 없었지만 이건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사조는 피식 웃고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누르며 압력을 넣었다.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갖고 싶었는데. 그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살자고 나왔는데 나 말고 다른 사내도 만나 보고 싶고, 아이도 가져야 하고, 그러려고 나왔는데 실망하였나 싶어서.”
사조의 말이 점점 무섭게 들리기 시작했다. 사조는 기억 못 하는 원한까지 내게 대입하기 시작한 눈치였다. 아래턱을 간지럽히듯 쓰다듬은 사조는 앞으로도 호흡만 잘 맞추면 일이 커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포기하는 게 편해. 서방이 주는 떡이나 잘 받아먹고 사는 게 네 팔자려니 해. 죽을 때 돼도 잊지 않고 챙겨 갈 테니.”
입에 쪽 입을 맞춘 사조가 자라는 듯이 팔베개를 해 주었다. 그때 가야금 켜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렸다. 음악 취향까지 별난 사조의 벨 소리였다. 나를 한 팔로 안고 문자를 확인한 그는 굿나잇 키스하듯 나의 입을 빨고선 팔을 빼냈다. 일하러 나가려는 낌새에 나의 눈은 그를 따라갔다.
일어나서 안방에 딸린 화장실로 걸어간 그가 10분 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자개 옷장을 연 그가 그 안에서 무난한 티셔츠와 바지를 갈아입고 한쪽 벽에 세워 둔 기타 가방을 멨다.
“일, 하러 가?”
치마와 속옷, 그리고 윗도리가 벗겨진 채로 누워 있으려니 너무 창피했다. 사조는 일어나려고 몸을 세우는 내 몸을 뒤에서 손으로 눌렀다. 다시 이불에 눕게 된 나는 그럼 남의 집에서 혼자 어쩌면 좋으냐고 그를 닦달했다.
“자고 있어. 새벽에 닦아 줄 테니.”
집이 바로 옆인데 가지도 못하게 누르는 손은 진심이었다. 옴짝달싹 못 하고 누워 있는데 이 밤에 일을 하려고 떠나는 그의 모습이 심하게 걱정이 됐다. 그가 아니라 내가. 직업이 뭐든 합법적이기만 하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조는 여자 문제가 걸렸다.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겼으니 그런 조건이 어디 흔하냔 말이다. 두 집 살림하려고 깐 끈끈이에 날파리처럼 날아가 붙은 거면 어쩌나. 게다가 기타 가방만 들고 다니지 음악을 업으로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무슨 일하는지 물어봐도 돼?”
내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떠나는 사조가 뒤돌아보았다. 그는 약간 장난기가 걸린 얼굴로 답했다.
“원귀 잡으러 다녀.”
거짓말인가? 그런데 원귀가 뭐지? 음악도 아니고. 무슨 새로운 장르인가? 그런데 잡으러 다닌다는 말은 수확한다는 말이랑 똑같은 말 아닌가?
“어부 일 하니?”
“하하!”
사조는 배를 잡고 뒹굴 기세로 웃었다. 띠리리 울리는 전화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이었다. 얼마 후 배가 당길 정도로 웃은 그가 방을 나섰다. 잘 자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주고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집으로 가려고 했으나 잠이 쏟아졌다. 30분만. 30분만 자고 일어나서 몸을 닦고 여기서 자든지 저쪽으로 건너가든지 해야지. 그리고 일어나서 그와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 그의 상처 받은 눈이 나를 향한 건지, 아니면 다른 여자를 향한 건지. 만약 후자라면 그가 아무리 좋아도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원귀는 무슨 생선일까…….”
잠이 막 들려는 차에 생각 난 질문이라서 핸드폰을 켜고 검색해 보았다. 하품하며 화면이 뜨길 기다리는데 경고 문구가 있었다. 화면을 내리자 시퍼런 피부의 귀신 사진이 이미지에 떴다. 핸드폰을 끄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서 누웠다. 얘가 또 나를 놀렸구나. 아니면 나랑은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 없는 건가. 설움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촛불 꺼지듯 꺼져 버렸다. 30분만 자겠다고 해 놓고서 알람도 맞추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나는 그를 기다린 게 분명했다.
༺♥༻
숨이 막히고 가슴이 저리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몸이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피곤해서 깨고 싶지 않았으나 가슴이 당겨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나는 팬티만 입은 알몸과 내 가슴에 붙어 있는 머리를 보고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맨 손바닥으로 얼굴을 박박 긁었다. 겨우 벽에 걸린 시계로 한 시인 것을 확인하고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늘이 주말이어서 다행이지 평일이었으면 사조에게 소장을 썼을 거다.
“하, 으…….”
유두가 저를 위한 것인 양 빨고서 문다. 물지 않은 가슴은 손으로 천천히 주무르며 농락하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으며 기상하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그것도 남자 드로즈를 입은 채로 말이다. 쭉, 쭉, 앙골차게도 빠는 사조의 머리를 밀면서 내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가슴에 열중해 있던 사조의 몸에서 나와 똑같은 비누 냄새가 났다. 새벽에 와서 나를 씻긴 게 정말인가 보다. 얼마나 곯아떨어졌으면 사람이 사람을 씻기는데 잠만 잘 수 있을까.
“씻고 싶어…….”
“내가 다 씻겼어.”
“아니, 그거 말고. 세수.”
“누워 있어. 물그릇 가져올 테니.”
사기 전과가 있는 그의 머리를 힘을 주어 밀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가슴에 난 키스 마크의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양 가슴에 공평하게 남긴 것을 보고 수학에 능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옷장까지 기어가 손잡이를 잡고서 일어났다. 안방에 있는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만 하고 몰골을 확인하려고 하는 차였다. 심장이 조여와 억 소리가 났다.
“아, 윽!”
막힌 세면대 위에 어제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가 늘어져 있었다. 바닥 타일에 낀 핏물에서 비린 냄새가 났다. 내 비명에 성큼성큼 걸어온 사조가 주저앉아 있는 나와 화장실을 확인하고 불을 딱 껐다. 그렇다고 방금 본 광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그의 몸을 살펴보니 벌거벗은 그의 상체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남의 피가 묻었다는 소리였다.
“손으로 빨아야 하는 거라서. 정인이 너 씻기고 나니 곤하기도 해서 까먹었다.”
그가 손을 내 팔 안쪽에 쑥 넣어 일으켜 주었다.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쓰라는 그의 말에 천천히 거실 화장실로 걸어가 세수를 하는 척하며 물을 틀어 놓았다. 바지를 입고 거실로 나온 사조는 가스레인지 불을 타탓 켰다. 아침이라도 먹이려나 보다. 우당탕탕 살림살이 쏟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안에 먹을 순 있는지 모르겠다. 화장실 거울을 보는데 몰골이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눈은 붕어에 입술은 붓고 텄다. 찬물에 세수하고 사조가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새 칫솔로 이를 닦고 나왔다. 어제 입은 반팔을 찾아내어 또 입었다. 사조가 씻고 나온 시간에 맞춰 라면을 끓여 둔 게 보였다. 앉으라는 듯이 의자를 꺼내 놓는 것을 보고 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가서 앉았다. 사조는 내 앞에 앞접시를 꺼내 두고 화장실로 갔다. 그도 간단히 씻는 소리가 들렸다. 핏물 생각에 입맛이 없었다. 라면을 기계적으로 앞접시에 덜어 먹는데 면이 덜 익은 게 느껴졌다. 이건 꼬들한 정도가 아니었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터라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멍하니 라면을 보고 있는데 사조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왔다. 제 기대와 달리 먹지 않는 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입에 안 맞아?”
“면이 안 익었어.”
잠도 충분히 못 자서 그런가 머리가 아팠다. 내 말에 빠른 속도로 라면을 한 젓가락 한 사조는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질겅질겅 익지 않은 라면을 씹는 그의 얼굴은 매우 좋지 않았다.
“요리에 영 소질이 없어.”
“그래 보여.”
솔직히 라면은 소질로 끓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에 일일이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사조는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게 신경 쓰이는지 연신 물을 따라 주고 국물이라도 먹으라며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그 정성을 봐서 국물을 몇 숟가락 떠먹었지만 그 이상으로 먹히지는 않았다.
“그것만 다 마시면 나가서 먹을 것을 사 올게.”
“그만 먹을래.”
“요리는 앞으로 다른 이가 와서 해 달라고 할 테니 화 풀어.”
화? 내가 화가 났던가. 나는 도대체 사조의 무엇을 보고 충격 먹은 것일까. 생각보다 심각한 일을 연달아 겪은 것 같은데 그의 얼굴을 보고 옷고름처럼 쉬이 풀리는 내 마음이 가장 심각한 거 아닐까. 나는 열이 나나 싶어서 스스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도 나지 않고 심장도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저 피를 보고도 또박또박 묻지 못할까. 밤마다 나가서 일하는 게 분명한, 어쩌면 건달일지도 모르는데, 여자가 나 말고도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에게 라면 맛 괜찮다는 소리나 하고 앉았다. 심한 말도 하지 못하고 여기 앉아서 라면 국물이나 떠먹고 있는 나 자신에 화가 났다. 나는 얼굴을 뜯어낼 듯이 감싸고 식탁에 엎드렸다. 송정인. 이 미친.
“정인아.”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고 사조가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다급히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풀어낸 사조가 꺽꺽 울고 있는 나를 보고야 말았다. 나를 탓하는 울음인데도 좌불안석인 사조가 엄지로 눈가를 여러 번 쓸어 주었다. 그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사조는 우는 나를 두고 일어나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냄비를 꺼내고 물을 올리는 그의 뒷모습은 비장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뭐 해?”
“새로 끓여다 줄게.”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돼.”
“아니면 나가서 사 올까? 그게 나으려나?”
“사조야…….”
이 복잡한 마음을 그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새 직장, 새 삶, 새로운 관계들. 잘 헤쳐 나가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사조의 정체를 의심하게 될 때마다 그에게서 안 좋은 증거들을 발견할 때마다 네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한 데로, 알고 보니 내 삶이 더한 곳으로 들어가면 어떡하지? 행복의 동아줄인 줄 알고 잡았는데 알고 보니 저 밑으로 떨어지는 썩은 것이면? 그런데 내게 라면을 끓여 주겠다고 꼼틀대는 저 등이 예뻐 보였다. 아, 가슴 밑에 문신은 지금 보았다. 건달이 아닌 게 더 힘들겠다. 얼굴을 씻고 온다는 핑계로 일어서서 화장실 쪽으로 가는데 벽에 기타 가방이 있었다. 지퍼가 열린 가방 안에는 기타가 없었다. 그럼 종일 무얼 매고 다니는 것인가 싶었다. 닫히지 않은 지퍼를 잡고서 내렸다. 그 안에 있는 건 피 칠갑을 한 장검이었다.
그 길로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남자 드로즈에 반팔 차림으로 그 집을 뛰쳐나왔다. 나를 따라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당장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무서워서 현관에 주저앉아 있는데 사조의 발소리가 들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송정인.”
목소리는 왜 이렇게 좋은 거야. 소, 돼지, 닭, 오리, 생선 다 잡아도 사람은 안 된다. 아니면 내가 아직 꿈속인가. 아침마다 느꼈던 행복은 다 꿈이고 아직도 병원인가. 나는 사조에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옷도 불편하고, 피곤하고, 그래서 집에서 자려고. 내일 보자.”
“점심은.”
라면을 들고 쫓아올 것 같아서 나는 목소리에 하품을 섞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배 안 고팠어.”
그랬음에도 집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안방에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112 버튼을 누르려고 한 뒤에야 떠올랐다.
“내 핸드폰.”
가방, 지갑. 다 그 집에 있었다. 그야말로 그의 팬티만 훔쳐서 달아난 꼴이었다. 마음이 안 좋아서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그의 팬티를 벗고 손으로 세탁했다.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머리를 말린 뒤 화장대를 보니 새로 산 립스틱이 컬렉션이 보였다.
“직접 물어볼까.”
만약 내 짐작이 맞아서 사람을 해하는 건달 같은 거라면, 그런 위험한 일 관두면 안 되냐고 해 볼까. 알고 보니 여자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워낙 험한 일을 하다가 정신 줄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내일은 일요일이라서 하루 더 쉬니까. 그에게 오늘이든 내일이든 가서 달라고 말해야 했다.
어차피 미뤄 봤자 좋을 일은 없었다. 나는 집에서 간단한 볶음밥 요리를 만들어 그릇에 예쁘게 담았다. 사조와 겨우 연인 비슷하게 된 게 하루도 되지 않았기에 헤어지자고 말할 단계도 아니었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사조와 이별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나를 떠나기 전 친구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너는 왜 항상 이상한 남자를 고쳐서 좋게 쓰려고 하냐고. 처음부터 괜찮은 놈, 괜찮은 조건을 골라서 사귀면 속을 덜 썩이지 않겠냐고. 그런데 나도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꽤 괜찮은 사람, 꽤 좋은 조건인 줄 알고 연애를 시작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
어차피 그렇게 고르고 고른 놈도 결혼이라는 선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헤어지게 되고 그러면 개놈들이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개놈이라는 표식은 쉽게 붙었다. 이혼이라도 하면 개놈보다 더 심한 말이 붙는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 과연 개놈이 아닌 놈들이 있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 햄 볶음밥을 보면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래. 나는 그중에서도 온몸으로 개놈을 겪어야지 개놈임을 아는 멍청이다.
뇌물을 들고 가는 심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서 그의 집으로 가려는 차였다. 기적처럼 그의 집 문이 열렸다. 종일 우리 집의 문이 열리는지 아닌지 관찰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속도였다. 문을 열어 준 사조는 웃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나가기 전과 똑같았다. 나는 볶음밥 접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같이 먹을래?”
사조가 조용히 숨을 내쉬고는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사조를 따라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신발을 벗기도 전부터 풍기는 냄새 때문에 잔기침이 나왔다. 집에 매운 라면 냄새가 가스실처럼 차 있었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을 열어는 둔 것 같은데 라면으로 사골을 끓여도 이 정도 냄새는 안 날 정도였다. 뜨악하는 심정으로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준비해 둔 말을 다 까먹었다. 건달이니, 여자가 몇이니 같은 말은 꺼낼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집안이 개판 오 분 전이었다. 쓰레기통에 다 들어가지도 못해서 바닥으로 떨어진 라면 봉지. 수십 개의 냄비와 수십 개의 그릇이 개수대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볶음밥을 식탁 위에 두고 그의 옆으로 비슬비슬 걸어갔다. 라면 수십 봉을 끓이고도 모자랐는지 새 냄비 안에 든 것도 라면이었다. 그는 면 한 가닥을 집어서 후루륵 맛보고는 표정을 싹 지웠다.
“모르겠다. 이게 맛이 있는 건지 아닌지.”
애써 끓인 라면을 버리려고 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사조의 눈이 벌게져 있었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이 집에서 라면만 끓인 얼굴이라 나는 진땀이 났다. 그를 밀치고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그가 끓인 라면을 식탁 위로 가져왔다. 자리에 앉아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니 아침부터 우리가 한 게 뭔가 싶었다. 와중에 부엌에 선 그는 식탁 위 라면을 버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냥 먹자. 잘 끓인 것 같애.”
“맛없어 보여.”
“그냥 먹자구. 앉아, 좀.”
한마디만 더 하면 일어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앞날을 예감한 사조가 의자에 앉았다. 내가 만든 볶음밥은 손도 안 대고 있기에 내가 먼저 숟가락 통에서 수저를 꺼내고 그의 라면을 건졌다. 빤히 쳐다보는 통에 체할 것만 같지만 아무리 라면을 잘 끓인다고 하더라도 라면은 라면이었다. 늘 먹는 자극적인 맛에 면은 오버쿡이 됐지만 그래도 버릴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만든 볶음밥을 그의 앞에 밀어 놓고 그의 라면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사조는 힘없이 의자에 늘어져 앉아 거의 티비를 보듯 내가 먹는 모습을 보았다. 표정이 안 좋은 게 라면 때문이라고 단단히 오해한 이 남자는, 내가 라면의 반을 비울 때까지 눈 뜨고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 자세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냄비를 들어 국물까지 마시자 스트레칭 하듯 목을 돌렸다. 제 눈두덩을 주무르는 사조에게 나는 수저를 건네주었다. 다 식은 볶음밥이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싶었다.
“먹어, 얼른.”
“음식 하는 사람 들일 테니 염려 마. 앞으론 그런 거 너한테 줄 일 없어.”
“누구를 들여?”
내가 준 숟가락을 받고 간신히 한술을 뜬 사조가 밥을 목으로 넘기며 다시 말했다.
“음식 하는 사람.”
“들이지 마. 라면 끓이라고 사람 들이는 사람 처음 봤어.”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밥을 먹고 있는 게 못 봐주겠다. 원래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너랑 보는 건 힘들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 말을 꺼내는 것보다 사조의 안색이 나쁜 게 더 신경 쓰였다. 나는 나 좀 보라고 그의 팔뚝을 잡고 주물렀다. 퍽퍽하게 볶음밥을 먹고 있던 사조가 눈만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영 별로지?”
사조의 감정이 최대치에 다다랐다.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는데도 사조는 밥 먹던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물을 따라 놓은 그가 물은 마시지 않고 잔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니 미련도 없이 떠났지.”
폭탄과도 같은 말이었다. 아까 내가 집으로 간 것에 대해 한 말이 아니었다. 세 가지 경우겠다. 사조는 누군가와 나를 겹쳐 보거나 아니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사조를 잊었거나. 하지만 아무리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기억나게 할 수는 없었다. 사조는 물을 술처럼 마셔 댔다. 잠시 우리 사이에 찾아온 정적 속에서 나는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긴 볶음밥을 쓸쓸하게 바라봤다. 그래도 저 생각해서 해 온 건데 맛나다 맛없다 정도는 말해 주지. 빈정이 상한 나는 이 일을 오늘 매듭짓고자 했다.
“내가 네 기억 속에 있어?”
내 말에 있다, 없다 답하는 대신 사조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구차하고 빈곤한 감정을 숨기려는 게 보였다. 나도 그래 봤으니 알았다.
“것 봐라.”
“…….”
“네가 나를 잊을 거라고 했지? 아니라고 자신하더니. 너는 다를 거라며 헛된 믿음을 심어 주더니. 응?”
사조는 말할수록 감정이 치받는 것처럼 목소리가 낮아졌으나 표정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하지만 그의 떨리는 손으로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단 한 마디도 그러냐 할 수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사조가 이보다 더한 바닥을 길 것 같았다.
“안 보려고, 네가 와도 안 본다고 수천 번 다짐했는데,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까 이 좁아터진 집에서 내가 이따위 것을 끓여다 바치고 있더라.”
또 그 눈이었다.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 저런 감정, 저런 표정을 과연 연기로 꾸며 낼 수 있나. 과연 착각할 수 있나. 그리고 이 기시감. 저 눈을 어디서 본 것 같은 이 기시감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자기 꼬시지 말라고 애걸하더니 나는, 내 마음은 어찌 돼도 상관없지? 산 것도 아니니……. 저 귀신 같은 사내. 어찌 되든 말든. 그래도 잘 살겠지 하면서.”
“…….”
“한데 정인아.”
너를 아프게 하는 기억을 지워 줄 수 있음 지워 주고 싶었다. 이런 애한테 두 집 살림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니.
“네가 밥 못 먹고 사라진 게 그렇게 가슴 아프더라.”
“…….”
“아주 잊혀지지가 않아서, 혼이 났다.”
왜 내가 겪은 일처럼 아픈지 모르겠다. 혹시 이 모든 게 나의 병 때문에 일어난 일들일까. 내가 나 혼자 살겠다고 그를 잊어버린 걸까. 나는 그에게 분명 무언가를 빼앗았고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게 마음이든, 그의 삶의 한 부분이든, 떠난 사람은 죄인이었다. 나는 그의 말 대부분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울고 싶은 위선자였다.
“사조야.”
“알아, 그만하려 했어. 이런 말들……. 듣는 나도 지겨운데, 하물며 너는.”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네가 좋겠어?”
내 말에 지쳐 보이는 사조의 눈이 다시 나를 담았다. 나를 담는 것도 벅차 보이는 사조의 눈에 떨어질락 말락 눈물이 버티고 있었다. 그걸 응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몰라서 그래. 몰라서…….”
그때 사조가 어지러워진 주방, 식탁을 돌아본 뒤 고개를 숙이더니 팔을 들었다. 활짝 펼친 두 팔을 든 그는 정작 나를 마주 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로 빠르게 걸어가 그의 품에 들어갔다. 사조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내 머리, 내 등을 껴안은 손이 크고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가두기엔 한없이 여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조의 숨에서 눈물 냄새가 났다. 오래 묵혀 서러운 울음. 이런 울음은 나밖에 흘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조도 나와 똑같은 설움을 흘릴 줄 알았다. 얼마큼의 상처를 주고 그를 잊었을까. 잊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상처일까. 아니면 그 상처가 그를 괴롭히는 걸까. 여하튼 한 가지.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서 해 주어야 할 가장 첫 번째는 무한한 위로였다.
“라면이 맛없어서 너한테 성질내면서 떠날 정도는 아니야, 내가…….”
라면을 끓이는 데에 자신감을 잃을 게 걱정이었다. 그게 뭐라고 축 처져서는 되지 않으니까. 다신 집안이 엉망이 될 때까지 라면을 끓여 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조 성격 정말 급하다. 기억날 거라고 내가 자신했으면, 적어도 일 년은 보지. 그러고 왜 기억 못하냐고 따져 보지.”
“그사이에 내가 없어져.”
“없어져?”
“네 안에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웅얼 잘도 대답을 했다. 사조는 내 등을 조심조심 쓰다듬으며 설움을 끝없이 토했다.
“불행하게 살고 있었으면, 매일 울면서 죽고 싶다고 하면, 나타나서 웃어 주려고 했는데. 참 어여쁘게 웃더라, 너.”
“그랬구나…….”
“나는 사랑에 빠트려 놓고. 그래 놓고.”
이상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사조에게 말은 하지 못하고 천장을 바라봤다.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손 위로 흰 눈이 떨어졌다. 한여름에, 그것도 실내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자니 무서워야 했지만, 우는 사조보다 무서운 것 없었기에 눈송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받아 보려고 해 보아도 손을 통과한다. 환상 같은 눈송이를 보면서 나는 사조에게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많은 말들처럼 그와 관련되지 않은 건 묻어 두는 날이었다.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만을 받아야 하니까 말이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정신적인 부분 때문에 상담을 추가로 받는 게 어떠냐는 말이 있었는데, 그 먼 곳까지 꼬박꼬박 다니고 싶지 않아 근처 병원으로 다닌다고 거절을 한 참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을 해 봐야겠다. 잊은 것은 잊은 이유가 있겠거니 하면서 일부러 그 기억들을 무시하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 될 것만 같았다. 나를 안고서 뱉는 사조의 설움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까지 녹일 것만 같았다.
한여름의 겨울을 보며 그리운 감정이 드는 것은 나만의 것일까. 아니면 이게 바로 사조가 말한 그 기억의 일부일까. 어떻게 하면 이번 생을 잘 살 수 있을까. 그것도 사조와 함께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이 멀어 보였지만, 단 한 가지도 걱정되지 않는 건 내가 너무 멍청한 탓일까. 그와 함께라면 가시밭길도 한 번 가 볼 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조는 세상이 없어지는 것처럼 슬퍼하는 중인데 나는 그의 품에 누워서 잠들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에게 내가 상처를 준 게 맞는 것 같았다. 원래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잘 모르는 법이니까 말이다.
༺♥༻
아침에 일어나면 할아버지의 사진에 인사하고 아침도 꼭 챙겨 먹었다. 요즘은 운동도 다니고 있었다. 다음 주에는 병원에 상담 예약을 잡아 놓고 혹시 몰라서 공고에 뜬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점심도 대충 먹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제의까지 받았다.
“제가요?”
“그러려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요?”
“저 그냥 만들 줄만 아는데.”
“난 또 카페 차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왜, 정인 씨 손도 야무져서 잘할 것 같은데.”
처음엔 그 모든 게 사장님이 나를 띄우는 말인 줄 알았다. 평범한 커피도 맛있게 내렸다면서 칭찬해 주시는 분이니까.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면서 흘려듣지 않으면 공주병에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어깨를 주무르면서 가만히 있을 때, 한숨 돌리면서 토마토 주스를 마실 때, 자꾸 사장님의 말이 괜찮은 제의 같았다. 바닷가 옆에 작은 카페를 차리고 자전거 대여점까지 같이 해서 그 남자와 사는 상상을 해 봤다. 요즘 들어서 행복한 일이 많은데 그 생각을 하니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에 메모장을 켜 카페 창업에 쓸 돈을 계산하고 있는 차였다.
“음?”
토마토 주스를 반쯤 마시고 있을 때 우리 가게에 또 다른 단골손님이 나타났다. 조그마한 양 갈래를 하고 있는 여자애가 자기 몸집만 한 까만 레트리버와 함께 산책을 하는 게 보였다. 그 여자애는 우리 카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유리창에 붙어서 나를 한 번씩 보고 갔다. 그 여자애가 데리고 다니는 개는 레트리버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다리가 한쪽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여자애는 유리창에 붙어서 계산대 쪽에 서 있는 내게 손을 흔들고 가는 게 제 하루 일과였다.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강아지가 소녀 옆에 얌전히 앉아서 꼬리를 흔드는 게 너무 귀여워서 처음 그 여자애가 산책을 시킬 수 있는 무게일까 걱정이 됐던 게 무색했다.
인사를 마친 여자애가 떠나고 나면 시간은 금세 4시가 됐다. 내가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오전부터 일이 있어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난 그 남자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는 내 마음이 하늘에 전해졌는지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사장님에게 퇴근을 알리고 카페를 나설 때부터 불안불안하다 싶었더니 결국 아파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빗줄기가 떨어졌다. 소나기였다. 달려가 커다란 나무 밑에서 그를 기다렸다.
“사조야.”
어깨와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털고 있을 때였다. 까만 우산을 쓴 그가 기타 가방을 메고 나무 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사람. 돈은 꽤 벌어 오는 것 같은데 자기는 절대 건달이 아니라고 길길이 뛰었다. 원귀는 생선도 건달 조직 이름도 아니고, 산 자의 세상을 침범하는 흉악한 귀신이라는 소리에 내 귀를 씻고 싶었다. 그는 오전에 일이 있어도 꼭 4시에 맞추어서 나를 카페에 데리러 오는데 오늘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내가 본 어린 시절 친구들의 집에 가 보면 나쁜 가정 여덟 개, 좋은 가정 두세 개밖에 안 돼서 부럽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없어도 그만인 거고 나쁜 가정에 속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그 나쁜 가족도 없어서 빌빌거리는 내가 있다. 졸업식, 입학식, 입원, 퇴원, 그 밖의 여러 가족이라는 이름이 필요한 순간들. 남들은 당연한 게 나한테는 당연하지 않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때 나는 무너졌다. 하지만 내 곁에는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당연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원귀 잡는 건 그만두고 같이 카페를 하자고 꼬셔 볼까. 금방 넘어올 것 같진 않지만 느낌상 언젠가는 져 줄 것 같다.
“어리석기는.”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내 쪽으로 뛰어온 사조가 젖은 내 어깨를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 윗도리라도 벗어 주려고 하기에 나는 질색했다.
“보고 싶어서 일찍 퇴근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 에이, 조금만 더 늦게 나올걸.”
“이거 주려고 했는데 주지 말아야겠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
그 말에 그가 가져온 까만 비닐봉지 안을 보자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나 이거 좋아하는데.”
“그러니 사 왔지.”
사조는 좋아하는 내 얼굴을 보고 아이스크림을 꺼내었다. 우리는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사조가 나무 막대기 두 개를 양쪽에서 잡아당겼는데 누가 내 남자친구 아니랄까 봐 이번에도 반으로 정확히 갈라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양이 적은 쪽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가 내 손에 양이 많은 쪽을 쥐여 주었다. 초코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고 깨물어 먹는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이런 것 많이 먹으면 병 걸린다.’
아이스크림을 혀로 녹여서 먹던 나는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떨어트렸다. 이렇게 비 오는 날 그와 정자에 앉아서 주황빛으로 물든 예쁜 섬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달다.”
그는 불평불만이 많은 입술로 그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고 영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는 내 손을 잡고서 우산을 씌워 줬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우리는 천생연분처럼 짤랑, 짤랑, 같은 방울 소리를 내고 다녔다. 그의 핸드폰에 달린 방울, 나의 손목에 달린 방울. 두 개의 방울이 울면서 내는 소리에 입안으로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 애달프고 아득하던 마음이 높은 파도가 되어 나를 그날처럼 한입에 삼켰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낭독하듯 이야기하는 사조의 옆모습을 보는데 혀가 시렸다. 나의 걸음은 파도에 묶여 늦어졌다. 사조는 웃으며 걷다가 나를 부드러이 돌아보았다. 그의 검은 우산 아래서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다.
‘사조야. 나를 사랑해?’
‘너무나.’
나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했던 그 남자. 절대 나를 찾지도 않고 잊을 거라던 그 남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가 내 눈앞에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조는 눈물이 뺨으로 떨어지자마자 들고 있던 우산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나는 그의 따뜻한 뺨을 단단히 쥐었다. 눈, 코, 입. 이 모든 걸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에 그가 왔다. 말없이 울다가 그의 말이 떠올랐다. 장검에 묻은 핏물과 원귀라는 소리가 이제야 내 머리에 들어왔다.
“원귀를 왜 베어야 해? 왜 네가 잡아야 해? 여기로 온다고 벌 받은 거야? 그런 거야?”
내 상태가 왜 이런지 감을 잡지 못하고 지켜보던 사조의 눈에 의문이 꺼졌다. 빗소리가 우리 사이를 채우고 있을 때 사조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버려진 우산에 맞고 튕겨 간 빗방울 하나가 사조의 뺨에 날아갔다. 주르륵 흐르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소심하긴. 손을 잡을 게 아니라 허리에라도 매달려야지.”
“위험한 거 아니야? 막 다치고…….”
“네가 보기보다 이 서방이 세단다. 원귀 따위에게 다칠 것이면 사조라는 이름도 내려놓아야 할 거야.”
“안 본다더니. 너 바보야?”
“오지 말 걸 그랬나?”
새 삶을 살려고 그랬던 것보다 할아버지가 모든 것을 바쳐서 늘려 준 나의 삶의 마침표를 그런 식으로 찍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침표를 다른 식으로 찍을 수 있었지만 포기하면 거기서 바로 끝이 나니까. 다시는 바꿀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 착한 바보는 내 삶에 들어와 마침표를 다르게 찍는 것뿐만 아니라 내 삶을 밝혀 주려고 하고 있었다.
“고마워. 이렇게 와서. 정말이야…….”
“저녁 먹으면서 울자.”
사조는 단단히 내 손을 거머쥐고 버려진 우산을 찾았다. 우리는 어제처럼 산책로를 껴서 걸었다. 나는 그의 체온이 손에 들어온 것을 믿기 어려웠다. 아파트로 걸어가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조 같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자가 이렇게 나와 있으려면 한 달에 서른 마리씩 원귀를 잡아 넘기는 수밖에 없단다. 핸드폰으로 위치도 넘겨받는다는 말은 농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 재물은 많다. 너 때문에 여기에 억지로 사는 것이고.”
“응,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이사…….”
엘리베이터로 들어오자마자 그의 목을 안았다. 자연스레 내 입맞춤을 받은 사조가 허리를 안았다. 앞으로 어디에 살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그것들은 천천히 정해도 늦지 않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을 만끽하고 싶었다. 사조와 함께.
사조의 말마따나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기적. 그러나 이미 내가 그 파도를 넘고서 생을 다시 한번 얻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하고 싶었다. 사조를 기억하는 건 그의 말대로 기적이나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가 없었으면 아마 나는 평생을 얼굴 모르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나에게 나타나 준 사조를 연모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연모할 것이다. 영원한 안녕이 우리를 찾아온 후에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