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제도의 황궁.
그간의 침묵이 힘을 모으기 위한 기간이었다는 듯, 황궁은 그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은 느슨했던 관료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일선 부대들을 돌보던 장군들이 속속들이 제도로 소환되는 등, 또 다시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잡혀가고 있었다.
즉위 이후 끝없는 전쟁을 벌여온 황제를 추종하는 자들도 있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반발하는 자들도 많았다.
때문에 황제 역시 전쟁을 잠시 멈추고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이번 아카데미의 사고는 하나의 방아쇠가 되어서 관료조직에 황제가 칼을 댈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카데미 출신이 제국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었고, 그렇게 뭉친 힘은 황제도 무시하기 힘들 정도여서 알게 모르게 황제의 발목을 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황제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특히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철저한 감사를 받았고, 이는 그동안 아카데미 세력들을 묶어 주던 중추가 비어버린 것을 뜻했다.
결속력을 이뤄 주던 중추가 사라진 지금, 아카데미 출신들은 이합집산을 이루고 있었으니 황제의 의도는 멋지게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 그런 것 치고는 일이 너무 많구나. 내가 내 발목을 잡은 건지도 모르겠군.”
한쪽 벽을 전부 가린 화려한 베일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나른함과 권태를 담고 있었다.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는 황제의 방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베일 앞에 쌓여진 수많은 서류가 이질감을 주었다.
“황제 폐하 만세!”
그 순간 저 멀리 있는 문이 열리더니, 서류를 한아름 든 공안요원이 큰 소리로 외치며 들어섰다.
이어서 능숙한 솜씨로 베일 앞에 서류를 내려놓더니 뒷걸음질로 신속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모양을 보아하니 추가로 서류를 더 들고 올 참이라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놈들이 유능하긴 했어.”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손을 흔들자 서류가 둥실 떠올라 황제에게로 향했다.
빠르게 서류를 살피며 내용을 살피는 황제의 행동은 조금 지쳐 보였다.
아카데미 출신들로 인해서 제국이 부흥한 것은 맞지만, 그 세력이 너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권력욕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황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꽤나 시간을 들여서 아카데미에 자신의 사람을 심었다.
유능하기로는 대륙 전체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없다는 황제가 시행한 일이었고, 황제의 밑에는 손발이 되어 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무사히 아카데미에 사람을 심는 것은 물론, 그간 아카데미가 쌓아온 지식들까지 강탈하는데 성공한 황제는 마지막 수순으로 아카데미의 실책을 드러내게 한 것이다.
입학식에서 사고를 일으켜 희생을 일으키고, 마룡봉인체의 탈출로 아카데미를 반파시켜 이목을 끌어 모아 아카데미 출신들의 재검증을 하게 만든다.
재검증의 기간 동안 움츠려든 관료들을 치고 나가 권력을 재편성하는 것이 황제의 목적이었는데, 계획은 처음부터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뜬금없는 아렌의 등장 때문이다.
입학식에서의 사고로 최소한 십수 명은 죽어 나가리라 판단했지만, 죽은 이는 없었고 두 명이 의식불명에 빠졌지만 아카데미가 어떻게 수습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마룡봉인체를 탈출시켜서 아카데미를 날려 버리려 했지만, 아카데미를 날려버려야 할 마룡봉인체들이 각자 이리저리 도망가 버렸고, 그마나 남아있던 두 놈도 아렌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쳐 버렸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길 지경이었으니 황제는 회심의 블랙박스로 이번에야말로 대 참사를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아렌이 막아낸 것이다.
그 와중에 총학생회를 드러내서 아카데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관료조직들에 손을 대는 것은 성공했으니, 당초의 목적을 이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뭔가 영 껄끄러운 상황이다.
“생각해 보니 화가 나는군.”
황제가 투덜거리며 서류를 집어던졌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안들이 능숙하게 서류를 받아 척척 정리했지만, 고민에 빠진 황제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공안들이 황제폐하만세를 외치며 방으로 들어서 서류를 쌓아 갔지만, 생각에 빠진 황제는 시선을 주지 않았고, 방안 이곳저곳 있던 공안들이 대신 서류를 살피고 분류했다.
“그러고 보니 셋째 녀석의 조직도 당했다고 했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만큼 황제는 자식도 많았고, 각자 나이가 찬만큼 이제는 황제가 빨리 죽기만을 바라는 불효자식들이다.
이제나저제나 황제가 죽기만을 바라며 각자의 세력을 키우고 있는 황자들의 움직임을 황제는 낱낱이 알고 있었고, 재롱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간간히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그 중에 아렌이 관련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연구 결과가 괜찮아서 조만간 빼내 올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비록 결함이 있고 수명이 짧아진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다.
거기에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소드마스터라는 것은 실로 매력적인 전력 아닌가.
육성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성공확률이 극도로 낮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지만 황제에게는 그런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정규전 중심으로 투입하면 충분히 제 값을 하고도 남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는데, 그런 중요한 성공작들 중 두 개가 아렌의 손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이쯤 되면 악연 같기도 하단 말이지.”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황제는 아렌이 일부러 그의 일을 방해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아렌은 상황에 맞춰서 움직였을 뿐이고, 입장을 바꿔서 황제 자신이 아렌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렇게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렌의 입장이고 중요한 일마다 슬그머니 나타나 쇄기가 되는 아렌이 황제는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건설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떻게든 아렌을 구슬려서 제국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굴려야겠지만, 그게 또 애매한 것이 아렌의 성향을 분석한 내용을 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은둔형 초인.
손속의 잔혹함이나 반말을 지껄이는 태도 따위는 초인의 앞에서 따질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성향인데, 적의를 느끼고 선공을 받으면 처절하리만큼 적을 분쇄하지만 의외로 아렌이 먼저 시비를 건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자기 자신의 성장에 중점을 두는 은둔형 초인들의 특징이고, 이러한 자들은 세속의 명예나 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거기에 가문이 황금의 그라인드이니 부족한 것도 없을 것이니 더욱 그렇고.
“이대로라면 영지에서 꿈쩍도 안 할 텐데.”
그건 조금 곤란했다.
여러 가지 계획을 추진 중인 황제에게는 때에 따라서 시선을 돌려줄 강력한 이슈가 필요했고, 아렌은 거기에 부합하는 이슈메이커였으니, 부지런히 움직여 줄 필요가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황제가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손짓으로 공안요원을 불렀다.
“황제폐하 만세!”
“…… 시끄럽다.”
“저의 충성심은 뇌성벽력과 같습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표현하는 공안을 보며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지속적인 세뇌와 교육으로 절대적인 충성심이 있는 것은 좋은데, 가끔 이렇게 과잉 반응할 때가 있으니 이건 나름대로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그래. 원로원에 그라인드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토 하나 달지 않고 바로 사라지는 요원을 보면서 황제는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통하면 좋고,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써먹을 구석이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자, 그제야 황제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금 심기일전해 서류더미를 들추며 국정을 살피길 얼마나 지났을까.
“황제 폐하를 뵙소이다.”
공안들의 살벌한 눈초리를 묵묵히 견디며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제의 방으로 들어서는 노인을 바라본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비록 베일 안쪽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초인은 감정만으로도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긍정적인 기운이 방안을 채웠고,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인도 조금은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군. 로디컬. 건강은 괜찮은가?”
“폐하의 염려 덕분에 무탈합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노인의 이름은 로디컬 드 그라인드.
알코르의 숙부가 되는 인물이고, 그라인드에 몇 남아 있지 않은 직계 혈족 중의 한 명이다.
그라인드의 혈족들이 숫자가 적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혈계능력.
기적에 가깝다는 혈계능력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일단 발현하는데 성공만 한다면 막강한 능력을 가지지만, 자아의 충돌을 견디지 못한다든지, 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든지, 현실을 부정하고 미쳐 버린다든지 하는 경우가 워낙에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라인드의 혈족들은 숫자가 적었다.
로디컬은 선대의 혈족들 중에서 혈계능력을 각성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다른 가문이었다면 무능력자로 치부되었겠지만 그라인드에서는 달랐다.
능력의 모자람이야 채우면 되는 것이고 마침 그라인드는 돈이 많았으니 모자란 부분은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가문에 대한 애정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선대 영주를 도와 영지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말년에는 이렇게 제도의 원로원에 적을 두며 황성과 그라인드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위치에 있었다.
몇 명 없는 그라인드의 혈족 중에서도 큰 어른에 해당하는 자가 바로 로디컬이다.
공안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은 로티컬과 황제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연배가 비슷한 둘은 공통적으로 추억하는 기억들이 제법 있었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닌가.
가볍게 시작된 둘의 이야기는 어느덧 몇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황제도 재담꾼의 기질이 있었고, 로디컬 역시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언변이 좋아서 둘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던 공안들마저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때로는 화를 내기까지 하는 이야기의 향연은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묘한 감흥을 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한바탕 크게 웃은 황제가 로디컬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 그랬지. 생각하면 자네와도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어.”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곁에서 호종했으니 이 늙은이도 일생의 광영이지요.”
어깨를 들썩이며 과장스럽게 말하는 로디컬의 모습에 황제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역시 오랜 벗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즐겁군. 왜 진작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야.”
“폐하께서 칩거하신 시간이 길기는 했지요. 황자님들까지 안 보신 지 꽤나 시간이 지났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원로들과 자주 자리를 마련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푸근하게 웃는 로디컬의 대답에 황제 역시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내 오랜 친구 로디컬. 내 앞으로 이런 자리를 자주 가지겠다고 약속하겠네.”
“황공무지로소이다.”
“하하하하.”
황제의 웃음소리가 방을 울렸고, 손을 휘젓는 모습이 진정으로 즐거워 보였다.
퍽!
동시에 로디컬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