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287
제287화
‘어찌 이런 잔인한 짓을…!’
단순히 끔찍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든 순간부터 강력한 사념이 라울의 머릿속을 두드렸다.
– 죽고 싶지 않아.
– 너무 아파!
– 살려 주세요….
– 어째서 이런 짓을?
– …….
휘릭.
다시 병을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자 사념의 파도가 사라졌다.
꾸득.
라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령들이 폭주한 원인은 더 찾아볼 것도 없었다.
토템.
요정들의 공포, 고통, 원한을 담아 넣은 이 작은 병이 벌인 일일 테니.
‘요정과 공감하는 정령들이 정신 줄을 놓아버릴 만하군.’
문제는 과연 이 토템이 하나만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현재 엘프와 제국군이 충돌하고 있는 전선은 상당히 길고 넓었다.
적어도 이런 소규모 개척지 수십 곳에서 전투 중일 테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요정들이 희생당했단 말인가?
‘내 실책이다.’
전생에는 요정족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
극소수의 플레이어들이 목격했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그래서 원래 인원이 적었거나, 귀환한 고대 종족들과는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설마 제국 측에 사로잡혔던 건가?’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사로잡았다면 어째서 굳이 저런 잔인한 토템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차라리 요정족을 구슬리거나 협박하여 정령의 힘을 손에 넣는 게 이득 아닌가.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 어쩌면….’
아직 충분한 수의 요정을 포획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대로 제국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엘프들을 밀어내고 진격로를 확보한다면, 인간들의 왕국 또한 곤란해질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라벨을 위해서라도 놈들을 용서할 수 없어. 만약 살아남은 요정들이 있다면 그들도 구해내야 하고.’
마음을 굳힌 라울이 길드 통신을 열었다.
긴급회의를 소집한 그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간부들에게 전달했다.
「작전 변경이다. 현 시간부로 원소 정글에 전력을 집중한다. 현재 구축 중인 방어선은 애쉬튼 후작가에 인계하고 원정을 준비하도록. 이곳에서 제국의 선봉대를 꺾는다.」
「제국 놈들이 감히 우리 라벨 님의 동족을! 이 제이크가 결코 용서 하지 않겠습니다!」
제이크가 격분하며 외쳤고.
「원소 정글이면 레인저 기사단이 필요하겠군요. 부하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말수가 별로 없는 피어스도 굳어진 목소리로 전의를 다졌다.
「이번엔 정말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요. 마법사들과 함께 이동 마법진을 준비하겠습니다. 새로 개발한 포션들도 최대한 챙겨 가겠습니다.」
나키아뿐만 아니라 간부들이 모두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이를 갈았다.
「일반 병사는 필요 없다. 최소 엑스퍼트 상급, 6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대동하도록. 압도적인 전력으로 단번에 쓸어버린다.」
「네, 마스터!」
간단히 재료만 챙겨 가려 했던 원소 정글행이 생각지 않게 전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국과 한 번은 부딪칠 예정이었고, 그게 이곳이 된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으니.
라울은 간이 포털 장치를 개척지 중간에 설치하며 증원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 * *
“정찰 결과입니다.”
타운트리 회의실에 마련된 마법스크린에 원소 정글의 지도가 펼쳐졌다.
“현재 제국 측이 엘프족과의 경계에서 차지한 개척지는 총 30여 곳. 그 가운데 25곳이 C등급 이하. B등급이 4곳, A등급은 1곳입니다.”
케인의 보고와 함께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제국의 개척지 현황이 표시되었다.
“참 나. 많이도 해먹었네. 어떻게 할까요? 한 번에 다 쓸어버리는 건?”
제이크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지만,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요정들을 구해야 해. 케인, 특이 사항은 없었나?”
“최전선 쪽에는 특이점이 없었습니다만, 내부로 침투한 요원들이 보내온 정보가 있습니다.”
탈칵.
스크린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어? 저건?”
“성벽? 이 원소 정글에 진짜 성벽이라고?”
명백히 이질적인 장면이었다.
온통 나무와 수풀로 가득한 정글 한복판에 세워진 반듯한 돌 성벽.
개척지의 방어벽이 모두 목책으로 이뤄졌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크기와 위치를 보아 짐작건대, 적어도 S등급의 개척지. 그리고 제국군의 원정군 본대가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케인이 말을 마친 그때.
“…분명해. 저곳이야.”
“라벨! 깨어난 거야?”
충격으로 쓰러졌던 라벨이 회의장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저곳이 바로 내 예전 고향. 다소스 숲의 ‘페어리 가든’이 있던 장소야. 그리고 ‘정령수’의 군락지이기도 해. 아마도 거기에….”
“몸은 괜찮은 거야? 다들 걱정이 많았어.”
라벨이 라울의 눈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라울. 부탁이 있어.”
“뭔데. 말만 해!”
순간 라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팝업되었다.
-스킬도감의 사서 [라이벨리나 에리오트 메르디아네]가 특별 요청을 해왔습니다.
-스킬도감의 선택 슬롯 2개를 사서에게 양보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넘어간 스킬 슬롯은 사서에게 종속됩니다.
-[조언] 사서는 스킬 슬롯을 대가로 특별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보상의 종류나 등급은 사서의 능력에 비례합니다.
-사서의 요청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라울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창을 내렸다.
이미 라벨은 그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
게다가 그녀의 힘은 고작 스킬 슬롯 두 개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해, 라벨. 사실 스킬도감은 나보다 너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잖아. 네게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없어.”
라벨은 단번에 대답하는 라울의 말에 뭉클했는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이 결정,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는 마법 스크린에 떠 있는 제국 요새를 한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공략 준비가 되면 불러줘. 그때까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래. 이쪽은 나에게 맡겨.”
휘리릭.
라벨이 스킬도감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스킬도감이 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라울의 눈앞에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연속해서 떠올랐다.
-사서 라벨이 B등급 스킬 [날카로운 칼바람]을 스킬도감에 기록했습니다.
-사서 라벨이 B등급 스킬 [차가운 격랑]을 스킬도감에 기록했습니다.
-사서 라벨이 A등급 스킬 [전율의 찬가]를 스킬도감에 기록했습니다.
-사서 라벨이…….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시야를 가득 채우는 메시지에 놀란 라울이 메시지 창을 접었다.
새로운 메시지 표시 숫자가 끝도 없이 증가해 나가고 있었다.
‘정보 확인! 스킬도감.’
[스킬도감]등급 : 에픽
상태 : 봉인 중(3/5), 귀속, 사서 라벨 입주 중.
효과 : 기록된 스킬의 종류와 수에 따라 스킬의 효력이 강화된다. (현재 기록된 총 스킬 수 : 2231=>2523⇑)
추가 기능 :
1)도감 전용 스킬 슬롯 4개 제공 – 선택 슬롯1(-2), 랜덤 슬롯 1
2)빠른 숙련 도우미 – 스킬도감에 기록된 스킬을 사용할 때 숙련도가 빠르게 증가한다. (기본 제공 숙련도 – 현재 중급 1LV)
3)사서 – 입주한 사서의 특성에 따라 도감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4)스킬북 제작
실시간으로 기록된 총 스킬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스킬도감의 스킬 강화 계수도 상승하고 있었으니….
‘특별한 보상이라는 게 이거였어?’
여태까지 스킬 도감에 저장한 스킬들은 오로지 라울이 모은 스킬북과 카피한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스킬 도감에 쉴 새 없이 새로운 스킬들이 기록되고 있었으니.
요정족의 모든 지혜와 정수를 넘겨받은 라벨.
8서클 마법사인 그녀가 알고 있는 마법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뿐이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각종 마법서와 스킬북, 도서관을 전전하며 그녀가 쌓은 지식은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다.
그것이 모두 스킬도감에 기록된다면….
‘어쩌면 잠겼던 봉인이 하나 더 풀릴지도!’
뜻하지 않게 스킬도감의 등급을 올리게 될지도 몰랐다.
“자, 우리는 계속 회의를 이어가지. 그래서…”
라울이 잠시 멈췄던 작전 회의를 재개하려던 순간.
“마스터, 잠깐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불청객이 라울을 찾아왔다.
* * *
타운트리 목책의 바깥.
숲과 공터의 중간에서 라울은 누군가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활과 무기를 들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귀하신 몸께서 무슨 일이지?”
침묵이 길어지자 라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뭐가 못마땅한 것인지 그를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한마디 말조차 없다라. 이건 선전포고라 생각해도 되겠나?”
그럼에도 별 반응이 없자, 라울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목책 위에 서 있는 퍼스트 길드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인간. 여왕은 어디 있느냐?”
마침내 하이엘프 멜리쉬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라벨 말인가? 그녀라면 지금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나오기 힘들다만. 용건이 있다면 내게 말해라.”
“크읏! 감히 더러운 인간 놈이 어디서 함부로 입을 노리느냐!”
멜리쉬를 호위하던 전사장이 몸을 부르르 떨며 호통 쳤다.
슬쩍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라울이 다시 멜리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어봐서 대답했더니, 쯧쯧. 그리고 엘프들은 대장끼리 얘기하는데 버릇없이 끼어들어도 되나 보지? 아주 재밌는 종족이야.”
“뭐라고? 이놈이!”
스릉.
검이 반쯤 뽑혀 나왔지만, 멜리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녀로서도 이 상황이 탐탁지 않았는지 차갑게 말했다.
“주인이 없으니 종에게 말할 수밖에. 그녀에게 묻고 싶다. 어째서 약속을 어긴 거지?”
“약속? 무슨 약속?”
“분명 우리가 통행을 허가한 건 여왕과 너뿐이었다. 그런데!”
멜리쉬가 목책을 가리켰다.
“저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째서 인간들이 이 주변을 계속 활보하고 있는 것이지? 여왕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는 것인가!”
‘허, 참 나.’
라울은 기가 차서 속으로 혀를 찼다.
상당한 전력을 끌고 왔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설마 그런 이유였단 말인가?
‘난 또, 제국과의 전투에 한 손 보태겠다고 하는 줄 알았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약속은 분명히 지켰다. 엘프들의 영역을 통과한 것은 분명 나와 라벨뿐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궤변인가! 그럼 저 목책 위의 인간들은 뭐란 말이야?”
“멜리쉬 님, 역시 인간이랑 말을 섞는 게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거짓말만 일삼는 인간이 약속을 지킬 리 없었던 겁니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엘프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라울이 또박또박 말했다.
“어이, 엘프들. 물어보자. 이 타운트리가 너희 엘프들의 것인가?”
“당연히! 이 원소 정글은 우리 엘프들의 영역이다.”
“하, 웃기는군. 나는 분명 제국군에게서 이 타운트리를 점령했고, 이곳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내 부하들이 돌아다닌 곳은 모두 제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었지, 너희 엘프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희는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인간. 분명히 얘기하지. 이 원소 정글은 그게 어디든 우리 엘프들의 영토다! 이는 대전쟁 시절 이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제국에게서 밀려나 전전긍긍인 주제에 이 당당함과 뻔뻔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 이상 입씨름할 이유가 없군.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당장 저 인간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라. 우리는 더 이상의 인간들이 원소 정글을 활보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
라벨이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멜리쉬는 아주 강압적인 태도로 라울에게 요구했다.
“싫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전원 세계수의 양분으로 만들어 주겠다.”
엘프들이 활을 겨누고 정령들을 소환했다.
제국을 상대할 때와 달리, 정령들이 가세하니 아주 기세가 등등한 모양이었다.
“푸흡, 하하하하하하!”
라울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말이 우습나, 인간! 저번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멜리쉬의 손짓에 뒤쪽에 있던 일단의 무리가 검을 뽑아 들고 다가왔다.
그들의 검에 솟아오른 것은 분명 녹색의 오러 블레이드.
엘프의 초인이라 불리는 대전사들이 분명했다.
거기에 상급 정령술사까지 포함하면 열이 넘는 초인 전력.
요정 여왕 라벨마저 없는 라울 일행이 우스워 보일 만했다.
하지만.
“원한다면 상대해주지.”
라울이 손가락을 튕기자.
파바바밧!
타다닥.
목책 뒤쪽에서 뛰어오른 퍼스트 기사단의 간부 스무 명이 50m 이상을 날아와 라울의 뒤에 기립했다.
구우우웅.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평원을 환하게 밝혔고.
“어때? 정말 한번 해볼 생각인가?”
하이엘프 멜리쉬의 하얀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