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21
21화
블링크 한상민을 때려잡으면서 리그에서 공급하던 마약 확보 임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명령대로 빌런을 토벌했지만 한 가지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뭘 위해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걸까.
내가 빌런을 싫어하는 것도 맞고 공무원 헌터로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빌런 제거가 내게 지상 최대 과제라고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그런 신념도 책임감도 없다.
내가 공무원 헌터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편해서였다.
하지만 더 이상 편하지 않으면? 공무원 헌터의 메리트는 떨어진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 아프군.”
실력을 감출 생각 없이 지금처럼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 움직이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것과 별개로 블랙요원을 빌런으로 위장, 빌런 세계로 깊숙이 침투시키는 발상은 꽤 놀라웠다.
정주호는 이로 인해 내 존재가 드러났다며 한숨을 내쉬는데 어차피 선택권은 내게 있다. 블랙요원도 필요에 의해서 되었을 뿐,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리그의 이름이 점점 더 깊숙한 곳까지 오는 느낌이다.
나는 정다현에게 리그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았다.
“다현 씨.”
“네, 준호 씨.”
“저번에 리그가 점 조직이라 했죠.”
“네.”
“그럼 리그의 수뇌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정확하진 않아요. 레벨 8 빌런들이 수뇌가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죠. 하지만 리그를 만든 세 빌런에 대한 정보는 있어요.”
아르고스, 헬 마스터, 블랙하운드.
이들이 리그의 시초이자 현재 세계 최악의 빌런으로 불렸다.
“세 빌런이 어떻게 의기투합한지 알려진 건 없어요. 하지만 그 조합이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재앙이 되었죠.”
“······.”
세 이름은 나도 들어본 적 있는 빌런들이다. 저 셋은 내가 혈종이 된 후에도 여전히 악명을 날렸으니까. 근데 직접 본 적 있냐면 그건 아니다.
왜 한 번도 못 봤을까. 이게 과연 우연일까?
“이 셋의 강함은 레벨 8 초인 중에 독보적이라고 해요. 미국에서 몇 번이고 체포 작전을 시도했지만 극심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어요.”
내 표정이 심각하다고 여겼는지 정다현이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네 왔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아직 리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곳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글쎄, 내가 볼 땐 준호 씨가 아니라 그 빌런들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정다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도착했는지 미소 짓고 있는 이세희가 살짝 턱을 치켜든 채 정다현을 보고 있었다.
“안녕? 준호 씨도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존대를 했는데 이세희가 바로 정색했다.
“평소처럼 편하게 말해도 돼요. 갑자기 존대하니 거리감 느껴지잖아요.”
“······!”
아닌 척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란 가운데, 정다현은 저 커다란 눈이 어디까지 커질 수 있나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전 국장님과 먼저 일정이 있어서. 좀 이따 봐요.”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눈웃음 지은 이세희가 국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국가수호국 내부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여들었다.
뭐지?
*
한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온 정주호에게 이세희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임에도 반짝이는 재능, 뛰어난 수완, 타고난 배경과 미모까지 모두 갖춘 그녀는 마치 찬란한 태양과도 같았다.
나날이 대형 길드의 상승세가 무서운 가운데 그녀처럼 장래가 유망한 존재가 선두에 나서니 왜 통제가 버거워지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그녀의 시대가 올 것이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국장님.”
“이 팀장님의 요청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앉으시지요. 차는 커피로?”
“네, 부탁드려요.”
잠시 후, 이세희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준호 씨와 실력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찾아왔어요.”
“무슨 말인지 잘······.”
“준호 씨, 레벨 7이죠?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요.”
“······!”
“아마 지금쯤 국장님이 조치를 취하셨을 것 같아서요.”
“으음!”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저 눈빛을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적의가 생겨나지 않는 것. 이세희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저걸 요망하다고 해야 할까. 자신이 20년만 젊었어도 간 쓸개 다 빼줘서라도 매달렸을 것 같다. 물론 결혼은 안 하고. 그 끔찍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신성 길드의 정보력은 언제나 그렇듯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어디까지 알고 온 겁니까?”
“저도 눈과 귀가 있는데 대략적인 건 알고 있죠.”
“허, 이러다 내가 오늘 입은 팬티까지 들킬 판이군.”
“다행히 거기까지 관심이 없어서요.”
생글생글 웃는 이세희의 미소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결국 떨쳐내지 못한 정주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준호는 우리 국가수호국 공무원 헌터요.”
“그리고 저희 신성 길드 소속 최윤희 양의 오빠이기도 해요.”
“······.”
“윤희 양의 재능은 상당해요. 지금부터 꾸준히 쌓아나가면 레벨 7, 어쩌면 레벨 8에 도달하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길 정도로. 그런 기대주를 케어하기 위해서라도 준호 씨의 문제를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요. 크게 보면 국가를 위한 일이네요.”
요망한 혀놀림이 이어졌다.
“마침 신성 길드가 국가수호국 스폰서이기도 하고 준호 씨가 저와도 인연이 있어서 같이 보조를 맞추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합의를 끌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제멋대로 상상한 거라면 죄송해요.”
완전히 허를 찔렸다.
여기에서 강경하게 나가봤자 최준호, 최윤희를 생각한다는 대의명분을 무너뜨릴 수 없다. 신성 길드 소속이라고 해도 레벨 8에 오를 수 있는 인재라는 건 결국 국가의 전력 상승을 위한 일이니까.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이세희를 보고 정주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당분간 조용히 임무를 수행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국장님이 고생하시겠네요.”
“저 녀석 때문에 하루에 빠지는 머리카락이 두 배나 늘었습니다. 신성 길드에서 이런 약은 개발 안하나? 개발하면 제발 나한테 좀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임상 실험이라 해도 기꺼이 지원할 테니.”
“···제가 한 번 연구소에 들려 알아볼게요.”
“그 정도만 해줘도 감사하지. 후! 아무튼 이후 건에 대해서는 신성 길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우리도 신성 길드, 특히 이 팀장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고요.”
“국장님은 공무원 헌터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죠.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실상은 기습을 당한 자신이 뼈아픈 일격을 허용했고 이세희는 큰 이득을 얻었지만.
이대로 손해만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정주호는 혹시나 하고 생각하던 방법을 꺼내보았다.
“그럼 이 팀장이 최준호 좀 자중하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그 미모면 저 녀석도 흔들릴 것 같은데.”
진심이 담긴 토로에 이세희의 미소에 담긴 의미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함이었다면 지금은 씁쓸함이다.
“국장님, 혹시 지금 저 죽이려고 그 말씀 하시는 건 아니죠?”
“···설마?”
“일어나볼게요.”
어느새 자신감이 완전히 지워진 이세희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세희가 국장실 안으로 들어간 뒤, 나와 정다현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마물의 심장 건은 빼고 이세희와 첫 만남과 윤희 건으로 만났던 걸 얘기했다.
잠시 후, 국장실 밖으로 정주호와 이세희가 나왔다. 그런데 둘의 표정이 이상했다.
심각한 얘기라도 나눴나?
인사를 마친 정주호가 안으로 들어가고 이세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때 용감하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세희 팀장님. 저는 오종엽이라고 합니다.”
“아! 그 종수 군의 형? 준호 씨랑 친구라 들었어요. 그리고 대단한 기프트를 갖고 계시다고.”
“하하, 예. 덕분에 종수가 새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번뜩이는 이세희의 눈을 못본 오종엽이 쑥스럽게 웃었다. 모태솔로 자식. 완전 홀라당 넘어간 게 보였다.
“저야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드린 게 전부인 걸요. 감사는 준호 씨가 받는 게 옳아요.”
“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우십니다.”
“그럼 저랑 다현이 중에 누가 더 나아요?”
“예? 그, 그, 그게······.”
예상치 못한 일격에 오종엽이 버벅거렸다. 모태솔로 자식. 쯧쯧.
“농담이에요. 다음에 제대로 인사드릴게요.”
“예, 예!”
오종엽이 비켜서고, 나와 정다현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이세희는 정다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내게 말했다.
“다현이 좀 빌려갈게요. 야, 밥 먹으러 가자.”
“갑자기 와서 무슨 얘기야.”
“다 알아. 너 슬럼프잖아. 이럴 땐 다이어트 집어치우고 마음껏 먹으면 돼. 가자.”
“어, 어어?”
이세희와 정다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의 슬럼프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힘을 북돋아주는 것. 저게 친구라는 건가. 참 좋은 친구를 두었다.
“왜, 왜! 뭐!”
그에 반해 내 친구는 좀 모자란 것 같다.
이렇게 여유롭던 분위기도 잠시.
다음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버서커와 인형술사가 접촉했다.”
*
버서커와 인형술사의 접촉이 밝혀지는 순간 국가수호국을 비롯한 모든 정부 조직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전국 길드 연합 회의가 열렸는데, 정부 측에서는 빌런 습격을 경계하여 사냥 축소를 주장했고 길드 측은 본래 횟수 유지를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빌런은 대표적으로 홀로 다니던 빌런이다. 버서커는 대한민국 빌런 중 가장 강한 무력의 소유자였고 인형술사는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빌런. 둘의 연합이 어떠한 재앙을 불러올지 누구도 쉬이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각개격파를 시도할 거예요.”
이세희와 나가서 얘기가 잘 됐는지 표정이 밝아진 정다현이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레벨 7로 추정되는 두 빌런이 뭉치면 레벨 8 초인이 아니고서는 절대 막을 수 없으니 그리 움직일 거라 했다.
“버서커는 종잡기 힘든 빌런이라면 인형술사는 까다롭죠. 정부 측에서도, 길드 측에서도 둘을 잡기 위해 움직일 거라 생각해요.”
절대 어설픈 전력을 동원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인형술사의 특성 때문이다.
시체를 얻으면 생전의 강함과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기프트 ‘인형술’은 시체가 늘어날수록 인형술사의 전력을 늘려주는 꼴이 된다.
“어쩌면 준호 씨가 움직여야 할 수도 있어요.”
“그건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래 버서커는 내 몫이지만 버서커와 인형술사가 힘을 합치면서 주도권은 정부로 넘어갔다. 내 실력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일부에 불과해서 아마 다른 조치가 취해질 거다.
골치 아픈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하는 정주호 성향상 나보다 레벨 8 초인을 동원하고 싶어 할 테고.
버서커가 레벨 8이 아닐까 생각하는 나로서는 결국 내 차례까지 돌아올 걸 알고 있기에 지켜보다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내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버서커와 인형술사의 협력에 대비해서 붉은 뱀 김영환 명예 장관님이 준비하실 거다.”
김영환 명예 장관. 정부 조직에 소속된 유일한 레벨 8 초인.
올해 70이라는 나이에 여전한 권력욕과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지만 레벨 8이라는 위명은 어디 가지 않았다.
자연히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에 반해 정주호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우리는 망치와 모루 전술로 제거하기 어려운 인형술사를 정예 전력으로 붙들고 그 사이 장관님이 버서커를 맡으실 거다. 작전 총괄은 청와대 각성자안보실에서 맡고 우리는 한 축으로 포위망을 구성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작전 완성도는 상당했다.
이러니 내가 혈종일 때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개떼처럼 달라붙었던 거로군.
대표 3국으로 불리는 국가수호국, 대외협력관리국, 대마물방위전선국의 주축 인원이 동원되고 각 지역 빌런대응팀이 동원될 예정이다.
“모두 작전 개시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도록. 그리고 최준호.”
“예.”
“따라와라. 할 얘기가 있다.”
나는 정주호의 뒤를 따라 국장실로 들어갔다.
“버서커가 네 손을 떠나게 됐는데 괜찮나?”
“예. 사안이 사안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해해주니 다행이고. 이번 작전에서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어떤 겁니까?”
“저번 대외협력관리국과 했던 작전에서 잡아온 빌런들을 기억할 거다. 그쪽에서 심문한 결과 뒤에 인형술사가 있는 걸 확인했다.”
“그렇군요.”
“근데 그 다음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어. 금제가 걸려있다고 하더군.”
“그 말씀은?”
나는 왕주열에게 사용한 이후 금지당한 능력을 떠올렸다.
“위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네 능력으로 걔들에게 정보를 뽑아내라.”
“알겠습니다.”
좋은 기회였다. 이번 기회에 브레인워싱의 숙련도를 높여야겠다.
*
최준호가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정주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벌써 견제하는 건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뾰족한 송곳은 튀어나오는 법.
헤드 브레이커 최준호의 이름은 정부 기관부터 시작해서 대형 길드에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어쩌면 국가수호국 비밀 작전이던 버서커 체포 작전도 새어나갔을지 모른다.
붉은 뱀 김영환이 콕 짚어 버서커 체포 작전을 철회하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욕심 많은 영감 같으니라고······.”
하지만 정부 측에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레벨 8 초인이라는 점, 장관이라는 점에서 뒷담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주호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노크와 함께 들어온 부하 직원이 보고를 가지고 온 것이다.
“국장님.”
“뭐야?”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미국은 왜?”
미국은 마물의 등장 이후 영향력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동맹국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권국이다.
“그, 미국에서 헤드 브레이커와 공동 작전을 해보고 싶다고······.”
“거절해.”
“예? 그럼 이유라도.”
“바쁘다고 해.”
“아, 알겠습니다.”
부하가 밖으로 나가고, 정주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사방팔방에서 찔러보고 난리야, 이것들이.”
슬슬 한계가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