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423
423화
“…….”
나를 보는 성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누가 보면 결연한 결심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성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선을 넘으면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저 멀리 지나쳤다. 더 이상 자신이 수습할 수 없다는 걸 성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애써 속내를 감추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떠세요?”
“뭐가?”
“세계의 공적이 된 거요. 이게 당신이 바라던 일이던가요?”
“내가 바라던 게 맞아.”
아마 이런 대답을 원하던 게 아니겠지.
“그게 무슨…….”
“그럼 신을 상대로 정면에 맞섰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지도 못한 줄 아나?”
그래, 결심하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세계를 불태워버릴 빌런에서 세계를 구원한 초인이 되었다. 그 명예를 놓고 다시 세계의 공적으로 돌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자칭 신을 치워버리기 위해 난 기꺼이 그 길을 선택했다.
“대체 이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왜 세계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건데요?”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녀석을 처리하기 위해.”
“둘은 공존이 가능해요. 그런데 당신은 자꾸 충돌을 일으키도록 만들고 있어요.”
“어떻게 공존이 가능하단 거지? 신이 양보해서? 아니면 내가 굽혀서?”
“그건……!”
입을 벙긋거리던 성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알고 있을 거다. 나나 자칭 신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멀리 왔다기보다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끝난다.
“그걸 알면 물러서 있어.”
“그럴 수 없어요.”
“너도 끝을 보겠다는 건가.”
“…….”
기세를 발산해서 압박을 하니 성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도 내게 맞설 준비를 하였다.
[진심이야. 더 이상 설득할 여지는 없어 보이는데?]그럴 테지.
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나와 성녀가 있는 곳은 알프스 산맥으로, 자칭 신에게 있어 자기 앞마당과 같은 곳이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 전력을 끌고 나올 수 있음에도 성녀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바인지 눈치 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본 모습을 드러낼 생각인가 본데.”
“무슨 말씀이시죠?”
“신을 사칭해도 주변의 눈이 무서운 건가.”
피식 웃는 날 보며 성녀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제때 온 게 맞았어. 아직 자기 몸을 완벽하게 구성하지 못한 거야. 은둔의 현자에게 한 방 얻어맞은 여파가 생각보다 강했던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으, 으으으!”
반박하려는 성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칭 신이 더 이상 함부로 떠들지 못하도록 제어함과 동시에 나를 향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 틈을 가까스로 공략하는데 성공했고 자칭 신은 곧 완벽해질 순간을 방해받은 것에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내가 기다려줄 이유가 없지. 상대가 약한 틈을 드러내고 있는데 왜 기다려줘야 하지?”
성녀의 저 너머로 분노가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녀석도 이곳에 성녀를 보낼 때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내 무덤이 될 곳이라고.
“아악!”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성녀의 등 뒤의 광휘가 검붉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공간이 갈라지면서 거대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와 광기를 머금은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 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광심이를 필두로 만득이가 보조하여 영향력을 제거하면서 난 앞으로 나섰다.
콰드득!
공간을 뒤틀고 뻗어 나온 검은 짐승의 팔이 채찍처럼 쇄도했다. 나는 기뢰를 두른 손으로 그걸 정면으로 받아냈다.
파스스스!
짧은 접촉만으로 진득거리는 사념이 손끝을 타고와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온갖 생명의 광기와 감정으로 뒤섞인 것이 어떤 속내를 갖고 공격해온 건지 알 수 있었다.
마치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내는 것처럼 끔찍한 사념을 내게 뿌려댔다.
물러서지 않고 그 사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쾅!
내가 짐승의 팔 전체를 기뢰로 뒤덮어버리자 사념의 여파는 완벽에 가깝게 제거되었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짐승의 팔은 사라졌으나 성녀 뒤의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난 굳은 듯 자리에 서 있는 성녀를 보며 웃었다.
“그게 네가 모시는 신의 실체다.”
“…….”
성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더 이상 꼭두각시 인형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실체의 일부를 드러낸 자칭 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육체를 잃었음에도 느껴지는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는 이제껏 보아왔던 신수와 완전히 다른 존재에 도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건 신수가 아니야.]용용이의 중얼거림이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얼마나 많은 걸 잡아먹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군.”
인간, 마물을 가리지 않았다. 거기에는 신수도 존재한다.
그것이 고스란히 자칭 신의 양분이 되었고 지금의 괴물이 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힘은 더 이상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폭주하기 마련이니까.
녀석을 보니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더 큰 힘, 더 많은 기프트를 추구하다가 제어하지 못한 채 혈종에게 잡아먹혔던 내 모습을.
종의 차이가 존재하기에 그걸 버텨냈지만 내 눈에 보이는 자칭 신은 내가 혈종이 되었을 때와 크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결국 너도 그 방구석 오타쿠같은 녀석에게 당한 거였어. 자기 욕심으로 벌인 일이니 그걸 남의 탓으로 하기도 힘들었을 테지.”
[일개 인간이 너무나 많은 걸 알고 있구나.]뇌리를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마저도 기과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세상 전체를 뒤집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들끓는 욕망 덩어리였다.
“그러니 더 죽이고 싶지 않나? 뒤에 숨지 말고 앞으로 나서보던가.”
[…….]자칭 신은 내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에 나섰다.
조금 전까지 짐승의 팔이 등장했던 공간이 갈라지더니 검붉은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결계랑 비슷해. 나도 튕겨내려 하고 있어.]그럼 무리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말하려 했으나 용용이의 행동이 더 빨랐다.
여태껏 작은 형태를 유지하던 게 무색하게 나와 비슷한 크기로 덩치를 키운 것이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힘을 투사할 수 있으니 밀어내지 못할 거야.] [동족이여, 기어이 내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으려는 건가?]자칭 신은 용용이를 떼어놓고 싶은가보다.
[자기 욕심을 위해 같은 동족을 살해한 혐의를 가진 자를 동족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동족의 일이라면 덮어 놓고 지켜보던 용용이의 놀라운 변화였다.
다소 부드러워졌던 자칭 신의 기세가 다시 바뀌었다.
[그럼 둘 다 처리하는 수밖에.]최악!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자칭 신의 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 하나는 늑대인간의 것과 비슷했고, 다른 팔 하나는 갑각류의 집게와 비슷했다. 거대한 동체 너머로 검붉은 아우라를 발산하는 촉수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괴하게 뒤틀린 뒤덮여 형체조차 짐작하기 힘든 얼굴에 붉은 안광이 연신 번뜩이고 있었다.
이제껏 보아온 신수는 모두 신화를 근거로 하여 육체를 구성했다.
하지만 자칭 신의 겉모습을 보면 그 어디에도 신수다운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이게 우리 동족이라고?]용용이가 충격을 받아 중얼거렸지만 혈중섭식의 부작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너도 그 권능의 실험체였군.”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잃는 것도 있는 법. 겉모습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하지만 그 힘을 수용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지.”
[…….]“나도 알거든. 미래에서 다 겪어보고 왔으니까.”
검붉은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무수히 많은 별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비유일 뿐, 자칭 신이 가진 모든 공격수단이 동원되어 날 덮쳐온 것이다.
[저걸 어떻게 네가…….]용용이가 경악할 만큼 강력한 공격이긴 했나보다. 짧은 시간 대응할 방법을 놓치긴 했지만 만득이와 광심이가 나서면서 1차적으로 방어를 해냈다.
하지만 자칭 신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내 존재를 단숨에 말살하겠다는 것처럼 끊이지 않는 흐름으로 연이어 공세를 퍼부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잠시지만 반격할 방법을 잃었다. 하지만 버텨내는 건 가능했다.
파사사!
손으로 쥐려 했다가 섬뜩한 사념들이 손에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정신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것들이다.
만독불침이나 혜광심어가 없었다면 나도 이걸 방어해내는데 엄청난 심력을 소모했겠지.
지금은 괜찮다는 의미다.
오히려 머릿속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정보에 웃을 수 있었다.
“재밌는데.”
마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강하고 좋아 보이면 무조건 내 안에 쓸어 넣어 내 것으로 삼았던 그때의 나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던가. 결국 폭주를 일으켰고 균형이 어긋난 힘이 수시로 들끓었다.
신수라는 종의 차이, 신으로 군림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는 자칭 신을 미치지 않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녀석에게 이점만 가져다주진 않았다.
무작정 쏟아 붓는 강맹한 힘은 어느 순간 한계를 보이기 마련이고, 흐름을 파악하기에도 용이했다.
무엇보다, 녀석은 아직도 심상 세계에 숨어 제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았다.
이곳이 녀석이 바라는 전장이라면 굳이 어울려줄 이유가 없지.
콰릉! 콰르릉!
연이어 울려 퍼지는 섬뜩한 검붉은 벼락이 내리쳤다. 인간 심연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강렬한 힘이었지만 내게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익숙한 잔재일 뿐이었다.
손에 잡히는 공간을 기뢰로 잡아뜯어버린 뒤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이다.
[도망 못친다.]자칭 신은 내 의도를 간파하고 붙잡으려고 했지만 검붉게 형성된 손은 마치 밧줄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섰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아는가!]다가올 손길을 막으려고 했던 나는 자칭 신을 보다 분노의 대상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성녀가 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결연함이 맴돌았다. 그래, 몇 차례 본 적 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지금이에요.”
“무슨 의미지?”
“당신은 제 목숨을 버리는 것마저 신의 의지라고 말씀하셨죠.”
“틀리다고 말하고 싶나?”
“아니요, 그 말이 맞아요. 제 의지가 아니었던 거예요. 신께서는 자신이 아끼던 인형을 가장 값어치 나갈 때 팔아치우고 싶었던 거겠죠.”
[네가 지금……!]“그럼 지금은 어떤가요? 여전히 제가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 물음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전히 종속되어 있지만 지금의 의사 표현은 본인의 의지였다.
“아니.”
“그럼 이 자리에서 절 죽여주세요.”
“진심인가.”
“네. 더 이상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모시던 신은 인간을 긍휼하는 게 아닌 지배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거든요. 제가 틀렸던 거죠. 더 이상 잘못된 길로 갈 수 없어요.”
나를 향한 성녀의 눈은 티 한 점 없이 밝았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의지로 종속마저 벗어버린 것이다.
“사양하지 않지.”
내 손은 그대로 성녀의 가슴을 꿰뚫고 심장을 부숴버렸다.
무시무시한 통증을 느꼈을 것임에도 성녀의 표정은 편안했다.
왈칵 피를 토한 성녀가 날 보며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부디 세계의 평화를…….”
“그딴 건 관심 없어. 대신.”
나는 성녀라는 숙주를 잃어버리고 폭주하기 시작하는 공간의 균열을 보며 말했다.
“저 녀석은 확실히 없애주지.”
“…….”
희미하게 미소 지은 성녀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