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411
411화
자기 목숨보다 미모가 더 중요하다는 태도는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만큼 내가 제대로 봤다는 이야기겠지.
방금 전 성녀의 행동으로 확실해진 건 자기 목숨보다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기 마련이니까.
겁에 질린 성녀에게 손을 뻗을 때였다.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성녀의 머리 위로 발산되면서 날 감싸기 시작했다.
기이한 감각이 휘감는 걸 느끼면서 난 눈살을 찌푸렸다.
날 막기 위해 손을 쓴 건 성녀가 아니라 자칭 신이었다.
“장난질을.”
녀석의 힘을 밀어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저 너머에서 녀석은 날 부르고 있었다.
위협이 아닌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였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끝이 나는 상황에서 대화라니?
“고상한 척은 다 하는군.”
[위험해.]용용이가 옆에서 경고했다. 나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칭 신이라는 음흉한 녀석은 이마저도 이용할 수 있는 음험함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녀석이 파놓은 함정이라고? 그렇다면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 갑작스러운 초대는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라 보기 힘들었으니까.
“응하지.”
[위험하다니까!]“내가 위험한 만큼 저 녀석도 위험할 거다.”
손을 거둔 나는 자칭 신의 의사에 따라 심상 세계 안으로 진입했다.
절로 거룩함이 드는 순백의 공간은 신을 향한 신앙이 생겨나도록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었다.
그래, 강요다.
상대를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는 자칭 신의 개수작.
이걸로 내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 그냥 녀석이 도취되어 행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수란 건 결국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녀석들이니까.
그때와 녀석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지만 은연중 느껴지는 기세는 날 더 경계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필멸자여.]“뭐가 무서워 얼굴을 감추고 있냐?”
가볍게 도발했지만 녀석은 끄떡도 안했다.
[아직 나를 볼 자격이 없다.]“그 자격이 뭔데?”
[나를 믿으라.]“개수작이군.”
믿음이 없는데 믿음을 강요하는 꼴이란 참 우습다.
그게 아니라면 세뇌라든지 뭘 해보겠다는 건데 경계심만 더 올라가게 만들 뿐이지.
자칭 신은 여전히 광휘에 휩싸인 채 날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나를 적대하게 만드는가.]“네 존재자체.”
[…우리는 공존할 수 있다.]신이 들고 온 것은 공존이었다.
역시나일까, 내 훼방에 녀석도 적잖이 귀찮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끝을 보자는 건가?]“네가 유럽에 만족했다면 그랬을 수 있겠지. 근데 그럴 생각이 없잖아?”
[내 축복은 많은 인간들이 부여받을수록 강해진다. 그것은 인류를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네 종으로?”
[나와 인류가 바라는 바는 일치한다.]진지한 목소리는 녀석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틀린 정의와 확신에 관한 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그건 내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결국 넌 인간을 종으로 써먹겠다는 이야기지.”
[그게 잘못됐나?]“어. 네 신 놀이에 수많은 존재들이 휘말리고 있으니까. 나도, 인류도, 네 손에 죽은 신수들도.”
자칭 신은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를 감싼 기운이 사나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게 있어 인간의 삶이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내가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그렇다.]개소리였다. 그랬다면 내가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렸겠지. 아니, 내가 나이를 먹고 기량이 쇠퇴할 때까지만 기다려도 그만이다.
“어느 신수가 그러던데. 나라면 수명의 문제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가 되면 어떡하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불가능하다니 도전해보고 싶어지는데. 지금 내 눈에 가장 거슬리는 건 네놈이거든.”
[저번에 내가 한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무슨 제안?”
[네가 원한다면 너도 신이 될 수 있다.]자칭 신은 어떻게든 날 끌어들이고 싶은가보다. 그 이면에 깔린 감정은 자신이 그동안 이뤄놓은 것을 타격받기 싫어하는 기색이 전해졌다.
날 없앨 수 있지만 자신이 받을 피해는 내키지 않는 걸 테지. 그러니 신이라는 그럴 듯한 키워드로 자신의 하위 카테고리에 가둬두려 하는 것이다.
“사양하지.”
[끝내 대적하는 걸 선택하나.]한탄 섞인 녀석의 중얼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다.
“이젠 내가 질문하지. 네 잘난 권능을 발현하면 원하는 존재를 과거로 보낼 수 있나?”
[…그걸 왜 묻지?]자칭 신의 기세가 들끓었다. 이것은 내가 내내 도발했을 때에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빨리 대답해라!]쩌저적!
단지 언성이 높아진 것임에도 심상 세계가 흔들렸다. 이 기세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렬했다.
이 정도라고? 내가 그동안 봐온 어떤 신수보다 강력했다.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하면 네가 원하는 답을 하지.”
[…끝까지 장난질을 하려고 한다면 입을 열게 만들 수밖에.]콰지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성하던 공간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악에 오염되듯 검붉은색으로 물들면서 섬뜩한 살기가 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힘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자칭 신의 기세만으로 죽음을 면치 못할 그런 압도적인 힘이었다.
아무래도 자칭 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음험한 녀석이었다.
애초에 내가 바라던 전개였기에 사양하지 않고 손에 기뢰를 둘러 녀석의 힘에 맞섰다.
콰직! 콰과과과과광!
금빛 기뢰에 얽힌 검붉은 기운은 심상 세계를 산산이 파괴해나갔다.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고 곳곳에 구멍이 꿰뚫리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드러났다.
나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의 공간이다.
치이익!
충돌을 거듭할 때마다 녀석의 기운은 내 전신을 침식해 들어왔다. 만득이가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그 기운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그 어떤 독보다 지독한 기운은 필사적으로 내 내부를 파괴하려 들었다.
분명 손해가 있는 충돌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충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칭 신과 부딪칠수록 녀석에 관한 정보가 내게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견뎌내지 못하고 정신이 파괴되었을 테지만 내게는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그동안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확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녀석이 물밑에서 쓸 칼을 준비하는 것도 알게 됐고.
“그런 거였나. 왠지 눈에 띄지 않더라니.”
[…네놈, 인간이 어떻게.]“너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었어. 전지전능한 신의 자존심이 구겨질 만 해.”
미쳐있던 내가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을까.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신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신을 자처하는 녀석이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칭 신에게는 인간을 과거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흘러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그 능력을 가진 신수가 존재했다.
바로 은둔의 현자였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룰 수 있는 은둔의 현자는 날 과거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였다.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권능, 그리고 혈중섭식.
이 두 가지가 우연히 겹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날 과거로 보냈을 가장 가능성 높은 존재는 은둔의 현자이며, 자칭 신은 그걸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이라는 작자가 쩨쩨하게 다른 신수를 질투나 할 줄이야.”
[…….]“더 알고 싶어졌어. 네놈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혈종 때문일까, 기프트 자아들 덕분일까.
방대한 정보가 흘러 들어와도 내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자칭 신은 내가 그동안 모르던 정보를 잔뜩 품고 있는 노다지였다.
[돌아가라.]자칭 신의 선택은 날 추방하는 것이었다. 검붉게 물들었던 공간은 본래였던 것인 마냥 순백으로 물들면서 억지력이 발동하여 날 밀어냈다.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 튕겨나온 나는 성녀의 거처로 돌아와 있었다.
아쉽군, 좀 더 캐낼 수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질려있던 성녀는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미모를 지워버리겠다는 내 행동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성녀는 나와 자칭 신의 충돌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도 알지 못하겠지. 체스말은 자신만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된 거야!]난 경악해서 묻는 용용이에게 잠시 뒤 설명하기로 하곤 성녀를 보았다.
“너도 봤군.”
“…….”
“그게 네가 모시는 신의 실체다.”
“제게 뭘 바라죠?”
“없어.”
성녀란 건 참 복잡한 존재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신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건지, 스스로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건지 하나하나 파악하기 힘들었다.
“네 신실함을 증명하고 싶다면 너라는 효율적인 수단을 스스로 망가뜨리던가.”
“저를?”
“그게 어렵다면 더 이상 네 주인을 위한 행동을 하지 말던가.”
“…….”
“그걸 증명하고 아니고는 네게 달린 문제겠지.”
더 이상 얽힐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혼란에 휩싸인 성녀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 성녀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용용이 넌 자칭 신의 진명에 대해 모르지?”
[응, 저번에 마주했을 때도 알지 못했어. 너처럼 인간이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와 같은 반열에 오른 건 줄 알았거든.]그 정도로 자칭 신은 인간과 흡사한 느낌을 용용이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데?]“대화를 나눴지. 그리고 부딪치기도 했고.”
[뭐? 그럼 설마…….]“끝내진 못했다. 녀석도 나도 전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지.”
그것과 별개로 자칭 신에게서 쏟아지는 정보와 녀석의 기이한 수법은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분명한 건 녀석은 너나 현아 같은 신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럼?]“강해지기 위해 비틀었더군. 그건 더 이상 신수라 부를 수 없었어. 오히려 마물에 가까웠지.”
[설마, 아닐 거야.]“신이 되기 위해 동족도 해치는 녀석이 그걸 못할 거라 생각하나?”
[그렇기는 하지만…….]“그건 무수히 많은 제물을 통해 얻은 힘이다.”
녀석의 힘 안에서 느껴졌던 무수히 많은 혼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제물로 바쳐졌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혼은 부수적인 것. 그 안에 핵심을 이루는 건 바로.
“그 안에는 신수도 있었지.”
[말도 안 돼. 강해지기 위해 동족을 제물로 바쳤다고? 말도 안 된다고.]용용이는 필사적으로 부인했지만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사실임을 녀석도 알고 있었다.
자칭 신은 신수지만 동시에 타락한 존재였다.
“이걸 듣고도 현아는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해?”
[…그건 나도 몰라.]“가서 얘기해봐. 그때도 지금과 같은 입장이라면 더 이상 설득할 필요는 없겠지.”
[넌 현아가 나서길 원해?]“현아가 나선다는 건 다른 신수들도 나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하나 철저한 중립인 녀석이 넘어온다는 건 다른 신수들도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녀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방해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가서 설득하고 와.”
[알았어.]시무룩해진 용용이가 자리를 벗어났다.
그 사이 난 할 일이 있다.
“녀석이 감춰둔 체스말을 찾아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