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허버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팬텀과 마주 앉았다. 한때 세계를 대표하던 다섯 개의 별 중 하나이자 세계를 아우르던 파티의 리더인 팬텀의 낭패한 모습은 보면 볼수록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팬텀은 그런 허버트의 기색에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고.
“우리 사이에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겁니까?”
“용건만 얘기하지.”
“하하.”
“웃지 마라.”
서늘한 기세가 담긴 목소리에 허버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야박하군요.”
“그렇게 티내고 싶은가.”
“잘 지내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리그 소탕은 파티에도 나쁜 전개는 아닐 겁니다.”
“나쁘지 않지만 네놈들 이익이 더 크겠지.”
“서로 좋게좋게 가는 것입니다.”
허버트는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그걸 보는 팬텀의 눈은 날카로웠다.
“사람 좋은 척하면서 이익은 챙겨가는 수법은 여전하군.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뭐지?”
“미국의 미래입니다.”
“미국이라, 우리의 영역이 그만큼 좁아졌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내 착각은 아니겠지.”
“잠시 주춤하고 있을 뿐, 파티의 영향력은 여전히 세계적인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분열된 힘이다. 저 바다의 ‘레비아탄’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파티의 힘은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
가뜩이나 유럽 내 세력이 독자노선을 걸으려 하는 시점에서 지금 파티의 힘은 사상 가장 약화된 상태라 봐도 무방했다.
예전에 미국 대통령은 고개를 조아리고 선택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는데.
팬텀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만 비꼬고 진짜 용건을 꺼내라.”
“헤드 브레이커가 천둥새를 사냥하는 것에 적극 협조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걸로 얻을 이익은?”
“어느 결과가 나오더라도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최준호가 천둥새를 사냥하거나 설사 최준호가 당하더라도.
팬텀은 그 안에 숨겨진 흉계를 꿰뚫어보았다.
최준호가 천둥새를 사냥한다면 미국의 골치가 되던 것을 치워버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협력한 것은 신수를 사냥한 초인에게 호감으로 다가갈 것이고.
그와 반대 결과가 나와 최준호가 죽으면 세계최강이라 불리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처리하게 된다.
팬텀은 과거 허버트가 대선에 출마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들의 선택을 받은 후보를 압도적으로 찍어 누른 지지율에는 저 인간 좋아 보이는 미소 뒤에 숨겨진 ‘음흉함’이었다.
“음흉한 녀석이군.”
“개인적으로는 헤드 브레이커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 팬텀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다. 천둥새에 관한 내용은 미국 정부보다 파티가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팬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버트의 장단에 어울리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녀석의 수법이 나쁘진 않았다.
두 존재가 충돌한다면 한쪽이 이기더라도 무사하지 않겠지.
천둥새가 리그에 간섭하지 못하는 상황만 되어도 막심 게데스를 앞세워 공략이 가능하다.
“협력하지.”
“감사합니다. 이걸로 같은 배에 탔군요. 잘 부탁합니다.”
환하게 웃은 허버트가 팬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팬텀이 코웃음 쳤다.
“지금 내게 도와달라는 건가. 이번은 쉽지 않을 거다.”
“그러지 말고 저도 좀 도와주시죠. 요즘 지지율 때문에 어려워죽겠습니다.”
“싫다.”
곧 있을 선거에 도움을 달라는 뻔뻔한 녀석을 보며 팬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까지 미소 짓고 있던 허버트는 자리에 앉으며 푸념했다.
“한참 전에 무덤에 들어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영감이 더럽게 빡빡하게 구네.”
*
* *
막심 게데스에게서 전달받은 정보는 기본 골자가 미국 정부가 제공한 것과 같았다.
다만 천둥새와 얽힌 히스토리를 깊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리그의 설립자인 아르고스가 천둥새와 협력 관계인 부분과 출몰 빈도를 통해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 세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인데…….]용용이도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정보대로라면 천둥새의 인간 세계 개입은 예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리그를 통해 하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데.”
[아냐, 그 정도라고는 안 봐. 이 인간들 조직이 적대관계라고 했잖아? 그래서 자기들 상상이 많이 가미되었다고 생각해.]그렇다고 해도 천둥새의 개입이 많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다.
아마 아르고스를 비롯한 몇몇 녀석들은 내가 용용이에게 받은 것처럼 천둥새에게 뭔가를 받았을 확률이 높겠지.
아니, 짠돌이 용용이와 달리 더 많은 걸 줬을 확률이 높다.
용용이가 발끈했다.
[거기에서 왜 내가 짠돌이라고 하는 건데?]짠돌이를 짠돌이라고 했을 뿐인데 뭐 잘못된 게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와, 억울하네! 그런다고 내가 뭘 더 줄 거 같아?]눈치가 빨라진 것까지.
안 좋은 것만 빨리 느는 기분이다.
아무튼.
천둥새의 개입 빈도가 높다는 건 구린 의도가 숨어있다는 걸 짐작케 했다.
그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녀석을 죽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거지.”
다만 걸리는 부분은 천둥새를 상대할 때 리그가 개입할 여지가 존재한다는 것이지.
웬만한 녀석이라면 근처에 오는 것만으로 휩쓸려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테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신수와 괴수의 대결이니까 신경 안 써도 되지 않을까?]이젠 나더러 태연하게 괴수라고 하는군. 너희 기준에서 한없이 하찮은 인간 아니었나.
[이 정도면 인간 취급 받으려는 네가 이상한 거야.]진짜 내가 이상한 거라고?
[응.]너무 당당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용용이와 천둥새에 관해 얘기를 나누면서 스탠퍼드를 방문해서 박사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대학원생(기프트)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요령을 터득했다.
내가 기존 대학원생(만득이, 광심이, 제련이)을 동원해서 다른 기프트에도 자아가 있을 수 있는 걸 주목하고 끌어들이려고 한다고 말하니 완전 흥분해서 달려들기도 했다.
“대학원생으로 대학원생 모집이라니! 준호는 우리를 뛰어넘을 재능을 가지고 있어!”
“이건 혁명이야! 졸라 대단해!”
“준호를 보면 재능이 졸라 차이나는 걸 느껴.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지?”
박사들의 극찬을 받으니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격려해서 신입을 모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 후에 나는 막심 게데스를 상대하면서 기프트 점검에 나섰다.
튼튼한 녀석 답게 잘 버텨줘서 두들기는 맛이 있게 해줬다.
어떻게 보면 천둥새를 제거하는데 나보다 녀석이 더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리그를 없애기 위해서는 천둥새를 없애야 하니까.”
그 정도로 적극적일지 몰랐군.
“신수가 어떤 방식으로 힘을 전달하는지 모르지만 아르고스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던 건 천둥새의 역할이 크다. 녀석이 사라져야 리그의 구심점을 제거할 수 있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짙은 살기가 배어나왔다. 누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가질 수 있는 일이니까. 그 과정에서 실력이 부족하면 짓밟히는 걸 테지.
“딱히 양보를 바라진 마라. 내 손에 걸리면 죽는 거다.”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네가 먼저 제거하면 상관없고.”
“고마운 말이로군.”
녀석은 별 반항 없이 수긍하면서 슬쩍 날 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리그에 갖는 원한을 갖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신파 타임이었다.
막심 게데스는 제법 큰 결심을 하고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난 그게 달갑지 않았다.
“별로 안 궁금한데.”
“…….”
“때는 리그가 파티에서 떨어져 나갈 무렵이다.”
“안 궁금하다니까.”
[쟤는 얘기하고 싶어 하는 건데? 궁금하니 그냥 좀 듣자.]나는 공략에 실패했지만 용용이 공략은 성공한 셈이로군. 뻔하디 뻔한 신파에 관심이 없었지만 막심 게데스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해봐.”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말 그대로 뻔한 신파였다.
리그로 인해 처와 자식을 모두 잃은 한 남자의 복수기.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바치려 했고, 그렇게 손에 넣은 힘으로 복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복수를 위해 자기 생식능력까지 포기하면서 힘을 손에 넣고… 저 인간 멋지다.]정작 듣는 나는 심드렁한데 용용이가 난리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공감대였지만 더 따져봤자 피곤할 테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보통은 공감하면서 힘을 보태주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넌 생식능력 포기하는 게 얼마나 큰 결심인지 아냐고!]쓸데없는 감상은 대결에서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이다.
약하면 밟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넌 강하지만 너희 가족은 아니잖아.]그러니까 내가 멍멍이를 키워놓고 근처에 버서커를 배치해놓은 것이다.
정주호도 초인이 되면 근처에 배치해둘 생각이고.
별로 공감 가지도 않는 이야기에 힘을 보탤 이유가 없다.
[진짜 야박하다.]감상에 빠질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지 연구하는 게 훨씬 낫다.
용용이를 보니 다 들은 것 같아 난 주의를 환기시켰다.
“내가 널 더 강하게 만들어주지.”
“어떻게?”
“일단 살아남아.”
무사하면 자연스럽게 강해져있을 것이다. 버서커도 그렇게 성장했으니 막심 게데스에게도 적용되겠지.
버서커보다 더 튼튼하고 회복력도 좋다. 좀 더 힘을 써도 되겠다.
“자, 잠깐……!”
곧이어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확실히 만득이들에게 자유도를 부여하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늘어난 거 같다.
내가 지시한 부분에 집중해서 제 역할을 해내는 삼총사(만득, 광심, 제련)이 날 보좌하고 나는 기존 기프트 활용에 힘을 쓴다.
이것은 신경을 분산하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말살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만득이들 같은 대학원생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기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녀석들을 찾아보라고 했는데 잘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좀 더 쓸모 있는 녀석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났을 무렵. 나는 삼총사의 다급한 호출을 받게 되었다.
심상세계 안으로 진입하니 내게 힘이 되어줄 녀석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
역시, 내가 감지하지 못한 자아가 있었나보다. 말하는 걸 보면 한 녀석인 거 같은데 그게 어딘가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신입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재수 없는 얼굴을 발견했다.
이 녀석들, 미쳐버렸군.
“뭐야, 날 보고 싶었던 거 아닌가?”
날 보며 히죽 웃고 있는 건 혈종이었다. 그러니까 만득이 이 녀석들이 신나서 찾아낸 지원군이 다른 누구도 아닌 혈종이란 말이지?
놈들을 믿은 내 잘못이로군.
한심함을 느끼곤 혀를 찼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제 할 말만 지껄였다.
“재밌는 짓을 하던데? 꼬봉들에게 일을 전담시켜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예전의 너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일이지.”
“변태처럼 그걸 보고 있었냐?”
“나야 요즘 취미가 네가 하는 걸 보는 일이니까. 꽤 강한 적을 찾아나서는 것도 흥미롭고 네가 자중하는 모습도 신기하게 보이더군.”
“난 너처럼 미치지 않았으니까.”
혈종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나랑 똑같은 얼굴이지만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게 생겼군.
“웃기는 소리하는군. 내 성격은 너에 기반 한 것이다. 내가 미쳤다는 것은 너도 미쳐있다는 의미가 되지.”
“헛소리하지 말고.”
“진실을 알려줘도 들을 생각이 없군. 하긴, 원래 그런 녀석이었지. 남 탓으로 돌려야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녀석은 재수 없게 느물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저렇게 여유가 넘치는 건지 모르겠다.
다음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이런 태도를 보인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너, 지금 내 힘이 필요한 거잖아? 그러면 내게 애원을 해야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대학원생 하나 들이기 위해 매달려야 한다는 건가.
그걸 아는 녀석은 나한테 소위 갑질이라는 걸 하는 거고?
“자, 부탁해봐. 태도에 따라서 내가 협력이라는 걸 생각해보도록 하지.”
“부탁하면 들어줄 생각은 있고?”
“고민 정도는 해볼 수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체가 자존심을 접고 하는 부탁인데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내가 천둥새를 잡기 위해 자기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혈종이 착각한 게 있다. 녀석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나도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녀석에게 몸을 빼앗기고 훨씬 오랫동안 지켜봐온 건 나다.
“내가 왜 부탁 하냐. 할 거면 네가 해야지.”
“뭐? 하!”
혈종이 코웃음쳤다.
“너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몸 근질거리지? 부수고 찢고 가르고 싶어서.”
“……!”
녀석의 표정이 굳었다.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심상 세계라서 불가능한 게 아쉬울 따름이로군.
“나서고 싶은 건 너지. 그러니 만득이들한테 신호를 보낸 거고.”
삼총사에게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있는 녀석이다.
그런데 굳이 이 자리에 불려나왔다? 그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다.
나는 진미를 앞에 둔 것처럼 느긋하게 녀석의 표정을 음미하다가 말했다.
“무릎 꿇고 대학원생이 되고 싶다고 애원해봐. 그럼 생각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