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확실히 미국이란 나라는 스케일이 다른 듯하다.
나 하나 죽이겠다고 핵까지 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아니,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가 안일한 걸지도 모르겠다.
반성한다.
빌런 하나를 죽이기 위해 핵을 쓴다, 이 각오는 오히려 본받아야 하는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치부해 버리다니.
과거로 돌아와 정상이 되면서 나도 많이 물렁해졌군.
상대가 저렇게 진심이니 나도 좀 더 독해질 필요가 있다.
“계속 연구해 봐.”
“뭐, 뭘?”
“나 죽일 연구.”
“…….”
이 졸라맨이 누굴 미친놈 보듯 바라 봐?
손을 들자 반사적으로 눈에 힘을 푼다.
“어차피 나에 대해 계속 조사할 거 아냐. 그 정보 쌓이면 대응 방법도 업데이트 될 테고. 그거 나한테 공유해라.”
“그걸 왜?”
다시 날 미친놈 보듯 바라본다.
참지 말고 한 대 칠까?
“그냥 궁금해서 그래. 너희가 어떻게 날 죽이려고 할지.”
그런다고 실제로 내가 죽을 일은 없지만.
이건 그냥 내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나도 좀 더 자극 받으려는 그런 거.
어차피 완전회복이 있는 한 나는 여벌의 목숨을 갖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공짜로 달라는 게 아냐.”
사실 공짜로 받을 생각이었다. 다른데 생각이 미치면서 제안을 바꿔 들기로 한 거지.
난 품속에서 장우위안을 죽이고 빼앗은 부스트를 꺼내들었다.
처음에는 그 정체를 알지 못하던 제임스 리드는 리그의 부스트란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걸 어떻게 준호가 갖고 있어?”
“출처까지 물어보진 말고.”
내가 태평문 쳐들어가서 다 쓸어버린 뒤 공교롭게 방문한 남궁기를 죽이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배를 탈취해서 돌아온 걸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제임스 리드의 표정을 보니 그걸 궁금해하는 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나한테 두들겨 맞은 통증 때문에 정작 다가오진 못했지만.
난 말에게 당근을 흔들 듯 부스트를 흔들어 보였다.
“날 도와주면 이것도 연구하게 해 주지.”
“주, 준호! 날 믿어! 지금까지 졸라 믿음 가게 행동했잖아!”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잠깐 손잡은 거지, 신뢰가 쌓인 척 은근슬쩍 말을 보태기는.
제임스 리드가 말하길, 리그의 부스트는 미국도 확보하지 못한 거란다.
레벨 7 각성자를 초인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부스트는 초인 대거 양산의 꿈이란다.
내가 볼 땐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낸 결과물이지만.
반응 보니 귀한 물건인 건 알았으니 몸값을 좀 높여야겠다.
“좀 더 보고.”
“나 졸라 실망.”
제임스 리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솔직히 그냥 건네주자니 아까웠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건 이 물건을 나 혼자 소화할 수 없는 물건이어서다.
내 휘하에 믿을 수 있는 연구진도 존재하지 않고. 때가 되면 신성길드와 함께 연구해서 결과를 공유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가과학마물연구소도 끌어들일까?
졸라맨을 여기에 끼워 넣는 건 미국이 리그와 가장 많이 충돌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이런 느낌?
이만한 걸 공짜로 넘겨줘 봤자 계속 탐욕만 드러낼 테니 나도 밀당을 할 생각이다.
겸사겸사 필요한 정보도 얻어 내고.
“빨리 받고 싶으면 류광철에 대한 정보를 줘 봐.”
북쪽으로 가서 마물을 하나하나 쳐 죽이며 찾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명색이 국가 소속 초인인데 그렇게 무식하게 돌진할 필요가 없지.
“류광철? 그게 누구야?”
“북쪽에 있는 초인. 알면서 자꾸 구라칠래? 한번 더 푸닥거리 할까?”
이 녀석의 결정적인 실책은 나한테 정보를 살살 긁어내려고 졸라맨을 자처한 것이다.
그런다고 스탠퍼드 박사 학위 딴 게 어디 사라지나. 대놓고 머리 좋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놓고 순진한 척 해봤자 안 넘어간다.
“…….”
입을 닫은 녀석은 눈알을 굴리다가 내 시선을 떼어 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니 졸라 무섭잖아. 살살 말해 줘.”
“그래서 할 거냐, 안 할 거냐.”
“할게. 근데 시간이 조금 걸려.”
“시간은 상관없어.”
빠져나갈 길을 다 막아 두니 거듭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정보가 도착할 때를 기다리면 되겠군. 예전이라면 무작정 돌격했을 텐데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들었다.
“졸라 마피아야.”
“자꾸 궁시렁거릴 거냐?”
한번 더 마피아라고 하면 러시안 룰렛이라도 해 버릴라.
확률이 낮다고?
내가 생각하는 러시안 룰렛은 총알이 전부 채워진 채로 하는 거였다.
* * *
제임스 리드가 보낸 요청이 미국까지 도달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인 관련 문제를 선결해서 처리하는 부통령 다니엘 로건은 첫 내용을 읽고 미소를 지었다.
“펜타에 이어 부스트까지. 마초맨이 금광을 캐고 있군.”
하지만 요청서 내용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은 굳어갔다.
자신의 선에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요청이 있어서다.
“테이머에 대한 정보라.”
테이머는 북한에 자리한 류광철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에서도 예의주시하는 초인으로 미국과 중국, 일본, 한국 사이에서 알맹이만 쏙쏙 빼먹는 인물이다.
몇 번이고 회유를 시도했지만 아예 합류할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자기만의 왕국을 세운 류광철은 교류를 하기에 부담스러운 상대기도 했다.
어쩌면 최준호가 이제야 안 게 용한 일이다.
“포기할 수밖에 없나.”
마물을 조종할 수 있다는 능력이 여전히 탐났다. 다른 형태로 옭아맬 수 없나 고민에 있었지만 최준호가 직접 냄새를 맡은 이상 직접적으로 제어할 수단이 없다.
하지만 테이머가 중요하다고 해도 최준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직 세계 최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짧은 시간 거둔 성과는 각국 수뇌부들이 그를 최강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당국 초인에게 최준호와 맞대응을 삼가라고 말하겠는가.
최근 태평문의 멸문 사건도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100% 최준호로 확신하고 있었다.
말소자 때와 비슷했다.
“가질 수 없다면 통 크게 내어 주는 것도 필요해요.”
색기가 묻어나오는 끈적한 음성에 부통령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정장 투피스를 차려입고 있음에도 폭발적인 볼륨을 드러낸 안나 크리스틴이 서 있었다.
잠깐이지만 고민이 싹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부통령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게. 그동안 더 아름다워졌군.”
“관리에 집중했거든요.”
그러면서 가까이 다가오자 팜므파탈의 아찔한 향이 전해졌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였으면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시만이 아닌 독을 품은 장미다.
한 번 덜미가 잡히면 영혼까지 빨아 먹힐 생각을 해야 한다.
이명도 서큐버스보다 독거미가 어울리는 거 같은데.
“앉으시게.”
부통령이 자리를 권했다.
안나 크리스틴이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자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며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최준호에 관련된 이야기죠?”
“정확히는 마초맨의 요청서지. 헤드 브레이커가 테이머의 정보를 필요로 한다네.”
“어차피 북한은 우리가 손이 닿기 힘든 곳이었어요. 지금 제임스가 친분을 쌓아 나가는 중이니 화끈한 정보 전달로 신뢰를 보여 주는 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군.”
과거처럼 세계가 좁다 하며 활개치던 시절이 아니다. 마물의 등장으로 영역은 극도로 축소되었고, 각성자의 수준이 높아지는 만큼 마물도 강해지고 있다.
강한 초인의 보유가 곧 국력이라 불리는 만큼 미국은 헤드 브레이커라는 초인을 대비하면서 어떻게든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이는 중이다.
반대하는 측도 있으나 그들도 최준호의 힘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걸 위해서 크리스틴 양의 역할이 중요하지.”
“물론이에요. 각오도 단단히 다졌어요.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해가 바뀌고 안나 크리스틴의 나이는 2에서 3으로 바뀌었다.
최준호의 나이 공격으로 엄청난 심적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스리며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 절대 명제를 세웠다.
나이는 피할 수 없지만 미모는 세월을 역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안나 크리스틴은 세월에 맞서며 자신의 미모에 성숙함을 더해 가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두 가지 매력은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조합이니까.
그동안 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화장법을 바꾸고 예쁜 근육 단련, 화법, 몸가짐 교정에 매진했다.
자존감 회복에 성공한 안나 크리스틴은 자신의 미모가 지금 이 순간 전성기에 올랐다고 자부했다.
“지금의 저는 벨루스와 붙어도 자신 있어요.”
“오, 그 전설의 공작원.”
“부통령님은 벨루스를 본 적 없으신가요?”
“호기심에 모든 걸 잃을 수 있으니 궁금해도 참았지.”
“현명한 선택이세요. 벨루스는 정말 치명적이거든요.”
리그의 전설적인 미인계 요원 벨루스는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절대매혹의 소유자다. 음지에 벨루스가 있다면 양지에는 안나 크리스틴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국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활동을 멈췄다.
그럼에도 벨루스가 남긴 성과가 대단하여 전설로 남아 있었다.
“믿겠네.”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안나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두 번의 실패를 안겨다 준 최준호의 존재는 어느 순간 목표가 되었다.
언제인가 게재되었던 황색 언론의 기사가 떠오른다.
된장찌개 vs 안나 크리스틴에서 된장찌개에 처참하게 패했던 자신의 모습을.
이제 그 굴욕을 갚아 줄 때다.
그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최준호가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겠어요.”
안나 크리스틴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선언했다.
* * *
대한민국 전역이 북진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이는 대기업, 대형길드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속한 기업, 길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영토의 확보는 언제나 이권을 동반한다. 이것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곳에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신성그룹도 마찬가지다.
오늘 이영문의 주재 아래 총회의가 열렸다.
그룹의 임원이 모인 자리에 참석한 이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는 말답게 북진 정책의 필요성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 발표하는 미래기획실장이 그러했다.
“북진이 언급되면 항상 나오는 비판이 남은 국토 회복 요구지만 현재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평야입니다.”
식량 주권이야 말로 외국에 휘둘리지 않을 기본 조건 중 조건이다.
정부가 북진 거점으로 삼는 곳은 개성이며, 이곳에서 북진을 시작하여 연백, 재령, 평양 평야를 수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곳은 북한 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며, 이곳을 손에 넣기만 하면 대한민국의 국력은 급속도로 성장할 발판이 마련된다.
더 많은 식량은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고, 이는 인적 자원 확보를 의미한다.
“예전이라면 이곳을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망상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부 자체가 동원할 수 있는 인원에 한계가 있고, 길드들이 그 제안에 응하는 비율이 높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발표하던 미래기획실장이 슬쩍 이세희를 본다.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이다.
“초인 최준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한꺼번에 시선이 모여든다. 수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세희가 최준호와 좋은 인연을 맺고 얻은 성과는 실로 눈부셨다.
특히 빅뱅 시리즈의 세계적인 대성공은 외부에서 신성그룹의 역량을 몇 배 상승시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영문이 동조했다.
“정부 입장에서 자신감이 생겼다는 이야기겠지.”
“예, 맞습니다. 실제로 홀로 해낼 역량을 갖췄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초인 하나로 가능한가?”
“단독으로 플러스 단계 마물을 사냥할 수 있는 유일한 초인으로, 그 가치는 감히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도 측정은 해야지.”
“예, 죄송합니다. 사실 터무니없는 금액이라 볼 수 있어서, 기획실 내부에서 판단하기로 최준호 초인의 몸값은 최소 1경(1,0,000,000,000,000,000)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
터무니없는 금액에 회의실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세희도 어마어마한 가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이영문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우리가 발을 어떻게 들이느냐가 관건이겠어.”
“정부 입장에서는 최대한 독식하려들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같이 피를 흘리겠다는 결의를 보여야 참여 시켜 주겠지.”
그게 아니라면 조금도 양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형길드의 힘을 줄이고 싶어 한다.
이 기회가 정부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이영문의 시선이 이세희에게 향했다.
“이 팀장의 생각은 어떻지?”
“당연히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래?”
“네. 정부에서 북진을 거론하는 건 으레 하던 얘기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최준호 초인은 현 시점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저는 정부도 좋지만 최준호 초인의 추천을 얻어 내어 합류하는 방향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큰 사업에서 어떨 땐 인연으로 터무니없이 쉽게 성공할 때도 있는 법이지.”
정부가 강경하더라도 최준호의 입김이 닿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네게 모든 걸 맡기겠다.”
“제 모든 걸 걸고 성공으로 이끌겠습니다.”
“책임은 질 수 있고?”
“네.”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하자, 임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이영문이 피식 웃었다.
“좋다, 북진에 관한 모든 건 이세희 팀장에게 맡기겠다. 그룹의 총력을 기울여도 좋다.”
* * *
졸라맨이 말하길, 펜타의 개량형을 만드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거라 말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주구장창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 없어 나는 밀려 있던 숙제를 하기로 했다.
바로 천명국의 기프트를 알려 주는 것이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
아직도 천명국을 볼 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저번 생의 경험으로 나는 천명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시도한 대타협으로 인해 쫓기는 삶을 살아야 했고, 한국을 떠나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천명국을 만나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유능한 사람이 내 곁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진세정은 조금 과장해서 그걸 축복이라고 말했다.
당장 내 주변만 해도 정다현, 이세희, 정주호, 천명국, 진세정이 있고 최근에 졸라맨이 추가되었고, 죽었지만 하트워커 김종현도 유능한 인재였다.
멍청한 놈은 살인충동을 불러일으키지만 유능한 인재는 일을 술술 풀리게 만든다.
내 앞에서 당당하게 악플러임을 밝힌 진세정을 제지하지 못하는 것도 유능한 인재여서다.
난 천명국의 일처리를 신뢰하기에 그가 더 강해지는 걸 원했다.
얼마나 좋은가. 심장 근처에 작은 구멍 하나 내고 내게 내재된 기프트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게.
내가 제안하면 당연히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보인 반응은 내 생각과 달랐다.
“저는 못 합니다!”
“많이도 아닌데요. 작은 구멍 하나입니다.”
“저, 저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를 벗어난다.
음, 기프트를 알아내는 방법이 그렇게 충격인가.
이 좋은 걸 거절한다고?
그래서인지 더더욱 해 주고 싶어졌다.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옆에서 지켜보던 대통령이 한마디 보탰다.
“그런 과격한 방법일 줄 몰랐군.”
“과격해 보입니까?”
“심장 근처에 구멍 뚫겠다는데 그 반응은 당연하지.”
“그렇군요.”
그냥 손가락 한마디만 심장 주변에 박아 넣으면 되는 건데.
잽싸게 회복제를 뿌리면 이틀 정도 뻐근한 통증만 느껴질 뿐이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그냥 마취 없이 복강경 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걸 어떻게 구슬린다? 그러고 보니 늦장가를 갔다고 했었나. 신혼의 단물이 빠질 때로군.
갑자기 설득할 방법이 생각난다.
유부남인 걸 공략하면 된다.
마침 내 주변에 자칭 유부남 심리학 마스터가 있다.
“방법이 있습니다.”
“있다고?”
“예.”
내 주변에는 열과 성의를 다해 조언해 줄 유부남이 있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날 도와줄 것이다.
유부남의 정체는 버서커였다.
나-유부남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톡을 보내자마자 숫자가 사라졌고 곧이어 버서커의 유부남 심리학 강의가 시작되었다.
* * *
“…….”
집으로 향하는 천명국은 가슴이 벌렁거리는 걸 느꼈다.
설마 했지만 진짜로 심장에 구멍을 뚫으려고 할 줄이야.
천명국은 최준호의 기프트에 대해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다.
상대의 기프트를 빼앗는 건지 복사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걸 가져올 수 있다. 그걸로 여러 개의 기프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그가 보유한 기프트는 본래 주인이 있는 것일 테지.
각성자가 되기 전 과거가 백지처럼 새하얀 최준호가 어떻게 그런 기프트를 보유하고 있는 건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분명 숫자가 늘어나면 폭주를 일으킬 텐데, 괜찮다니.”
보통 듀얼 기프트만 보유해도 어긋남이 발생한다.
기프트를 받아들이는 최준호의 그릇이 얼마나 큰 건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니, 이미 기프트 숫자가 많아져서 정신이 이상한 건가.
기회를 보다가 한번 조언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포기하는 게 좋겠지.”
기프트는 천명국이 오랫동안 소망해 온 것이다. 하지만 기프트의 인연은 끝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아쉬웠다.
인연이 아니겠거니 하고 포기했는데 그 길이 열린다고 해서 기뻐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일 줄이야.
집에 도착한 천명국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아빠!”
도도도 달려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안겨 들었다.
올해 4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천명국의 위안이자 빛이었다.
한동안 딸과 해후를 나누던 천명국은 딸의 손에 낯선 장난감이 들린 걸 보았다.
“그래, 내 딸. 그건 뭐니?”
“저기 잘생긴 삼촌이 사줬어요!”
“……!”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천명국은 최준호가 손을 드는 걸 보고 기겁했다.
저, 저 악마 자식이 왜 여기에?
설마 여기까지 기프트 탐색을 권유하러 왔단 말인가.
“지아야, 들어가 있어.”
“우웅, 안 들어가면 안 돼? 잘생긴 삼촌이랑 놀고 싶은데…….”
벌써 딸까지 넘어간 건가.
천명국의 마음속에 경계심이 몇 단계 더 상승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대로 안 들어 보고 가셔서요. 설득하러 왔습니다.”
“…제대로 검증된 방법이 아닌 이상 할 생각이 없습니다.”
설마 이런 미친 방법을 사용해 본 건 아닐 테지.
하지만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았다.
“검증된 방법인데요? 이걸로 버서커가 기프트를 개방했고, 제 동생도 기프트 개방을 위해 준비 중입니다.”
“예? 버서커가 기프트까지 개방했던 겁니까?”
“아, 모르셨구나. 좋은 걸로 개방했습니다.”
“…….”
덕분에 재미도 봤다고 중얼거리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버서커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했다.
그나저나.
버서커도 그렇고 친동생도 했다면 괜찮은 방법이었던 건가.
최준호가 엉겨드는 딸을 안아 든다.
딸아, 아직 안 된다. 가슴에 배신감이 번져 가는 와중에 최준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건 이해합니다. 평범한 방법은 아니니까요.”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천 실장님이 제게 큰 도움이 되니까요. 전 제가 더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주변 사람들의 역량 상승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
가슴이 간질거렸다. 곧 뚫릴 거라 그런 건 아닐 거다. 이 막나가는 미친 녀석이 적어도 자기 생각을 해 준다는 사실이 퍽 감동이라 그랬다.
순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끌리는 게 사실입니다.”
“호의는 호의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혜택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혜택?”
그때였다.
최준호는 다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의사를 전달해 왔다.
[사모님에게 천 실장님이 중요한 시기라 얘기해서 혼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중요한 시기라니 애를 데리고 친정에 가 계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천명국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물론 이틀에 불과하다. 하지만 천금 같은 시간임이 분명했다. 이틀이면 집에서 오랜만에 혼술을 할 수도 있고, 마음껏 풀어져서 침대에 뒹굴거릴 수도 있으며 밀린 게임을 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
머릿속에서 의지가 전달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최준호가 준비한 선물 보따리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제가 사모님에게 천 실장님이 필요한 시간이 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따님을 못 봐서 아쉽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개인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 한 달?
물론 딸을 못 보는 건 아쉽다.
하지만 한 달, 무려 한 달이다.
이 시간이면 게임 한 개 아니, 알뜰살뜰 잘 쓰면 여러 개를 진득하게 해서 엔딩을 볼 수도 있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 총각 시절 취미였던 호캉스도 갈 수 있다.
최준호는 악마다.
한 달의 자유시간은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풍족한 개인시간이다.
누구냐. 누가 이 평범한 유부남의 심리를 낱낱이 꿰고 이중삼중 덫을 깔아 놓은 거냐.
전부 자신을 낚기 위한 장치임을 알았지만 결국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 하겠습니다. 제발 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최고의 기프트를 찾아보죠.”
눈앞에서 악마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