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다음 날, 천명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를 청와대에서 가장 먼저 전달받은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걸로 한고비 넘겼군.”
“말씀하시는 것치고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으신데요.”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운 법이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고.”
대통령은 개구진 미소로 씩 웃었다. 여유가 묻어나오는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서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천명국 말고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이 보기에 시원찮았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 오히려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을 설득하는 게 내 입장에서 훨씬 고된 일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거든.”
[너 말하는 거 같은데.]에이, 설마? 아니겠지.
난 용용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면서 한가지 우려되는 부분을 언급했다.
“다만 천 실장님이 대통령이 된다면 권력 구도 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어떤 게 말인가.”
“대통령은 권력자의 자리 아닙니까. 권력욕이 중요하다고 들어서요.”
“중요하지. 그 부분은 내가 옆에서 도울 생각이네.”
“권력은 나누는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때가 되면 자양분이 되어줘야겠지. 어차피 난 물러날 사람이야. 정치 인생을 이어나갈 사람을 위해 주는 건 유감스럽지 않아.”
권력이라는 것은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평화로운 승계도 가능한 거구나 싶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이라서 모를 수도 있는 거고.
하긴, 나도 권력에 욕심이 없으니 비슷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
[넌 언제든 깽판 칠 수 있어서 그런 거 같은데.]용용이 넌 진짜 깽판이 어떤 건지 못 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진짜 깽판 한 번 보여줘?
[여기에서 더 심한 게 있어? 난 사양할래.]바로 후퇴할 거면서 센 척 하긴.
내가 본 두 사람의 성향상 큰 다툼없이 관계가 잘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천명국의 의지에 달린 일이겠지.
“그리고.”
“예.”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에는 자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걸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항상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아주니 다행이군. 천 실장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연속성과 자네와의 친분이라 생각했거든.”
“지금처럼 잘 지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명국이니까. 저번 생의 유감은 모두 잊고 잘 지내고 있다. 비록 중간에 일이 생겼지만 유부남에게 달콤한 꿀같은 한 달간 휴가도 내가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천명국도 같은 생각일 거라 생각한다.
“천 실장은 더 스트레스 받겠어.”
지금처럼 잘 지낼 건데?
[너만 모르고 하는 소리 같은데?]무슨 소리 하는 거냐.
[참고로 난 이해했어.]“…….”
그렇게 말해도 난 당연히 모르는 일이다.
*
* *
나는 내 스스로가 필요악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이후, 놀라울 정도로 안정감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던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나는 내가 언제고 빌런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진세정을 고용해서 이미지를 개선하는 노력을 해왔고.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늘 짐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존재가 국가에 도움이 되며, 필요악 형태로 허용된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 존재가 온전한 구성원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무원이 고용보장을 받는 것처럼 나 또한 사회일원으로 확고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달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더 강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지.”
버서커는 날 보고 감히 그렇게 말했다.
미친 녀석답게 모든 걸 강해지는 것에 기준으로 두고 있었다.
제법 주제 넘는 말이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틀린 게 없었다.
내 속의 작은 의심은 혈종을 불러올 수 있으며, 흔들림은 균열을 일으켜 끝없이 날 뒤흔든다.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확고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여기에서 더 강해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말 한 번 예쁘게 하네.”
“네가 강해진다는 건 세상이 그만큼 고통을 겪는다는 걸 의미하니까.”
“네게 별의 순간을 더 많이 엿보게 해줘서 좋은 거 아니냐?”
“마냥 좋아하기에는 너무 많이 엿봤다.”
언제는 별의 순간을 보고 싶다며 미쳐 날뛰더니.
사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지 버서커 녀석을 보면 알 수 있다.
해줘도 난리, 안 해줘도 난리다.
“그래서 더 보기 싫고?”
“아니, 끝없이 엿봐야지. 그게 아니면 내가 네 옆에 있는 이유가 없다.”
“오늘따라 뭔가 자신감이 넘치는데?”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진짜?”
버서커 녀석이 이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처음에나 온갖 폼을 잡았지, 흠씬 두들겨 팬 뒤로 많이 얌전해졌다.
조금 얌전해졌나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군. 기회를 엿보면서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우직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하이에나 같은 녀석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의 눈은 첫 만남 당시의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기대하게 해놓고 실망스러우면 곤란한데. 내 손이 좀 거칠어질 수 있어.”
“실망하기 전에는 손속에 사정을 뒀던 것처럼 얘기하는군.”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뭐, 기분 문제긴 하니까.
“어디 한 번 구경해볼까.”
녀석이 자신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뭔지 보고 싶었다.
*
* *
오늘 있던 버서커와 대결은 방영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와 버서커의 대련은 가장 인기있는 컨텐츠 중 하나였는데, 초인들이 치열하게 대련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도 하고 나한테 당하는 버서커의 치열한 모습에 영감을 얻는 각성자들이 많기도 했다.
특히 이 컨텐츠로 버서커의 빌런 이미지를 희석시키는데 성공했다.
매번 지독하게 쳐맞고 있으니 동정심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진세정이 이미지 세탁에 좋을 거라 했는데 버서커를 둘러싼 여론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걸 보고 있자니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좀 당해주는 컨텐츠를 하면 이미지가 좋아질 수 있을까.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있고?]당연히 없다.
그런고로 불가능하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버서커 녀석 타격감이 좋기도 해서 두들겨주는 걸 포기할 수 없다.
오늘 대련은 녀석에게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방영을 하지 않은 거였는데, 결과적으로 그 판단이 옳았다.
“기프트 하나를 더 개방한 거냐?”
“…그래.”
내 앞에서 형편없는 몰골로 쓰러져 있던 버서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기프트 하나를 더 개방했다고 기적적으로 판도가 뒤집히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제법 분발하긴 했지만 결과에 변화는 없었달까.
하지만 과정에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직감이냐?”
“너한테 하도 두들겨 맞다보니 각성이 되더군.”
버서커가 개방한 기프트는 정다현과 동일한 직감이다. 대신 본능에 특화된 종류였다.
그걸로 할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입는 타격을 최소화하는 것밖에 없었지만.
당장 용도가 거기에 특화되었을 뿐, 활용하기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접목이 가능할 거다. 지금 사용하는 방식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데미지를 줄일 수 있는 게 어디던가. 덕분에 좀 더 버텨내기도 했고. 내 공격을 몇 차례 더 버텨낼 수 있다는 건… 음, 그래도 똑같이 죽을 거 같은데.
[죽이는 건 너만큼 잘하는 인간이 또 없지!]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용용이의 말이 내 실력을 증명하고 있지.
“나한테 안 통하지만 다른 녀석들한테는 괜찮겠어.”
“그런가.”
“근데 나랑 붙으면 회피용으로 고정될 텐데 고정 파트너를 구하는 게 낫겠어.”
이럴 때 졸라맨의 존재가 아쉬워지는군. 하긴, 이찬택도 있으니 다른 방향으로 개발할 여지는 존재하겠다.
버서커는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더 다양한 방면에서 이용해 먹지.
“참고하지.”
그리 말한 버서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러지?
의아하게 바라보니 녀석은 쓰게 웃었다.
“내 딸이 아빠가 이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돈 버는 건지 알까 싶어 그랬다.”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지?
세상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모든 가장이 직장 내 더러운 꼴 참아가면서 살아가지. 돈 버는 게 어디 쉬운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으면 자기만의 사업을 하는 게 낫지.
그 점에서 보면 버서커도 떵떵거릴 순 있긴 하겠다.
나 때문에 못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나 죽이려고 달려들 땐 언제고 갑자기 두들겨 맞는다는 표현을 쓰냐?”
“그럼 이게 두들겨 맞는 게 아닌가?”
“치열한 대결이지.”
“…….”
버서커는 날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 저기에 생략된 말은 ‘결과가 정해진’이었다.
결과가 정해진 치열한 대결이다.
[쟤, 너 한 대도 못 맞췄어. 네가 일방적으로 폭력행사 했고.]용용이도 딴죽을 걸었다.
누가 보면 내가 버서커 패려고 대련하는 줄 알겠다. 다 버서커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거다.
“매번 두들겨 맞고 끝나서 모르나 본데 네가 발전하고 있는 건 맞아. 그러니 기프트를 하나 더 개방하고 그런 거 아니냐. 이 추세로 보면 기프트 하나 더 개방하지 않을까?”
“기프트가 세 개라고? 그쯤 되면 기프트 사용하는데 헷갈릴 거 같군.”
“그건 아닐 걸.”
내가 기프트 여러 개 사용해봐서 아는데, 좋은 거면 헷갈릴 일 없이 대결에도 잘 사용하게 된다.
“나도 그냥 푸념해본 거다.”
“그러냐.”
“그리고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뭐?”
버서커는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구석에 놓아둔 가방을 내 앞에 가져왔다. 버서커한테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빨간 가방을 열더니 물건 한 무더기를 내 앞에 늘어놓았다.
무심코 시선을 둔 나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이건…….”
“여기에 싸인 좀 해줬으면 좋겠다.”
“…….”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버서커도 비슷한 듯 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버서커가 내민 것은 내 굿즈(goods)였다. 열쇠고리부터 시작해서 다이어리, 티셔츠, 머그컵과 쇼핑백 등등 끝도 없었다. 심지어 누리를 닮은 칼 모양 봉이 뭔가 싶었더니 응원봉이란다.
난 응원을 받을 일이 없는데 응원봉은 왜 나오는 거야?
“이 정도 모으기 쉽지 않은데, 진짜 팬인가 봐요.”
어색한 침묵 사이로 등장한 진세정이 굿즈를 둘러보더니 감탄을 터뜨렸다.
“한정판도 있고, 초판본도 있네요.”
“비싼 거 아닙니까?”
“지금은 매우 비싸죠. 근데 구매할 때 가격은 비싸진 않아요. 대신 매우매우 많은 정성이 필요하죠. 이걸 구한 걸 보면 따님이 진짜 초인님의 팬인가 봐요.”
“그렇지.”
대답하는 버서커의 표정은 침울했다. 내 팬이라는 것에 굉장히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
저럴수록 내가 한 번 만나보고 싶어지는 걸 녀석은 모르나보다.
“내 팬이라니 해줘야지.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전달해줘.”
“이런 녀석이 뭐가 이쁘다고 팬을 하는 건지…….”
“네가 알아보지 못하는 나만의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
더 대화해봤자 자기만 말린다는 걸 알았는지 버서커가 입을 닫았다.
굿즈 종류가 워낙 많아 하나하나 싸인을 해주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팬이라는데 해줘야지.
마침내 싸인이 끝나자 버서커가 구시렁거리며 가방 안에 굿즈를 넣었다. 그 손놀림이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말하는 것과 정반대 태도였다.
저러니까 팬 서비스 의욕이 생겨나는 기분이로군.
조용히 의욕을 불태울 때, 진세정이 나직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초인님.”
“하실 말씀이라도?”
“네.”
그러면서 내게 곱게 접힌 편지지를 내밀었다.
“초인님께 보내는 사연이에요.”
“사연이라…….”
진세정의 권유로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나는 은밀하게 컨텐츠를 하나 더 하고 있었는데, 바로 각지의 빌런에 대한 제보를 받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거짓이지만 그 중에는 정확한 정보도 있어 대조를 통해 사실확인이 되어 몇 개의 빌런 조직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초기에는 내가 몇 번 나간 적이 있고, 그 후에는 버서커가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진세정이 내게 가져왔다는 건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란 거겠지.
난 사연 내용을 살펴보았다.
[초인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빛초등학교 3학년 이서준입니다. 편지를 쓰면 초인님이 나쁜 사람들 잡아주는 거 맞죠? 나쁜 아저씨들이 엄마를 데려가서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