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ild Who Defied the Waves RAW novel - Chapter 5
5장. 가위
억, 소리를 내면서 땀에 흠씬 젖은 이불을 걷어찼다. 내가 이불을 뒤집고 일어날 정도로 놀라서 깨는 건 성장기에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을 때밖에 없었다. 같이 저녁 한 끼 하자던 사조와 삼겹살을 노릇하게 구워 먹던 것, 형체가 없는 무언가가 노크했던 것, 사조가 헛것을 보면 자기한테 오라며 웃었던 것까지 전부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던 것은 씻고 잔 듯이 깔끔한 몸과 희부연 달빛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 흑백 사진 같이 색이 바랜 기억도 한 몫을 했다. 후우, 숨을 내쉬자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칫솔질은 한 모양인데 속에 밴 술 냄새는 속일 수 없었다.
그때 평상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물건들이 다르게 보였다. 창틀 밑에 쓰는 사람에 따라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서랍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 서랍 위에 있는 엔틱 탁상시계가 고장이 났는지 시곗바늘이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시계를 고쳐보려고 가져와 시곗바늘을 수동으로 돌리는데 다소 강한 바람이 불었다. 섬 전체를 휩쓸고 온 바람에선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이 집 부엌에서가 아니었다. 아랫동네서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김치찌개 냄새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없는 솜씨로 냄비를 태우며 끓인 김치찌개였다.
잠든 지 몇 시간은 된 것 같은데 밖은 깜깜했다. 두둥실 뜬 보름달이 비추고 있는 아랫동네로 관심이 쏠렸다. 아랫동네는 오징어잡이 배처럼 찬란하고 강렬한 빛을 냈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현혹해 하나라도 더 이 섬에 들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식의 유혹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위험한 파도가 가로막고 사람이 살기는 하는지 의문투성이인데도 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냄새가 정확히 어디서 나는지 확인만 해 보려던 나 역시 어느 시점부터는 집 밖으로 나가 아랫마을에 당도해 있었다. 밤바다는 생물이 죽은 새까만 색이었다. 바다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슈퍼 간판이 보일 즈음이 돼서야 밤 산책의 목적지가 밝혀졌다. 사조가 껌이나 술 같은 것을 사 오는 슈퍼는 시기를 잘 골라서 와야지 건질만 한 게 있었다. 그 시기란 건 사조와의 동행이 필수 요소였다. 반농담으로 얼굴 없는 사장이 골방에 앉아서 사람 차별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달그락, 달그락.
김치의 시큼한 냄새가 유독 심해진 지점은 슈퍼 바로 밑에 있는 파란 대문 근방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냄비를 꺼내고 정리하는 소리가 슈퍼 앞까지 울려 퍼졌다. 미세하지만 무쇠를 주걱으로 긁는 듯한 소리도 더해져 있었다. 평소라면 문 좀 닫고 살지 그러냐며 지나쳤을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감개무량했다. 사람이 산다는 증거를 발견한 이상 내일 시간 될 때 오자고 넘어갈 수 없었다. 사조 말고도 이 섬에, 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불을 최초로 발견한 인류처럼 격양되는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그 집에 뛰어 들어갈 기세로 달려갔다. 문패가 없는 파란 대문은 바람 방향에 따라 끼익, 끼익 움직이고 있었다. 집주인이 놀라지 않게 파란 대문의 문을 손바닥으로 쳐보았다. 시멘트로 메운 마당, 어둑한 바깥 부엌을 밝히는 전구 불과 신문지로 얼기설기 막아 둔 안방 문이 대문 안쪽에 있었다. 판자로 만든 집은 마루라고 칭할 만한 공간이 없고 바깥에 화장실과 부엌을 마련해 두었다.
“계세요.”
그때 하늘이 울었다. 이 동네의 장점은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전기세 생각 않고 불을 켜 둔다는 거였다. 집과 가로등에 전구 알을 달아 둔 덕에 주황색 빛무리가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여 주었다. 빗발치는 빗줄기가 시멘트 위에 침투하고 있었다. 주걱으로 무쇠솥을 긁는 소리는 배경음처럼 부엌에 깔려 있었다.
“계세요?”
사람이 들어와도 무신경한 집주인의 태도를 청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경우만 봐도 귀가 어두워지자 멀리 있는 소리는 대충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선에 문제가 생긴 건지 부엌으로 다가갈수록 전등이 깜빡, 깜빡 요란을 떨었다. 노인들 눈 건강에 좋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부엌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위기를 탄다는 말이 있다. 누가 봐도 말을 절대 꺼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한 마디만 더 얹으면 빵 터져서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분위기,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나의 등골을 타고 흐를 때 말이다. 그 분위기에 대한 예감은 사람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눈치를 엿 바꿔 먹은 게 아니고서야 상황에 맞는 분위기를 탔다.
부엌에 있는 것은 여자였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김치찌개도 부엌 화구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체구가 씨름 선수 버금갈 만큼 기골이 장대한 여자였다. 부엌에 천장이 낮은 탓도 있지만 허리를 숙이고 솥에 눌어붙은 붉은 쌀알을 손톱으로 긁고 있는 걸 맨정신으로 보기엔 힘들었다. 더욱이 여자의 머리는 태어나 한 번도 손질해 보지 않은 것처럼 엉망으로 엉킨 데다가 그 길이가 종아리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꽃무늬 나일론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모든 것이 두려움을 부추기는 요소였다. 문드러진 손톱으로 무쇠솥을 긁고 있던 여자가 인기척을 느낀 것처럼 동작을 그쳤다. 부엌을 비추고 있던 전구 불이 꺼지고 들어오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불이 꺼질 때마다 여자의 동작이 변하고 있었다. 부엌의 전등이 켜졌을 때 왼편으로 돌아간 여자의 고개가 보였다. 위험을 감지한 발은 부엌 나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떠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춘 순간 부엌의 불이 완전히 꺼졌다. 드득, 드득, 무쇠솥 긁는 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적막이 더 공포스러웠다.
부엌에서 여자가 나올까 봐 눈치를 보던 나는 불이 꺼지자마자 파란 대문으로 빠르게 뛰었다. 시멘트가 흡수하지 못한 빗물이 찰박, 찰박, 하는 발소리를 낳았다. 그것이 뒤에 들릴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파란 대문을 몸통으로 밀치며 언덕길로 나왔다.
뒤돌아본 대문 안엔 부엌을 나오고 있는 누런 발등이 있었다. 비가 들이쳐 목으로 넘어갔다. 빗물 한 컵 정도를 마시며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비에서 비린 쇠 맛이 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기이한 드득, 드득, 소리가 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돌아보면 그 여자가 따라오는 게 보일까 봐 사흘 굶은 경주마처럼 결사적으로 달렸다. 설상가상 언덕이 미끄러워 슬리퍼가 수도 없이 벗겨지는 바람에 한 짝은 발목에 끼고서 갔다.
“사조야!”
익숙한 전경이 보이자마자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사조야, 사조야, 소리쳐서 부르는데 온 집안의 불이 꺼져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구르다시피 마루로 기어서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방으로 들어온 나는 대비한답시고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렀다. 이 소란을 이 층에 있는 사조가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깊은 잠에 들었거나. 아니면, 어제…….
‘자꾸 헛것이 보이면 나한테 와 봐.’
그게 꿈이 아니었나. 설마 자기가 있는 이 층에 올라오기 전까지 모르는 척할 셈인가. 어제 그 일이 꿈이 아니라면, 사조는 분명 그 여자와 그림자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달칵, 누군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환청 따위로 착각할 수 없었다. 이따위 얇은 이불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오든 나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부리며 이불 속에 몸을 웅그린 차였다.
모든 정보를 청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사악, 사악, 맨발로 복도를 쓸고 다니는 발소리에 척추가 찌릿했다. 집안까지 쫓아온 그 집념이 무서워서 두통이 왔다.
창문을 열어 둔 탓에 빗물이 방으로 번지 점프하며 들어왔다. 얼핏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빗소리마저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버텨 볼 생각이었지만 발소리는 끝내 나의 방을 찾아냈다. 어려서부터 제일 좋아하고 자신 있는 과목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체육이었다. 배구든 농구든 시험을 봤다 하면 A를 받았고 체력장에서도 눈에 띄게 좋은 등급을 받았다. 한마디로 건강하다는 소리였다. 골골대던 것도 한 철이고 팔찌를 찬 후부터는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이 튼튼한 몸이니 이 상황에서 기절을 바라는 것은 어려웠다. 바라건대 방으로 들어오는 게 뭔지 모르고 살면 좋겠다. 절실히 바랐다.
빗물 맞은 발소리는 추적, 추적,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을 열고 침대 앞까지 걸어왔다. 이불을 덮고 있는 동그란 물체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호러 장르 영화는 유명한 시리즈 세 편을 본 게 전부이기 때문에 귀신이나 유령에 대한 내 상상력은 빈약했다.
“그냥 가세요.”
여자는 덮은 이불을 걷으려고 하는 듯이 손 하나를 이불 속에 넣었다. 나름 강하게 나갔다고 생각했으나 상대는 씨알도 안 먹히는지 내 이불을 강제로 뺏으려고 들었다. 당기는 힘이 대단해서 그래도 2분을 버틴 거면 많이 버텼다. 나도 한 고집하는 터라 실랑이 끝에 버티고 버티자 그 이불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나 자신이 어리석고 가여워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울었다. 상대가 힘이 빠진 틈을 타서 이불을 훅 잡아당겼다. 이불을 뺏긴 나는 눈에 익은 청바지를 보고 고개를 휙 들었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욕이 세상 구경을 했다. 이불을 들고 있는 사조의 하얀 티, 젖은 청바지, 방금 감은 듯한 머리카락을 하나씩 하나씩 뜯어 보며 씨근거렸다. 눈을 감싸고 오 초간 숨을 골랐다. 진정할 시간을 주듯이 과묵한 남자 행세를 하던 사조가 내 손목뼈에 가만히 손을 댔다. 넘보지 말라는 뜻으로 어깨를 털어 대고 띵띵 부은 눈을 가렸다.
“시계, 시계 고장 났어.”
오늘따라 사조는 이러쿵저러쿵 군소리 않고 자리를 옮겼다. 그의 맨발이 내는 투박한 발소리가 방안을 가로질러 창문 앞까지 갔다. 내 말대로 고장 난 시계를 만지는 눈치였다. 그의 손이 시계에 꿀밤 먹이듯 때리는 소리만 장황했다. 그사이 냉정을 되찾은 나는 시계가 분해되고 있는 창가로 시선을 바꿨다. 사조의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똑똑 떨어져 귀 옆으로 흘러내렸다. 사조는 그게 귀찮은지 제 짧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털고는 다시 시계에 집중했다. 한참을 시계를 반으로 갈라 분해해 보던 사조가 내 쪽을 바라봤다.
“고장은 무슨.”
“고장 안 났어? 시곗바늘이 뒤로 가던데?”
나는 괜히 엄살 부린 게 아니라는 듯이 손짓을 쓰면서 빠르게 항변했다. 그가 싱겁게 웃으며 시계를 서랍 위에 올려 두었다.
“헛것을 봤구나.”
별일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사조는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서 침대 쪽으로 던져두었다. 그가 등을 돌리자마자 새가슴이 된 나는 곧장 방 밖으로 나가려는 사조의 뒤를 따랐다. 복도로 나온 사조는 제 젖은 머리칼을 말리려는 듯이 화장실 쪽으로 걸음 했다. 어미 오리를 쫓듯이 사조의 뒤를 졸졸 쫓던 나는 갑자기 멈춘 그를 보고 긴장했다.
“왜, 왜 멈춰. 뭐 있어?”
고만 따라오고 네 볼일을 보라며 내칠 것 같은 예감에 나도 화장실에 가려 했다는 변명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공포심은커녕 지금 당장 다리 네 개 달린 여자가 거꾸로 누워 계단을 기어 내려와도 하품이나 할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용건이 생각난 얼굴로 나를 몰아세웠다. 하도 엽기적인 것을 많이 봐서 그런가 나를 관찰하는 그의 눈빛이 그들보다 백배 나았다.
그런데, 얘는 보면 볼수록 눈이 참 예쁘다. 가을의 수목원을 곱게 빻아서 만든 호수가 눈동자 안에 있는 것 같아. 이런 상황에도 그를 향한 호의로 가득한 마음은 무서운 게 없나 보다.
“봤구나.”
“뭘?”
“그것들.”
이어진 사조의 말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당황보다도 사실 확인을 받은 기분에 코끝이 매워졌다. 머리에 번쩍 별이 뜨는데 구경꾼인 사조의 말은 더없이 육감적이었다.
“혼자 자면 또 올 텐데.”
“무서우니까 그러지 마. 그런 소리를 왜 해.”
“이리 말하면 나랑 자려나 싶어서.”
사조의 손이 날아가는 새처럼 머리 위로 올라탔다. 그의 손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조금 늦었다. 머리 위에 얹어진 사조의 손이 상냥하게 내려와 뒷목에 닿았다. 허전한 덜미를 낚아채듯 그의 손이 다가와 감쌌다. 종일 질주하던 심장이 노곤을 풀어주는 손에 쓰러져 쉬었다.
“정인이 베개 주고 이불도 줄 건데?”
사조의 제안은 홈쇼핑 광고처럼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비단 이불 위에 놓여 있을 내 베개를 생각하면 계단을 오르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긴장을 풀려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몸이 넘어갔다. 의도한 것처럼 나를 안아 든 사조가 씩 웃었다. 허락의 의미가 아니니 김칫국 마시지 말라고 말하려던 순간에 몸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허벅지 밑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것이 사조의 팔인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사람일 수 없는 것을 보다가 사람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사람만이 줄 수 있는 포옹과 대화는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나는 먹잇감 찾아 이 나무, 저 나무 두드려보는 딱따구리 같은 이 시기가 가장 걱정이었다. 그럴 때 가장 나쁜 놈들이 꼬였다.
사조에게 내려 달라고 말할 틈이 없어 그의 팔뚝을 흔들었다. 갈색 호수에 풍덩 빠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찰나 그의 입술이 촉, 하고 부딪혔다.
사람이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도둑 뽀뽀하고 저가 더 떠는 그의 눈처럼 말이다. 그 웃음이 건전치 못하고, 어떤 꿍꿍이가 숨겨 있는 것처럼 무척 수상쩍었대도, 나는 첫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정열로 뒤덮여 그의 목을 안아서 당겼다. 끌려온 그의 양 뺨을 붙잡았다. 혀를 먼저 집어넣은 건 나였다. 그의 맛, 그의 혀를 구석구석 느끼고 싶었다. 예상보다 더 달콤한 그의 것을 빼앗아오기 위해 혀를 놀렸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오는 내가 놀라운 듯이 잠시 입술을 뗀 뒤 가뿐한 입맞춤으로 바꾸었다.
“정인, 야…….”
말할 시간을 아껴 서로의 것을 나누고 싶었다. 뒤로 간 그의 뺨을 잡아다가 다시 내게로 당겨 왔다. 사람이 사람을 묶어 둘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감정이란 것도 식으면 그만이었기에 누군가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란 환상을 버린 지도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때 주었던 강렬한 감정,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에 나는 목말라 있었다. 그 허상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피해 다녔지만, 외로움에 저며 있는 나의 심장은 도무지 만족을 몰랐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상대를 탐할 때야말로 진정한 내가 드러났다.
시작은 탐욕으로, 어찌 보면 기술이랄 것 없이 그의 입안을 구강기 아이처럼 핥고 빨았다. 그런 나를 적당히 받아 주던 사조가 바뀐 건 한순간이었다. 맞추어 주는 듯이 쪽,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기미하던 사조가 방향 없이 돌아다니는 혀를 농밀하게 감았다. 그는 능구렁이처럼 나를 잡아 두고 혀가 즐길 수 있는 속도를 가르쳐 주었다. 빨고 핥기만 하는 것은 재미없으니 색다르게 즐겨 보자는 듯이 말이다. 주도권은 그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제껏 내가 만나 온 남자 중에, 나를 이만큼 사랑스럽게 바라봐 준 사람이 있었나.
그의 목에 손을 두른 지도 몰랐다. 어느새 사조의 손도 내 뒷목을 서서히 주무르며 내려가 옷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딘 손끝이 등을 타고서 들어와 속옷 끈을 푸를 기세였다. 사조의 손이 애정을 갈구하듯 귓불 끝을 만지작거렸다. 눈밭 위를 거니는 것처럼 조심조심 움직이는 손길이 나를 숨차게 만들었다. 그의 입맞춤은 폭력적이었다. 나를 갖고 싶어 간만 보는 그 손길도 속임수였다. 이런 식의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나를 녹여 없애려고 하는 듯한 혀는 처음이었다. 달고 단 것을 아껴 먹듯이 혀 위를 쓸고 다니는 입맞춤이 그의 표현이었다. 가자, 가 볼래, 그게 본심일 터였다. 여위어 가는 마음에 그를 들이기 직전 팔찌가 흔들렸다. 요요한 방울 소리가 나를 유혹의 강물에서 건져냈다.
“후으…….”
입술이 해방되는 순간마저도 사조의 빨간 혀가 나와 내 입술에 묻은 무언가를 핥아 갔다. 더 먹어 보려는 듯이 꺾어지는 그의 고개를 내가 거부했다. 그는 살덩이를 엮느라 반들대는 입술을 자랑스레 내보였다.
“왜에.”
더 하자고 칭얼거리는 그에게서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잘하는 짓이라고 우는 방울 소리가 할아버지의 고함 같았다. 입맞춤을 한 장소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계단은 열 개가 넘어 보였지만 한 걸음만 걸어도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나의 버둥거림이 심해지자 사조는 달래서 데려가지 않고 발부터 내려 주었다. 방금 전까지 정열적으로 혀를 섞은 사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거리가 벌어졌다.
이 층으로 올라가고픈 사조가 계단에 발을 걸쳤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감이 남은 양 어깨의 방향이 내 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나 자신이 불러온 상황을 무사히 넘기려면 배짱 튕길 수밖에 없는 터라 나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왜, 맨날 자자고 그래. 내가 쉬워 보여?”
깨가 쏟아질 것을 기대한 사조는 어처구니가 없어도 많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일자로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외로워서.”
감정을 싣지 않은 그의 담담한 고백이 나를 부끄럽게끔 했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건 옥색 팔찌뿐이었다. 저것보다 달콤한 말, 저것보다 달콤한 제안을 한 남자도 많았다. 손에 물 안 묻히게 해 준다는 말보다 외롭다는 말에 뒤숭숭한 건,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인아.”
정인아, 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고였다. 그래, 그에게 왜 끌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가 왜 무서웠는지도 알 것만 같다. 그는 나처럼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외로운 사람이었구나.
“정인아.”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그냥……. 그냥 부르지 마.”
“하지 말란 건 더럽게 많구나, 하여간.”
머리를 말릴 기분이 아닌지 이 층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등을 보자 상반된 생각이 가슴에서 일었다. 저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나 위로해 줄 깜냥도 안 되는 나를 어쩌란 말인가.
“너 외로운 거 나도 알거든?”
병원에 가질 않아서 이게 무슨 병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뉴스를 보다가 곡 하듯이 우는 것, 남이 보기에 기겁할 정도로 청승 떤다는 것은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만큼 속이 말이 아닐 사조에게 필요 이상으로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나 일방적으로 외로운 거 채워 주고, 알아주고, 그래 줄 사람을 찾아. 평생 그랬어.”
“그랬구나. 그래서?
“그래서 나는 너 외로운 거 알아도, 못 채워 주고, 너는 뭔가 이상하고…….”
“해서.”
식어가던 아궁이에 불을 땐 것처럼 사조가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사조는 이기적으로 구는 나를 더 봐줄 수 없을 터였다. 네가 외롭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받고만 싶어서 싫다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솔직한 속내를 남한테 내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건 어쩌나. 외롭다는 그의 마음에 돗자리 깔고 들어앉아도 빈털터리라서 줄 게 없었다. 사랑 듬뿍 받고 자라서 마냥 꽃 같은 사람이 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 주지 않는다. 그 간단명료한 사실을 직접 증명하기 위해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가져다 바친 나는 골병이 들었다.
사조의 발이 계단 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그가 이 집에서 나가라고 그러면 나는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임에도 객기를 부린 거다. 응징하듯 그의 손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어금니를 악물고 있을 때 그의 손이 머리를 안았다. 한 계단 높이 있는 그의 앞으로 몸이 차츰차츰 끌려갔다. 그의 팔이 나를 롤러코스터의 안전 바처럼 매주어 최악의 상황까진 가지 않았다. 하얀 면티에 가려진 그의 가슴이 꽤 아늑했다. 손이 커서 머리를 한 손바닥으로 다 감쌀 수 있는 그에게 이 시간부로 후회될 만큼 모진 말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해서. 일방적으로?”
바보 같은 송정인. 그 남자들에게도 요구하지 못한 것을 왜 이런 섬에서 외로워 삭아 가는 사람에게 내어 달라고 이러는 건데. 이 애는 다를 것 같애? 이 약은 마음이 사조가 옆에 없을 때마다 시원섭섭하다고 하더니만 뒷구멍에서 나 몰래 기대하고 있었다. 또 이 사람은 뭔가 다르겠지, 하면서.
“응, 일방적으로. 난 일방적으로 받고 싶어.”
고등학교 급식이 영양소를 고루 갖추어 잘만 나오는데도 캐릭터 도시락을 싸고, 됐다는데도 제 엄마도 안 할 손빨래를 식모처럼 해 주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감사하다는 말도 점차 건성으로 변하고. 나는 연인도 엄마도 뭣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퍼주기만 하다가 외로워 허덕거리는 삶에 기쁨이 있을까.
“사람이 지겹고 싫어.”
사랑의 성공 난이도는 5프로 미만인데 어느 나라나 필수처럼 여겨져서 세상 살맛이 안 났다. 짜장면 데이나 빼빼로 데이처럼 국제적인 단체의 상술이 아닐까 싶었다. 잘 헤어지고 또 잘 사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사조의 품에 안기면 사랑의 난이도 따위 생각나지 않았다. 이 수치는 잘못됐다며 지우개로 쓱싹 지우고 뒤에 0 하나를 더 붙인다.
참고 살다가 속병이 나는 것처럼 사조의 허리를 안지 않으면 내일 당장 아쉬워 속병이 날 것 같았다. 두 팔로 간신히 안을 정도로 커다란 사조는 제 가슴 밑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내가 마모될 때까지 만질 작정이었다. 하지 마. 꼬시지 마. 부르지 마.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흥흥거리던 나는 기가 다 죽은 양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개를 빼 들어 위를 올려다볼 때 마침 내려오고 있던 사조의 입술과 안녕했다. 사조의 입술은 우유, 설탕, 크림같이 부드러운 것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마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입술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 두고 싶은 건 결코 내가 이상성격자라서가 아니었다.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주지 않고 저 입술을 가져올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맥락을 건너뛰고 이어진 그의 괜찮단 말에 내가 실수라도 했나 싶은 것이었다.
“사람이 아니거든, 내가.”
본인이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에는 여러 중의적인 뜻이 있을 거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는 말, 혹은 사람 이하라며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거나 여러 안 좋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사조가 하는 말은 인성이고 나발이고 자기가 생물학적인 의미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들렸다. 진심인지 농인지 분간 안 가는 판국에 사조는 엄지로 눈물 자국을 벅벅 문질러 닦아 주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면 돼? 하면 얼마큼 드려야 만족하려나, 정인이는.”
사조는 뭘 모른다. 그건 일정한 수량을 꼬박꼬박 월급 받듯 받아서 만족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거였으면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가 반은 줄었을 것이다.
“사조 네가 사람이 아니면.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
“말하지 않았던가? 명이 아주, 아주 긴 그런 거라고.”
손목에 찬 팔찌는 사조가 요주의 인물인 것처럼 팔을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렸다. 엄살 부리는 방울 소리가 거슬렸는지 사조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좀 뺄까?”
단박에 고개를 젓자 사조가 손톱 밑 살로 내 손등을 살살 긁었다. 방울은 질까 보냐며 더욱 신명 나게 짤랑짤랑 울었다.
“야, 정인아. 원하는 거 준다지 않아.”
그런가.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건가.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게 뭐든 상관없이 받고 또 받으면 그만인 그런 게 내가 원하는 건가.
“모르겠어…….”
그래, 모르겠다. 그리고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대가 없이 내주는 사람은 교과서에서 본 사탕 가게 아저씨뿐이었다. 어린아이에게도 공짜는 없는 법이라고 가르치는 세상인데 나 같이 사회에 찌든 어른에게 내주기만 하는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받기만 하면? 나도 너한테 뭘 줘야 하잖아.”
“음…….”
청산유수같이 말을 놀리던 놈이 대뜸 노선을 바꿔 말을 흐린다는 건 정곡을 찔렸다는 뜻이었다. 그럼 그렇지. 너도 똑같지. 아무것도 필요 없다면서 꼬셔 놓고 나중에는 이것저것 계산하려고 할 테지. 저가 사람이 아니라는 말보다 장단 다 맞춰 주고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더 큰 배신감이 드는 나도 만만치 않은 년이었다.
속으로 남자의 위선은 남이 아닌 자기를 위한 거라며 사조를 헐뜯던 나는 그가 잡고 있는 내 손의 위치가 애매하다는 걸 깨달았다. 위로, 위로, 더 위로 올라가다가 못해 그의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명백히 나의 손이었다. 새빨간 입안에 잡혀 들어간 나의 손가락 하나를 그가 앙 물었다.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오만 정이 떨어질 짓을 해도 받아 주겠다는 듯이 서글서글한 그의 갈색 눈과 오래, 아주 오래 눈을 마주쳤다. 검지 마디를 물고 있는 그가 병 주고 약 주는 양 깨문 자리를 혀로 쓸었다.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사랑 같은 걸 일방적으로 받는 대신 무얼 주어야 하냐고 물으니 내 손가락을 먹는다.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 준 거라고 생각한 나는 이해관계에 맞는 대가를 생각해냈다. 내가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한다고,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심상이었다. 여자, 그림자, 수상한 노크 소리가 오버랩되며 와장창 깨진 환상의 나라에서 쫓겨났다.
“싫어. 그런 거 안 할래.”
“안 아프게 잘해, 나.”
“안 아프면, 그게…….”
그게 죽는 게 아니게 되니. 이놈이 어떻게 보면 입만 둥둥 뜬 놈보다 더한 놈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서 뿌리쳤다. 재수 옴 붙은 것처럼 양손을 팍팍 털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사조와 벌인 충동적인 해프닝을 해결하고 온 사이 빗물에 젖어 있던 머리는 다 마르고 말았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누운 나는 마루에 서 있는 사조의 기척이 신경 쓰여 발을 굴렀다. 앞으로 눈깔 귀신이든 처녀 귀신이든 나타나 봤자 몸뚱이도 없는 놈들이 뭐 어쩌겠나 싶다. 사람이 아니란 것하고도 밥만 잘 먹고 사는데.
똑똑, 두 번 두드리면 자기인 줄 알라는 그 노크를 남기고 그는 이 층으로 가 버렸다. 사람 아니라는 놈이 감수성은 풍부했다. 잘 자. 다정한 인사말은 낚싯바늘에 꿴 지렁이 같은 것이었다. 아, 가위에 눌려도 제대로 눌린 느낌이었다. 이 상황 자체가 가위에 눌린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무거운 감정에 잔뜩 눌려 있어 곧 터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