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8
018화
“허억!”
다급한 신음소리와 함께 부란이 몸을 일으켰다.
창백한 안색과 함께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부란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매년 보아왔고 능숙하게 부란에게 다가가 등을 쓸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 심호흡하시고요. 괜찮습니다. 위험은 없어요.”
남자의 목소리에 실려 있는 기이한 파동과 바닥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마법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조명은 빠르게 부란을 안정시켰고, 그러한 광경이 강당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었다.
“이제 슬슬 깨어나기 시작하는 군요.”
“흥. 반응들이 엘레강스하지 않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면 분주히 뭔가를 적는 리암의 말에 베네프트가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단련된 마법사와 기사라면 자기 자신의 죽음조차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죠.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입교생들에게 그런 부분을 바라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만.”
깊게 숨을 쉬며 홍차의 향기를 즐기는 베네프트의 독설에 리암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 이상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입교생들의 들뜬 마음과 기대를 파고들어 그 마음의 틈으로 마법을 건다.
그렇게 시행된 마법이 육체를 현실에 둔 채 정신만을 이면 세계로 끌어들여 간접적인 죽음을 체험하게 하는 이 의식은 유피테르 아카데미의 오래 된 전통이다.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게 하고, 간접적이나마 죽음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그릇을 넓히는 것이 주목적.
아카데미의 입교생들은 대대로 이런 경험을 해 왔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기 마련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엘리트들이 고분고분해져서 아카데미의 수업을 착실히 따라오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다.
물론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인이 되는 학생이 매년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아카데미가 책임 질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귀족이라면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고, 평민이라면 애초에 각오가 모자랐던 것이니 어떤 상황이라도 아카데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여하튼 이면 세계에 들어간 입교생들은 가상 던전 안에서 무수히 많은 함정과 몬스터 고난들을 만나게 되고 그 강도는 갈수록 강해지며 결국에는 공평하게 죽음을 체험하게 된다.
세상에는 불합리한 존재가 늘 존재해 왔고 그것은 엘리트들만 모인 아카데미 입교생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아직까지 던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존재는 없었다.
다만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뛰어난 학생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니 실질적으로 이 가상 던전은 입교생들의 입학 성적을 측정하는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버틸까요?”
베네프트의 기대에 찬 음성에 리암은 쓴 웃음을 지었다.
“뭐. 예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리암의 기억 속에 이 가상 던전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 * *
화르르륵!
불꽃이 사방으로 넘실거리며 오크들의 잔해를 소각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일절 피해를 주지 않았다.
경악할 정도로 섬세한 마나컨트롤이었지만 지금의 레티시아는 그런 부분을 알아볼 정신이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는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의 베로아가 아렌에게 다가가 아렌의 몸가짐을 정리했고, 벡스터도 사방을 경계하며 혹시나 놓친 오크가 없지는 않은지 살피는 중이었다.
이어서 사방을 불태우던 불꽃이 한 점에 모이면서 다시금 불꽃의 화살로 변했을 때, 레티시아는 간신히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후들거리는 몸뚱이와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쉽게 치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이성의 존재.
마나를 끌어올려 심신을 최대한 안정시킨 레티시아의 시선이 아렌에게로 향했다.
“······아아.”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던 조금 전의 자신에게 경솔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작은 체구의 소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으며 방금 전의 살육이 그녀의 뇌리 속을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우웁!”
그만큼 토해냈는데도 아직까지 뱃속에 남아 있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시큼한 위액이 올라오는 것을 느낌에 레티시아는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마인드 리프래쉬MIND REFRESH.”
청량한 느낌과 냉정한 이성이 레티시아의 마음을 감쌌고 그제야 레티시아는 아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백금발의 작은 체구, 수려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미소년.
나름대로 귀족가의 사교 파티에 나가 본 적이 있는 레티시아로서도 처음 볼 정도의 미형美形이다.
‘······괴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뿐.
저 미소년의 탈을 쓴 괴물은 그녀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불합리의 결정체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실전에 투입이 가능할 정도의 전투마법사고 서든 백작가의 영예라는 고위 귀족.
마법이 잘 적용됐음에도 요동치는 가슴을 붙잡고 신색을 가다듬었다.
“서든 백작가의 레티시아 드 서든이에요. 도움에 감사드려요.”
정중한 예법은 귀족가 영애의 표본이었지만 그녀의 말에서 비아냥거림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일찍 도와줬어도.’
도미닉의 최후를 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울컥하는 감정과 분노가 솟아올랐고 자연히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었던 것.
일단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하고, 이 부분을 따져 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뭐?”
답변이 나오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베로아의 손길에 몸을 맞기더니 이내 발걸음을 돌려 예의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갈 뿐.
생전 처음 당해 보는 타인의 무시에 레티시아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을 무렵.
“그라인드 백작가의 적자 아렌 드 그라인드 님이십니다.”
어느덧 다가온 베로아가 공손한 표정으로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 도련님께서는 타인과 대화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으십니다. 이 부분은 영애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뻔뻔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베로아를 보면서 뭔가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레티시아.
“···그래요. 적자께서 그런 기벽이 있으시다니 당신도 모시기 쉽지는 않겠군요.”
최대한 나 지금 상당히 불쾌하다는 느낌을 실어서 말을 건넸다.
“까다로운 분은 아니십니다.”
하지만 그 주인에 그 하인인지 베로아의 대답은 레티시아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에 레티시아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려는 찰나.
“이동하셔야 합니다.”
눈치를 보던 벡스터가 요령 있게 한마디 했고, 레티시아는 울분을 가슴에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 * *
오크들의 부락이 있던 공동을 벗어나 다시 동굴로 진입한 일행은 정처 없이 걸음을 이어 나갔다.
동굴에 울리는 것은 일행의 발자국 소리뿐.
베로아와 벡스터야 이런 침묵에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레티시아의 불안한 정신은 익숙지 않은 상황에 점점 극한으로 몰렸고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당대 그라인드 백작은 걱정이 없으시겠네요. 이렇게 훌륭한 후계자가 계시니까요. 조만간 그라인드 백작가의 이름이 제국을 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귀족의 화법은 일단 상대를 띄워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법.
상대를 구름 위까지 올린다음 천천히 요리하는 것이 고위 귀족의 음험한 사교다.
“······죄송하지만 본가의 후계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레티시아는 첫 말부터 지뢰를 밟아 버렸다.
누가 봐도 가공할 만한 능력의 적자가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백작가 내부에 복잡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아렌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닐 것이다.
베로아의 대꾸로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레티시아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서든 백작가는 은혜를 잊지 않아요. 거기에 큰 문제가 없는 이상 가문을 승계하는 것은 적자의 당연한 권리이니 이치에도 맞군요.”
보통 귀족가문의 후계에 간섭하는 것은 심각한 내정간섭으로 비춰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으로 발발할 수도 있지만, 명분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귀족 아닌가.
레티시아를 구했다는 것과 이렇게 능력 있는 적자가 홀대받고 있다는 점 등을 이용하면 아렌의 계승에 관여하는 것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고, 레티시아는 그 점을 어필한 것이다.
“감사한 말씁입니다만.”
하지만 이번에도 레티시아의 예상은 빗나가 버렸다.
“도련님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슬쩍 아렌을 봤던 베로아가 공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이제는 울화통이 터질 지경에 이른 레티시아가 벌게진 얼굴에 잠시 손 부채질을 하더니만 아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지치는군요.”
쉬어가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고, 자리에 앉아 눈을 마주치고 말을 꺼내면 최소한 대꾸라도 할 것을 기대한 레티시아의 한 수였다.
무릇 귀족가의 남성이라면 레이디의 불편을 모른 척 하지는 않아야 하는 법.
그것은 귀족 남성의 의무나 마찬가지였고, 평소 레티시아는 이러한 방법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아렌은 대꾸도,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았다.
그저 예의 느릿한 걸음으로 묵묵히 걸어 나갈 뿐.
“이···”
불안한 조명 아래서도 보일만큼 벌겋게 달아오른 레티시아의 얼굴이 보였고,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뭔가가 터져 나오려는 그때.
“도련님.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슬그머니 끼어든 벡스터의 한 마디가 맥을 끊었다.
그리고 슬쩍 레티시아를 가리키는 벡스터의 모습을 본 아렌의 발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벡스터와 베로아의 모습을 보면서 레티시아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이라도 한잔 하시지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보료를 꺼내 바닥에 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 아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레티시아에게 베로아가 물통을 건넸다.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베로아에게서 얻은 물을 한 모금 머금자 멍해진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불합리한 존재를 합리로 대하려고 한 내 잘못이구나.’
깨달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오는 법.
소소하다면 소소한 깨달음을 얻은 레티시아의 표정이 차분하게 변하던 그 순간.
키리리릭!
섬뜩한 소리가 동굴을 울렸고, 모두의 시선이 동굴의 천장으로 향했다.
“아크 센티피드!”
수십 개의 겹눈을 빛내며 톱니 같은 주둥이를 쉴 새 없이 부딪치는 거대한 지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각각의 마디가 사람 몸통만 하고 그 끝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지네!
카라라락!
레티시아의 외침에 반응이라도 한 것인 양 수십 개의 다리를 놀리며 일행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숙련된 기사라도 반응하기 힘들 것 같은 속도와 힘에 레티시아의 정신이 아늑해졌고 표정에는 절망이 들어선 그때.
슈칵!
공간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아크 센티피드의 그 거대한 몸체가 떨어지는 기세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버렸고.
후드득!
그 거대한 몸체에서 뿜어져 나온 체액이 그대로 레티시아에게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