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177
제177화
“어째서…?”
페리도 탑주는 어질해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의자에 몸을 의지했다.
레오파드 마탑과 코넬리우스 마탑은 페리도 마탑주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아니 애초에 사신으로 보낸 마법사를 들여보내지도 않고 문 앞에서 돌려보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것처럼 페리도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레슬리 왕국에 형성된 대형 마탑 카르텔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커다란 계획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레오파드, 코넬리우스, 스카일러의 세 세력은 일정 기간 함께 손해를 감내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로 했고, 그와 함께 눈독 들이고 있는 몇몇 중형 마탑을 각자 나눠 갖기로 이미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리도 마탑은 스카일러 마탑의 먹잇감으로 낙점 받은 상태였고.
페리도 탑주는 최대한 버티다가 정 안 되면 스카일러 마탑의 경쟁 마탑에 도움을 청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페리도 마탑의 운명은 거대한 세 세력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더러운 놈들!’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탑주 모임이나 학회에서 종종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공동연구나 개발도 함께 했고, 급할 땐 생산 라인을 빌려주기까지 했는데….
돌아온 것이라곤 이런 차가운 배신과 무시라니.
페리도 탑주의 머릿속에 차가운 분노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정말 이 상태로 파산하게 된다면, 수백 년을 이어온 마탑은 헐값에 팔려나갈 것이고, 자신과 소속 마법사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탑을 살리는 것이 무리라면 적어도 제값은 받고 넘겨야 할 것 아니겠는가?
탑주는 벌떡 일어나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다.
“당장 연락할 수 있는 왕국 내의 모든 중대형 마탑에 소식을 전해. 인수할 자가 있다면 적당한 가격에 마탑을 넘기겠다고.”
“탑주님….”
완벽한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소속 마법사들은 그걸 깨닫고는 허탈한 표정을 짓거나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서둘러라. 놈들이 어디까지 손을 써놨을지 모르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왕국 내의 어딘가에서 적당한 매수자가 나서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라울은 두 번째로 페리도 마탑을 방문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방문과 달라진 점이라면 탑주의 안색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는 것과, 탑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암울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결국, 페리도 탑주는 아무런 대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레슬리 왕국의 그 어느 마탑도 3대 세력에 거스르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페리도 탑주는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두었던 라울의 제안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그가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라울 자작님이 하신 제안, 여전히 유효합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페리도 마탑을 인수할 의사가 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충분히 감수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탑주는 한동안 멍하니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눈에 뻔히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희 마탑을 인수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역시나 ‘그 기술’ 때문인가요?”
“아니라고 할 수 없군요. 저는 ‘그 기술’의 가치를 굉장히 높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라울의 단호한 대답에 오히려 탑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후우.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중 코어 제어 기술’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입니다. 완성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아니 진짜 제어가 가능할지 아무런 확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다들 이렇게 탐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딴 기술, 차라리 발견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탑주가 탄식에 가까운 아쉬움을 토로하자 라울의 눈이 번뜩였다.
‘이상하군. 개발자가 오히려 확신이 없다니. 제대로 된 가치를 눈치채지도 못하는 것 같고. 뭔가 내가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나?’
다중 코어 제어 기술.
중형 마탑에 불과했던 페리도 마탑을 파워아머의 선두주자로 이끈 사기적인 기술이었다.
지금까지의 파워아머는 단 하나의 코어만 사용 가능했다.
하지만 이 기술이 개발됨으로 인해 여러 개의 코어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파워아머의 출력, 지속시간, 유틸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이 기술이 개발되고 거의 3년간 다른 마탑에선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제국 측에서 열화판 복제 코어가 나오고 나서야 점차 상용화되기 시작했으니, 그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라울로서는 꼭 손에 넣어야만 하는 기술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이렇게 불러주신 건 제게 마탑을 매각하실 의사가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라울이 묻자 탑주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이 나라를 위해, 마법계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위기가 닥쳤을 때는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더군요. 이제 굳이 레슬리 왕국에 얽매이지 않고 저희를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비록 아직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아니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도록 충분한 투자와 지원을 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울은 탁자 밑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탑주의 마음이 움직였으니 이제 라울이 움직일 명분이 생겼다.
겨우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린 라울이 함께 배석했던 마법사 협회의 다리오 실장에게 물었다.
“그럼 바로 인수 절차에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네, 제가 자세한 절차를 알아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는지 탑주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듯했다.
라울은 탑주와 악수를 나누고 기쁜 마음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라울은 일행과 함께 회의실에 모여 세 마탑(그라넥 마탑, 제이도 마탑, 페리도 마탑)에 대한 인수 작업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그라넥 마탑과 제이도 마탑의 인수 건은 어느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서류 처리까지 완료되었다.
남은 건 마탑의 자산과 구성원들에 대한 처우 등을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마탑 건물은 일단 남겨두고, 나중에 퍼스트 길드 지부나 신생 마탑의 영업소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버나드의 말에 라울도 동의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각국의 수도와 주요 도시에 퍼스트 길드 및 상회 지부를 모두 설치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80% 정도 계약을 마쳤습니다. 나머지 20% 인원은 퇴직이나 이직을 원하고 있고, 그에 따라 차용증과 채무 증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마탑은 개인 소유가 아니었고, 그 구성원 전원이 마탑에 대해 함께 책임을 져야 했다.
따라서 마탑을 떠나는 인원은 그 직급에 맞게 마탑의 부채 일부를 떠안아야만 했다.
그 정도만 해도 라울로선 굉장한 은혜를 베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파산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빚을 청산할 때까지 공방에서 끝없는 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라울로서도 어차피 새로 마탑을 세울 마당에 마음에도 없는 이들까지 식구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기사들과 직공들은?”
“모두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군. 앞으로 네 밑에서 일할 이들이니 잘 다독이도록 해.”
“네, 마스터.”
신생 퍼스트 마탑은 당연하게도 나키아가 탑주를 맡을 예정이었다.
이미 6서클 마스터에 이르렀고, 연금술에도 조예가 깊은 그녀인 만큼, 탑주로서 부족함은 전혀 없었다.
일반적으로 파워아머를 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코어와 역장을 제어하는 마법진 전문 마법사.
파워아머의 마나로드와 인공근육을 만들고 그 안에 흐르는 마법윤활유를 연성하는 연금술사.
파워아머의 외골격과 갑주를 제작하는 대장장이.
이들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직접 제작 가능한 곳을 비로소 파워아머 제조사(혹은 마탑)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나키아는 비록 마법진에 대한 조예는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마탑을 인수하며 영입된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다 보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 그럼 이제 페리도 마탑 말인데….”
라울이 페리도 마탑에 대해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웅성웅성.
밖에서 뭔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여기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면, 꽤 소란스러운 모양인데.’
이곳은 그레이 마탑에 있는 별관.
작지만 아담한 정원도 있고, 담도 둘러쳐 있어서 소음이 심한 곳은 아니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마스터.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사용인인 집사가 약간 당혹스런 표정으로 라울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일행이 별관 밖으로 나오자 소리가 좀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더러운 외국 자본가는 이 나라를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국가 핵심 기술을 외국에 팔아넘기려는 페리도 마탑은 반성하라!”
“반성하라! 반성하라!”
“외국 귀족과 붙어먹은 그레이 마탑은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
라울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그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도 이런 수법을 써먹는단 말이야?’
정말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가 거기란 생각이 들었다.
라울은 굳이 밖으로 나서지 않고 공중에 떠올라 시위하는 군중들을 바라봤다.
라벨이 투명화 마법을 펼쳐주었기에 밖에서 그의 모습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시위에 나선 이들은 대략 백여 명.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몇 명을 빼고는 얼굴도 꾀죄죄하고 복장도 낡았다.
각자 손에 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긴 했지만, 과연 저 중에서 그걸 읽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지나가는 행인들이 시위대와 피켓을 보며 수군거렸다.
아마도 저녁이 되면 술집에서 오늘 봤던 이 장면을 떠들어 대리라.
라울이 다시 정원으로 내려서자 어느새 그레이 마탑 수석마법사 엘머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라울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시끄럽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괜히 그레이 마탑이 욕을 먹는군요.”
그러자 엘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뭐, 종종 있는 일입니다. 별난 탑주님을 보시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곤 하거든요. 지금 저렇게 시끄럽게 굴어도 얼마 안 가서 저절로 해산할 겁니다. 라울 님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손을 휘릭 휘젓자, 담벼락을 경계로 외부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어차피 탑 식구들은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밖에 나갈 일도 잘 없으니 아마 지금 시위대가 있다는 사실도 모를 테죠.”
“그래도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솔직히 저로서도 지금 왕국의 행태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손님으로 오신 이상 신변에 이상이 없도록 저희가 확실히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외출하실 때는 조심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사실 이곳은 레슬리 왕국 내에서도 거의 치외법권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현자 그레이라는 존재는 그만한 무게가 있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관망해야겠군. 어차피 인수가 끝나면 떠날 테니까.’
굳이 아무것도 모르는 시위대와 얽혀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시위대 사건은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지만,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협회장님께서도 송구하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며칠 뒤 찾아온 다리오 마법사가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괜찮습니다. 다리오 실장님이나 협회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라울은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레슬리 왕국도 갈 데까지 갔구나. 마탑 하나 때문에 법 규정까지 건드리다니.’
전말은 이랬다.
현대 지구만큼은 아니지만, 커넥트의 각 국가도 국가 기간산업이나 상업의 보호를 위해 법을 제정해두고 있었다.
레슬리 왕국의 경우 국가의 핵심 전력인 마탑의 보호를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마탑은 외국에 매각하거나 외국에서 투자를 받는 데 제한을 두고 있었다.
중형 마탑이지만 자본 규모나 인원이 적은 페리도 마탑은 원래 그 제한을 받지 않는 곳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보호 마탑 기준선을 확 내려버리는 바람에 페리도 마탑도 그 안에 포함된 것이다.
이렇게 보호 기준을 상의도 없이 내려버리면 타국과의 무역이나 관계에서 마찰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런 걸 감수하고서라도 페리도 마탑을 순순히 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래놓고 페리도 마탑을 처리하고 나면 은근슬쩍 규정을 다시 원위치 시키겠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다면 오산이야.’
라울은 바로 케인을 불렀다.
“케인, 관련 자료 확보해서 바로 본국에 보고하도록. 달튼을 통해 템플턴 공작가와 연계하면 더 좋겠지. 그리고 마커스 왕국, 브레넌 공화국, 신성 제국의 수도에도 친절하게 자료를 보내주고. 아, 언론사에 투고하는 것도 잊지 마.”
이런 재밌는 일은 함께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 라울이 마탑을 인수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레슬리 왕국은 이번 일로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페리도 마탑 인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울의 질문에 다리오 마법사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공개 입찰을 통한 특별 경매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라울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그래. 이렇게 심심하게 끝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어디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고.’
라울이 전의를 불태우며 회의를 소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