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1
미쳤었던 재앙급 빌런의 회귀
#현대판타지 #퓨전 #회귀 #공무원 #빌런 #각성
미친 빌런이 정신을 되찾음 / 김현우
1화
힘에 취해 폭주를 일으킨 나는 피를 갈구하는 짐승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 감각에 걸려드는 것, 신경에 거슬리는 걸 죽이고 또 죽였다.
내게 살의를 가진 놈, 욕심을 가진 놈, 이용을 하려던 놈까지 모두 죽였다.
혈종(血宗), 블러드 마스터(Blood Master).
세상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왔지만 그마저도 잠깐.
피를 향한 갈증은 빠르게 덮쳐왔고 몸의 통제권을 앗아 갔다.
지워지지 않는 자기혐오가 날 휘몰아쳤다.
내가 힘을 탐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남들보다 강해지고, 남들보다 잘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그 대가가 피가 마르지 않는 손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피에 대한 갈증마저 느껴지지 않는 걸 느꼈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목적을 달성해서일까.
이해 못 할 상황에 의문을 가질 때.
다시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 * *
광기에 잠식되어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을 때 느끼는 감각은 한결같다.
세상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물들고 묵직한 중압감이 내 가슴을 짓누른다. 그 속에서 나는 옴짝달싹 못 한 채 버둥거린다. 이런 나를 비웃듯 미쳐 버린 또 다른 나는 거칠 것 없이 뛰쳐나가 피에 대한 갈증을 채운다.
몇 번이고 발악해봤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혈종은 결국 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탓에 만들어진 괴물이다. 이 괴물을 지울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에 할 수 없다.
내가 발악할 때마다 녀석에게 집어삼켜지길 반복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혈종은 또 다른 나. 혈종이 가진 능력, 경험, 생각 등은 녀석의 것이자 내 것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흐릿했던 의식은 또렷해지고 주변의 감각이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내 뇌를 들쑤시던 녀석의 광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녀석을 극복한 걸까. 아니면 녀석이 새로운 방법으로 날 기만하려는 걸까.
잔뜩 경계하던 내 마음을 풀어놓은 것은 콧속으로 스며드는 그리운 냄새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된장찌개.
두 번 다시 먹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의 음식.
다시 한번 맛보길 고대했지만 나로 인해 가족이 더 피해를 볼까 봐, 해를 입을까 봐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피에 미쳐 가족을 수렁으로 밀어 넣고 거듭되는 후회 속에서 살아왔다.
내가 ‘녀석’이라 부르지만 결국 모든 것이 내 업보였다.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유를 되찾고 속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어머니의 음식을 다시 맛볼 수 있는 건 내게 큰 축복이다. 설사 꿈이라고 해도, 녀석의 기만이라 해도 상관없다.
나는 신에게 감사하며 반사적으로 그곳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녀석이 피를 핥던 것처럼 손안에 느껴지는 내용물을 핥아먹었다.
틀림없는 어머니의 된장찌개다. 맛있었다.
“······준호야!”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소리.
소리를 귀에 담는 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건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준호야!”
혹시 꿈인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 부모님의 얼굴이 젊어도 너무 젊어서다.
평생 그 모습을 간직할 거라 생각했던 부모님. 하지만 여러 번 혈겁을 일으키고 녀석에게 몸을 뺏기면서 내가 할 수 있던 건 가끔씩이나마 멀리서 보는 게 전부였다.
그때마다 늙어 가시던 부모님. 나날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꿈이라고 해도 좋다. 다시 한번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감각이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 같은 생생함이었다.
현실과 꿈 사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때.
부모님은 황망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준호야. 왜 된장찌개를 손으로 먹니?”
“손으로?”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린 곳에는 된장찌개 국물과 건더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내 손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현실감은 뭘까.
“설마······.”
다시 한번 손으로 된장찌개를 퍼서 입에 넣었다.
맛이 느껴진다. 구수한 된장 맛에 부드럽게 부서져 가는 두부, 감자, 애호박의 맛까지.
꿈이 이렇게 생생할 리 없었다.
젊은 부모님의 모습, 광기에 잠식되지 않은 내 모습까지.
녀석의 기만이 아니다. 나는, 내가 과오를 범하기 전의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아이고, 준호야! 음식을 왜 손으로 퍼먹어!”
어머니의 놀란 목소리에도, 미친 놈 보듯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도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맛있어서요. 손으로 먹으니 더 맛있는데요.”
난 다시 한번 손으로 된장찌개를 퍼먹었다.
그리움이라는 조미료가 한 스푼 첨가된 어머니의 음식은, 참 맛있었다.
* * *
다음 날 일어났을 때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다시 미쳐 버리지도, 피에 대한 갈증도 없었다.
“진짜 과거로 왔네?”
나는 맨정신으로 햇빛을 쬘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미쳐 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늘 추격에 쫓기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기에 푹 자본 게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녀석은 늘 내게 속삭였다. 더 이상 반항은 포기하라고. 너와 나는 둘로 분리되어 있지만 결국 같은 존재라고. 자신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세상의 유일한 존재가 되자고 속삭였다. 나는 거절하고 녀석의 모든 걸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온 건 녀석의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혈겁을 일으키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
그렇게 나는 사상최악의 빌런이 되었다.
현실은 무능한 25세 백수였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갠 뒤, 간단하게 스트레칭하고 거실로 나오자 주방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냄새와 재료를 써는 칼소리가 정겹게 맞아 줬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냄새를 뱃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럴수록 날 향한 어머니의 표정은 떨떠름해졌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일찍 일어났네?”
“네, 뭐 도와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근데 진짜 괜찮은 거야?”
“뭐가요?”
“그··· 아니다. 아니야.”
“하하.”
어제 된장찌개에 손을 담궈서 그런 거구나. 내가 생각해도 미친놈 같긴 했다.
아니, 원래 미친놈이라 불렸으니 미친놈이 미친짓을 한 게 되나? 혈종을 상대하면서 내가 정상일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딘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녀석의 조롱과 기만 속에서 버텨 내지 못했겠지.
녀석도 나도 망가졌었다. 그래서 망가진 티를 최대한 내지 않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어떻게 하면 정상으로 보일 수 있을까.
당장 유해 7단계 마물이라도 잡아 올까? 그럼 아들의 실력을 보고 좋아하시지 않을까?
“밥 먹으렴.”
“네.”
“손 씻고. 수저랑 젓가락으로 밥 먹어.”
“알았어요.”
어제 이후 날 보는 눈에 유난히 안쓰러움이 묻어나왔다. 내 행동이 철없긴 했나 보다.
철부지 취급이지만 그래도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
식사 내내 부모님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식사가 끝난 뒤, 정리를 하겠다는 말에도 한사코 말리시면서 뒷정리를 마치고 일하러 나가셨다.
홀로 덜렁 남게 된 나는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진짜 유해 7단계 마물이라도 잡아와야 되나? 근데 너무 커서 놀라시지 않을까? 유해 7단계 중 작은 게 있었던가?
머리를 굴려봤지만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계획을 지우며 우선 현재 상황에 집중했다.
“한창 백수 짓 할 때였지.”
10대 때 각성자 적합자 판정, 20살부터 대기업과 대형 길드 공채에 도전했지만 3년 동안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낙담하면서 방에 틀어박혀 2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녀석.
그게 25살 최준호인 나였다.
남들 눈에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일지 몰라도 희대의 학살자 경력 25년인 내가 보는 관점은 다소 달랐다.
“난 무해한 녀석이었구나. 이렇게 훌륭할 수가.”
적어도 거슬린다고 죽이고, 심심하다고 죽이고, 그냥 죽이고, 필요도 없는데 피를 빨지는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내 모습이 퍽 자랑스러워졌던 순간이다.
“근데 이런 생활은 부모님 피를 빨아먹은 건가?”
그래도 진짜 피는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괜찮을 거다.
이제는 옛 기억이 된 먼 과거를 되짚어보니 예전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이때 자신은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남 탓만 했을 뿐.
세상을 원망하고 무능력한 자신을 원망했다. 그것이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면서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거 같다.
힘만 얻으면 부와 권력이 내게 올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 철없던 생각의 결과물이 최악의 빌런, 혈종의 탄생이었다.
원하는 힘을 얻었지만 대가없는 힘이 아니었다. 내 선택으로 인해 가족들이 큰 피해를 봤다.
아들을 잘못 둔 죄로 평생 감시에 시달리신 부모님.
오빠를 잘못 둔 죄로 재능이 있음에도 그걸 개화하지 못한 여동생.
같은 실수는 없다. 피에 미친 빌런이 아니라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자랑스러운 아들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건 유해 7단계 마물 사냥이었다.
“이따 여쭤 봐야지.”
나는 침대에 누워 부모님을 기다렸다.
* * *
“···뭐가 됐으면 좋겠냐고?”
농사를 짓고 돌아온 최진규와 이영희는 아들의 질문에 눈을 끔뻑였다.
어제도 그랬지만 아들의 바뀐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쓸데없이 날을 세우고 세상을 원망하던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굳은 표정 대신 이제는 제법 웃기도 했다.
“그동안 걱정 끼쳤잖아요.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 보려고요.”
“······.”
“난 우리 준호가 공무원이 됐으면 좋겠어.”
멍하니 있던 최진규와 달리 이영희는 재빨리 자기 소망을 밝혔다.
“공무원이요?”
“그래. 그 막 세지 않은 헌터도 공무원이 되잖니? 모든 공무직 헌터가 마물을 사냥하고 빌런을 체포하는 건 아니니까······ 응?”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들의 물음에 최진규는 옆에서 찌르는 이영희의 손길을 느꼈다.
동조하라는 무언의 신호였지만 마치 세상을 달관한 듯한 아들의 눈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바뀐 모습이 여전히 낯설었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그리고자 하는데 아버지 된 입장에서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다시 도전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 좋겠다. 굳이 말하자면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좋겠지.”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데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
“당신은 마음 다잡으려는 준호 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옆에서 이영희가 소리쳤지만 최진규의 시선은 아들에게 고정되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냐. 준호가 아직 방법을 못 찾았지만 제대로 된 방법만 찾으면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도 있어.”
“그게 쉽지 않은 걸 알면서 그런 소릴 해요?”
“준호가 하기에 따라 다른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하냐?”
“그전에 아버지 생각이 궁금해요. 공무직 헌터는 어때요?”
“나쁘지 않다.”
“그런가요?”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고, 나라에 봉사하며 월급도 밀리지 않고 나오지. 안정적인 걸 좋아하면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 될 거다.”
“그럼 그거 할게요.”
“다른 곳은 생각 안 하고?”
“가장 만만해 보여서요. 집에 더 있는 것도 그렇고.”
잠시 말을 멈춘 아들은 자신과 부인의 눈을 마주한 뒤 말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하고 싶어졌어요.”
“······.”
아들의 진심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진규는 퍽 감격에 휩싸였고 부인도 감동이 컸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철없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철이 들었다.
“크흠흠!”
“당연하지. 벌이가 크지 않을 뿐이지, 안정적인 게 얼마나 좋은데! 준호 너라면 잘할 거야.”
“하지만 공무직 헌터가 되려면 최소한 레벨 1이 되어야 한다.”
다시금 옆구리를 찔러오는 부인의 손길에도 최진규는 꿋꿋이 말씀하셨다.
“레벨 1, 할 수 있겠냐?”
레벨 1, 그건 최준호의 역린이었다. 물론 회귀한 최준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레벨 9도 되죠?”
* * *
“우리 준호가 많이 바뀌었네요.”
“남자는 어느 순간 철이 들기 마련이니까.”
말은 그랬지만 사고뭉치였던 아들이 이렇게 갑자기 바뀔 줄 몰랐다.
손으로 된장찌개를 퍼먹을 때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줄 알았는데.
그 후 보여준 의젓한 모습은 꽤 만족스러웠다.
“잘할 수 있을까요?”
“하겠지. 보통 마음가짐으로 말한 게 아닐 테니까.”
“하지만 각성자로 인정받는 게 쉽지 않던데······.”
“방법을 찾아야겠지. 우리가 할 건 믿고 지켜봐 주는 거니까.”
“그렇긴 해요.”
아들을 믿고 지켜봐 주는 것.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둘은 이번만큼은 믿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나저나 레벨 9라니, 준호도 허풍이 참 심하네요. 누구 닮아서 저런 건지.”
“커흠!”
* * *
부모님 말씀을 듣고 진로를 결정했지만 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회귀 전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빌런으로 낙인찍힌 뒤 집요한 추적에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공무직 헌터는 최고의 선택이다.
공무직 헌터는 어엿한 공무원 신분.
안정적인 고용 보장과 과하지 않은 업무 강도.
쥐꼬리만큼이지만 공권력도 쥐고 있다.
공권력, 이 얼마나 황홀한 울림이란 말인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내가 바뀌겠다는 결심의 증거로 공권력의 편에 서겠다는 것만큼 확실한 증표는 없었다.
돈이야 시간 나면 마물 몇 마리 잡으면 되고 빌런 목에도 현상금이 걸려 있다. 공무직 헌터가 된다고 해서 돈이 부족할 일은 없다.
결심을 했으니 다음은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내 계획은 서울로 올라가 공무직 헌터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다. 2년 전 머물던 서울 집에는 현재 여동생 최윤희가 취업 준비 중에 있었다.
또 다른 아픈 손가락인 여동생. 이번에는 앞길 막지 않고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
다만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그 부분이 살짝 걸렸다.
“죽기 직전까지 굴리면 실력은 늘겠지?”
실력이 안 늘었던 녀석은 다 죽었으니 실력이 늘 수밖에 없다. 여동생이니 적당히 조절하는 게 관건이다.
앞으로 계획을 세우고 백수짓으로 늘어진 몸을 깨우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며 단련했다. 그러다 문득 들어온 부모님 과수원 풍경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무심하긴 했네.”
사람 안 죽이고 피를 안 빤다고 개과천선한 게 아니다.
한눈에 쉬이 들어오지 않는 과수원의 규모는 부모님의 고생을 알 수 있었다.
마물들이 등장하고 격변한 세상.
토착 생물과 결합된 유해 마물들이 망쳐놓은 사과나무를 보다가 과수원 한 바퀴를 돈 뒤 집으로 들어갔다.
“요즘 유해 마물들 숫자가 늘었네요.”
내 질문에 아버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 전까지 괜찮았는데 마물들도 진화를 한다고 하더구나. 더 비싼 퇴치기구를 써야 할 시기가 됐지.”
“가격은 어떤가요?”
“비싸지. 마물들이 진화할수록 가격은 더 올라가고.”
“제가 해결할게요.”
“방법은 있고?”
“네.”
“위험한 방법이면 하지 않아도 된다.”
“딱히 위험한 건 아니에요. 조금 귀찮은 정도?”
추격에 시달리면 각성자도 각성자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마물도 귀찮았다.
숱한 도피 생활을 했던 나는 어떻게 하면 마물을 쫓아낼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아무리 강한 빌런이라고 해도 먹고 싸고 자는 건 바뀌지 않으니까.
사실 나중엔 귀찮아서 마물을 발견하는 족족 다 죽였다.
“그래, 부탁하마.”
“오래 안 걸릴 거예요.”
방으로 들어간 나는 편한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트럭 키를 챙겨든 뒤 밖으로 나갔다.
퇴치기구라는 건 결국 등급 낮은 유해마물을 쫓아내는 것이다.
“유해 3단계 정도면 되려나?”
* * *
점심쯤에 나간 아들은 저녁이 되고 밤이 될 때까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연락수단인 스마트폰마저 두고 간 걸 본 이영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괜찮은 거겠죠?”
“괜찮겠지.”
“무리하는 거 아닐까요? 바뀐 모습 보여 주려고 조급하게 행동하려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런 기색은 아니었어.”
동네 마실 나가듯 태연하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진규가 침음을 흘렸다.
“트럭까지 끌고 갔잖아요. 어디 가는지 물어는 봤어야죠!”
꽤나 성급해진 이영희의 목소리에 최진규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그때 밖에서 트럭 엔진음이 들려왔다.
“준호야!”
자리에서 일어나 전력질주로 나가는 이영희를 보며 최진규가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온 부부는 트럭 짐칸에 실린 거대한 물체를 볼 수 있었다.
“그, 그게 뭐니?”
“불 좀 켜 주시겠어요?”
이영희는 당장이라도 저게 뭔지 캐묻고 싶었지만 뭔지 확인하고 물을 생각으로 앞뜰 조명을 켰다.
그리고 기절할 뻔했다.
“메, 멧돼지?”
일반 멧돼지보다 2배는 더 큰 거대한 멧돼지가 짐칸에 누워 있었다.
“친환경 유해마물 퇴치기구에요. 잠깐만요.”
“······.”
최준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둘만 남은 부부는 멍한 시선으로 멧돼지를 보고 있었다.
유해 3단계에 해당하는 멧돼지는 숙련된 사냥꾼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흉폭한 마물이었다.
감출 수 없는 흉성과 총알도 견뎌 내는 질긴 가죽은 농가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걸 잡아오다니.
그때 멧돼지의 몸이 들썩였다.
“지, 지금 꿈틀거렸어요. 살아 있는 거 아니에요?”
사색이 된 이영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최진규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대야를 들고 오는 아들을 붙잡고 이영희가 말했다.
“주, 준호야! 저 마물 살아 있는 거 아니니?”
“깔끔하게 잡았죠?”
“지금 제정신이니! 왜 마물을 산 채로 잡아와!”
“괜찮아요.”
최준호는 짐칸에 실린 멧돼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수백 kg, 아니 어쩌면 1톤은 될 법한 멧돼지를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는 아들의 모습에 부부는 할 말을 잃었다.
더 놀라운 광경은 그 다음이었다. 최준호가 멧돼지 목 부분을 잡고 돌리자,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이 한 바퀴 돌아갔다.
뀌익! 뀌이이!
눈을 부릅 뜬 멧돼지가 난리 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숨이 끊어졌다.
뒤이어 콸콸콸 쏟아지는 피를 대야로 받기 시작했다.
“······.”
믿기지 않는 광경에 최진규와 이영희가 입을 떡 벌렸다.
산에서 만나면 가장 피해야 할 마물이 아들의 손에 장난감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이 멧돼지가 유해 3단계라 피를 과수원에 뿌려 두면 다른 등급 낮은 것들은 접근하지 못할 거예요.”
뼈도 걸어두면 더 등급 높은 포식자가 있는 걸로 알고 접근하지 않을 거고.
“퇴치기구가 결국 상위 포식자의 체취를 흉내 낸 거거든요. 포식자가 있는 곳에 먹잇감이 얼쩡거리지 않는 구조에요.”
최준호의 손이 멧돼지 뱃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안쪽을 헤집는가 싶더니 붉게 물든 손을 빼내 입으로 가져가 피를 핥았다. 마치 진미를 맛본 것처럼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아! 피가 신선해요. 냄새랑 맛도 진하고. 퇴치기구로 효과는 확실하겠어요.”
“······.”
피 묻은 입으로 해맑게 웃는 아들의 모습에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