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307
307화
프란츠 영감에게 떡밥을 뿌리는데 성공한 나는 식사나 하고 가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방문은 고속비행을 시험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아직 괜찮으니 볼일 하나를 더 보는 것도 좋겠지.
“확실히 기습 방문이 좋단 말이지.”
그 과정에서 수확을 거두기도 했고.
앙투안을 잡은 건 순전히 운이다. 언제고 한 번 손봐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걸려든 게 행운이지.
밖으로 나오니 슈프레 강 위로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이 보였다. 그 위로 반짝이는 별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마물이 등장하기 전에는 저 별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하던데 새삼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서울에서도 석유가 수급되면서 환경단체가 시위를 하고 난리던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왜 그러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감상에 빠졌네?]“난 감상에 빠지면 안 되냐.”
[그게 너랑 어울리진 않잖아.]“그렇긴 해.”
그저 조금 전까지 서울에 있던 내가 베를린에 위치하게 된 것이 묘한 감흥을 가져다주어서다.
세계가 좁아졌다고 할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됐으니 어디든 내 시야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자가용을 몰게 됐을 때 이런 기분이었지. 서울에서 베를린까지 도달하면서 크게 부하가 걸리지도 않았으니 원한 건 모두 얻은 셈이었다.
잠시 베를린 하늘을 보며 감상에 빠져있던 나는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어디 가려고?]“여기까지 왔는데 자칭 신이라는 녀석을 봐야지.”
난 바티칸을 향해 고속비행을 시전했다.
*
* *
“…….”
나이트가운을 걸친 알레시아 성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한 번 잠들면 아침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신의 계시를 받아 교황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그녀의 방은 검소했다. 스스로 명품이 되길 원하지, 명품의 덕을 보길 원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그 결과 바티칸에 위치한 그녀의 거처는 성소가 되었고 그곳에서 신의 말을 대신하면서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본래 이탈리아가 종교의 중심이었던 만큼 그 상징성은 여전했다. 바티칸에서는 성녀를 영입하여 영향력 확장을 꾀했고, 성녀는 신의 계시를 받들어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유럽 각지에 산적한 안건을 처리해나갔다. 대립이 발생하면 중재를 하고, 제3자의 관점에서 한 곳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고.
신의 존재를 앞세웠기에 유럽 전역이 그녀를 존중하고 경애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성녀가 되기 전에도 뛰어난 각성자였던 그녀는 초월적인 감각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지에 가까운 능력과 본능을 활용하여 지금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그런 감각에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창문 앞으로 다가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환한 보름달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 하늘은 평화로웠으나 성녀의 본능은 비상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이런 위기감은 일찍이 겪어본 적 없다. 드라쿨레아가 등장할 때보다 더 서늘했다.
날씨가 서늘함에도 어느새 그녀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가득해졌다.
어느 순간, 밝은 보름달 위로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안개가 드리우더니, 별안간 공간이 뒤틀리다가 겹치는 현상이 벌어졌다.
파아앗!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어느 순간 자리하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누구보다 어둠과 잘 어울리며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게 만드는 존재.
이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헤드 브레이커.”
만약 그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마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마물도 아닌 최소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
이 자리에 등장한 존재가 최준호라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성녀의 긴장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최준호에게 이런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걸로 알았다.
그 사이 새로운 기프트를 얻기라도 한 걸까. 지금도 압도적인 강함으로 세계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끝없이 강해지는 모습에 두려움이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허공 위에 모습을 드러낸 최준호는 정확하게 성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전신을 휘감은 것은 성녀가 알던 것과 사뭇 달랐다.
치이이익!
검은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어둠을 꿰뚫고 자세히 살펴본 그의 전신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난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갈가리 찢겨나간 상태였다. 그것이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오랜만이군.”
“…어서 오세요.”
“잠시 시간 괜찮나?”
“그걸 아는 분이 이런 시간에 찾아오나요?”
“일이 지금 끝나서. 배려를 바라나?”
“바라면 해줄 거고요?”
“아니.”
한 번 툴툴 댔지만 애초에 최준호에게 이런 에티켓을 기대한 적이 없다. 애초에 저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라 해야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감각이 보내던 경고가 한결 누그러졌다는 점이다.
“옷 갈아입을 시간이 필요하면 말해.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그제야 성녀는 자신이 나이트 가운을 걸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식은땀을 가득 흘린 탓에 달라붙어서 적나라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겁을 했겠지만 상대가 최준호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지적을 받지 않았다면 이런 차림이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으니 들어와요. 어차피 다른 마음을 먹을 사람도 아닌 걸 아니까.”
“남자로도 안 본다는 건가?”
“한 번이라도 흑심을 드러냈으면 내가 이러겠어요? 들어오세요.”
“…….”
최준호가 입을 닫고 순순히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면서 성녀는 묘한 승리감에 휩싸였다.
한편으로는 왜 자존심이 상하는 건지.
아니, 그 이유를 모르면 바보겠지.
‘칫.’
속으로 혀를 찬 성녀는 최준호를 안내하여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내려서 내밀었다.
교황조차 얻어 마시고 싶다며 종종 말하는 특제 에스프레소였지만.
“난 아메리카노가 좋은데.”
저딴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성녀는 부아가 치미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런 구정물보다 이게 더 나아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답지 않게 또 금방 포기한다.
컵을 들어 에스프레소를 살짝 맛본 최준호가 말했다.
“멀리서 왔더니 목이 마른데 물도 주겠어?”
“네.”
말을 잘 들어서 특별히 얼음물로 내밀었더니 최준호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에스프레소가 든 잔을 그대로 얼음물에 부어버린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미지근해도 먹을 만하군.”
“이, 이익!”
끝내 구정물로 만들어버린 행태에 부아가 치미는 걸 느끼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 앞에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남자를 상대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던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최준호가 잠시 구정물로 목을 축이는 걸 보면서 성녀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일어나서 루틴이 어그러졌지만 피로는커녕 정신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과연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칠지 걱정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여기까지 온 이유인가요?”
“어. 먼저 볼 일도 봤고.”
“어디서요?”
“베를린.”
“왜 여기가 아니라 거기를 먼저 들른 거죠?”
“그게 왜?”
“…그냥요.”
저도 모르게 발끈했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건 성녀도 알고 있었다. 하긴, 이 무심한 남자한테 그걸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웃기긴 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성녀는 최준호가 찾아온 용건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요?”
“저번에 듣긴 했지만 한 번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서. 네 가 모시는 신은 널 24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나?”
갑자기 본론으로?
성녀는 그 질문에서 위험한 냄새를 맡았지만 순순히 수긍했다.
“우선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한다면 아니에요. 그분께서는 하찮은 저를 24시간 전부 지켜보지 않으세요.”
“지켜볼 땐 알 수 있고?”
“네.”
“그럼 지금 지켜보고 있나?”
“…아니요.”
최준호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났다. 성녀는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성녀 앞으로 구정물이 내밀어졌다.
“목 마르면 이거 줘?”
“그딴 건 줘도 안 먹어요.”
“맛 괜찮던데.”
최준호는 구정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믿으라고요?”
“난 약속하면 다 지키는 편인데.”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 신이 내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신께서 그 요구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자신은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존재인데 최준호는 옆집에 사는 빌리 아저씨를 부르는 것처럼 편안하게 보였다.
‘위험해.’
다시 감각이 비상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신마저도 경외가 아닌 도전의 대상으로 생각할 줄이야. 최준호라는 인간은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녀는 아직도 신을 영접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신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던 경건한 느낌. 그 속에서 무한한 해방감과 고양감을 느꼈고, 뭐든 해낼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신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자신을 따른다면 바라는 모든 걸 이뤄주겠다고. 그리고 성녀가 되어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었다.
하지만 최준호는 그 신을 건드리려 한다. 그 끝에 존재할 것은 충돌일 테고.
성녀는 신과 최준호가 공존하길 바란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내가 듣고 싶은 건.”
최준호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서늘한 눈빛이 비수처럼 틀어박혔다.
“네 생각이 아니다.”
“…….”
“네 사견을 섞지 말고 전달부터 해. 내가 대화하고 싶다고.”
“…알았어요.”
자신의 말을 들을 기색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성녀는 무력감을 느꼈다.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성녀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신이 기도에 들어주었다.
파아앗!
환한 빛과 함께 신의 의식과 동기화 시킨 성녀는 거대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게 보였다. 광휘에 휩싸여 눈동자만 드러났지만 성녀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고양감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신이 신을 찾은 것은 공적인 이유가 아닌 지극히 최준호의 ‘사적인’ 이유여서다.
신은 절대 사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종속되길 바라며 최준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 요구에 순응했다.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하지만 신은 노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끝까지 듣고 답을 들려주셨다.
성녀는 속으로 안도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의 의중을 전달했다.
최준호의 제안에 대해 신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거절, 거절이라.”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기색이었다.
그것이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 고요인 거 같아 더 긴장이 되었다.
“다시 한 번 전달해. 이 말을 듣고도 거절한다면 더 요구하지 않지.”
“그러죠.”
하지만 이어진 말은 성녀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걸… 말하라고요?”
“못할 이유는?”
“…….”
“가서 전달해.”
“당신은 기어이 싸움을 원하는 건가요?”
조금의 눈치도 느껴지지 않아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최준호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글쎄다. 이게 싸움을 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마 네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전달하고 오죠.”
이를 악 물고 다시 신을 찾은 성녀는 최준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쫄았냐?]이 말을 듣고 신이 노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커지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아니고서는 신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다 헤드 브레이커 때문이야.’
괜한 상념이 생겨난다고 툴툴거릴 때 신께서 대답했다.
데려오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신의 대답을 전달하니 최준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봐, 되잖아?”
“…….”
왠지 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