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2
2화
신선한 멧돼지 피를 곳곳에 뿌리고 뼈를 걸어 두는 등 퇴치기구를 설치하고 고기에 독을 빼느라 며칠이 흘렀다.
“고기는 꼭 드세요.”
“저걸 먹을 수 있나?”
“그냥 먹으면 탈나지만 독기를 빼놨거든요. 저 자체만으로 원기회복에 좋은 보약이에요. 구워 드셔도 좋고 삶아 드셔도 좋아요.”
“넌 그걸 어떻게 알았니?”
“그냥 이것저것 하면서요.”
쫓기면서 터득한 생활 지식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예전에는 쫓기느라 시간이 날 때면 육포를 만들어서 들고 다니곤 했다. 육포만으로 겨울에 보름 동안 버텼던 적이 있었지.
그마저도 없으면 아예 생고기도 먹었다. 마물의 독이 혀에서 톡 쏘는 맛이 별미기도 하지.
“그리고 효과 떨어지면 연락주세요. 다시 잡아오면 되니까.”
“그래. 서울 가서 시험 잘 봐라.”
“윤희랑도 잘 지내고.”
“걔가 저랑 친하게 지낼까요?”
“당연히 아니지.”
“엄마, 그건 좀 상천데.”
“2년 동안 백수였던 아들이 준 상처가 더 컸어.”
“그건 인정.”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 잔소리를 감수했다.
그나저나 윤희라, 여동생의 존재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가 빌런만 되지 않았다면 찬란하게 빛났을 아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꿈을 접을 수밖에 없고, 보호조치라는 이름 아래 감시라는 감옥에 갇혔다.
난 가족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어떤 이유로 젊은 시절로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부모님에게 듬직한 아들로, 동생에게는 성공으로 향하는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게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마친 뒤 차에 탑승했다.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예전과 달리 오래 걸렸다.
도로 곳곳에 마물이 출몰하고 국가의 통제를 거부하는 빌런들이 급증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소모되게 만들었다.
마물들은 주기적으로 사냥하지만 빌런은 말 그대로 변수다.
전직 빌런으로 말하자면 빌런은 악이다. 사람의 탈을 쓴 마물. 내가 미쳐 버렸을 때 녀석에게 유일하게 동감했던 것이 빌런을 상대로 망설이지 않고 손을 쓸 때였다.
만약 내가 공무직 헌터가 되면 빌런을 상대하게 될 텐데 적어도 손을 쓰는데 망설임은 없을 것이다.
빌런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 평온한 생활이 방해받을 가능성은 내려갈 것이다.
“문제는 능력인데.”
운전 와중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전생에 각성했던 능력이었다.
혈중섭식(血中攝食)이라 불렸던 내 능력은 대상의 피에 담긴 능력을 얻어내는 유니크 속성 기프트다.
대상의 심장에서 쥐어짜낸 가장 신선한 피를 섭취해야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저번 생에 늦은 나이로 각성했음에도 혈종이라 불렸던 이유가 이 능력에 있다.
결국 힘을 주체하지 못해 폭주를 일으켜 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흡혈귀라 오해받기 좋은 기프트라 혈중섭식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다른 기프트를 공개하면 되겠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생에 빼앗은 기프트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열 개나.
전생에 혈종이라 불렸던 힘이 고스란히 내 피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마치 호접지몽 같았지만 이 부분을 놓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 생각이다.
설명할 수 없는 행운은 조용히 받아들이는 게 가장 좋거든.
내가 다시 빌런이 된다면 세상에 재앙이지만 한 번 후회를 겪은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음.
아마도?
미치기 전만 해도 나는 지극히 무해한 정상인이었으니까. 상대가 시비 걸지 않고 눈에 거슬리지 않고 나쁜 짓만 안하면 난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서울로 진입했다.
빈손으로 집에 가기 뭐해서 근처 마트에 들려 고기를 잔뜩 샀다. 수중에 한 푼도 없는 백수였지만 부모님이 윤희와 잘 챙겨 먹으라며 용돈을 잔뜩 주셨다.
짐을 들고 집에 도착했다. 2년 전만 해도 이 몸이 살던 집이지만 전생까지 포함하면 30년 만에 방문한 곳이다.
방 두 개 딸린 빌라는 두 명이서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산만하게 어질러져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발 디딜 곳은 넉넉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트에서 구매한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집 청소를 시작했다.
눈에 띄는 쓰레기를 모아서 버리고 빨랫감을 분리해서 세탁기에 넣어 두니 1시간이 흘렀다.
윤희에게 있어 지금 이 시기는 정신없을 때긴 했다. 올해는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지만 내년에 합격이 유력했다. 지금이라도 약간 눈을 낮추면 얼마든지 대형 길드에 갈 수 있는 실력이었으니까.
그때 밖에서 도어락 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윤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올해 21살인 내 동생 최윤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차근차근 자기 재능을 개발한 재원이었다.
친오빠가 사상 최악의 빌런만 아니었어도 자기 재능을 화려하게 꽃 피웠을 아이.
하지만 빌런 오빠를 둔 죄로 윤희는 취직도 못한 채 자유를 제약당하며 쓸쓸이 늙어 갔다.
모든 게 내 탓이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동생의 젊다 못해 어린 모습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두 번 다시 피에 취해 빌런이 되지 않겠다고.
“뭐야, 벌써 왔어?”
나를 본 윤희의 눈은 시큰둥했다.
“간다고 연락 했었는데, 답장 없더라.”
참고로 읽씹 당했다.
“보면 됐지, 뭐. 평소처럼 게임하고 뒹굴거리다가 느긋하게 올 줄 알았어.”
“그게 네가 보는 내 모습이냐?”
“뭐 아니었던 것처럼 그래?”
“생각보다 평이 후해서 놀란 거야.”
인간 쓰레기, 상종 못할 놈, 부모님 등골 빨아먹는 기생충, 바퀴벌레, 구더기 등등, 온갖 나쁜 평가를 상상했었다.
내가 스스로 내린 평가에 윤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잠깐 같이 있었는데 벌써 나까지 이상해지는 거 같아.”
“벌레 취급이 아닌 걸로 다행이다.”
“그 정돈 아니거든? 아니, 날 뭘로 보는 거야, 진짜.”
윤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그렇다 치고 엄마한테 공무직 헌터가 되고 싶다는 건 들었어. 진짜 하려고?”
“해야지.”
“왜?”
“뭐가?”
“아니, 원래 오빠는 대기업 아니면 거들떠도 안 봤잖아. 현장 경험을 쌓을 겸 알바 하라고 해도 귀찮다면서 틀어박혀 시간이나 죽이고 있었고.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무슨 생각인데?”
“더 이상 가족 속 안 썩이려고.”
“진짜? 부모님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 방구석 폐인 오빠가 이런 말을 한다고?”
기생충, 바퀴벌레, 구더기 생각하다가 방구석 폐인 평가를 들으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공무원 신분인 것도 나빠 보이지 않잖아. 그리고 사회악인 빌런도 때려잡고.”
대기업 헌터들은 부산물이 풍부한 마물과 던전 공략을 노린다면 공무직 헌터는 치안을 어지럽히는 빌런과 상대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 빌런 잡는데 보람을 느꼈데?”
“치우면 치울수록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갑자기 그런 생각 들더라.”
“하긴. 헌터 재능도 사람 상대하는 거랑 마물 상대하는 게 다르다고 하더라. 근데 시험은 어떻게 하려고? 준비는 했어?”
“무슨 준비?”
“공무직 헌터 준비한다며? 관련 서적이라도 구매해야지!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아, 그러네.”
“······.”
솔직히 말하면 그냥 하고 싶다고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뭘 공부해야 되지? 빌런 하나 잡아가면 합격시켜 주려나?
질문이 담긴 눈길을 보내자 윤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몰라, 알아서 해.”
“그러지 말고 도와주라. 잘난 여동생 덕 좀 보자.”
“내가 왜?”
앙칼지게 눈을 치뜨지만 그래 봤자다.
“용돈 줄게.”
“···진짜?”
“얼마면 돼?”
“님이 제시.”
통 크게 50을 부르자 녀석의 고개가 광속으로 상하운동했다.
“바로 가자!”
남매 사이가 앙숙이라면.
그건 용돈이 적다는 의미였다.
* * *
다음 날, 우리는 책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각성자와 마물이 등장하게 된 서울은 이전보다 절제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피난용 쉘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거리를 걷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차분함과 경계심이 공존했다.
그나마 대형 마물은 도시 외곽에서 철저하게 막고 있지만 문제는 빌런이다.
경계가 강화되면 숨어 있다가 약화되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약탈하고 죽인다.
자칫 잘못 휩쓸리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세상. 그래서 거리를 나온 사람들도 이것저것 즐기기보다 용무를 빨리 마치려는 성격이 강했다.
그럼에도 이 활기가 좋았다. 회귀 전 나는 평생 도시에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각성만 했으면 공무직 헌터가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오랜만의 쇼핑이라며 윤희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헌터 지망 천만 명 시대다. 각성 가능성이 있는 자, 각성한 자는 일확천금을 손에 쥘 수 있는 헌터를 꿈꿨다.
당연하게도 빌런 위주로 상대하는 공무직 헌터는 인기가 없었다. 높은 연봉을 보장해 주고 성공할 시 인센티브가 줄줄 딸려 오는 대기업 혹은 프리랜서 헌터가 요즘 대세였다.
그래서 공무직 헌터가 되는 조건은 간단했다. 우선 각성을 해서 레벨 평가를 받을 것. 그리고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윤리관과 인적성 검사 자료, 면접통과였다.
“오빠가 통과해야 하는 건 그 시험이고. 그리고 각성은 했어?”
“어.”
“일단 절반 이상은 합격했네. 기프트는 있고?”
“있어.”
“진짜? 와! 집에서 진짜 열심히 했나 보네? 그럼 99% 합격이야. 오빠가 A급 이상 빌런이거나 전과만 없으면 돼.”
둘 다 해당됩니다만.
“여유롭게 준비해도 되겠네.”
“안 돼. 합격 여부를 떠나서 좋은 부서에 배치되려면 나머지도 잘해야 돼.”
“좋은 부서도 있냐?”
“당연하지! 이 오빠 뭔 소리래?”
날 보며 인상을 구긴 윤희가 공무직 헌터가 되면 가야 되는 부서에 대해 설명했다.
중앙권력의 직속이자 서울 내부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수호국, 정부와 대기업의 가교 역할을 하는 대외협력관리국, 마물 사냥 허가 및 대비책을 마련하는 대마물방위전선국이 그곳이다.
“이 부서로 가야 그나마 공무직 헌터 역할을 할 수 있어. 나머지는 말 그대로 봉사직이야, 봉사직.”
딱 봐도 날 위해 조사한 티가 났다. 난 윤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감사를 표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
“아, 아니거든? 용돈값 한 거거든?”
“그래도 고맙다고.”
“그니까 고맙다는 소리하지 마! 다 돈 받고 하는 거니까.”
빨간 얼굴로 휙하니 앞으로 치고 나간다. 부끄러워한다. 더 놀릴 생각이 없어서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화제를 바꿨다.
“너는 어떤데? 준비가 어렵지는 않고?”
“나? 준비야 수월하지. 필기시험은 순탄해. 문제는 실기시험이지.”
“기프트만 있으면 쉬워지지?”
“응. 근데 그게 어디 쉽나.”
기프트는 포스로 이뤄진 일종의 권능이다. 내 혈중섭식이 상대 피에 새겨진 기프트를 빼앗을 수 있다면 다른 기프트는 포스로 뇌전을 만들어 낸다거나 검으로 이변을 일으키고 공간이동을 하는 등, 발휘하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각성자 중 기프트를 가진 비율은 3% 내외다. 그만큼 기프트는 귀하다.
난 아니지만.
“피만 좀 있으면 되는데.”
혈중섭식은 능력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능력을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기를 보다가 한 번 말을 꺼내 봐야겠다.
기왕 돌아온 이상 내가 빌런이 안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희가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신경 쓸 생각이었다.
그게 내가 저지른 죄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내가 윤희에게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였다.
단지, 재능이 있다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니 혹독한 단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수상하게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시험에 필요한 책을 사고, 간단한 옷 몇 벌을 구매한 뒤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은행에 도착했다.
“진짜 괜찮다니까?”
“공과금 그거 얼마나 한다고.”
우선 생활 전반에 윤희가 신경 쓸 건수를 최대한 줄여 놓는 것이 내가 취할 첫 번째 조치였다.
* * *
최윤희는 앞장 서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바뀌긴 바뀌었네.’
본가에 있을 때만 해도 오빠는 뭔가 악에 받쳐 있었다.
갈 곳 잃은 분노가 표류하면서 어디에 표출해야 할지 모르던 모습. 최윤희가 보기에 딱 그랬다.
그 모습이 안타깝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염병처럼 번져 오던 패배감은 질색이었으니까. 자신이 잘 되면 자극을 받아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다시 본 오빠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초조함은 사라지고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이걸 여유라고 할 수 있나? 일종의 초탈인 거 같았다. 세상을 달관한, 산전수전 다 겪은 분위기를 백수 5년차에게 느껴졌다.
부모님에게 연락하니 별다른 이유 없이 바뀌었다고 한다.
식사할 때 꼭 수저와 젓가락을 챙겨주라던데 그 이유는 모르겠고.
아무튼 서울로 올라오기 전, 유해마물 퇴치기구를 직접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유해 3단계에 해당하는 마물을 사냥해서.
대체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물 사냥도 놀라운데 기프트까지 있다고?
기프트 자체만으로 웬만한 중견 길드 입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다만 오빠가 길드보다 공무직 헌터에 뜻을 둔 것 같아 더 말하지 않았다.
최윤희는 자꾸 올라오는 호기심을 억눌렀다. 나아진 걸로 됐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다.’
공무직 헌터 지망생이면서 자꾸 자신이 봐주니, 피가 있으면 된다느니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해 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용돈 때문은 아니고.
아니, 사실 마음이 얼어붙기에는 50만 원이 좀 큰돈이긴 했다.
그때 은행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꼼짝 마!”
은행강도, 빌런들이었다.
* * *
“오빠!”
“강도들이네.”
나는 뒤로 바짝 붙은 윤희를 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어서일까. 떨림이 전해졌다.
개의치 않고 입구 쪽을 보고 강도의 수를 가늠했다.
열 명, 두 조로 나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전문 털이범이다.
“여긴 은행이잖아. 강도가 어떻게······.”
“락다운 능력이 있는 빌런한테 은행은 맛집이지.”
특히 이런 서울 외곽에 위치한 은행은 털어 버린 뒤 여차하면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경기도 외곽 지역으로 잠입하면 방법이 없다.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빌런 시절 몇 차례 은행털이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빠삭했다.
녀석들은 락다운 능력으로 주변과 연락을 불가능하게 만든 뒤, 반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리해 버리는 손속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식으로 몇 차례 은행이 털리면서 정부는 은행 지점을 서울 중심지로 집중시키고 외곽에 남겨둔 몇몇 지점은 대기업 길드들 지부를 배치함으로써 위협을 해소했다.
아직 그에 대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시기였고 빌런들은 그 틈을 노린 것이다. 시기적절한 습격이다.
“모두 손 들고 무릎 꿇어!”
“허튼 짓하면 바로 죽인다!”
“당신들이 지금!”
탕!
한 남자가 반발하려던 순간 빌런의 손에 들린 총구가 불을 뿜었다.
경악한 표정이 된 남자가 피를 쏟으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당장 안 꿇어!”
빌런들의 외침에 직원들과 고객들은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열 명으로 이루어진 빌런들은 신속했다. 다섯은 입구를 점거한 채 고객들을 무력화 시켰고, 나머지 다섯은 지점장을 붙잡고 금고로 향했다.
난 뒤에 있는 윤희를 바라봤다.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해서일까.
두려움과 분노가 혼재되어 격렬한 떨림이 전해졌다. 윤희는 헌터 지망생.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실전 경험도, 제대로 된 장비도 없는 그녀가 총을 든 빌런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손을 뻗어 윤희를 툭 쳤다.
“가만히 있어. 이런 빌런들은 앞뒤 가리지 않으니까. 확실하다고 생각할 때 움직여야 돼.”
“그래도······.”
“그리고 명심해. 빌런들은 딱 두 종류야. 죽일 놈이거나 죽여 마땅한 놈이거나.”
“뭐?”
“보고 있어.”
난 빌런들을 향해 움직였다.
* * *
솔직히 빌런에 대한 내 감정은 좋지 않다.
내가 혈종이 되어 버려 미쳐 버린 것은 내 탓이 99%고 1%가 빌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미쳐 버리기 전, 나는 힘에 대한 갈망으로 혈중섭식을 필요 이상으로 남용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멈춰야 하는데 하면서도 힘에 대한 갈망을 끊을 수 없었다.
그때 주변에서 날 부추겼던 게 빌런들이었다. 녀석들은 신입이자 강력한 힘을 지닌 내 힘을 탐냈다. 그때 멈추지 못한 것이 결국 폭주를 일으키고 혈종이라는 빌런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당시 내 주변에 나더러 멈추라고 말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던 나를 말려 줄 사람을 바랐던 것 같다. 빌런들 사이에서 그걸 바랐던 게 웃기긴 하지만.
남 탓이긴 하지만 난 원래 속이 좁다. 그래서 내가 혈종이 된 1%의 책임이 빌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99%를 남 탓하고 싶은데 차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은 빌런을 많이 죽일수록 찬사 받는 세계.
1%의 악감정과 사회 정의를 내세울 생각이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공간이 잘라진 것처럼 거리가 줄어들었다. 시시덕거리던 빌런들이 기겁했다.
“너, 너 뭐야!”
탕!
처음부터 끝까지 날아오는 탄환을 지켜보다가 몸을 기울여 탄환을 피했다.
그 사이 빌런 바로 앞에 도달한 나는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콰드득!
“끄아아악!”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빌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잡힌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기뢰(氣雷)라 불리는 이 기프트는 독일의 그랜드 마이스터 프란츠의 기프트다.
포스를 이용해서 접촉한 부위의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는 기프트는 근접전의 악몽이라 불린다.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프란츠는 빌런이 된 나한테 죽지만 이번 생은 다르겠지.
CCTV 할아버지마냥 날 빤히 바라보던 영감의 모습을 생각하면 예전과 다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에도 베토벤이 러시아 출신 아니냐고 하면 난리 치겠지?
“뭐, 뭐야!”
“흩어져!”
기겁한 빌런들이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어깨를 잡히면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서졌고, 팔이 잡히면 정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한 번에 한 명씩.
이래서 평범한 게 어려웠다.
내가 빌런이었으면 망설이지 않고 목부터 뽑아 놨을 텐데. 아니면 머리를 건드려 뇌를 파괴하는 것도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공무직 헌터를 준비하는 공시생. 상대가 빌런이라도 다짜고짜 죽여 대다가 삐끗하면 나도 빌런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역시 죽이는 게 가장 편하단 말이지.”
공무직 헌터였다면 공권력으로 즉결심판을 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웠다.
입맛을 다시다가 금고에 들어갔던 빌런들이 바깥의 소란을 감지하고 밖으로 나오자 곧장 달려들어 제압했다.
“꼼짝 마!”
순식간에 넷을 제압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빌런이 지점장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외쳤다.
“손 들고 물러나!”
“내가 왜?”
“뭐?”
“난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아.”
“지금 무슨 소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인질이 된 지점장을 바라봤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빨라도 인질의 목숨까지 구할 수는 없다. 이럴 땐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야 한다.
“구하고 싶었지만 유감이네요.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죽일 테면 죽이라고. 대신 나도 널 죽일 거니까. 참고로 머리를 부술 거야. 뇌가 산산조각 나서 눈, 코, 입, 귀로 줄줄 흘러내리겠지. 아, 너무 자비로웠나? 팔다리부터 부수고 머리는 가장 나중에 부숴 줄게.”
인질 한 명의 희생으로 빌런 하나를 처리하면 수지맞지.
나는 대놓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 * *
“······.”
은행을 습격한 빌런들의 수장, 언락(Unlock)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런 미친놈이 대체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전투보다 전파 방해, 금고 해제 등이 주특기인 그는 한탕 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꼬였음을 느꼈다.
자신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빌런.
기세에서 밀리면 답이 없다고 생각해서 끝을 보려고 했지만, 상대는 더 미친놈이었다.
지점장의 머리에 구멍을 내고 다른 녀석을 잡으면 협상이 될까 싶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미친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이 녀석은 감당할 수 없는 미친 녀석이다.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 언제라도 밟아 터뜨릴 수 있는 벌레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지점장의 머리에 구멍을 내는 순간, 말했던 대로 자신의 머리를 두부처럼 으깨 버릴 것이다.
툭.
결국 상대의 기세에 밀린 언락은 총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히익!”
지점장이 기겁하면서 도망치는 게 보였지만 언락은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감이 좋네.”
바로 앞에 도착한 미친놈은 입맛을 다셨다.
콰드득!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언락의 양 어깨가 푹 꺼졌다. 전신에 엄습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다.
“끄아악! 대, 대체 왜?”
“너만 멀쩡하면 다른 애들이 억울하잖아. 그리고 이 눈높이가 딱 좋아.”
미친놈이 태연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