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127)
제127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쓰러진 드레이크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련의 사람들이었다.
드레이크의 목 줄기를 벤 것인지, 피가 한껏 묻은 거치도의 핏물을 털어내는 남자.
그리고 고위급 사제인지 금색 사자가 수놓인 하얀 사제복을 입은 일남일녀.
“어라?”
서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는지,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이 동네에 왜 사람이 있죠? 음, 이상하네. 발리스타 요새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사람을 파견했다는 내용은 전해들은 게 없는데.”
일남일녀의 사제 복장.
그리고 언급한 발리스타 요새.
그 두 가지만으로도 이들의 소속이 어딘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성제국!’
“또 모르는 일이지. 카밀 공작이 극비리에 인원들을 파견한 것일지도. 딱 보아도 저자들, 범상치 않은 이들 같으니.”
여인의 옆에 있던 다른 사제가 말했다.
‘카밀 공작?’
남자의 말에서 또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제국에서 3공작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제국민들은 3공작들에게 황제나 교황과 같은 통치(痛治)에 대한 존경이 아닌, 옥좌에 오른 그들의 무(武)를 존경하고, 경애했다.
그렇기에 제국 내에서 그들에게 경어를 붙이지 않는 이들은, 오로지 그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자들뿐이었다.
게다가 드레이크를 쓰러뜨린 남자의 특이한 검과 금빛으로 수놓인 사제복….
어렵지 않게 저들의 정체를 눈치챈 내가 정중히 인사했다.
“이런 궁벽한 곳에서 제국의 이름 높은 검사, 크랭크 후작님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그대, 나를 아는가?”
내 말에 크랭크 후작과 사제들의 표정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거치도(鋸齒刀)는 용병이나 야인들이 애용하는 무기. 경지에 오른 검사 중 그런 거친 검을 쓰는 무인은 오직 대륙에 야수검, 크랭크 후작님뿐이지요.”
“…제법 견문이 높은 젊은이로군.”
크랭크 후작이 설마 검만으로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줄은 몰랐는지, 꽤나 놀란 감정을 담아 말했다.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 십이대주교와 3공작, 4후작 등 어지간한 제국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가족 관계까지 파악을 끝낸 지 오래였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견문이 높은 어린 공자께서는 이 험악한 곳에 무슨 일이실까요?”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다만,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눈은 차갑게 식어 우리의 정체를 탐색하고 있었다.
황금빛 사자가 수놓인 사제복. 십이대주교의 상징이었다.
‘크랭크 후작은 일황자파야. 그와 함께 움직이는 여자 사제라면… 처녀궁(處女宮), 루나겠군.’
그렇다면 저 근육질의 덩치 큰 남자는 보병궁(寶甁宮), 딩고일 것이다.
그렇게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나는 내심을 감춘 채 태연하게 답했다.
“저희는 몬스터 사냥꾼입니다. 아룡종의 시신은 버릴 것 하나 없이 마탑에서 굉장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니까요.”
“몬스터 사냥꾼이라….”
피식.
루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지었다. 전혀 안 믿는 눈초리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라도 안 믿을 테니까.
대부분의 몬스터 사냥꾼들이 입구 초입에 있는 오우거나 트롤 정도를 사냥하는 데도 목숨을 거는 판국이다.
그러니 어떤 미친 몬스터 사냥꾼도 죽음의 계곡까지 들어올 만용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리 뻔뻔하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제국과 연맹은 공식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휴전 관계.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못하더라도, 수면 아래에서는 수없이 많은 계략과 음모가 판치는 관계였다.
이런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당장에 칼부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내가 대놓고 정체를 숨기는 의미는 하나였다.
-여기서 쓸데없이 박 터지게 싸워봐야 피차 남는 거 없이 힘만 빠지니, 서로서로 건들지 말고 갈 길 가자.
저들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험지까지 들어온 우리가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알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저들은 일황자파다.
‘이바렐라 계열이라면 모를까, 저들과 싸워서 좋을 게 없어.’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처럼, 일황자파가 힘을 내줘야 이바렐라 그 또라이가 날뛸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한 것인지, 실소를 지었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아룡종 많이들 잡으시고….”
“잠깐.”
루나와 말하며 자리를 뜨려 할 때, 크랭크 후작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젊은이들, 어떤 몬스터를 사냥하러 온 거지?”
“…와이번을 잡으러 왔습니다만.”
저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와이번의 서식지는 북쪽이니, 겹치지 않아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기에, 솔직히 말한 것뿐인데.
내 대답을 들은 크랭크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도 와이번의 알이 필요한데, 잘됐군. 어떤가? 피차 여기서는 힘을 합쳐보는 게.”
“후작님?”
크랭크 후작이 내건 뜻밖의 제안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루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슨 생각이지?’
야수검(野獸劍), 크랭크 후작.
그는 그 이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거친 이였다.
연맹과의 전선에서 가장 많은 전력이 모이는 중부 국경에 자청하여 갈 정도의 인물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싸움을 걸면 걸었지, 피해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힘을 합치자고 하다니.
‘설마?’
크랭크 후작은 왕국 연맹에서 4후작임에도 어떤 면에서는 3공작보다도 까다로운 적으로 평가되는 이였다.
바로, 그가 가진 초인적인 감(感) 때문에 말이다.
전생에 그 감 하나로 얼마나 많은 연맹의 함정을 벗어났던가.
‘이자, 어쩌면 제노스의 백(魄)을 느낀 걸지도 몰라.’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이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좋습니다. 하하. 저희도 어차피, 와이번을 잡으려 했으니까요. 후작님 같은 무인이시라면야, 저희가 거절할 이유가 없죠.”
-야, 미쳤어?!
-제롬 공자, 제정신인가?!
살라딘, 그리고 세트가 전음을 보내왔다.
그들이 볼 때는 내 선택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적국의 가장 위험한 인물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손을 잡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 손을 잡는 것이 옳았다.
-독도, 잘 쓰면 약이야.
살라딘과 세트에게 담담하게 전음을 보냈다.
‘제노스의 백(魄)이 약했다면, 크랭크가 이런 선택을 할 리가 없어.’
진작 제노스의 백을 처리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 했겠지.
4후작의 하나인 그가 한 걸음 물러설 정도라면, 아무리 혼에게 백을 처리하도록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 일행 중에서도 희생이 발생할지 몰랐다.
‘써먹을 수 있는 건 뭐든지 써먹어야 해.’
가장 좋은 건, 백이 크랭크 후작이나 두 주교들과 같이 죽어주면 더할 나위 없었다.
한편 악수를 하며 바라본 크랭크 후작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차디찬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크랭크 후작 역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
‘누가 승자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크랭크 후작, 내가 어려 보여서 쉽게 뒤통수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난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상단의 주인이었거든.
‘…생로가, 열렸다.’
크랭크 후작은 자신의 초감각이 이 젊은이들을 본 이후로 급속도로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쇼프 후작과 찢어지고 난 이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던 생로의 감각이 확 하고 열린 것이다.
‘복장으로 보면… 연맹 측 아이들인가.’
그것도 모두 다른 국가의 인사들이었다.
복식이 모두 달랐으니까.
그때, 루나 대주교가 저들을 보내려 하자 열리던 생로가 재차 닫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서 잡았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 대주교들 역시 일황자 전하의 중요 전력이었으니까.
절대로 희생되어서는 안 됐다.
“…저희가 거절할 이유가 없죠.”
하나, 이 맹랑한 젊은이가 자신의 손을 잡자 다른 감각이 열렸다.
‘이 녀석, 무언가 꾸미고 있군.’
열린 생로와 별개로, 또 다른 사로(死路)의 감각이 느껴지는 것이다.
4후작의 하나인 자신을 상대로 뒤통수를 칠 생각이라니.
‘…재밌군.’
크랭크 후작은 야수검이라 불리는 무인이다.
걸어온 승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제롬 일행과 신성제국 일황자파의 위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 * *
씨마리아호가 정박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
그 위험성과는 별개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실로 아름다웠던 광경은 어느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해변의 모래는 어느새 녹고, 튀고, 타서 크레이터를 만들고 있었으며, 맑다 못해 투명하게 빛나던 바닷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바닷물 위에는 극도로 뜨거워진 수온에 죽은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내밀며 떠올랐다.
그런 처참한 풍경 속에, 오직 한 노인만이 오롯이 서 있었다.
“후우우우우….”
노인의 긴 호흡과 함께, 그의 손에 떠올라 있던 마나 역시 천천히 가라앉았다.
“제법…이군, 신성제국의 개들.”
노인은 주변에 흩뿌려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목이 잘린 시신, 옆구리가 터져 나간 시신. 그리고 새카맣게 탄 시신까지.
노인은 주변에 떠 있던 3구의 시신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둥실 떠올렸다.
“다음은 어느 놈들을 처리해볼까.”
눈을 감은 노인의 디텍팅 마법에 세 개의 기운이 느껴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운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눌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미약한 기운이었다.
‘이놈들이야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고.’
두 번째로 느껴진 기운은 얼마 전 느꼈던 커다란 무리의 기운이었다.
여전히 자신의 아이들과 투닥이며 천천히 자신의 ‘작품’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흠.’
마지막 기운은, 심처에 있던 이들과 여기 있다가 피했던 놈들이 합쳐진 듯했다.
이놈들은 샛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심처’에 있는 자신의 반쪽은 이미 자신과 뜻이 달라진 상태.
혹시나 그가 수작질을 부렸다면, 충분히 귀찮은 적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작품’까지는 무주공산.
결정을 내린 노인이 몸을 띄운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금방 떨어지는 태양.
이 때문에 기묘한 동행은 조금 빨리 야영지를 꾸렸다.
“아이고, 추우실 텐데 이거라도 좀 쓰세요.”
살라딘이 모닥불을 피우고 남은 침낭 하나를 루나에게 건넸다.
“어머, 고마워라. 사냥꾼님에게 주의 가호가 있기를.”
겉보기에는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별말씀을요. 인원이 적으셔서 필요한 짐도 많이 못 챙기셨을 텐데. 아무리 사제님들이라고 해도 이런 추위 속에 노출되면 견디기 힘든 법입니다.”
“후후, 배려해 주시는 건가요? 고마워요. 다만 짐이 모자라지는 않네요.”
루나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침낭을 꺼내며 웃었다.
“저런, 아공간 주머니가 있으셨군요.”
“후후, 장기간 이동할 때는 필수품이죠.”
-쳇, 준비성이 철저하네.
살라딘이 혀를 차며 전음을 보내왔다.
침낭을 주며 자연스레 함께 온 동료가 더 있는지, 아니면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려 했지만 쉽사리 틈을 주지 않았다.
‘언제가 가장 좋을까.’
이들의 뒤통수를 치기 가장 좋은 시간은.
‘하탄과 브론테스, 바우칼라크들과 합치면 전력은 대폭 상승해. 하지만 그건 이놈들 역시 마찬가지. 다른 무리가 더 있을지도 몰라.’
육로는 카밀 공작이 꽉 잡고 있으니, 분명 해로를 통해 드래곤 산맥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황자의 로렌트 항구 배를 사용하여 왔을 터.
‘최악의 경우 이황자 측에서도 누군가를 보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쪽도 전력이 비슷하다면… 가급적이면 합류하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겉으로는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뒤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이한 동행.
그 동행이 깨진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머지않아 일어났다.
날이 밝고, 다시금 나락의 절벽으로 향하려 했을 때.
“찾았다, 이 쥐새끼들.”
그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이자, 크랭크 후작의 감이 경종을 울렸던 인물.
제노스의 백(魄)이 말이다.
백의 시선이 크랭크 후작 뒤에 있는 루나와 딩고를 향했다.
“그때 뒈진 놈들과 똑같은 복장… 네놈들은 신성제국의 쥐새끼임에 분명하렷다.”
‘역시 더 있었군.’
백의 말에서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첫째, 크랭크 후작 일행은 단독으로 온 것이 아니다.
둘째, 모종의 이유로 팀을 나누었고, 그 나눈 팀, 또는 팀들 중 하나 이상은 이미 전멸했다.
“그렇다면 네놈들이 심처에서 나온 놈들이렷다?”
“!”
노인의 말에 이번에는 크랭크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정보를 일부 빼앗겼군.’
뭐, 상관없지.
어차피 백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혼한테 받은 물건들을 써야 했으니까.
제노스의 백과 대치하면서 동시에 크랭크 일행과의 정보 싸움을 잠시 벌이자.
빠지지지직!
제노스의 손에서 뇌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 작품을 노리는 놈들, 그리고 신성제국의 주구들. 네놈들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주마.”
나는 주머니 안의 시약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쓰면 좀 더 쉽게 처치할 수 있기야 하겠다만.’
백을 너무 쉽게 쓰러뜨리면, 크랭크의 뒤통수를 치기가 어려울 수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저들은 좀 더 격렬히 치고받으며 싸워줘야 했으니까.
반대편에서 크랭크 후작이 거치도를 뽑아들고 있었다.
그럼 어디, 실력 한번 보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