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383
383화
일본에서 전해진 소식이 진세정을 거쳐 내게로 전달되었다.
흥미롭군, 흥미롭다.
일본어로 적합한 단어를 찾아보면 오모시로이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내게 이런 제안을 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기들이 내 손안에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수 없지.”
다만 이렇게 스스로 안겨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기에 다소 황당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해온 제안은 책임 소재를 놓고 현 총리와 전 총리간에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것이다.
그걸 내게 권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했다.
신종 자살 방법인가?
“일단 일본에 가면 되나.”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기다리던 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졸라맨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전신이 근육질인 녀석이 가운을 걸치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끈거렸다.
“준호. 졸라 오래 기다렸지? 미안.”
“아니, 별로. 갑자기 찾아온 건데 괜찮나?”
“이 정도 가지고 뭘.”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겨버린 졸라맨은 날 부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더 이상 빌런을 잡아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실험 대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안 그래도 준호로 졸라 의심 받고 있잖아?”
“증거는 없어.”
“…증거가 없어도 세상 사람들은 이미 심증으로 다 준호인 걸 졸라 확신하고 있을 걸.”
“확신하라지.”
어차피 내가 했다는 증거가 없더라도 다 날 지목하더라.
[사실 너밖에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없기는 해.]저우콴 때도 그렇고, 증거가 없는데 참 억울하다.
[네가 저질러놓고?]용용이가 황당해하건 말건 나는 졸라맨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빌런이 필요 없는 이유는?”
“샘플이 충분히 모였어! 지금부터 해야 하는 건 그동안 확보한 자료를 가지고 더 깊이 연구하는 거야.”
“그래?”
난 순순히 수긍하는 의미로 대답했지만 졸라맨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보다.
“뭔가 아쉬워 보여.”
“타국에서 빌런 잡아오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했거든.”
“빌런 잡는 게 재미있다고?”
“하나하나 사라질수록 세상이 평화로워지니까.”
그걸 예고도 없이 그만두게 되었으니 내겐 소소한 재미가 하나 사라졌다고 봐야겠다.
“…….”
“안 그래도 요즘 빌런 잡아오기가 어려워지고 있었으니 그만두는 게 낫겠지.”
“잘 생각했어.”
더 이상 행동에 옮기지 않는 걸 가지고 이런 취급을 받다니, 기분이 묘하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미국은 어때?”
“뭐가?”
“요즘 돌아가는 상황.”
그러면서 나는 일본에서 해온 제안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현 총리와 전 총리가 날 불러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한다는 내용을 말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졸라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쳤군, 다들 머리가 졸라 돌았어. 지금 두 사람은 새로운 자살 방법을 생각해낸 거야?”
“왜 내가 죽일 거라고 생각 하냐.”
“그럼 무사히 살려둘 거야?”
“가만 둘 수는 없지.”
“봐, 그럼 죽는 게 맞잖아.”
팔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고, 팔다리가 없어질 수도 있는 건데 왜 죽는 것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녀석의 머릿속에 내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 거지.
[아직까지 이미지를 찾는 네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그래서 미국은 어떤데?”
“…개판이지, 뭐.”
“자세히 얘기해봐.”
천명국에게 들은 게 있지만 현지인이 보는 건 다를 수도 있었기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어진 설명은 천명국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책임을 미루다가 준호를 부르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거야!”
“이젠 내가 가는 것 자체가 불상사냐.”
“가면 누구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
책임을 미루다가 내전이 벌어진 곳이나 책임공방을 놓고 날 불러들이는 곳에 비하면 이성이 살아있기는 하다.
“내 눈에는 책임을 지기 싫어서 가장 열심히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른 결정을 원해?”
“길어지면 이자까지 쳐줘야지.”
“본국에 전달할게. 준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결정하라고!”
사색이 된 졸라맨이 인사도 없이 내 앞에서 사라졌다.
[저기도 책임을 놓고 시끄러워지겠네.]이거 본의 아니게 재촉한 꼴이 되었군.
*
* *
구질구질하다 못해 막장으로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내가 일본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
나 홀로 결정하고 이동하려고 했는데 천명국이 그 전에 꼭 청와대를 방문해달라고 사정해서 결국 청와대를 찾았다.
천명국은 걱정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전부 다 죽이면 안 됩니다.”
“안 됩니까?”
“예, 그랬다간 다른 곳들이 전부 책임을 회피하고 배를 째라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거야 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난 천명국의 조언에서 저우콴의 케이스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빌런보다 더 악랄한 독재자를 비행기 사고로 위장해 처리했고, 실제로 내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모두 내가 손을 썼다고 생각하던 그 사태를.
그 이후로 누구도 내게 기프트를 알아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좀 더 교묘하게 처리했어야 했나?
하지만 증인을 모두 없애는 것이 가장 완벽한 암살이듯,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은 시신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초인 정도 되면 이 작업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머리를 잘 굴렸으면 지금도 초인을 끌어당길 수 있는 수단이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안 죽이겠습니다.”
“…다짜고짜 손을 써서 병신으로 만드는 일도 삼가셔야 합니다.”
“그럼 할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초인님이라면 좋은 방법을 찾아내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초인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천명국은 내게 부담감을 팍팍 줬다.
죽여도 안 되고 팔다리를 꺾어놓아서도 안 된다고 하면 대체 어떻게 처리를 하라는 건지, 이런 게 바로 손발을 다 꺾어놓은 게 아닐까 싶었다.
고민이 되는군.
죽이지도 않고 팔다리를 비틀어놓지도 않으면서 책임지게 만들 방법이 뭐가 있지?
…그냥 목을 뽑아버리면 안 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당연히 나도 농담한 거다. 농담한 거.
[아무도 네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진심이 새어 나온 거라고 생각할 걸? 내가 이건 100% 장담할 수 있어.]…그래, 이쯤이면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상대는 100% 과격한 방향으로 해석하더라.
간혹 터무니없는 오해마저 있어 억울할 때가 있었다.
[이런 걸 너희들 말로 스스로 자초한 거라고 하던데. 그러려니 하는 게 속 편하지 않아? 어차피 전부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그걸 옆에서 깐족대는 용용이가 더 얄미운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난 그저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뿐이야. 날 원망하지 말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걸 추천할게.]말을 말자.
천명국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일정을 조율한 뒤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짧은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이 날 마중 나왔다.
40대 초반에 각진 턱과 부리부리한 눈빛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후쿠오카에서 날 수행하던 박영후였다. 그는 그동안 승진을 거듭한 끝에 팀장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오랜만입니다.”
“다시 초인님을 보좌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제 일본어도 가능한데 팀장님을 귀찮게 만들었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곳에 머무르시려면 여러 귀찮은 일이 발생하실 텐데 제가 커버하겠습니다.”
“겸사겸사 일이 터지는지 살펴볼 테고요.”
“…하하, 사소한 문화 차이로 터무니없는 오해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 역할은 불필요한 충돌이 벌어지지 않도록 중재하는 것이니 공기 취급하셔도 됩니다.”
감시로 따라붙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군.
“누가 지시한 겁니까?”
각성자안보실 소속이니 각성자안보실장인가 싶었는데.
“대통령님이십니다.”
“그래요?”
“예. 대통령님께서 초인님을 믿고 있지만 상대가 워낙 뻔뻔한 정치인들이다 보니 최악의 상황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명국의 당부였으니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시뮬레이션 보유자인 그가 말하는 사건사고는 높은 확률로 발생했다. 그때마다 적절한 대처 방안이 준비되었기에 큰 사고로 번진 적이 없고.
천명국이 보기에 오늘 사고가 벌어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이거나 목을 뽑아버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
나 나름대로 안심하라고 건넨 말이지만 박영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둘 다 죽인다는 걸로 들릴 걸.]그런가? 누군가를 안심시킨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싶다.
“가시죠.”
난 박영후가 준비한 차를 타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
* *
최준호의 입국 소식은 곧장 수상 관저에 정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히가 총리는 자신과 완전히 운명 공동체가 된 각성장관을 호출했다.
“왔군. 최준호의 상태는 어때 보였나?”
“상당히 좋아보였습니다. 수행원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 그 말은 우리의 대응 방법에 따라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최고의 결과’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그런 소설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책임 지지 않고 모든 책임을 다케다에게 미루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팔 하나는 내어주더라도 다케다의 목은 날아가게 만들 계획이었다.
“명심하게. 최준호를 설득하지 못하면 자네나 나나 무사할 수 없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지. 이번 책임론에서 우리 책임이 되면 자네나 나나 목이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준비된 자료는 완벽합니다. 최준호가 온 자리에서 모든 책임은 전 총리께서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때 다케다 총리의 오른팔이자 심복이라 불린 인물에게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방금 전 그 말은 완전히 갈라섰다는 선언과 같았기에 히가 총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각오가 보기 좋군.”
“대신 총리께서도 저와 한 운명이라는 걸 잘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애초에 소수계파였던 내게 기회가 온 거니 결실을 나눠도 모자라지 않아.”
모든 책임을 지고 몰락하는 것은 전 총리 측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임한 협상 자리였다.
다케다 측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히가 총리가 자신 있는 이유는 신성그룹을 압박하는 모든 과정이 전 총리로부터 진행되었다는 증거가 있어서다.
저쪽에서는 수습의 책임을 이쪽에 전가하려고 하겠지만 딱히 수위를 높이지 않은 점, 재고의 여지를 둔 점을 어필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준비된 자료로 상대를 향한 악감정을 심어주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최준호가 자료 받길 거부했습니다!”
“대체 왜?”
“모르겠습니다.”
“설마 다케다에게 넘어간 건가?”
그러나 그 예상도 빗나갔다. 최준호는 다케다 측이 건네는 자료도 마찬가지로 거절했던 것이다.
대체 최준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계산이 복잡해질 무렵, 최준호가 보낸 박영후가 제안을 해왔다.
“각자 입장만 반복해서 되풀이하면 제대로 된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초인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초인님은 양측이 한 자리에 모여서 자료의 진위여부를 따져보고 싶어 합니다.”
“설마 찾아다니기 귀찮아서 한 자리에 모아놓는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아마도.”
박영후의 목소리에 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