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청와대 안으로 들어가는 길.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로 바글거렸던 거리는 한산했다. 온갖 조형물과 잘 관리된 길은 마물과 빌런으로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홀로 동떨어진 느낌을 선사했다.
“한국은 참 멋진 곳 같아요. 마물도 적고 빌런도 적고.”
성녀는 언제 봤냐는 듯 내 옆에 서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외국에서 온 손님이 뭐라 떠들건 무시했을 테지만 한국어로 말을 거는 탓에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한국어는 언제 배웠지?”
“성녀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성녀는 아무나 못하겠어.”
“그럼요. 온갖 교양 문화 교육부터 시작해서 수십 개의 외국어를 통달해야 해요. 그 과정을 이수하고 나서야 성녀의 자격이 주어져요.”
“성녀란 게 그럴 가치가 있나?”
“헤드 브레이커가 보기에는 없어 보이나 봐요?”
“모르니까 물어보는 건데.”
[얘도 보통내기가 아니네.]용용이 말에 동감이었다. 좀처럼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능수능란한 사업가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성녀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어?]지금 용용이를 본 건가?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옮기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성녀란 게 원래 갑자기 등장하는 건가?”
“아니요.”
“그럼?”
“저한테 궁금한 게 많았나 봐요? 하긴, 원래 비밀이 많은 여자한테 끌리는 법이죠.”
그러면서 고혹적인 척 미소를 짓는데 끌리는 게 아니라 끌어내 버리고 싶어지는데.
[쟤 지금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걸 전혀 모르고 있어!]그럴 생각까지는 없다. 어쨌든 여기까지 온 손님이고 프란츠랑 함께 온 이상, 적으로 치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아무튼 몇 마디 어울려주다가 안으로 들어가니 대통령이 프란츠와 성녀를 맞아주었다.
바티칸이 뭐, 옛날부터 존재했고 마물을 상대함에 있어 유럽의 구심점 역할을 한 건 알고 있긴 한데 대우가 극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녀는 이런 대우들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대통령의 호감을 산 뒤 교황의 친서를 건넸다.
미소 지은 채 그걸 받아든 대통령은 프란츠와 성녀를 번갈아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이 먼 길까지 두 분이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이곳을 오게 된 이유는 한국 정부에 요청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허허, 요청할 게 있다면 그곳에서 요청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곤란한 걸 요청하려는 것 같아서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대통령은 한껏 엄살을 부리면서 미리 연막을 쳤고.
“조금 곤란해도 대통령님께서 힘 써주시면 쉽게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성녀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흘려냈다.
다시 말하지만, 성녀의 수완은 상당해 보였다.
종교인이라기보다 사업가를 보는 느낌인데?
대통령도 웃고 있지만 허를 찔린 기색이 느껴졌다.
“성녀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그런 거겠지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역시 대한민국의 약진은 대통령님의 능력이라는 분석이 옳았네요.”
“허허,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내가 정신계 기프트를 사용하고 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성녀는 대통령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었다. 대체 어느 정도 수완이기에 저렇게 구워삶을 수 있는 거지?
[보통이 아니야.]나름 인간 세상에 대해 많이 보고 있는 용용이도 그리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것도 인사 단계에서만 먹힐 뿐, 본론에 들어가자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저희가 원하는 건 얼마 전 대한민국의 초인인 헤드 브레이커께서 사냥한 플러스 플러스 단계 천마갑귀에 대한 정보에요.”
“그건 이미 충분히 공개한 상태입니다.”
“네, 하지만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 것 같아 그걸 부탁드리려고 찾아왔어요.”
성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대통령이 이대로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그에게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불가능합니다.”
“네?”
“그 이유는 사냥에 대한 권리가 전적으로 최준호 초인에게 있어서입니다.”
성녀의 미소에 균열이 일어났고, 시선이 내게 향하게 되었다.
정작 난 별 생각이 없다.
“헤드 브레이커, 천마갑귀에 대한 정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가 왜?”
“그야 천마갑귀 같은 마물이 앞으로 인류를 위협할 게 분명하고…….”
“그 정보는 이미 공식적으로 알린 걸로도 충분할 텐데? 그 외의 정보라고 해봤자 내 개인적인 부분과 관련된 내용일 테고.”
“…….”
성녀의 입이 닫혔다. 신이 난 듯 이리저리 떠들었지만, 입 다문 모습이 가장 낫군.
프란츠도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뭔가가 있군.
물론 상대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투뿔 마물은 한국에서 공개한 그대로라고 보면 된다. 그것 외에 정보를 알고 싶으면 솔직한 속내를 꺼내놓던가.”
아직 내가 미숙해서 직감으로 진실과 거짓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개소리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걸로 판단할 수 있다. 손이 나가려고 하는 걸 보면 대부분 개소리다. 적중률을 수치화한다면 99.9%는 되지 않을까.
[0.1%의 무고한 희생자는 생각 안 해?]어차피 날 께름칙하게 만든 놈이니 후환을 없앴다고 생각하면 된다. 잘못 판단할 확률보다 나중에 귀찮아질 경우가 더 많다.
[와! 진짜 너란 인간은 대단하다. 근데 나도 궁금하긴 해.]모두의 시선이 성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때, 여태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프란츠가 혀를 차면서 끼어들었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헤드 브레이커는 쉽게 상대할 상대가 아니라고.”
“그러네요.”
한숨을 푹 내쉰 성녀는 조금 전까지의 가벼움을 버리고는 내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유럽에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고 있어요. 지금 전력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게 저희 측 판단이에요. 부디 도움을 베풀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조짐이라는 것부터 설명해봐.”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한 건지 궁금했다.
*
* *
내가 상대한 천마갑귀는 중국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마물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발생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성녀의 말에 의하면 투뿔 마물은 충분히 자연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마물의 생태계는 인간 전력의 상승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에 적응한 마물은 전보다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되었다.
둘째는 지속적인 전투였다. 혹독한 환경에서 마물과, 인간을 상대하면서 마물은 다양한 전투 방식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포스 다루는 방법의 습득이다.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월등히 강력한 육체와 포스를 보유한 마물은 이 원시적인 형태의 포스 단련으로 강해졌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인간만 강해지는 게 아니었어요. 인간들이 강해질수록 마물도 강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마물과 경쟁 속에서 전투 능력이 향상되고요. 생존에 필요한 지역들을 수복하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마물들의 저항이 강해지고 있고요.”
“그 조짐이 투뿔 마물의 등장을 암시한다고?”
“단지 의심 단계일 뿐이었죠. 여기에 확신을 부여한 건 예언이었어요.”
예언이라는 단어에 대통령과 천명국이 흠칫했다. 저기에 뭔가가 있나 보군.
“흘려들을 예언이 아니다. 저 예언은 여러 번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줬다.”
프란츠도 말을 보탰다. 그러니까 더더욱 호기심에 부채질을 했다.
난 성녀에게 물었다.
“그 예언이라는 건 누가 내려주는 거지?”
“그건…….”
조금 전까지 청산유수로 떠들다가 조용해졌군. 난 저 예언이라는 걸 내려주는 신의 행세를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과연 진짜 신일까?
아, 참고로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다. 미쳤다가 과거로 돌아온 마당에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만큼 이상한 행동은 없겠지.
다만 그 신이 진짜 전지전능할지, 인간의 상상처럼 고결한 존재일지 의문이 있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서로 속내를 터놓을 수 있어야 대화가 진전되겠지.”
“…….”
“오늘이 아니어도 돼. 천천히 생각해봐.”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앞으로 얘기 나눌 기회가 많을 겁니다.”
대통령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 일행이 돌아간 뒤, 나는 청와대 마당으로 나와 용용이와 대화를 나눴다.
“네가 볼 때 어떤 거 같냐?”
[가장 유력한 건 신수지만 확신할 수 없어.]“왜?”
[신수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의 형태거든. 다른 형태로 진화를 이뤄냈다면 우리와 다른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봐.]“그럼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건가.”
[배제할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가능성은 낮아.]용용이는 그리 말했으니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신수인 척 하는 마물일 수도 있고, 신수보다 더 초월적인 존재일 수도 있는 거다.
아니면 신의 행세를 하고 싶은 또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고.
“투뿔 마물이 자연 발생한다는 것보다 신이랍시고 예언을 내려주는 게 뭔지 궁금한데.”
[…….]내 중얼거림에 용용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첫날 일정을 마치고 청와대 근처 호텔에 체크인을 마친 프란츠와 성녀는 따로 자리를 옮겨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평가했다.
“어렵네요.”
“애초에 수작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 정도도 많이 성장한 거다.”
“성장이라뇨?”
“적어도 손을 먼저 쓰지 않았으니까.”
“그 정도인가요?”
“외모만 곱상하지, 아주 무지막지한 녀석이다.”
프란츠는 한 차례 방문했을 때 최준호에게 겪었던 수난들을 열거했다.
흥미롭게 듣던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상대해보니 알겠어요. 헤드 브레이커는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탄이에요.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면 당장 제 머리부터 부서졌을 거예요.”
“그걸 알면서 모험을 감수한다고?”
“어떤 남자인지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네가 보니 어떠냐?”
“좋아요. 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지, 그 강대한 리그를 동아시아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든 건지 알겠어요. 여기 와서 더 확실해졌어요. 헤드 브레이커의 힘은 필요해요.”
성녀의 푸른 눈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다가 돌연 흔들렸다. 동공이 수축되면서 깜빡임이 잦아졌다.
프란츠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힘이 필요한 건 알고 있지만, 예언의 존재를 밝힌 건 섣불렀다.”
“어차피 드러날 거였어요. 그렇다면 이걸로 거래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결국 실패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에게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알게 해줬어요. 이렇게 신뢰를 쌓아나가다 보면 유익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 녀석이? 글쎄다.”
최준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면모를 지녔다.
성녀의 미모가 아무리 아름답고 신분에 우위가 있다고 해도 그것에 휘둘리는 녀석이 아니다.
“그럴 가치가 있느냐? 네 신의 의중을 저버리고도?”
“알고 계셨어요?”
“자꾸만 눈살을 찌푸리는데 일부러 주름을 만들고 싶지 않으면 그럴 리가 없지. 미모 관리가 경쟁력이라고 죽어라 관리하면서?”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할아버지는 못 속이겠네요.”
“바티칸에 있을 때부터 널 봐온 나다. 교황을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프란츠의 지적에 성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아니, 여태까지 애써 감춰왔던 거겠지.
“제 신은 헤드 브레이커와 타협을 하지 말라고 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이라고 해요.”
“신마저?”
프란츠는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진짜 신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은 진짜였다. 그 존재로 여러 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다가올 재앙에 대비할 수 있었다.
신은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으나 인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건 여태까지 바뀌지 않는 법칙이었다.
그런 신마저 최준호를 죽이라고 하다니.
뭔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성녀가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여러 번 속삭였지만 제가 전부 무시해버렸거든요.”
“그래도 되나?”
“분명 페널티가 있겠죠. 하지만 신의 뜻대로 휘둘리려고 세상에 나온 게 아니거든요. 저는 헤드 브레이커를 적대하기보다 친분을 쌓으면 더 건설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홀로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을 사냥한 사람이다. 성녀는 최준호의 비정상적인 강함이, 신마저 불안에 떨게 만드는 강함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프란츠도 최준호를 적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 성녀를 지지했다.
“네 생각이 옳길 바란다. 나도 옆에서 도와주마.”
“감사해요. 그럼 이대로 계속… 아! 아아!”
환하게 웃던 성녀의 눈이 붉게 물들더니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프란츠가 화들짝 놀라 비틀거리는 성녀를 부축했다.
“알레시아!”
“괜찮아요. 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가일 뿐이에요. 모시는 분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괜찮으냐?”
“네, 괜찮아요. 나중에 절 이해해주실 거예요.”
피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프란츠를 안심시키려는 듯 성녀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