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느릿하게 성벽의 잔해를 헤치고 걸어오는 아렌을 보면서도 누구하나 나서지 못했다.
턱.
간간히 들리는 발자국 소리만이 소리의 전부였고, 어느덧 성벽의 잔해를 지나서 아렌이 내성에 발을 들였다.
평평한 대지를 몇 번 밟아 본 아렌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어. 잔해가 많으니 불편하군.”
아렌으로서는 드물게 농담을 한 것이지만 그 농담에 호응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안 하니만 못 한 것이 되었다.
“……이런 폭거가 용서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얼굴이 너무 굳어서 조각상처럼 보이는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온갖 적대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 기사의 얼굴을 보면서 아렌은 피식 웃었다.
“안 될 건 뭐가 있느냐. 너희가 먼저 시작한 일이거늘.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다.”
느물느물한 아렌의 대답에 기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위대한 소드마스터의 기사로서 이러한 모욕을 언제 당해 봤겠는가.
당당한 주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에게는 언제나 영광과 명예만이 뒤따랐었는데, 그러한 찬란한 세월이 발에 짓밟힌 꼴이니 자연스레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분노가 공포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천인공노할 폭거에 대항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그 순간, 아렌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꽂혔다.
“왜 너희들이 하면 되고, 내가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구나. 너희들은 항상 그렇지.”
싸늘한 목소리가 고양되어 가는 기사들의 전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정확히 말해 주마.”
아렌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이건 폭거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 행사다. 감히 한 가문의 적자를 납치하려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지.”
신랄한 진실에 기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희들에게 명예 같은 건 없다. 비열한 납치범에게 명예라는 것이 있겠느냐?”
위대하기 그지없는 마스터와 명예로운 기사들이 비열한 납치범이 되었다.
몇몇 기사들의 고개가 땅으로 숙여졌고,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행위는 결과를 수반하지.”
냉정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모두에게 꽂혔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아렌의 손이 자코프의 병력에게로 향했다.
“…… 2황자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기사의 말에 아렌은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2황자를 무서워할 거 같으냐?”
우드드득.
뭔가를 짓이기는 소리와 함께 아렌이 들어 올린 손 주위로 막대한 압력이 집중되었다.
파팍. 팍.
공기마저 우그러트리는 가공할 압력에 아렌의 손 주위로 아지랑이가 생겼고, 압축된 공기에서 불똥이 튕겼다.
“죽는 이유를 알았으니 억울하지는 않겠지.”
“쳐라!”
“돌격!”
“죽여!”
아렌의 말과 함께 자코프의 기사들이 필사의 각오로 달려 나갔다.
항거할 수 없는 공포와, 수치심, 분노 등이 어우러져 이성을 마비시켰지만 그들은 전장을 달리는 기사들이다.
제 아무리 상황이 몰려 있다지만 순순히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고, 그것이 힘을 가진 자달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단 하나의 활로를 찾아서 돌격하는 기사들의 뒤로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온갖 감정이 어우러진 표정으로 무기를 앞세우는 그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무엇인가를 처단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을 상대로 개미떼처럼 달려오는 모습은 하나의 경이였고, 그 모습에 아렌은 웃었다.
“좋구나.”
과정이 어떻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수십, 수백의 의지가 오로지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느끼면서 아렌은 뿌듯한 마음이 들은 것이다.
“죽어라! 괴물!”
그렇게 첨단에 선 기사의 검이 아렌의 눈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파직.
아렌이 손에 모여 있던 기운을 해방시켰다.
* * *
2황자는 병사들에게 주목했다.
혈계능력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능력은 신분격차를 만들어 내었지만, 평민들이라고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
어디나 돌연변이는 나타나는 법이고, 평민들 중에서도 분명 능력 있는 자들이 있었으며, 때때로 그 재능은 하늘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격기사단은 그런 평민들을 훈련시킨 결과물이었다.
군부에 영향력이 강한 2황자가 재능 있는 병사들을 골라서 오러를 일깨우고 기사로 만든 것이 유격기사단이다.
오로지 전투를 목적으로 양성되어진 만큼 일반적인 기사로서의 소양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이들에게 있어서 명예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하튼 그런 유격기사단을 양성하는 곳이 자코프 자작령이고, 마스터에 이른 기사인 자코프는 우수한 기사들을 양성해 냈다.
제아무리 명예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스승에 대한 정은 있기 마련이다.
어느덧 영지에 남아 있던 유격기사들은 내성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별일 아닙니다. 관문에서 가벼운 충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커다란 폭음과 진동에 불안해하는 자작부인을 집사가 달래는 사이 영지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이 눈을 마주치더니만 자리를 옮겼다.
“성벽이 무너졌다고?”
“병력이 대응하러 나섰습니다.”
물어보는 기사도 답하는 기사도 얼굴이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꾸준히 보강을 한 요새의 성벽이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에 강적이 쳐들어 온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라인드의 괴물이라고 했지?”
“……난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금이 모자란다고는 하지만 인질을 잡고 황금을 요구할 생각을 하다니 ……. 기사가 할 일이 아니야.”
투덜거리는 기사의 모습에 유격기사단의 1전대를 맡고 있는 그리어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지금은 일의 원인을 따질 때가 아니야. 일이 벌어졌으니 일단 대책부터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지요.”
불만어린 표정을 짓는 기사의 얼굴에 그리어가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지금은 일을 수습해야 할 때다.
“기사단은 집합했나?”
“수습기사까지 전부 모였습니다. 내성을 중심으로 포진중입니다.”
자코프가 데리고 나간 기사들은 최정예였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사들과 수습기사들이 성에 가득했다.
전력으로만 따진다면 주변의 그 어떠한 영지와도 자웅을 겨룰 만하고, 일치된 힘을 발휘한다면 소드마스터와도 해 볼 만한 전력이라고 자평했다.
당장 그리어 자신부터가 최상급 익스퍼트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내고 2황자님에게 중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겠어.”
“……그 방법밖에 없겠지요. 연락은 넣어 놨습니다.”
그리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움직이지. 자작님에게 받은 은혜는 갚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이지요.”
그리어의 말에 기사 역시 결의가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전후관계가 어찌되어든 자코프는 그들에게 힘을 쥐어준 장본인이고, 그 은혜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두 기사가 결의를 다지고 전장으로 향하려던 그때.
“……뭐야?!”
“……무슨 마나가?!”
경악한 표정의 둘의 시선이 황급히 창밖으로 향했고, 그 순간 막대한 마나의 유동과 함께 태양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가청영역을 한참이나 벗어났으니 인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그렇다고 그 위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크억!”
“큭!”
파동이 공기를 따라서 공간을 진동시켰고, 내성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쿠르르릉!
대지가 함몰되면서 성의 주요 건물들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일부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미리 집합시킨 게 다행이군.”
수습기사들이 생활하던 건물이 함몰된 땅속으로 매몰되는 모습에 그리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건 뭡니까?”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 중얼거리는 기사를 일변한 그리어가 무서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영애와 영식, 부인을 급히 대피시킨다.”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방금 전과는 완전히 바뀐 방침이었지만 기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목숨으로 시간을 벌어라.”
“걱정 마십시오.”
기사의 두 눈에 어린 단호한 결의에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말로 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손짓이었고, 기사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성의 아래로 달려 나갔다.
쾅!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힌 그리어의 모습에 자코프의 식솔들과 집사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코프는 망설이지 않았다.
“급합니다! 빨리 몸을 피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소드마스터의 아내답게 결단을 내린 자작 부인의 대답과 함께 집사들과 시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콰쾅!
“크아아악!”
“죽여!”
“물러서지 마라! 적은 하나 …… 크억!”
폭음과 함께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내성 안까지 몰아쳤지만, 창백해진 안색으로 발걸음을 놀리는 그들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울먹이는 딸과 아들을 달래며 자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복잡한 내성을 지나 두툼한 벽에 보호받는 방으로 들어선 일행이 문을 봉했고, 집사가 앞으로 나서서 벽을 이리저리 만지니 음침한 소리와 함께 한쪽 벽이 물러서며 통로가 생겼다.
깊고 어두워서 마치 지옥의 구덩이 같은 통로의 모습에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지만, 아이들을 꾸짖은 자작부인이 몸소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자작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정황상 자코프는 실패했고, 그 보복으로 쳐들어온 것이니 자작의 생사는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자작 부인이 늠름하게 버티고 있으니 그리어를 비롯한 가신들은 자작가가 다시 일어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통로를 향해 발을 내디디려는 그 순간.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두텁기 그지없는 벽의 한쪽이 터져나갔다.
“아악!”
“히익!”
충격이 밀폐된 방안에 있는 일행을 덮쳤고, 폭음이 강타한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일반인인 자작부인과 아이들이 휘청거리고, 집사와 시녀들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오러를 전신에 끌어올린 그리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높게 세웠다.
콰지직!
“끄아아악!”
뼈가 갈리고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리어의 양팔과 양다리가 이리적리 우그러지고, 척추와 경추가 뒤틀렸다.
“꺄아아악!”
“히이이익!”
시녀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자작 부인이 필사적으로 아이들의 시야를 가렸다.
쿵.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그리어의 구겨진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고, 무너진 벽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여기 있었구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백금발을 휘날리는 귀공자가 들어섰다.
무기를 들지도 않았고, 갑옷을 갖춰 입지도 않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넘치는 복식의 귀공자의 모습은 성대한 파티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복장이었지만 그렇기에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자코프 자작 부인 맞나?”
“……그래요.”
뻥 뚫린 벽 사이로 들어 왔음에도 먼지하나 묻지 않은 아렌이 싱긋 웃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보는 이의 넋을 잡아끌만한 미소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아렌의 미소에 감탄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라인드 백작가의 아렌이라고 한다. 부디 그라인드의 초대를 거절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나직한 목소리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호종할 시녀들도 부족하지 않은 거 같으니 잘 됐군. 자작가의 명예에 어긋나지 않는 대우를 할 것을 약속하겠다.”
“……거절한다면, 요?”
자작부인의 반문에 아렌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불행한 일이 생기겠지.”
악마의 미소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작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아렌이 자코프 자작가를 방문한 이날, 몇 안 되는 자작가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성이 사라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소문은 살을 붙여서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