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안산에 벌어진 빌런 대량 증발 사건.
무려 50명이 넘는 빌런의 실종 소식이 알려진 것은 안산에 암약하던 빌런 조직 ‘빅텐’이 납치했던 사람들이 풀려나면서다.
제보를 받은 즉시 공무원 헌터를 비롯한 경찰이 출동하여 현장을 통제하고 빌런전담반 소속 헌터들이 서울에서 현장에 합류했다.
현장을 본 분석관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 현장을 봐왔지만 이토록 깔끔한 증발 현장은 처음입니다.”
빅텐에 소속된 빌런들은 안산에 위치한 여러 다국적 조직들과 경쟁해온 곳이다. 실전 경험이 풍부해 레벨보다 위험도가 훨씬 크다는 게 분석관의 설명이었다.
하나하나가 민간인에게 재앙에 가까운 존재들. 하지만 현장에 남은 증거를 볼 때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학살당한 게 분명했다.
거론되는 이름도 화려했다. 버서커, 사형 집행인, 인형사, 검은 사신 등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빌런들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 성향을 볼 때 범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새로운 네임, 말소자(Eraser)가 생겨났다. 대한민국의 국가 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초대형 빌런의 등장이었다.
공장에 벌어진 진상의 일부가 밝혀진 건 리플레이(Replay) 기프트를 가진 지원부서 헌터가 오면서다.
“이,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에요. 아악!”
현장의 상황을 리플레이하던 그녀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실신했다.
두 시간 뒤, 정신을 차린 리플레이는 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
“저, 절대로 대적하면 안 돼요! 절대로!”
그녀는 몇 가지 단면만 보는 게 전부였다고 밝혔다. 이는 포스를 지배하는 영역, 레벨 8에 도달한 각성자만 벌일 수 있는 일이다.
리플레이는 여기에 한 가지 정보를 추가했다.
말소자는 말 그대로 순수 악.
마치 어린 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잠자리 날개를 뜯다가 몸통을 뜯어버린 것처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가한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리플레이를 대신해서 분석관이 말을 이었다.
“아마 말소자에게 이 습격은 일종의 유희이자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리플레이가 현장 상황을 볼 수 있도록 약간이나마 열어뒀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쫓으면 너희가 날 상대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보고서에 첨언하도록 할게요. 고생하셨어요.”
현장을 지켜보던 정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은 표정으로 공장 안을 지켜보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날이 강한 빌런들은 많아진다.
이래서는 빌런들의 기세가 강해질 뿐이다.
빌런을 제거하기 위해 신성 길드를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강대한 힘을 지닌 빌런들은 이 세상을 놀이터처럼 마음껏 헤집고 짓밟으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다.
“······.”
만약 최준호였다면 달랐을까.
거침없는 손속, 확고한 기준. 그라면 말소자가 남긴 경고를 무시했을까.
어쩌면 최준호라면 말소자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비공식 레벨 7인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정다현은 알 수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에서 나오는 자신감. 자기만의 확고한 기준. 세상의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그것이 최준호가 가진 매력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한심했다. 상대가 레벨 8의 빌런인 걸 아는 순간 추격을 포기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을 수 없으니까.
···라는 핑계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사무관님.”
정다현은 분석관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조사를 마무리하시고 시체를 수색하세요. 그리고 말소자라 부르기로 한 빌런의 수배를 시작하세요. 그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건 긁어모으고요.”
“예.”
“그리고 안산 시장과 관련된 내용도 보고로 올리세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해요.”
조사 도중 현장에 안산 부시장이 머물렀다는 증거가 나왔다.
“알겠습니다.”
*
얼마 전 내게 최종적으로 견책이 떨어졌다. 왕주열을 체포하고 뒤에 얽힌 빌런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했으나 보고 누락, 단독 행동, 증거 미확보 상사 체포 등등이 겹친 결과였다.
원래 더한 징계가 주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봤자 감봉 1개월이었다.
그래봤자 쥐꼬리를 토막내는 수준이었지만.
아침 일찍 출근하자 전날 밤샘 근무를 한 정다현이 피곤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준호 씨, 어제 잘 쉬셨어요?”
“예, 푹 쉬었습니다. 다현 씨는?”
“어제 출동 건이 있어서요. 조사하고 오느라 제대로 잠도 못잤어요.”
“그럼 점심에 능이 된장찌개 어떻습니까?”
“능이는 사랑이죠.”
직장에 입맛이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된 요즘이었다.
외근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타부서와 연계된 서류 업무를 하는데, 이 업무를 처리하는 건 무척 수월했다.
결국 서류를 검토하는 건 이상이 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직감을 활용해서 문제가 있는 것과 없는 걸 구분하면 된다. 가끔 문제 있는 서류가 나오지만 그게 없을 때는 순식간에 업무가 끝난다.
“어제 휴가는 즐거우셨어요?”
점심을 맛있게 먹던 중, 정다현의 물음에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예,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거라 나쁘지 않았습니다. 친구 동생이 많이 아파서 병문안을 갔죠.”
“아······.”
“그런 표정 안 지으셔도 됩니다. 희귀병이긴 해도 잘 해결될 것 같거든요.”
“정말 다행이네요.”
“친구도 다현 씨가 걱정해준 걸 알면 위로가 됐을 겁니다.”
“네.”
정다현이 왜 물어봤나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심각한 표정을 보고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람은 고민을 거듭하는 동물이다. 사색 속에서 답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찾기도 하는 만큼 생각하는 것은 좋다.
그나저나.
안산에서 벌인 일이 꽤 커졌다.
시체들을 다 치워서 꼬리를 잡히지 않는 건 성공했지만 말소자라니.
꽤 거창한 이름이었다.
어쩌면 레벨 8의 빌런이 등장했을 수도 있다는 말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당장 주변에서도 말소자의 등장이 어떤 정국의 변화를 일으킬지 걱정하는 걸로 가득했다.
이럴 때는 빅텐을 정리한 게 나라고 밝힐 수 없는 게 참 난감했다.
그 빌런이 사실 공무원 헌터라고, 정상인이라고 말하면 이 소란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텐데.
괜히 이걸로 대비책을 세운답시고 야근하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밝힐 수도 없고.
나는 대낮에 당당히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
과거로 돌아와 제정신이 된 내게 가족은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다.
나로 인해 받은 상처를 위로해주고 더 잘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냥 사고 치지 말고 하고 있는 일이나 열심히 해. 그럼 엄마 아빠도 좋아할 걸?”
윤희는 그리 말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님도, 눈앞에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는 여동생에게도 말이다.
내일 윤희는 신성 길드 시험을 보러 간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인 만큼 신성 길드는 시험을 보기 위해 3차에 달하는 오프라인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그걸 모두 통과하고 내일 실기 시험을 본다.
나는 녀석이 합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험 치고 돌아오는 걸 그냥 기다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내일 시험을 잘 보라고 뭔가를 준비해주고 싶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만들어주기도 하니까.”
나도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선물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마음을 굳힌 나는 윤희가 마지막 점검 수련을 하러 나갈 때 마트에 들려 준비물을 구매했다.
*
시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긴장을 동반한다. 그 긴장이 과도하다 보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과정에서 최윤희는 조금의 긴장도 느끼지 않았다.
시험에 대한 막연한 어려움이나 암담함을 느껴서가 아니다. 당장 내일 시험임에도 마치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를 앞둔 기분이다.
“이런 게··· 여유?”
다른 곳도 아닌 신성 길드 시험을 앞에 놓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이게 방심인가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 기저에는 그동안 오빠한테 굴려진 기억이 깔려 있었다.
“웬수긴 해도 실력 하난 확실해.”
머리에 어디 하나 나사가 풀려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여전히 공무원 헌터를 왜 하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본인이 그걸로 만족한다니 더 말할 거리가 없긴 했다.
아무튼 자신이 이렇게 여유를 갖게 된 건 웬수 덕이 확실했다.
본인이나 잘 챙겼으면 하지만 말해봤자 들을 양반도 아니고. 그런 점에서 옆에 정다현이 있어 챙겨줄 테니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왕이면 둘이 잘 됐으면 좋겠는데 쉽진 않겠지?”
대한민국 최고의 재능 중 하나인 정다현이었으니.
신성 길드에 나와 화제성이 조금 줄었지만 미모와 실력, 매력 어디 하나 떨어지는 것 없다보니 웬만한 걸그룹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그에 반해 나사 하나 빠진 오빠는 아무래도 좀······.
괜히 비교했다가 정다현한테 미안해졌다.
“실력은 괜찮으니 정신만 잡으면 가능성 있긴 한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자신이 너무 멀리까지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그 다음 생각은 백수에서 벗어나고 할 부분이었다.
늦게까지 남아봤자 무의미할 것 같아 짐을 정리한 최윤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 왔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니 평소와 다른 달콤한 냄새가 반겨줬다.
“왔어?”
“응. 근데 뭐해?”
이건··· 엿같은 냄새였다.
식탁으로 다가가자 오빠가 뭘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너 합격 기원 선물.”
시험 전날, 윤희는 오빠에게 초대형 빅엿을 선물받았다.
기분은··· 왠지 좋지 않았다.
*
윤희에게 합격 기원 선물을 한 뒤 다음 날 시험 장소까지 바래다주고 나는 근처 신성 그룹 본사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프런트로 향하자 단아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미소 지으며 물어왔다.
“이세희 총괄 운영팀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팀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안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사전에 약속되지 않으면 연락드리기 어렵습니다.”
“최준호가 왔다고 전달만 해주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해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워낙 많은지라.”
“그렇군요.”
“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정다현에게 이세희의 번호를 물어볼까 생각 안해본 건 아니었지만 세상의 모든 이별은 아름답지 않은 법이라 정다현에게 굳이 묻지 않았었다.
오늘은 돌아가고 연락처를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아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
나를 본 이가 흠칫하더니 황급히 주변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국가수호국에서 봤던 이세희의 경호원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총괄 운영팀장님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개인적인 용건입니다.”
“······.”
용건을 밝히지 않아서인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표정이 굳었다.
설마 저번에 양팔 한 번 부러뜨렸다고 그러는 건가.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미소를 지어보이자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내심 낙담한 난 조용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고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런트 직원에게 다가간 그가 얘기하자 직원이 인터폰을 들었고 한결 공손해진 표정으로 30분 뒤 미팅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순식간에 3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자 저번과 달리 수수한 화장에 동글이 안경을 쓴 이세희가 맞아줬다.
“어서 오세요, 준호 씨.”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내 사과에 이세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에는 미리 연락 좀 주세요. 최소한 준비할 시간은 줘야죠. 원래 이런 몰골로 사람 못 만나요.”
평소와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는데?
속내가 밖으로 나오자 이세희가 미소를 짓더니 내게 명함을 건네줬다.
그걸 받아 주머니에 넣자 이세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자,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죠? 혹시 저번에 절 막 다뤘던 게 갑자기 미안해져서?”
“그건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다현이랑 동갑이에요.”
정작 정다현과 여전히 존대를 주고받고 있는데.
하지만 부탁을 하러 온 상황이라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게 예의였다.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어.”
“무슨 거래요?”
“아는 사람 동생이 아파. 신성 병원에 입원시키고 싶어.”
“···신성 병원은 아버지가 통제하고 있는 곳이에요. 시간이 좀 걸려요.”
“당연히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냐. 급행료를 준비했어.”
나는 미리 준비해둔 샤벨 타이거 심장을 꺼내들었다.
“그건······.”
이세희의 눈이 커졌다.
유해 6단계 샤벨 타이거의 심장이다. 푸른 보석처럼 생긴 이것은 포스 집합체로 그 자체가 유용한 에너지원이다. 유해 6단계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나는 심장에 포스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심장 속에서 무질서하게 움직이던 포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손끝의 감각에 걸려드는 포스의 실타래를 풀고 가지런히 정돈하여 심장에 서린 포스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비유하자면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를 일렬로 재정비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격렬하던 들끓던 포스가 완전히 안정되자 심장은 푸른빛을 띤 보석이 되었다. 저번 생에 신용불량자보다 고약한 빌런 신세라서 먹고살기 위해 익혔던 가공법이다.
“저 그거 한 번 살펴볼게요.”
다급한 표정이 된 이세희가 손을 뻗자 내가 슬쩍 뒤로 가져갔다.
“자, 잠깐만요!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그리고 가공은 또 뭐고요. 왜 뒤로 빼요? 좀 보여주세요.”
이세희가 사탕 뺏긴 어린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내 팔을 잡고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