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93
093화
허리까지 늘어진 백금발과 훤칠한 키,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탄탄해 보이는 몸은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청년의 얼굴과 무저갱 같은 눈빛은 보는 이의 가슴을 써늘하게 만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는 안심할 수 있었다.
느릿하게 걸어 나오던 아렌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어딘가에서 로브가 하나 날아와 그의 몸을 가렸다.
바디체인지의 영향으로 옷가지가 다 날아가 버린 상황이었으니, 가볍게 로브를 둘러 몸을 가린 아렌이 눈가를 찡그리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고생했네.”
온갖 감정이 담긴 부르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회한, 분노, 감사 등등, 한마디 말에 이러한 감정을 담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부르바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디체인지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 . 소중한 경험을 했군.”
마일리의 감탄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렌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부르바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뭔가 잘 못 된 것이 있나?”
“있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아렌의 모습에 부르바스와 마일리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심각한 건 아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아렌이 그제야 표정을 피면서 이야기했다.
“수련이라는 것은 적공을 하루하루 튼실하게 쌓아가야 마땅한 것인데, 힘으로 경지를 강제로 끌어올리지 않았느냐.”
아렌의 이야기에 부르바스와 마일리가 뭔가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찌어찌 잘 되기는 했지만, 당분간은 조정을 거쳐야겠지.”
아렌으로서도 블랙박스를 제어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강인한 의지와 고고하기 짝이 없는 경지, 부룡기공의 힘이 어우러져서 성공했지만, 그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아렌은 탈태환골을 할 생각이 없었다.
부룡기공 자체가 인간을 용으로 변화시키는 기공이니만큼, 아렌의 몸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변화하고 있었던 참인데, 그런 흐름을 강제로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
하지만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블랙박스의 힘을 흐트러트리는 과정에서 신체의 붕괴가 찾아오다보니 어쩔 수 없이 탈태환골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동안 쌓아온 부룡기공의 경지를 그대로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어찌어찌 기운을 인도할 수 있었고,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다만 억지로 경지를 쌓아올린 것이라 몸 이곳저곳에서 어색한 곳이 있었고, 시간을 들여 다시 자연스럽게 만들 생각을 하니 아렌이 인상을 찌푸리게 된 것이다.
“대단하긴 하더군.”
아렌의 중얼거림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하늘과 땅을 잊는 기둥처럼 블랙박스의 기운을 날려버린 아렌의 모습을 보았으니, 각각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한 교수들이 알아듣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제 아무리 작더라고 별이고 세계.
그런 기운을 온전히 하나의 인간이 몸에 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아렌은 폭발하려는 기운을 온전히 유도해서 하늘로 방출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그런 와중에도 힘의 조각만으로 탈태환골을 해 버릴 정도였으니 블랙박스가 가지고 있던 기운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지. 터무니없기도 하고.”
인상을 찡그린 부르바스의 모습에 아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발상 자체도 놀랍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하였다는 점에서 블랙박스의 제작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작 그 과정을 책임진 아카데미조차 모르게 진행하였으니, 그 심계의 독랄함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저간의 사정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아렌은 황제에 대한 위험도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럼 이제 나는 가겠다.”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르바스에게 아렌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떤 말을 해도 자네의 도움을 표현하지 못하겠지. 이 일은 잊지 않겠네.”
엄숙한 얼굴로 답한 부르바스가 말을 이었다.
“대가는 확실히 치를 테니까. 기대해도 좋네.”
“그거 반가운 말이군.”
피식 웃으며 답한 아렌이 몸을 돌렸다.
느릿하게 걸어나가는 아렌의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사사롭게는 목숨의 은인이며, 크게는 위대한 경지에 발을 디딘 초인에 대한 예우였지만, 아렌은 그저 묵묵히 발을 옮겼다.
맨몸에 로브하나 대충 걸친 추레한 모습이었지만, 조각 같은 외모는 거꾸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
경외어린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며 아렌은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명치에 자리 잡은 세계의 씨앗이 맥동하는 것을 느끼며 아렌이 미소를 지었다.
도박은 잃거나 얻거나 둘 중 하나.
다행이 아렌의 도박은 성공했고, 그의 입장에서도 꽤나 중요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용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하는 여의주의 그릇을 얻은 것이다.
* * *
카일룸 제국의 제도는 제국의 심장부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거대한 도시다.
그 크기는 어지간한 소영지를 우습게 여길 정도고, 지금 이 순간에도 증축이 되고 있으니 제국의 영광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화려한 도시다.
늘어가는 제국의 영역에 맞춰서 증축을 거듭한 제도의 모습은 아직까지 종전을 선언하지 않고 있는 황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화려한 제도의 정 중앙.
그곳에 황제의 궁전이 있었다.
제도의 어느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게 솟아있는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황궁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경이를 가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화려한 황궁의 깊숙한 곳.
황족들도 함부로 발걸음을 하지 못하는 깊숙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 황제가 칩거하고 있었다.
* * *
저 먼 남방에서만 난다는 대리석으로 바닥을 가득 채우고, 금은보화가 가득 찬 방안은 보물들의 빛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천박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과한 치장이 된 방이었지만 감히 그것을 지적하는 자는 없었다.
이곳은 황제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
한쪽 벽을 전부 가린 화려한 베일 속에서 나온 낭랑한 목소리가 커다랗기 그지없는 공간을 가득 울렸고, 황제의 한 마디에 황송하다는 듯이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루드비히의 보고와 7과의 정보를 교차 검증하고, 아카데미에서 올라온 보고를 취합한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가장 정확한 정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당당한 것이 자시의 보고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제 아무리 황제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봐도 믿기 힘든 이야기 아니냐.”
토라진 아이 같은 목소리가 울렸지만, 보고하는 자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답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예외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마룡봉인체를 비롯한 초인들이 그렇고, 위대하신 폐하도 그렇지요,”
“말은 잘 하는구나.”
자신을 띄워주는 신하의 말에 황제가 혀를 찼지만 이내 수긍했다.
얼마든지 예외적인 존재가 있는데 특이한 녀석이 하나 더 나왔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최소한 아카데미 정도는 날아가 버릴 줄 알았는데 그건 좀 아쉽군.”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1과장의 등에 소름이 돋았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변덕이 심한 황제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심신을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흥.”
그런 공안 1과장의 모습에 황제는 재미없다는 듯 콧김을 내쉬더니 이내 몸을 옆으로 뉘였다.
“그래도 블랙박스의 관측 결과를 얻었으니 나쁘지는 않군. 좋아. 이 건은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지.”
“황제 폐하 만세!”
1과장이 고개를 땅에 박으며 크게 외쳤다.
커다란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지만, 황제가 손짓하자 거짓말처럼 소리가 사라졌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그렇게 표 안내도 숙청은 안 할 테니까.”
“어찌 감히.”
“됐다. 이 녀석.”
시정잡배 같은 황제의 말투에 1과장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는 것이야말로 1과장이 지금까지 황제의 곁에서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결과는 마탑에 넘기도록 하고, 부르바스가 많이 삐졌을까?”
황제의 물음에 1과장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쯧. 은근히 쫌생이라 삐지면 오래가는데 ······ . 달래려면 피곤하겠군.”
천하의 부르바스를 쫌생이라 부르는 것은 이 드넓은 제국에서도 몇 없었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황제가 베일 너머로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 그렇고.”
1과장 역시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을 짐작한 것이다.
“봉인체 녀석들은 어떻게 됐느냐?”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했습니다.”
“대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황제의 말과 함께 대전 안의 기운이 빠르게 내려갔다.
쩌적.
산처럼 쌓여있는 금은보화에 얼음이 내려앉았고, 1과장의 입에서 김이 세어나왔다.
“추적을 저항하는 기술이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단심문관들의 눈을 피하려다보니 적극적으로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흠.”
대전안의 기운이 다시금 올라가기 시작했고, 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1과장은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변덕이 심하고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황제이지만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황제의 눈은 가능과 불가능을 정확히 꿰뚫어보았고, 불가능하다고 인정이 된다면 추궁을 하지는 않으니, 어찌 보면 좋은 군주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럼 할 수 없지.”
베일 너머로 손가락을 두드리던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라. 사냥개들도 준비하고. 빨리 잡아들여야지.”
“옛!”
마룡봉인체라는 강대한 초인들을 마치 집 나간 아이처럼 취급하는 황제이지만 1과장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하나 남았군.”
낮아진 황제의 목소리에 1과장은 다시금 긴장을 조였다.
“아렌 드 그라인드 ······.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 루드비히의 6과는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7과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고요.”
“아니까 고민하는 것 아니냐.”
1과장의 대답에 핀잔을 준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그라인드의 혈계능력에 대해서는 그라인드의 혈족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는 황제다.
그렇기에 갑자기 강해진 아렌의 존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선 보고가 올라온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폭주하는 블랙박스의 힘을 유도하고 바디체인지를 이루어냈다.
어지간한 황제도 이 자식 드래곤인가 하는 의심을 진지하게 했을 정도였으니까.
보고가 있기 전의 아렌이 그냥 대단한 초인 정도였다면 지금의 아렌은 제국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초인이 되어버린 것이니 황제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할 수 없군.”
나직이 중얼거린 황제가 1과장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일단 놔둬라. 내가 따로 알아보던가 해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황제는 능력 이상의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황제가 판단하기에 공안 1과의 능력으로는 아렌의 근처에도 다가가기 힘들 테니 황제가 따로 손을 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손 놓지는 말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여간에 말은 잘 하지.”
심드렁하게 답한 황제가 손을 들었다.
“이제 가 봐.”
“황제 폐하 만세!”
“시끄럽다 이놈!”
베일 밖으로 나온 손이 한 대 쥐어 박으려는 듯 주먹을 쥐었고, 1과장의 몸이 신속하게 물러났다.
“뻔뻔하기는.”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휘두르는 황제의 팔은 잡티 하나 없이 뽀얗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