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393
393화
천명국의 말을 듣는 순간 정주호가 아찔해하는 게 보였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제야 현실을 자각했네.]그러게 말이다.
구경하는 내 입장에서 흥미진진했다.
역시 남이 나락으로 향하는 건 각별한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대통령이 되라는 제안이 나락으로 가는 거였지?
[자기가 싫으면 그게 나락인 거지.]그도 그렇군.
납득하기 싫지만 용용이한테 한 수 배웠다.
그 사이 천명국은 차분한 목소리로 정주호를 설득해나갔다.
“이 나라는 오래 전부터 기로에 서 있었어. 전에는 멸망의 기로였지만 지금은 부흥의 기로지. 그걸 확실하게 만들려면 5년의 시간으로 부족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대신 너만큼 확실한 사람은 없지.”
“아니, 진짜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네.”
정주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5년 가까이 그물을 준비해온 천명국이 완벽하게 걸려든 물고기를 순순히 놔줄 리가 없다.
내가 볼 때는 너 죽고 나 죽자는 걸로 보이긴 했지만.
“너무 걱정마라. 네가 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믿지 말고 그냥 자유롭게 놔주면 안 됩니까.”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가만 두겠나.”
“아니, 형님. 진짜 난 정치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요.”
“나도 정치해본 적 없다.”
“…….”
“그리고 정치를 오래 했다고 국정을 잘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정주호 초인은 부산과 평양을 훌륭하게 보살핀 적도 있고.”
“그건 당시에 전시에 가까운 상황이어서.”
“그런다고 내가 생각을 바꿀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진짜 머리가 아파서.”
정주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뒤를 이어 5년을 하란 거요?”
“5년이 아니라 8년이다.”
“설마 날 8년 동안 시키려고 개헌을?”
“확실한 인물이 8년간 맡아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테니까.”
“와, 진짜.”
“다 너와 국가를 위해서 진행한 일이다. 오랫동안 숨기느라 힘들었다.”
“허허.”
잠깐이지만 정주호는 족히 5년 이상 늙은 듯했다.
저렇게 급속도로 늙은 건 죽음의 공포를 극한으로 느낀 사람에게서밖에 본 적이 없다.
그나저나 대통령 하면 더 늙던데.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걱정을 댁이 안겨다 준 걸 알면서 그러는 거요?”
“내가 널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게 꼭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건 또 무슨 말?”
“선거라는 게 반드시 100% 이기는 법은 아니니까. 네가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이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대가 이길 수도 있지.”
내가 들어도 개소린데 정주호가 듣기는 더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정주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지금 총선을 개헌선까지 이겨놓고 그런 말이 나온다고?”
“내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대선에 나온 네가 패할 가능성은 0.03% 정도나 된다.”
“퍽이나 지겠다.”
정치인이라면 최종 목표인 대통령이지만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이는 사람과 그 자리를 짐짝 취급하는 사람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말하긴 했지만 상황은 돌이킬 수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나아.”
“…….”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지.”
죽은 동태 눈을 한 정주호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청와대를 벗어났다.
저래서는 제대로 해낼 거 같지 않은데.
“지금은 저래도 현실을 받아들일 겁니다.”
내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천명국이 말을 보탰다.
“장난처럼 이야기 했지만 대통령 자리는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 이 나라에 있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주호밖에 없습니다.”
“질 확률이 0.03%나 되지만요.”
“그것도 다른 사건사고가 크게 터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하면 확률은 0.001%까지 떨어집니다.”
사실상 질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천명국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보다 곧 미국에 가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꽤 큰 사고를 쳐서 자숙을 했으니 슬슬 계획대로 움직여보려고요.”
“전혀 자숙같지는 않았지만… 미국에 가시는 건 파티에 관련된 일입니까?”
“얽혀있는 감정은 풀어야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파티 내부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는 것도요. 저는 초인님이 잘 해낼 거라 믿습니다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전 사건처럼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다 죽일 생각은 없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면 굳이 상관없는 사람을 건들 필요는 없으니까.
“어떤 부분이 걱정됩니까?”
“현재 미국 내부의 균형은 훌륭합니다.”
백악관, 의회, 그리고 파티.
이 세 곳의 균형은 서로가 서로를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 축인 파티가 무너지면 백악관이 득세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얘기가 잘 통하는 것이라 좋네요.”
“…….”
“물론 대통령님은 그걸 원하지 않으시니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걸 테고요.”
“그렇습니다. 백악관도 자기들이 전권을 휘두르지 못하니 초인님이 판을 흔들어놓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때 가서 쓸어버리면 되죠. 근데 이건 대통령님이 바라는 전개가 아니실 테고.”
“맞습니다.”
잠깐이지만 아연했던 표정, 다 봤다.
하지만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파티를 공격하라는 건 아무래도 주문이 과한 느낌인데.
“일단 책임을 지겠다고 했으니 지켜볼 생각입니다.”
“제대로 책임을 진다면?”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적은 피해 선에서 마무리 될 겁니다.”
내가 중요하게 보는 건 책임지려는 자세였지, 무작정 죽이려는 건 아니니까. 그 점에서 막심 게데스나 팬텀의 행동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안심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은 벌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초인님은 늘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이번에는 그러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피로가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내게 부탁해왔다.
[솔직히 저 인간은 좀 불쌍하지 않아?]“…….”
불쌍하긴 했다.
*
* *
본래 그동안 조사해온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려다가 미국행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은 파티가 보유하고 있다는 신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신수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 신수와 관계를 맺어온 파티인 만큼 신수에 대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내게 빚을 지고 있으니 책임은 책임대로 묻고 신수의 정보는 정보대로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 되는 방향이라고 보았다.
“뭘 그렇게 불안해 하냐.”
“준호가 그동안 벌인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졸라 태연한 거야!”
“그래서 감시하려고 왔고?”
“감시보다는 오랜만에 귀국이야. 나 집이 미국에 있다고!”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한국 사람인 줄 알았다.”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졸라맨.
걱정이 큰 나머지 따라붙은 걸 모를 리 없다.
“아무튼 기프트 연구는 고맙다. 네 덕에 상당 부분 진척됐어.”
“아직 졸라 멀었어. 그래도 분명한 건 이 기프트는 신수가 만든 게 아냐.”
“그건 확신하고?”
“인위적으로 만드는데 한계가 있어.”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신수는 변형을 한 게 전부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 사이 우리가 탄 비행기는 미국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니 철통같은 보안 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마중 나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에 온 걸 환영합니다, 준호.”
난 주변을 둘러보곤 말했다.
“뭔가 보여주기 식이 강해 보이는데.”
“하하, 정치란 건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숙명의 라이벌이 몰락하는 걸 지켜보는 건 그만큼 기대되는 일이긴 하니까.
내 말에 허버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또한 당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협력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지켜보죠.”
“우선 오랜 비행으로 지쳤을 테니 쉬길.”
*
* *
최준호가 돌아가고, 입맛을 다시는 허버트에게 다니엘이 다가왔다.
“그러게 성급한 접근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알지. 하지만 한 번 확인을 해야 확신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소감은?”
“내 생각이 맞다.”
허버트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냥 왔을 리가 없지. 헤드 브레이커의 각오는 진짜다. 파티로 찾아가서 녀석들이 저지른 일을 책임지게 할 거야.”
“의회도 난리가 나겠군.”
“이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되지.”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가 그걸 순순히 지켜볼 것 같지도 않은데.”
“정치 지형보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데 더 진심인 인물이야.”
“너무 낙관은 하지 말고.”
“낙관이 아니라 현실이지. 헤드 브레이커는 여태까지 그런 행동을 보여준 인물이고.”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인 허버트가 말했다.
“그러니 준비해둬. 대권까지 널 가로막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
“…….”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려고 한다.
그 부분이 걱정됐지만 좋아하는 허버트를 가로막을 수 없는 노릇.
다니엘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숙소에서 하루 쉬던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티의 인물들이다.
파티를 이끄는 팬텀을 시작으로 사자 가면을 쓴 막심 게데스, 그 뒤로 고양이 가면, 곰 가면, 뱀파이어 가면, 늑대인간 가면을 쓴 사람들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맨얼굴을 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컨셉은 독하게 지키는군.
“오랜만이야.”
“멀쩡하군.”
“내가 살아있어서 많이 섭섭하지?”
“…….”
팬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날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복잡한 빛을 띠고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념으로 바뀌었다.
“넌 너무 강하다. 어렵게 이뤄놓은 모든 균형을 무너뜨릴 만큼.”
“나도 내가 강한 건 알아.”
하지만 팬텀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강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힘이 미치는 모든 영향력에 대해서 넌 고민하지 않고 휘두른다. 그리고 멋모르던 사람들이 거기에 휩쓸려버리지.”
예전부터 많이 듣던 말에 난 코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큰 힘을 쓰는데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뭐라고?”
“내 힘을 내가 사용할 뿐이다. 큰 힘이 너희들 마음대로 향하지 않을 것 같으니 너희들이 규칙을 만들어 제지하려고 할 뿐이고.”
그래서 나는 규칙을 들먹일수록 반대로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는 했다. 그것이 녀석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일 테니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모두 인정한다. 부디 나 하나로 만족할 수 없나?”
“내가 듣던 얘기랑 다른데.”
“네가 원한다면 모두 목을 내놓겠다.”
“평소라면 그랬을 텐데.”
팬텀의 목은 내게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다.
대신 녀석들이 갖고 있는 다른 것은 내게 큰 의미가 되어줄 수 있지.
“내가 원하는 게 있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들었다. 신수의 정보라면 제공할 용의가 있다.”
“좋아. 그걸 내어주면 목숨은 필요 없어.”
그것이 ‘거래’니까.
난 장사치들처럼 바가지는 씌우지 않는다.
“너 하나로 만족하지.”
“고맙군. 그 말 변치 않길 기대하겠다.”
그리 말한 팬텀은 왼손을 들더니 곧바로 자신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오른팔.
위하오와 같은 대가를 치른 거지만 여기에 신수의 정보를 제공해주니까…….
그런데 팬텀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꽉 물더니 곧바로 고개를 휘젓자 왼팔마저 잘려나간 것이다.
털썩!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걸로 용서해다오.”
“…….”
음, 예상 이상의 행동력이었다.
저기까지 바랐던 건 아닌데 말이다.
팬텀 뒤에 서 있는 다른 가면들은 침통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모자란가? 그렇다면 다리도 내놓도록 하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다른 걸 바라는 게 있나? 뭐든 내어주지.”
자기가 저지른 죄를 통렬하게 반성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내어줘서 그랬어.”
“뭐?”
“난 팔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 굳이 두 개는 필요 없어.”
난 충분한 대가를 내놓은 사람이 과한 대가를 치르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스프는 떠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