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알아차린 오종엽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매가 약이라더니, 첫 만남이 큰 역할을 했다. 역시 법보다 주먹, 주먹보다 공포였다.
“앞으로 편하게 부르라고, 친구!”
그리곤 슬쩍 나타나 넉살 좋게 웃어 보인다. 미워하기 힘든 매력은 여전하다 싶었다.
오종엽은 첫 출근임에도 국가수호국에 녹아드는 수완을 보였다. 저번 생에 내가 봤던 녀석도 빌런으로서 드물게 날이 서 있지 않고 둥글둥글했다.
단지 고된 환경이 날이 서게 만들었지. 그리 생각하면 주위 환경이 내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정신을 찾으니 손속에 사정을 두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미친 것과 미치지 않은 것의 차이는 어쩌면 이게 아닐까?
인사를 나눈 뒤 오종엽이 은근히 내 옆에 서는 터라 떼어내길 포기하고 국가수호국을 안내해줬다. 구내식당이 맛있다며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면 사회의 따뜻한 밥에 감탄하던 내 모습 같았다.
설마, 얘도 회귀한 건 아니겠지.
“······.”
졸지에 홀로 남은 정다현이 엉거주춤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따로 먹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국장실로 불려갔다.
“둘이 친구 사이라며?”
“예, 맞습니다. 제가 준호한테 신세를 졌습니다.”
“최준호가 우리 국가수호국 에이스지. 아주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 옆에 있으면 배울 게 많을 거야. 대신 이상한 건 닮지 말고.”
“예!”
“첫 출근인데 적응력이 좋다고 들었어. 기대하고 있으니 앞으로 잘해보자.”
“예! 국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근데 하나 질문 있습니다.”
“뭔데?”
“저는 7급이고 준호는 9급인데 계속 편하게 대하는 게 맞습니까?”
이 녀석,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구나. 날 보며 슬쩍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의기양양했지만 정작 정주호에게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존대라도 받으려고? 가능하면 해보던가.”
“예?”
“불만이면 실력으로 교육시키고 오라고. 여기 실력 위주야.”
정주호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근데, 되겠어? 출근 첫날 실종된 공무원 헌터가 있다는 괴담이 생기는 것도 재밌긴 하겠네.”
“······.”
날 보는 오종엽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얘가 섭섭할 거 같아 한 마디 보탰다.
“자꾸 깐족대는데 교육 한 번 시킬까요?”
“···저 인생에 처음으로 광명을 찾았습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십쇼, 국장님.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충성은 국가한테 바치는 거고.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 그러니 우리 폭탄은 피해가자고. 쉽게 넘어갈 건 넘어가고. 알았지?”
“예! 국장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래그래.”
둘이 왜 의기투합하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통하는 주제라도 있나?
용건을 마치고 우리 둘이 국장실로 나오자 정다현이 내게 다가오다 오종엽을 보고 멈칫했다.
“사무관님!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반가워요, 종엽 씨.”
“오래 전부터 사무관님의 명성은 자주 들어왔습니다. 역시 빛나는 미모만큼이나 상냥한 성격이십니다. 제 목숨도 구해주셨는데 언제 저와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 한 번······.”
“괜찮아요.”
“······.”
단칼에 거절당한 오종엽이 비틀거렸다. 차였군, 쯧쯧.
대수롭지 않게 한 남자의 순정을 짓밟은 정다현이 날 보며 말했다.
“준호 씨, 대외협력관리국 건으로 검토할 게 있는데 서류 좀 준비해주겠어요?”
“준비하겠습니다.”
“10분 뒤 미팅 룸에서 봐요.”
“네.”
나는 옆에서 좌절하는 오종엽을 보며 혀를 찼다.
“너 모쏠이냐? 여자 그렇게 꼬시는 거 아니다.”
“······!”
오종엽이 다시 한 번 무너졌다.
*
오종엽의 동생 오종수는 올해 스무 살이 되었지만 겉모습만 보면 중학생으로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 자기가 걱정할까봐 새벽에 일어나서 홀로 끙끙 앓았었다고 말할 땐 오종엽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하지만 신성 병원 입원 이후 눈에 띄게 차도가 좋아지고 있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종수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형. 저희 형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절 치료받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네 삼촌에게 진 신세를 갚은 거니 갚을 필요 없어.”
“삼촌이요? 형은 어머니라고 하시던데.”
“그래, 어머니.”
내 수긍에 오종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몸은 어때?”
“이제 아프지 않아요.”
“신성 병원은 신약도 많고 명의도 많으니 나을 수 있을 거다.”
“네,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그동안 형한테 폐만 끼쳤거든요. 얼른 나아서 형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짐은 무슨. 가족끼리 당연한 거지.”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어. 난 형 덕분에 살아있는 거야. 아! 준호 형 덕분이기도 해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그래.”
“종수야, 잘했어. 쟤 은근히 속 좁아서 언급 안했으면 마음에 담아뒀을 걸.”
그렇게 말을 하는 오종엽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번 생에 오종엽이 빅텐에 들어가고도 오종수는 끝내 목숨을 잃는다. 그것이 자신의 우유부단함이라 탓한 오종엽은 세상에 분노를 돌려 빌런이 되었다.
이번 생에서는 오종수가 건강하게 회복될 테니 오종엽이 엇나갈 일도 없을 것이다.
빌런이었던 녀석으로 빌런을 잡는다, 참 획기적인 방법이다.
“우리 형이 준호 형 칭찬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요?”
“야, 너 무슨 소리야.”
“에이, 부끄러워하지 마. 준호 형이 도와줬을 때 고맙다고 평생 갚겠다고 하면서 울었잖아.”
“야야.”
“우리 형, 절 지켜주려고 강한 척 하느라 감정 표현이 서툴러요. 틱틱 말을 해도 속마음은 그런 게 아니니 형이 귀엽게 봐주세요.”
난 오종엽을 바라봤다. 녀석은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음, 내가 본 오종엽은 좋게 표현하면 거칠게 자랐고 나쁘게 말하면 험상궂다. 자신감이나 넉살은 일품이어서 상쇄가 되긴 했지.
그래봤자 현실은 모쏠이었지만.
“···근데 귀엽진 않아.”
“좀 그렇죠? 사실 저도 징그러워요.”
“와, 가만히 있는 사람 제대로 두들기네. 그만 패. 더 맞다가 죽겠다.”
“그만할까요?”
“더 해도 돼. 쟤 맷집 좋아.”
내 말이 뭐가 재밌는지 오종수가 환하게 웃었다.
“몰라, 난 화장실 간다.”
오종엽이 도망치듯 병실을 벗어나자 오종수가 날 빤히 바라봤다.
“만약에요, 제가 다 나으면 전 형처럼 되고 싶어요.”
“나?”
“네, 준호 형이요. 우리 형이 말해줬거든요. 준호 형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헌터라고. 그리고 빌런과 마물로부터 세상을 수호해준다고. 저도 건강해져서 각성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형처럼 빌런과 마물로부터 세상을 수호하는 헌터가 될 거예요.”
“음.”
“가능할까요?”
“이래 보여도 난 꽤 훌륭한 헌터야. 내 손에 잡힌 빌런만 수백 명이지.”
“우와!”
그리고 그 빌런이 전부 불구가 되었다.
“너도 할 수 있을 거다. 꼭 낫자.”
“네, 형!”
“그래, 나처럼 되렴.”
누군가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 싫지 않은 기분이다.
잠시 후 오종엽이 돌아오자 우리는 돌아가기로 했다.
“종종 올게.”
“네, 형! 안녕히 가세요!”
손을 모아 배꼽 인사하는 오종수의 배웅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너랑 다르게 동생이 착하네.”
“야, 나도 착하거든.”
가당치도 않은 말에 난 코웃음쳤다.
“응, 빅텐 스카웃 대상자.”
“야야! 그거 딴 데서 말하지 마! 어? 진짜 말하면 안 돼. 나 좀 살려주라! 국가수호국 엄청 마음 드는데!”
“말 안 해.”
“진짜지? 엉?”
안색이 하얗게 질린 녀석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
“맛있어요!”
된장전골을 맛본 정다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요리하는 입장에서 저런 반응만큼 흐뭇한 게 없다.
옆에서 소고기를 흡입하던 윤희도 정다현의 반응에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국물을 먹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세상에 처음 등장한 내 생존 요리가 드디어 인정받는군.
“어떻게 만든 거예요?”
“비법은 아울 보어입니다.”
유해 4단계 마물인 아울 보어는 깊은 풍미를 자랑하는 최고의 재료다.
등급보다 사냥하기 까다로워서 선호 받는 사냥감은 아니라 식재료가 무척 귀한 게 함정이었지만.
사실 제대로 맛을 우려내려면 아울 보어의 머리를 통째로 넣어야 하는데, 같이 먹던 사람들이 전부 기겁하더라.
아울 보어의 눈동자가 포스에 반응하다 보니 먹을 때마다 눈동자가 움직여서 마주치거든.
“아울 보어? 그거 마물이잖아.”
경악하는 윤희와 달리 정다현은 ‘역시······.’라면서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독기를 제거한 마물의 고기와 부산물은 훌륭한 미식 재료이자 영양 공급원이지.”
“몰랐어요. 아울 보어가 이런 맛일 줄은.”
“다행입니다.”
즐거운 식사가 이루어지면서 정다현은 윤희에게 신성 길드 합격을 축하해주며 어떻게 적응을 해야 할지 조언을 해줬다.
나로서도 새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여태까지 내가 봐온 정다현은 5급 사무관이었다면 지금은 신성 길드 출신의 모습으로 보였다.
윤희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에 감사하면서 다른 조언을 구했다.
“레이드에서 가장 주의해야 되는 건 뭘까요?”
“빌런이야.”
“네? 방심이나 기습, 이런 게 아니고요?”
정다현이 고개를 저었다.
“마물 사냥은 목숨을 건 혈투긴 하지만 여러 사람이 유기적으로 대응하면 위험은 최소화하고 위력은 극대화할 수 있어. 신성 길드는 그 부분 대응에 세계 최고 수준이고. 하지만 빌런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순간을 노려서 습격해와.”
마물을 사냥하던 레이드 팀이 빌런에게 습격당하고 실종되는 건 흔하디 흔한 일이다.
특히 인원이 모자란 소규모 길드는 사냥 후 부산물을 지키는 걸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고, 내로라하는 대형 길드 레이드 팀도 빌런에게 습격당해 장비를 빼앗기고 죽거나 사로잡혀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럼 빌런도 상대할 줄 알아야겠네요.”
“마물하고 빌런은 다른 법이니 익혀두면 좋아.”
조용히 듣고 있던 내가 나섰다.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쌍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어, 준호 씨······.”
“오빠가?”
“내 전문 분야잖아.”
빌런이란 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레이드에서 일단 수상하게 보이는 사람은 99.9%로 빌런이다. 그러니 모르는 얼굴을 보면 먼저 습격해서 기선을 제압하면 99.9%의 확률로 예방이 가능하다. 특히 다리부터 부러뜨려서 기동성을 상실시키면 변수가 생겨도 안전한 후퇴가 가능하다.
언제나 가장 확실한 정답은 죽이는 거고.
윤희가 솔깃한 표정이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오빠가 체포한 빌런이 200명이 넘으니까. 내가 전문가를 옆에 두고 있었잖아? 오빠한테 배우면 되겠······.”
“잠깐만요!”
정다현이 어딘가 급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된장 전골을 많이 먹긴 했다.
“왜 그러세요, 언니?”
“물론 준호 씨가 전문가긴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있고, 이제 막 길드에 들어간 상황이기도 하잖아. 그러니 적응이 바쁘기도 하고.”
“그렇죠?”
“그러니 일단 적응에 초점을 두고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게.”
“진짜요? 언니가요?”
“응, 내가.”
“다현 씨,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번거로우실 텐데.”
“괜찮아요. 제가 해야죠. 꼭 제가 해야만 해요.”
결연하기까지 한 모습에 뭐라 더 말하기가 어려웠다.
“잘 부탁해요, 언니!”
“응, 나만 믿어. 윤희 널 내가 꼭 키워줄게.”
그러면서 정다현이 날 힐끔거렸다.
*
식사를 마친 뒤 최준호가 잠시 집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정다현이 윤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나선 건 아니지?”
“네? 아뇨! 저는 완전 좋은데요.”
“다행이다.”
“근데 오빠를 막은 이유가 있어요?”
정다현이 흠칫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챘어?”
“네, 대놓고 막던데요.”
“그게······.”
말끝을 흐린 정다현은 최준호가 나간 문을 힐끔 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준호 씨 손이 좀 거칠잖아.”
“아! 실제로 좀 그래요? 많이? 안 그래도 기사가 엄청 많이 뜨고 있어서요.”
“으응?”
괜히 벌집을 건드린 걸까.
정다현은 자신이 불편한 진실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줘요.”
“윤희 생각 이상으로 좀··· 거칠어.”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언니가 옆에 있잖아요. 오빠가 중간이 없는 건 저도 알거든요.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건 언니가 있어서에요. 옆에서 지켜봐주세요. 부탁드릴게요.”
“······.”
최준호의 동생의 말이어서 그런 걸까. 그 의미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받는 믿음이란 게 이렇게 달콤한 것일 줄은 몰랐다.
이걸 위해 공무원 헌터로 이직했던 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초심을 잊고 일에 찌들어 있었나보다.
“믿어.”
“네! 그럼 빌런 대처법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씩씩한 윤희의 대답에 정다현이 미소지었다.
“신성 길드에 포스 발출형 단검이 있어. 샷 시리즈라고.”
“아! 저도 알아요.”
“그걸 받고 빌런을 보면 다리부터 잘라버려.”
“네?”
설마 다리를 노리는 이유를 모르는 건가?
의아했지만 정다현은 좀 더 풀어서 설명했다.
“다리가 잘리면 기동력이 상실되거든.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야.”
“아아, 그렇구나.”
“그리고 사냥 도중 접근하는 사람 99%는 빌런이거든. 아무 말 없이 접근하면 빌런이라 생각하고 먼저 잘라버려. 다리가 힘들면 팔도 좋아. 균형이 흐트러져서 무기 다루기가 어려워지거든.”
“만약 빌런이 아니면요?”
“말없이 접근한 사람 잘못이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그리고 긴급수송을 쓰면 돼. 그럼 잘린 부위는 붙일 수 있어. 아! 목은 붙일 수 있지만 죽으니까 유념하고.”
최준호는 먼저 기습해서 죽여 버리거나 목을 날려버리라고 하겠지.
그에 비하면 이 얼마나 온화한 대처 방법인가.
“언니, 제가 갑자기 생각난 사자성어가 있어요. 유유상종이라고.”
“갑자기 유유상종은 왜?”
“언니가 오빠더러 손속이 잔인하다고 하면 안될 것 같아서요. 제가 볼 땐 거의 막상막하······.”
“내, 내가?”
정다현은 큰 충격을 받았다.
*
정다현이 돌아가고 난 뒤, 날 보는 윤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다현 언니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다 오빠 탓이야. 책임져.”
“뭐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다현 언니가 얼마나 바른 사람인데 부사수 하나 잘못 둬서 저렇게··· 하.”
“그렇게 말해봤자 난 몰라.”
“알면 뭘 할 수나 있고?”
“시도는 할 수 있지.”
내 대답에 윤희의 표정이 구겨졌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저러는 건지, 억울했다. 설마 정다현을 데려와서 된장전골을 먹도록 유도한 게 걸린 건가?
아니면 아울 보어의 머리를 안 넣어서? 어쩌면 내가 정다현과 윤희의 미각을 얕봤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트윈 아울 보어 머리를 구해서······.”
“됐어. 오빠가 신경 쓰면 더 문제야. 아무튼, 오빠 때문에 다현 언니가 저리 됐으니 책임져. 아, 근데 난 세희 언니도 좋은데.”
아울 보어 머리 이야기가 아니었나보다.
“책임은 지금도 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근데 이세희는 거기서 왜 나와?”
“아, 몰라. 오빠는 모르는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이세희는 언제 친해졌냐?”
“최종 면접 때 보니 얘기가 잘 통하던데? 오빠 알던 것도 사실이더라? 오빠 이름 언급하면서 엄청 조심하던데 실례 저지른 건 아니지?”
정확히는 저지를 뻔했다는 말이 옳겠지. 걔도 수작 부리려 했으니 피장파장이다.
“안 저질렀어.”
“그럼 다행이고. 난 처음에 범접할 수 없는 재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탈하고 포용력이 넓어. 좀 계산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장점이지. 그리고 예쁘잖아! 진짜 주변에 다현 언니도 있고 세희 언니도 있고. 완전 눈호강 하는 듯!”
“······.”
“왜?”
난 대답 대신 윤희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깨끗했다. 행여나 이세희가 기프트를 사용했나 싶던 의심이 사라졌다.
“아, 뭐야! 머리 만지지마!”
“이세희랑 친하게 지내는 건 상관없는데 조심은 해라. 정신 계열 기프트 가진 여자야.”
난 윤희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의도로 말했다.
“어, 사람이랑 친해질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던데? 얼마 전에 임자 만난 이후로 자제 중이래. 어차피 본인 매력으로 호감 살 수 있다고. 원래 그런 말하면 재수 없어야 하는데 세희 언니가 말하니까 자연스럽더라. 어떻게 당당하게 잘난 척 하는데 멋있을 수가 있지? 어, 근데 그 임자가 설마 오빠는 아니지?”
“아무튼 조심해라.”
“아니, 나 여자 안 좋아한다고! 나 남자 좋아하거든?”
“그래. 믿어.”
“후! 내가 왜 이런 것까지 해명해야 되는 거야.”
“믿는다니까?”
욕 좀 먹었지만 이걸로 경각심을 심어줬다면 됐다. 윤희 취향이 정상인 것도 들었으니 그 부분도 짚고 넘어갔다.
“만약이지만 남자 사귀게 되면 나한테 소개시켜주고.”
“왜, 괜찮은 사람인가 보게?”
“그래야지.”
윤희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빌런 중에 여자를 꼬시는데 도가 튼 녀석들도 간혹 있다. 그것도 아니면 잘 나가는 여자 헌터를 꼬셔 신세 피려는 바람둥이도 있고.
세상은 넓고 죽일 놈은 많다지만 바람둥이를 죽여본 적은 없다.
하지만 여동생 문제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이상한 녀석이면 조용히 타일러보고 만약 먹히지 않으면 처리하는 게 좋겠지.
그래도 나도 오빠라서 윤희가 기왕이면 괜찮은 녀석을 만나면 좋겠다.
어떤 게 충족되어야 좋은 녀석인지 기준을 세워놔야 되나? 우선 자기 여자를 지킬 수 있어야 하니 내 공격을 세 번 정도 막아내는 실력이면 괜찮지 않을까?
으음.
생각해봤는데 이러면 몇 명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윤희 신랑감 후보 나이 평균이 50대로 뛸 것 같고. 아무래도 실력보다 사고방식을 봐야겠다. 지금의 나라면 상대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이럴 때 브레인워싱이 아까웠다. 좀 더 정교하게 다룰 수 있으면 백치로 만들지 않고 정보를 뽑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 왜 처가에 허락받으러 갈 때 술 먹이는 거랑 비슷한 거다. 속마음 꺼내는 건 같지 않나?
“실력보다 중요한 게 인성이야, 인성. 제정신 박힌 놈으로 데려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미쳐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부터 물어봐줄래?”
“가능성 없는 거냐? 하긴, 성격이 좀 더럽긴 하지.”
“이 웬수가 뚜껑 열리게 하네?”
윤희가 표정을 구겼다.
*
그로부터 며칠 후.
국가수호국은 여느 때와 같이 평온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정주호가 모든 인원을 소집하기 전까진.
“말소자의 정보를 얻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말소자 체포 작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