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364
364화
회심의 기회를 놓친 헬 마스터는 뒤로 물러나면서 거리를 뒀고, 나도 방금 전 물씬 다가왔던 죽음의 향기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일종의 음미 과정이다.
이건, 기존의 기프트와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거, 어떻게 한 거지?”
“이걸 피할 줄이야.”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지. 나도 그냥 물어본 거다.”
“…….”
헬 마스터의 입이 닫혔다.
녀석을 닥치게 만든 것과 별개로 방금 전 공격에서 전해지는 여운은 실로 대단했다.
아무래도, 신수의 권능과 인간이 갖는 기프트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 듯 싶었다.
대표적인 예가 고속비행이다. 원형에 가깝게 가져온 이것은 발동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육체를 갈가리 찢어버릴 만큼 강한 여파를 동원한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헬 마스터가 보유한 즉사 기프트 또한 본래 신수가 보유했던 원형에 가까운 형태일 것이다.
나는 그대로 가져온 대신 여파가 존재하고 헬 마스터는 발동 조건이 더 까다로워진 걸 테지.
분명 첫 충돌 당시만 해도 헬 마스터에게서 ‘즉사’가 담긴 기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차례 충돌이 이어지면서 경계가 느슨해지려던 순간에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
왜 굳이 번거롭게 공격을 뒤섞었을까.
난 발동조건을 그대로 가져가는 대신 후폭풍을 감당했고 녀석은 발동조건을 바꾼 대신 후폭풍을 없앤 것이다.
“그거, 네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구나.”
“……!”
헬 마스터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허를 찔린 셈이지만 궁지에 몰리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걸 안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특정 조건을 채워서 죽음을 만들어낸다는 건데. 그게 격에 따라 다를지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달라질지 모르겠어.”
대체 어떤 원리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나라서 눈치를 챈 거지, 헬 마스터를 상대하는 적은 평범하게 맞서다가 다가온 죽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목숨을 내주었을 것이다.
“더 해봐.”
“…얼마든지.”
헬 마스터의 신형이 쇄도했다.
*
* *
‘수가 하나 드러났나.’
헬 마스터, 션 베일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헤드 브레이커를 상대로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오산에 불과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훨씬 강하고 더 빠르다.
무엇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전투 지능’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모든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실전의 마스터라고 불리는 블랙하운드보다 더 높은 전투 지능이었다.
‘짧은 순간 내가 만들어낸 함정을 파악하고 내가 선사하는 죽음을 완전히 피해냈어.’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본질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션 베일리는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걸 느꼈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가 모셨던 ‘그 분’ 외에 없었다.
‘더 은밀하게, 더 확실한 죽음을 선사한다.’
그분을 떠올린 션 베일리는 자신이 얻은 기프트의 기원을 상기했다.
그는 본래 이름 없는 종교의 신도로, 모든 죽음을 관장하던 ‘그 분’에게 직접 선택 받았다. 그리고 스스로 소멸을 선택한 ‘그 분’의 권능을 하사받아 세상에 나왔다.
대적하는 모든 적에게 죽음을 내리는 헬 마스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이유다.
의식이 존재하던 그 순간부터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서 오직 실력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걸 보아온 션 베일리에게 이 세상은 모순 덩어리였다.
기괴하게 꼬이고 뒤틀린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려던 차에 손을 내민 것이 아르고스였고 그 이상에 자신의 꿈을 투영하려 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던 것이 망가진 건 최준호 때문이었다.
세계 전역으로 세력을 뻗히며 세계를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를 키워나가던 리그가 비틀거리고 끝없이 축소에 축소를 거듭했다.
그 결과 남미에서도 온전한 전력을 투사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녀석만 없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분의 이름을 걸고 확실한 죽음을.”
*
* *
내가 보기에 헬 마스터가 만들어내는 ‘즉사’에는 몇 가지 조건이 설정되어 있다.
아마 녀석에게 이 능력을 부여한 신수가 설정한 조건이거나 녀석의 실력이 신수에 비해 부족하니 조건을 충족해야 발동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교묘하게 자기 수를 뒤섞는 행동을 보고 곧바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 용용이가 있었으면 아는 척 하면서 끼어들었을 텐데, 꼭 필요할 때는 자리에 없다.
“꽤 재밌는 장난질인데.”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면서 죽음을 경고하는 것은 생경하면서 전율을 일으켰다.
천둥새를 상대했을 때와 또 다른 감각이다. 당시에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도전하여 극복할 수 있는 월등함에 부딪쳤다면 헬 마스터가 만들어내는 죽음은 절대 파훼할 수 없는 무조건적이었다.
저것에 맞서서도 맞설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자꾸 부딪쳐보고 싶은 건 왜일까.
이렇게 미끼를 뿌려놓으면 입질이 들어올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부딪쳐봐. 그리고 죽음에 힘껏 저항해봐. 죽는 건 걱정하지 마라. 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네 육체를 알뜰살뜰 써줄 테니.]어김없이 끼어든 혈종이 한껏 심기를 어지럽힌다.
예상대로다.
난 충동에 휩싸인 척, 헬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잔뜩 밑밥을 깔아놓는 것도 있지만 빈틈이 드러난다면 가차 없이 목을 비틀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헬 마스터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나를 놀라게 만든 건, 녀석이 죽음을 만들어내는 설정이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
한 차례 즉사 기프트를 피해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었다.
그물처럼 펼쳐져 쇄도하는 죽음의 힘을 고속비행으로 간신히 피했다.
짧은 거리를 별도의 준비 없이 펼치려고 하니 전신의 근육이 찢어지고 뒤틀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역시,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많다.
“이번 건 위험했어.”
“언제까지 이런 장난을 해야 하지?”
“난 장난 아닌데?”
“더 이상 말장난을 하고 싶지 않다. 너도 즐길 것은 다 즐겼지? 그러니 이제 우리 손을 잡아라.”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래?
하지만 녀석은 농담이 아니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권유하기 시작했다.
“네 사상은 리그와 다르지 않아. 그런데 왜 우리를 거부하는 거지?”
“내가 너희랑 같다고?”
“아니라고 말할 생각이야? 누가 봐도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걸 네가 보여주고 있는데?”
나더러 빌런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지껄이던 아르고스급의 개소리와 비슷한 등급이었다.
이젠 나더러 리그가 추구하는 낙원을 만들어놓고 있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
“네가 사는 나라가 우리가 추구하는 나라의 모습이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그 유토피아를 지금 리그가 추구하는 것이라 지껄이는 건가.
“능력 있는 각성자들이 우대받는 곳. 너희 대통령도 실력 있는 각성자고 국정 전반에 각성자들이 들어가서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어. 능력 있는 각성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대우받으며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 전부 네가 만든 거지. 그게 우리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사회이자 국가다.”
“…….”
녀석의 개소리가 그럴 듯한 건가 아니면 두뇌 회전을 지나치게 많이 시켜서 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해 힘을 보탠 게 리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게 황당했지만.
“넌 이미 우리가 원하는 훌륭한 인재상이야. 그러니 우리 손을 잡아. 아직은 되돌릴 수 있어.”
“진심으로 내가 감명 받고 합류할 거라 생각한 거냐?”
“아니.”
“근데 이 무의미한 짓을 저지르냐?”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헬 마스터가 씩 웃었다.
“네게 씨앗을 심어두는 거야. 리그의 씨앗.”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눈치 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리그가 사라지더라도 그 이상은 내가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떨쳐내려고 할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커질 것이다.
분명 녀석은 그걸 노리고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개수작이라는 의미다.
“그게 완성되려면 네놈의 목이 이곳에서 비틀려야겠어.”
“네게 죽음을 선사한다면 뭐든 상관없어.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어.”
헬 마스터는 확신이 실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더라도 이 자리에서 너도 죽어.”
서로의 목숨을 원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로군.
나와 헬 마스터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
* *
헬 마스터의 즉사기는 일종의 빌드업을 통해 발현된다.
녀석의 신체 일부나 포스, 들고 있는 무기를 매개로 기프트가 발동되고, 이후에 은밀히 빈틈을 파고들어 죽음을 선사한다.
서서히 물들어가는 죽음.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라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여기니까.
하지만 즉사 기프트를 자유자재로 발현하는 것을 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물결이 시시각각 나를 덮쳐 오고 있었다.
고속비행으로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헬 마스터가 노리는 것이 내가 고속비행을 발동하는 그 순간이다.
녀석의 권능이 발현되는 ‘죽음’은 상대가 기프트를 발동하는 찰나에 만들어지는 공백을 파고들어 완성이 된다.
위력이 강한 기프트일수록 주변의 포스가 반응하는 법이니까.
가장 유용한 고속비행이 도리어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이쯤이면 즉사가 아니라 기프트 킬러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결국 고속비행을 사용할 수 없으니 녀석이 시전하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기프트 원리인가.”
“와, 이걸 눈치 챘다고? 진짜 대단한데?”
감탄 섞인 목소리.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자신이 승자라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는 게 어때? 나도 이렇게 해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아직은 되돌릴 수 있어.”
“헛소리.”
“끝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거야? 너답기는 해.”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헬 마스터에게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확실한 죽음을 내려줄게.”
헬 마스터가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과 달리 녀석의 공세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물러나기 급급했다.
직접 부딪치면 녀석이 만들어낸 죽음에 노출된다. 그렇다고 거리를 두고 저격을 하자니 녀석이 죽음을 활용할 공간을 제공하는 꼴이 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지만 그것 또한 변수를 동반한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흐름으로 이어져야 대타가 나타날 테고.
슬슬 미끼를 물어야 할 텐데.
[답답하게도 하는군.]이 광경을 지켜보던 혈종이 기어이 한 마디 했다.
걸려들었다.
[겁쟁이처럼 도망칠 생각이냐?]내가 언제 도망을 치려고 했다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다.
[영락없이 도망치는 쥐새끼 꼴이로군.]네 녀석이라면 결과가 다를 것처럼 얘기를 하는군.
나는 다시 한 번 미끼를 던졌고.
녀석은 그것을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나라면 네놈처럼 겁 먹은 쥐새끼처럼 벌벌 떨고 있지 않을 것이다.]혈종은 날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일 테지만, 난 녀석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는 아주 강한 힘이 담겨 있다.
여태까지 혈종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녀석은 늘 내 육체를 차지하겠다고 기회를 엿보고 있고 나는 그걸 방어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수비하는 측의 장점은 요새를 꽁꽁 걸어 잠그고 상대가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설 수 있다면 반대로 요새 문을 활짝 열어 적을 들여놓을 수도 있다.
녀석이 허락의 의사를 드러낸 것이 중요했다.
하고 싶어하는 측과 양보하고 싶어하는 측의 생각이 일치했으니까.
그렇게 성사되는 게 거래 아닌가?
순간, 난 꽁꽁 걸어 잠근 빗장을 풀어버렸다.
“그럼 네가 해보던가.”
[뭐?]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의식의 교체.
난 심상 세계로 빨려 들어가 육체 통제권을 넘겼고.
내 육체를 혈종이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