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전용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던 박영후의 예상과 다른 무척 안전한 귀국이었다.
“역시 한국 공기가 최고라니까.”
크게 달라진 것 없지만 기분이 다른 것이 역시 신토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일본은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보니 불편해서.
그래도 된장국 하나는 일품이었다. 종류도 다양하다고 하던데 그걸 다 맛보지 못한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여기에 초밥도 좋았다. 아무래도 도주를 오래 하다 보니 날 것은 별로 먹어 보지 못해서. 내가 원래 또 날로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내 옆에 선 박영후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랫동안 일본에 있었으니 나보다 더 각별하게 느껴지겠지.
“고생하셨습니다, 초인님.”
“수고했습니다.”
“위에서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뵙자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일본에서 거하게 일을 벌였어도 내일 보자고 하는 건 날 배려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고, 일본에 있어야 할 박영후가 함께 왔다는 건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자세히 듣기 위함일 것이다.
당사자가 이야기하는 것과 제3자가 얘기하는 게 다를 테니까.
아니면 벌써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접하고 교차검증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일본에서 벌인 일이 워낙 크다 보니 조심하는 것도 있을 테고.
혈종 녀석이 저지른 일이니 녀석 탓으로 몰고 싶지만 안 먹히겠지?
결국 내 손에 피 묻히면서 저지른 일이니까. 발뺌할 수 없는 게 아쉬운 점이다.
박영후는 그대로 청와대로 향했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뭐, 뭐야? 왜 이리 일찍 와?”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TV를 보던 윤희가 날 보고 놀랐다. 어째 내가 일찍 오는 걸 그다지 반기는 눈치가 아닌데?
“숨기는 거라도 있냐?”
“없거든!”
“그럼 됐고.”
수상하긴 했지만 더 채근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여기도 며칠 후면 벗어나게 된다. 과거로 돌아와 꽤 익숙해진 공간인데 떠난다니 싱숭생숭하군.
좋은 기억이 있는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건 언제나 이런다.
내가 혈종일 때 어디 한 곳에 머무른 적이 없다 보니 더 애틋함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혈종. 이 녀석의 등장이 내 머릿속을 계속 복잡하게 만든다.
“무슨 속셈이냐.”
과거로 돌아오면서 녀석도 함께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샅샅이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녀석도 등장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을 놓고 있던 게 사실이다.
소멸했다 생각했던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게 드러난 것이다.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걸까.
크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내 정신 속에 숨어 있는 경우.
나와 한 존재라 판단이 되기에 내가 녀석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
내 정신의 일부라면 숨을 쉬는 것처럼 존재가 자연스러울 테니까.
두 번째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경우지만 만득이를 보고 생각한 거다.
어쩌면 혈종은 혈중섭식에 있는 자아가 아닐까.
혈중섭식이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전설의 기프트이며, 이 기프트의 자아가 내 것과 결합한 게 혈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기프트를 빼앗는 혈중섭식이 평범한 기프트일 리 없을 테니까.
다만 혈중섭식이 만득이보다 훨씬 선명한 자아를 갖고 있다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무분별하게 기프트를 취할 때 녀석의 힘이 커진 걸까.
여러 가지 가정을 해봤지만 뚜렷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궁금증 하나는 풀렸다.
“그래서 만득이가 움직였던 거였어.”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녀석은 내 정신에 숨어 있던 혈종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던 건데 내가 잘못 파악하고 만득이의 반란이라 판단했다.
표류하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자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를 위해서 일해 주던 거였다니.
“정상참작을 해 줘야 하나.”
내가 좀 모질게 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미안해지는군.
다음에 보면 잘해 줘야겠다.
* * *
다음 날, 차를 몰고 윤희를 신성길드에 데려다주었다.
청와대에 가는 김에 데려다주는 거였는데, 괜히 했다. 가는 내내 윤희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고물차 좀 바꿔.”
“아직 잘 굴러가는데?”
“돈도 잘 벌면서 이 구린 차를 몰고 싶냐?”
“난 크게 상관없어서.”
괜히 새 차를 몰면 신경이 쓰일 거 같다. 나는 막 몰고 다니는 타입이라, 괜히 좋은 차를 사면 관리해 줘야 할 것 같고 이리저리 신경 쓸 게 많아질 거 같아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차가 얼마나 좋은데?
문콕 당해도 신경 안 쓰이고, 먼지로 더러워져도 그러려니 하고, 내가 과거로 돌아와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을 때 실수로 엑셀을 세게 밟았는데도 저속으로 주행해 준 녀석이다.
내가 늘어놓는 장점에 윤희가 폭발했다.
“아오! 내가 하나 사 줘? 그럼 그거 몰 거야?”
“사 주면 몰아야지.”
“나한테 용돈은 그렇게 잘 주면서 차 하나 바꾸는 게 아깝냐?”
“그것도 그러네.”
주변에서 하도 잔소리를 하니 고려해 봐야겠다. 새 거 사고 막 몰다가 망가지면 바꾸면 되니까. 그래도 버리긴 아까우니 이 차를 세컨카로 쓸까.
정작 써야 할 곳에 망설이고 쓰지 않아도 될 곳에 손이 큰 걸 보면 정상인의 삶을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윤희를 데려다주고 나는 청와대로 향했다.
각성자안보실에 도착하자 천명국이 날 납치하듯 대통령 집무실로 데려갔다.
대통령이 날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화려하게 저질렀더군. 아주 잘했어.”
“감사합니다.”
“···위험하진 않았나? 상대 전력이 엄청나던데.”
“별로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실은 내가 아니라 혈종이 저지른 살육이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손을 썼어도 비슷한 결과였을 거 같다.
이미 박영후에게 대략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을 테니 난 순순히 인정하는 걸 선택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콘스탄티나 스타닐라는 직접 전투 능력도 초인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12궁의 실력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우위에 속한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나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각자 한 수를 숨겨 두고 있을 테니까.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 항의를 하더군. 그래도 자기들 은인인데 보답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무슨 보답이죠?”
“한마디로 개수작이지.”
대통령이 이렇게 격하게 말할 줄 몰랐는데.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고 했겠지. 자기들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줘서 데려가려고.”
“그렇군요.”
“최준호 초인은 명색이 대한민국 소속인데! 필요할 때 철판 까는 건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그러면서 대통령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일본 내각을 성토했다.
하마터면 내가 붙들려서 일본의 애정 공세에 시달릴 뻔했단다. 날 눌러앉히기 위해 온갖 공작을 벌일 거라 말하는데, 어차피 내가 거기에 넘어갈 것도 아니고.
근데 대통령이나 천명국을 보면 내가 넘어갈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내가 일본에서 만족스러웠던 건 된장국밖에 없었는데.
음? 설마, 다양한 된장국으로 날 유혹했다면?
···이건 좀 위험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이건 대통령의 입장이고.
“저한테는 나쁠 게 없지 않습니까?”
“······!”
대통령과 천명국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의아한 눈으로 보자 대통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가 섭섭하게 군 거라도 있나? 응?”
“초인님, 저희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반영할 테니······.”
둘이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한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불만 없습니다. 그냥 일본 내각에서 챙겨 주면 저한테는 나쁠 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받아먹고 내빼도 되니까.
오해가 풀렸는지 둘이 안도한다.
“행여나 그런 말은 하지도 말게. 우리가 실수라도 한 줄 알았잖나.”
“그랬습니까.”
“그만큼 최준호라는 초인이 대한민국에 중요한 존재라는 걸세.”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난 현재도 무척 만족하고 있다. 말도 잘 통하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커버해 주고 내 편을 들어 주고.
하지만 엄연히 계약관계인 만큼 그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
내 가치가 올라갈수록 더 안달이 난다는 게 이세희의 조언이었다.
“계약에 충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거만으로 충분하네.”
“별말씀은 없으시네요?”
“어차피 다음 계약은 그 다음 대통령이 고민할 문제잖나. 난 은퇴해서 유유자적 휴식을 취할 테니 상관없는 일이지.”
그것도 그렇군.
* * *
최준호가 돌아갔다.
시선이 마주친 대통령과 천명국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속내는 없어 보였지?”
“예.”
“다행이군. 그나저나 내가 안 떨고 있었나?”
“평온을 잘 유지하셨습니다.”
“그렇군. 다행이야.”
대통령은 손을 들어 보였다. 애써 감춰왔던 걸 증명하듯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 실장이 보기에도 그런가? 각성자 시점에서 얘기해 보게.”
“이런 각성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일본에서 전해진 소식. 그리고 박영후의 보고는 천명국으로 하여금 두 눈과 귀가 멀쩡함에도 이상현상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게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성과란 말인가.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았다.
세계 초능력자의 날에 최준호가 초인 셋을 상대로 압도한 적 있다. 하지만 목숨을 건 대결까지 가지 않았기에 다른 초인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프란츠를 꺾은 걸로 십대초인 반열에 올랐을 거라 봤으니.
하지만 후쿠오카 참사로 불리는 사건은 그 선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가 거둔 성과를 보고 세계 최강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라 볼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대우를 하자니 불편하게 생각할 게 뻔하니 우리가 평소대로 대해야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걸로 한 가지는 분명해졌군. 절대 최준호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 돼. 만약 어긋나서 빌런이라도 되면, 후쿠오카 참사가 대한민국에 벌어질 수도 있어.”
그리 말한 대통령이 양손으로 천명국의 어깨를 짚었다.
“대통령님?”
“난 우리 천 실장만 믿겠네. 최준호를 책임져 줘!”
“예?”
보통 이런 걸 책임지는 건 대통령이 아니었나?
하지만 얼굴을 보니 책임질 생각이 1도 없어 보였다.
“자네의 수완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네.”
“······.”
갑자기 배가 아파 왔다.
* * *
청와대에서 면담을 마친 나는 정다현에게 연락했다.
내가 현재 훈련을 봐주고 있는 건 정다현과 이세희였는데, 둘과 대화를 나눈 끝에 번갈아 훈련을 도와주기로 말을 맞춰 놓았다.
한 명이 훈련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으면 넘어가는 걸로 하고.
이번 순서는 정다현이었다.
-가능해요! 퇴근하고 찾아갈게요!
내 이른 귀국에 정다현이 놀라워하면서 바로 훈련 제안에 응했다.
평소에는 그녀가 먼저 연락을 했지만 정반대가 된 이유는 일본행에서 얻은 게 있어서다.
그게 혈종 때문이란 게 웃을 수 없는 일이지.
이세희에게 연락하니 다음을 기약하면서도 나와 얘기했던 ‘고유 포스’의 상용화 가능성에 대해 높게 판단했다.
내가 흔적을 남기던 습관을 얘기했던 건데, 이걸 사업적으로 엮어 내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었다.
훈련장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다현이 도착했다. 준비운동을 하고 다가오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늘은 훈련은 조금 다르게 해 보려고 해. 내가 실험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
“어떤 건가요?”
“기프트 응용.”
만득이의 반란으로 잠깐 혈종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때, 혈종이 기프트를 활용하는 방식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오늘 정다현을 지도하면서 그 방법을 사용해 볼 생각이다.
“평소보다 더 고될 거야.”
“오히려 바라던 바에요.”
결연한 표정 위로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어떤 곤경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게 정다현이지.
검을 든 그녀가 기세를 감추지 않고 온전히 내게 집중력을 쏟았다.
레벨 7이 되면서 확실히 직감을 활용하는 폭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자신의 감각과 직감 사이에 혼란을 겪지 않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알게 되면서 공격을 막아내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상대 공격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없기에 정다현은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다현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서린 기뢰를 본 정다현이 뒤로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평소대로라면 닿지 않을 거리였지만 내 손을 떠난 기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여 정다현에게 작렬했다.
“악!”
비명과 함께 쓰러진 정다현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경악했다.
“어, 어떻게?”
“기뢰의 응용 버전이야.”
그동안 내가 기뢰를 사용하는 방식은 엄밀히 말해 저번 생에 혈종이 사용하던 방식을 베껴 왔다.
그런 혈종이 내가 사용하는 것을 봤는지 내 기본 베이스에 기뢰의 사정거리를 늘릴 수 있는 단초를 내어 줬다.
기뢰는 시전자의 신체에서 벗어나면 급격하게 위력을 잃는 기프트다. 그래서 근접전투 외에 효용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기뢰에 포스를 실어 보낼 수 있다면? 그 포스로 기뢰 위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포스 또한 내 일부에 속하고 기뢰는 포스로 변환되는 힘이기에 내 손을 떠나도 포스가 존재하면 위력이 줄어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점은 기뢰와 포스를 따로 분리하는 것이다. 둘을 따로 운용해서 하나에 실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기뢰를 시전하는 나도 의식적으로 분리해서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려면 굉장히 많은 실전을 거쳐야겠지.
내가 볼 때 제대로 손에 익으면 직접 손으로 발동한 기뢰와 비교해서 70~80% 위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방금은 위력이 제대로 안 실렸어.”
“그런 거 같아요.”
기뢰에 적중당했지만 정다현은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생각한 위력이었다면 오른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제 위력이 아니란 의미다.
“거리가 늘어났으니 내게 선택지가 무수히 많이 늘어났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선을 다해 ‘잘’ 피해야죠.”
“멋진 말이야. 그럼 잘 피해 봐.”
검을 세운 정다현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손을 뻗었다.
대련을 하면서 정다현은 팔이 두 번 부러지고, 어깨가 한 번 부서졌다.
평소보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칼날폭풍이 다수의 적을 몰살시키기 좋다면 원거리 기뢰는 지정한 한 명을 골라 죽이기 좋다.
앞으로 한 명만 죽일 때 주위를 초토화 시키지 않을 수 있겠군.
이런 게 친환경 기프트인가.
고맙다, 혈종. 네 덕에 좋은 무기를 하나 얻었다.
* * *
“아득한 기분이었어요. 평소에는 거리를 두면 조금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대결이 끝난 뒤, 정다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평소보다 더 엉망인 몰골이었지만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 제한이 없어지니 모든 것을 본능에 의존하게 되었어요. 제가 판단할 방향을 한쪽으로 강요당한 거죠. 여기에 오빠가 허초를 섞으면서 생각이 교란되고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지금 같은 결과가 나왔죠. 기프트를 이렇게 발전시키기가 어려운데, 정말 굉장해요.”
그러면서 정다현이 감탄한 눈으로 바라본다.
음, 이거 혈종한테 얻은 힌트로 발전시킨 건데.
···하긴.
단초는 혈종이 줬지만 어쩌겠는가, 완성한 건 나인 걸.
불만이면 튀어나와 보시든가.
그래봤자 만득이한테 소멸행이다.
아니, 이건 내 순수한 바람이겠지. 혈종의 등장은 내게 불확실성을 더한 셈이니까.
이 녀석을 어떻게 제거한다?
생각이 깊어 갈 때 정다현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고민 있으세요?”
“···어떻게 알았어?”
“오랫동안 봐 왔으니까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씀해 주시겠어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호의를 거절할 수 없지.
“하나는 아니고 여러 고민이 생겨나더니 머리가 아프네.”
“그렇군요. 고민 해소는 중요해요.”
“방법이 있어?”
“다른 곳에 몰두해서 잡념을 흩뜨리는 게 중요해요.”
고개를 끄덕이던 정다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봉사 활동을 해 보는 건 어떠세요?”
“봉사 활동?”
“네, 저번에 기부 얘기를 듣고 생각했던 거거든요. 오빠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도 좋아 보이고요. 이제껏 느낀 다른 종류의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고··· 아,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아니, 나쁘지 않은데?”
봉사 활동이라.
머리를 비울 수 있다면 나빠 보이지 않는다.
혈종과 내가 다른 점을 스스로 어필할 수도 있어 보이고.
혼자 가기 심심한데 버서커나 데리고 가야겠다.
녀석에게 부탁할 것도 있고.
“봉사라······.”
그리고 봉사라는 단어.
왠지 나와 잘 어울리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