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양해를 구한 천명국은 머리를 부여잡고 두통을 호소했다. 저 증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천명국이 가진 기프트의 개방 징조였다.
시뮬레이션은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미래의 상황을 그리는 기프트다.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얻은 정보로 자연스럽게 미래 상황을 그렸던 거겠지.
어떨 땐 예지보다 더 까다로운 기프트가 시뮬레이션이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활용하다 보니 더 다양한 변수에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지.
저 기프트에 내가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하다.
아니, 내가 아니라 혈종이군.
근데 반응이 좀 과한 거 같은데? 난 딱히 스트레스 준 적 없는 거 같은데, 최근에 다른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징조가 보인다는 건 좋은 일이지.
다 내 덕이다.
“축하드립니다.”
천명국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지금 누구 때문에 두통을 겪고 있는 건데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프트 개방의 전조라 그런 겁니다. 원래 괴로운 포인트를 지속적으로 자극받아야 개방이 빨라지니까요. 스트레스라 생각하지 말고 기프트를 개방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속이 편해질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주고 계십니다.”
“제가요?”
“예, 초인님입니다.”
내가 천명국한테 무슨 스트레스를 줬더라?
금시초문인데.
내 표정을 보더니 천명국이 한숨을 푹 내쉰다.
“이래서 가해자는 피해자한테 피해 입힌 걸 모르는 겁니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아! 제가 실장님을 신경 써 드린 게 부담이 되었나요?”
하긴, 내가 과거의 앙금을 잊고서 천명국을 잘 챙겨 주려고 노력하긴 했다.
과한 관심이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내가 세심하지 못한 거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 말에 천명국이 폭발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제가 초인님이 벌인 일을 수습하는 거 때문에 얼마나 두통에 시달렸는데! 이번 일만 해도 미얀마 초인이 자칫 초인님 손에 죽기라도 하면 대참사로… 윽!”
급기야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머릿속에서 맹렬한 포스 회전 움직임을 감지했다. 작은 씨앗에 불과하던 것이 마침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난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명국의 발버둥이 잦아들 무렵, 축하 인사를 건넸다.
“기프트 개방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내가 있을 때 개방했으니 내 공이 맞겠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명국은 매우 지쳐 보였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군요.”
그러더니 날 보고 한숨을 푹 내쉰다.
이 좋은 날에 왜 저런 반응인 거지? 왠지 사고뭉치 취급받는 거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옆에서 용용이가 얄밉게 한마디 거들었다.
난 진짜 모르겠는데?
* * *
내가 우 아예 쪼의 레벨 9 테스트를 봐 준다는 사실이 알려질 무렵, 내가 위하오를 레벨 9로 인정했다는 사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격 있는 사람이 인정받은 거라며 반응을 보였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자신들과 상의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아니, 좋아해야 하는 일 아닌가.
십대초인에서 탈락할 수도 있는 자국의 초인이 인정받은 건데?
…물론 이건 내가 내세우는 대외적인 명분이고.
내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위하오에게 힘이 실릴 행동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겠지. 다 이해한다. 나도 둘이 더 치열하게 싸우라고 부추긴 거였으니.
자, 어서 치고받고 싸우고 서로 죽여라.
“초인님은 선천적으로 어그로 끄는 재능을 갖고 계세요.”
진세정은 나를 그렇게 평했다.
내가 어그로라고? 나는 내 스스로를 무색무취라 생각하는데 진세정은 전혀 동감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절대 나쁜 말이 아니에요. 주목받는 법을 안다는 의미거든요. 초인이라는 존재가 엔터테이너의 성격을 띠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초인님의 재능은 축복받은 거라 생각해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다고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이번에 우 아예 쪼라고 했죠? 미얀마의 영웅이라 불리는 초인이 이곳까지 찾아와 초인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해요. 초인님에게 받는 인정이라는 건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의미겠죠. 이건 초인님이 플랫폼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예요.”
“플랫폼?”
“레벨 9가 되기 위해 초인님을 거쳐 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초인님에게 상당한 권력이 부여되고요.”
누구나 날 거쳐 가게 만든다는 말은 상당한 인상을 주었다. 무엇이 내게 이득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걸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거니까, 걱정은 없었다.
다만 테스트 과정에서 죽는 초인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말에 천명국은 기겁했지만 진세정은 오히려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이다.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신뢰를 주지 못할걸요? 우리가 어린아이 테스트하는 게 아니잖아요. 당연히 밑바닥 실력까지 끌어내서 봐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부상 같은 건 발생할 수밖에 없죠. 저는 초인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제 생각도 바로 그겁니다.”
“천명국 실장님은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말씀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와 초인님은 우리 이익만 생각해도 되잖아요?”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그리고 약간 오해도 있고.
“어차피 꼭 죽이겠다는 건 아닙니다. 만약에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던 것뿐입니다.”
“네, 저도 초인님을 믿어요.”
진세정이 이렇게 말을 하니 나도 좀 더 편하게 손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왜 죽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리는 걸까?]그런 거 아니다. 여러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고려했을 뿐이지.
[그런 걸까나.]용용이 녀석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주제에 계속해서 깐족거렸다.
불만이 있으면 너도 얘기를 해 보든가.
[어차피 인간의 목숨은 나한테 의미 없어. 그냥 네가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게 재밌지. 본인은 모르는데 주변 사람은 괴로워하는 게 포인트고.]대놓고 구경꾼 모드로군. 썩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니다. 근데 나로 인해 괴로워하다니, 말이 과하군.
용용이를 더 갈궈 볼까 하다가 연락 온 대상을 보고는 신경을 옮겼다.
-헤드 브레이커.
“무슨 일이지?”
연락해 온 상대는 막심 게데스였다.
-리그의 꼬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네 정보가 사실이더군.
“그래? 잘됐군.”
캄차카 반도에 있는 리그 거점을 날려 버렸을 무렵, 나는 막심 게데스에게 연락하여 리그 주력이 거점을 옮겼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막심 게데스는 정보 전달이 늦은 것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리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잠잠해서 별 성과가 없나 싶었더니 성공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파티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할까.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녔으니 미사일, 전투기 폭격 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번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아쉽다.
-주력을 모아 공격할 예정이다.
“그럼 잘해 봐.”
-네 공을 기억하지.
막심 게데스와의 건조한 통화가 끝났다. 조만간 리그와 파티가 크게 충돌할 거란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의도하고 내가 만든 판이었다.
중국의 내전도, 리그와 파티의 전쟁도 말이다.
예전에는 당장 앞만 보기 급급했었는데, 이젠 나도 좀 더 큰판을 설계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미치지 않고 정상이 되었다는 증거며, 성장의 증거겠지.
아직도 더 성장할 수 있다라.
“나쁘지 않단 말이지.”
[세계를 위해서는 성장하지 않는 게 나아 보이는데…….]옆에서 궁시렁거리는 용용이의 말을 살포시 무시해 주었다.
* * *
“이곳이 서울이구나.”
인천으로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우 아예 쪼는 여전히 대도시 형태를 간직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얀마에서 함께 온 측근들도 대도시의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긴 기색이었다.
마물의 침공에 국토 대부분이 짓밟힌 자신의 고국과는 다른 풍경이다.
“도시의 형태를 간직한 것만으로도 그 국가의 저력을 의미하지.”
마물의 등장 당시 인류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초기 대응 실패로 정부가 맥없이 무너진 곳도 숱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마물의 침공에 무력하게 노출되어야 했다.
자칫하면 국가가 무너질 수 있는 순간에 대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가한 것이 선진국이라 분류된 국가들이다.
그들은 자국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고전하는 타국에게 방어할 수 있는 노하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부패하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국가는 어김없이 마물에게 짓밟혔고, 각성자들이 각 지방의 권력을 차지하거나 국가를 전복시켰다.
우 아예 쪼의 고국인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물의 침공 아래 소수 민족은 각자 살길을 찾아 갈가리 찢겼고, 정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졌다.
그 광경 속에서 등장한 우 아예 쪼는 진흙 속에 핀 꽃이라며 외신의 찬사를 받았다.
미얀마의 희망, 미얀마의 별 등등 희망에 가득 찬 칭호를 얻은 초인이 우 아예 쪼였다.
“그만! 우린 관광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국을 하나로 묶고 힘을 합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는 늘 불안에 빠져 있었다. 당장 자신의 존재로 국가를 묶어 놓을 수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마물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유해 8단계에서 플러스 단계, 그리고 곧 등장할 것으로 예고되는 플러스 플러스 단계까지.
유해 8단계만 해도 간신히 막아 내는 게 고작인 상황에서 플러스 단계라도 등장하면 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목적도 있다.
“오늘의 목적은 레벨 9로 인정받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로 자리매김할 최준호의 눈에 드는 것도 있다.”
최준호, 혜성처럼 등장하여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른 젊은 초인.
우 아예 쪼는 그에게 경외감과 동시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오늘 방문은 레벨 9로 인정받는 것보다 그의 눈에 드는 걸 목표로 했다.
최준호의 날은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고 그와 인연을 맺어 놓으면 자신과 조국에 결코 손해가 되지 않을 터였다.
마물의 등장 이후, 미국의 패권은 흔들리고 초인 개인의 무위에 국격이 바뀌고 있다.
우 아예 쪼는 동아시아의 지역 강국이던 대한민국이 최준호의 존재로 세계 전역에 영향을 끼치게 된 걸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행동을 신중히 하도록.”
“예!”
우 아예 쪼의 나직한 경고에 모두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내가 혈종이던 시절, 이 미친 녀석은 한국어만 할 줄 알던 녀석이었다.
듣기는 어느 정도 되었지만 그게 전부. 하긴, 미친 녀석에게 외국어 능력을 발전시키라는 요구는 내가 생각해도 무리긴 하다.
과거로 돌아오게 된 나는 한동안 한국어만 구사하다가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점점 외국 출신을 상대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얘들이 뭐라 절규하는지 들어야겠거든. 비명이야 세계 공용어긴 하지만 높은 곳에 있던 녀석들이 나락에 떨어질 때 뭐라 지껄이는지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외국어를 구사하게 됐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국어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우 아예 쪼입니다. 편하게 우라고 불러 주셔도 좋습니다.”
우 아예 쪼가 한국어로 인사를 하면서 합장을 해 왔다. 그러고 보니 미얀마가 불교 국가였지.
호의적인 상대에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지.
“최준호입니다. 미얀마의 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천명국의 불안한 눈길이 오히려 긴장감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바로 사고 치는 것처럼 보겠다.
“미얀마에서도 최준호 초인님의 명성이 자자합니다. 제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또한 우 초인님의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내 립 서비스에 우 아예 쪼가 웃었다.
“세계 최강이라 칭해지는 최준호 초인님에게 한 수 배울 날을 고대해 왔습니다. 지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미 훌륭한 초인이신데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레벨 9가 되지 못하더라도 최준호 초인님에게 많은 걸 배워 가고 싶습니다.”
음.
5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열정이 깃든 눈을 하고 있다.
마치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이다. 저러니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거겠지.
소문 그대로의 모습 같다.
근데 지금의 나는 좀 달라서 말이지.
예전의 나라면 저 모습을 보고 응원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혈종 때문인가, 내면에 좀 꼬인 게 있다. 저 모습이 과연 본연의 모습일까? 속에 다른 꿍꿍이는 없을까?
한때 빌런 출신이다 보니 저런 주인공을 보면 인정해 주기보다 밑바닥에 어떤 일면이 있을지 파헤쳐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싶어졌다.
자기 실력을 보여 주고 싶다 했으니 괜찮겠지?
“알겠습니다. 우선 우 초인님의 실력을 견식하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바라던 바입니다.”
난 웃으며 우 아예 쪼를 훈련장으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