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425
425화 (완결)
성녀의 희생으로 세상 밖에 끄집어내진 자칭 신의 모습은 도저히 신이라고 볼 수 없는 형태였지만 그 강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신이라는 건 납득이 가는 강함이었으니까.
하지만 외관은, 자칭 신을 둘러싼 모든 걸 벗어버린 모습은 도저히 신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나보다 작은 체구는 왜소하고 처량하다.
도저히 신이라고 볼 수 없는 초라함이 느껴졌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 지금 기세가 정제되어 있지 않단 말이야. 방심하다가 휩쓸릴 걸.]주의를 환기시키는 용용이의 말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에 휩싸인 자칭 신을 바라봤다.
“더 이상 신수라고 볼 수도 없어. 원형마저 어그러져 있군.”
자칭 신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오직 나만을 죽이겠다는 원한이 전해졌다. 동시에 섬뜩한 기운이 내게 쏟아졌다.
[그어어어!]“이성을 잃은 건가.”
제 정신이 아님에도 날 향한 적의는 한결 같았다. 그만큼 내가 원망스럽다는 의미겠지.
[조심해. 저 상태면 아까 전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야.]“쉽지 않겠어.”
[내가 도와줄게.]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용용이가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아니, 괜찮아.”
[정말로?]“어.”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을 보는 게 나아.”
[…알았어. 대신 주위 경계는 내게 맡겨.]용용이가 내 뜻을 알아차리고 뒤로 한 발 물러섰고, 나는 자칭 신을 바라보았다.
…추악했다.
내가 혈종에게 잡아먹혔을 때 저런 모습이었을까.
오로지 힘을 추구하다가 힘에 잡아먹혀 사리분별을 하지 못했다. 당시 내 눈엔 세상 모든 것이 날 강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
저걸 보고 정상이라 생각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녀석을 보고 혈종이 떠올랐기에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캬아아아!]흉성이 폭발하는 순간, 세상을 검붉게 물들이며 기세가 요동쳤다. 대기의 공기 흐름은 물론 내부의 포스조차 흔들릴 정도의 강맹한 기운이었다.
나와 녀석이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치이익!
전신에 두른 포스를 녹여버리고 피부를 태워버렸다. 초재생이 꿈틀거렸지만 신체가 타격받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어 녀석의 머리에 기뢰를 퍼부으려 했지만 불안정한 대기의 흐름이 내 손에 서린 기뢰마저 흔들리게 만들었다.
파직! 파지직! 파스스!
기세가 흩어지려는 기뢰를 억지로 붙들어놓은 나는 그대로 우겨넣듯 녀석의 머리에 쑤셔 넣었다.
쾅!
무지막지한 반발력은 그대로 손가락부터 손, 팔의 뼈까지 부러뜨렸다.
“음.”
초재생이 빠르게 회복에 들어갔지만 회복되는 속도보다 팔에 균열이 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러다 오른팔이 완전히 날아갈 판이었기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내 선택은 오른팔을 거두고 왼팔로 공격을 이어 나가는 것.
콰지직!
오른팔에 이어 왼팔마저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가서야 난 뒤로 물러났다.
반발력에 뼈가 부러지고 자칭 신의 기운에 피부가 검게 물들어 타들어간다. 강렬한 통증이 엄습해왔지만 내 신경은 전부 자칭 신에 향해 있었다.
“미쳐가는군.”
[네 팔부터 신경 써! 그리고… 위험해! 피해!]용용이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자칭 신의 신형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캬아아아아!]피할 수 없다. 내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에 양팔을 들어 막으려 했다.
콰드드득!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양팔의 뼈가 산산조각 나면서 피부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내부가 뒤집히는 통증과 함께 비릿한 혈향이 입가를 맴돌았다.
한참이나 뒤로 밀려난 나는 자칭 신이 다시 달려들기 전에 옆으로 피하고는 들끓는 피를 뱉어냈다.
“퉤!”
한 번은 피했지만 다시 달려드는 자칭 신의 기세가 매서웠다.
조금 전 충격을 해소했던 팔도 당장 떨어져 나가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덜렁거렸다.
[안 돼!]지켜보던 용용이가 꼬리를 휘두르자 내 앞에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었지만 잠시도 지체시키지 못하고 부서졌다.
하지만 자칭 신의 공격은 내게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짧은 거리를 고속비행으로 피해낸 것이다.
“큭!”
이미 상당한 손실이 있는 육체에 고속비행을 시전하니 전신이 갈가리 찢어지는 통증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난 웃을 수 있었다.
“이게 더 낫군.”
고속비행으로 육체에 부하가 걸리는 게 자칭 신과 충돌하는 것보다 충격이 덜했다.
그리고 여기에 따라오는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고.”
내가 했던 말이지만 왜 자칭 신과 천둥새가 상성이 나쁘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원형은 알 수 없지만 전투 형태가 지금과 비슷한 형태였다면 천둥새나 자칭 신이나 서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겠지.
서로 조심성 많은 성격이니 조심했겠지.
지금 저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폭주 중이잖아.”
수시로 폭주를 해왔기에 잘 안다.
저 상태로 오랫동안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음을.
우리를 뛰쳐나온 맹수가 마취총이 듣질 않는다면 그 다음 방법은 하나다.
지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계속 날뛰어봐라.”
*
* *
폭주하는 녀석을 상대하는 건 이골이 나 있지만 내 예상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그중 틀린 건 자칭 신이 신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그동안 축적한 힘은 내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여서 사흘 밤낮 동안 시달려야만 했다.
[와, 이걸 이렇게 한다고?]이 모든 과정을 본 용용이는 감탄을 터뜨렸다.
직접 상대하지 않고 철저하게 소모전을 유도한 내 방식을 말이다.
정작 사흘 넘게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던 나는 기력이 고갈되는 걸 느꼈다.
자칭 신은 그보다 더 일찍 바닥을 드러냈지만.
[그으, 그으으으윽!]녀석의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지만 난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조금의 여지를 주다가 찰나의 틈을 허용하여 불필요한 타격을 입는 것은 소년만화 말고 현실에서도 숱하고 나오는 이야기다.
내가 원하는 건 자칭 신이 폭주하는 끝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을 보이고 있다.
[이제 끝내도 될 거 같은데?]“아직 아니야.”
[확실하게 끝낼 생각이구나.]“마음에 안 드나?”
[아니, 이런 녀석은 다시 세상에 나타나면 안 돼. 난 찬성이야. 아니면 내가 직접 나설까?]“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용용이는 구경만 하고 있던 게 아니다.
지금 나 대신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까.
[많이도 구경 왔네.]사흘 동안 충돌의 여파는 알프스 산맥의 산 몇 개를 날려먹었다.
그래서 엄청난 숫자의 인간이 모여든 상황이다.
중간에 결계를 설치하는 것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인간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용이의 배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세졌군.”
[신세일 것도 없어. 우리 동족이 일으킨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 오히려 우리 모두가 너한테 큰 신세를 졌지.]“다른 신수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 그건 좀 미안하네.]“미안할 거 없다. 신수들이 애초에 그걸 이해하는 성격도 아니고. 네가 이해해주는 걸로 충분해.”
용용이가 바뀌었다는 증거니까.
그 사이 눈에 띄게 느려진 자칭 신의 공격은 이제 여유를 갖고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끝이 보이네.]“처리해야겠지.”
확신이 생긴 나는 조금씩 손을 썼다. 사흘 동안 완전하진 않아도 신체가 회복된 상태였고, 자칭 신의 공격 패턴에 익숙해졌다.
폭주란 그런 것이다. 이성이 남아 있지 않기에 공격 패턴이 단조로워지고 무의미한 힘의 소모가 이루어지는 것. 신을 자칭할 정도의 강함을 지녔지만 결국 무기력하게 내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결과였다.
[그악! 그아아악!]내 기뢰가 파고들 때마다 녀석이 몸부림 쳤지만 하나씩 속수무책으로 허용하면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 과정에서 폭주하는 힘이 육체를 강타하며 큰 충격을 줬지만 견뎌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자칭 신의 육체에서 폭주하던 힘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음일까.
혼탁하게 물들어있던 눈동자가 초점을 갖추더니 살기를 담고 나를 향해 쏘아졌다.
[이, 인간 네놈만 아니었으면…….]누가 보면 나 때문에 실패한 줄 알겠군.
“어차피 넌 과거에도 성공하지 못했어.”
또 모르는 일이지. 나 대신 견제하던 천둥새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을지도.
하지만 내가 혈종으로 활동할 때 벌어지지 않았으니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을 것이다.
그 후에는 누가 또 나타날 줄 알고? 이 세계를 혼자 집어삼키기에는 세계를 원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너,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세상을…….]“그런 건 관심 없어. 끝내자.”
퍽!
자칭 신의 목을 비틀어버린 뒤 그대로 머리를 터뜨렸다.
자욱한 피 분수와 함께 폭주하던 힘이 내 전신을 난자했다.
육체가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지만 개의치 않고 손끝으로 칼날폭풍을 시전해서 한 줌 핏물로 만들어버렸다.
더 이상 녀석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했고 마침내 완전히 소멸했다는 걸 깨달은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끝났군.”
[맞아 끝났어. 근데 너 괜찮아?]“전혀.”
자칭 신을 처리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특히 녀석의 남은 사념은 내 안의 기프트 자아들은 물론 혈중섭식 코어까지 깨뜨렸다.
“처리해봐야지.”
하지만 쉽지 않아보였다. 마지막 남은 모든 원념이 반드시 나만큼은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발현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약해진 몸, 사념의 영향을 받아 위태롭게 흔들리는 코어까지.
최악의 경우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혈중섭식을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혈중섭식이 사라지면? 기프트 자아들도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이대로 무능력자로 돌아가야 하나?
힘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민하던 내 귓가로 용용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걸 사용해.]“뭘?”
[은둔의 현자에게 얻어낸 거. 코어 말이야.]“아…….”
코어가 회생 불가능에 빠진 것에 이성이 흐려졌던 걸까.
잊고 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가능할까?”
[가능해, 버릴 수밖에 없으면 확실하게 버리고 다시 얻는 거지.]그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직감 때처럼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내가 도와줄게.]“네가?”
[응, 그러니 자리를 옮기자.]“…안 노리는군.”
[뭐야, 내가 너 약해진 틈을 노릴 줄 알았던 거야?]“…….”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내가 사라지면 신수 입장에서 많은 부분이 편해졌을 테니까. 제거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거하는 게 낫겠지.
[인간한테 신뢰 얻기 참 힘들다, 힘들어.]용용이는 아직도 자신을 못 믿는 거냐며 툴툴댔다.
“현아였다면 어땠을까.”
[어? 현아? 아무래도 쉽지 않겠지?]“그게 일반적인 신수의 모습이지. 너처럼 이해해주지 않아.”
“아니.”
[에이, 그거 맞는데? 감동했구나?]끝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용용이는 중요한 진실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히죽 웃었다.
난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래, 고맙다.”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옆에서 지켜봤는데.]“그럼 부탁할까.”
[응.]난 용용이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 *
최준호와 신의 대결.
초월적인 신의 존재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세계최강 초인의 대결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알프스 산맥 한복판에서 벌어진 둘의 대결은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결과는 양패구상, 혹은 최준호의 승리.
바티칸을 벗어났던 성녀는 실종되었고 신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준호가 신을 소멸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로 인해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많으면 많은 곳일수록 혼란은 컸고 각국의 정부는 이를 수습하는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신이 뿌리내린 기간이 길지 않은 곳일수록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나서야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의 존재가 자신들을 종속시키려 했음을. 그 기간이 길수록 인간 사회는 붕괴는 걷잡을 수 없어졌을 것임을 말이다.
그럴수록 최준호의 행방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가 사라지고 1년이 지났음에도 그 관심은 식기는커녕 나날이 커져만 간 이유였다.
이미 리그 토벌전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돌아온 적이 있기에 1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로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 기간에 실수를 범하면 신조차 소멸시킨 최준호가 돌아와서 손을 쓸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팽배해졌다.
그런 와중에 사회는 순탄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초인 전력은 압도적이면 압도적일수록 좋은 것입니다. 저는 평생 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음을 자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준호의 상관으로서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대선.
야당 후보는 연신 정주호를 공격했지만 은연중에 이루어진 천명국의 지원, 본인의 역량이 발휘되어 압도적인 격차를 유지했다.
“최준호 초인이 나라를 위해 일하게 만들 수 있는 후보, 격변하는 세계 흐름을 주도하고 이끌 수 있는 후보, 누굽니까!”
대선 결과는 말 그대로 압도 그 자체.
무려 65%의 득표율로 당선된 정주호는 압도적인 여당의 지원을 받는 강력한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그 평가는 웬만한 실정이 아니고서는 재선도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의 앞에 자리한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였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자칭 신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인 세계, 자국 내 쌓인 일거리들, 최준호에 관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까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다가 흠칫하는 게 정주호의 일상이 되었다.
“일단 처리할 일부터 진행해야겠지.”
그 사이 버서커는 대한민국 정식 초인이 되었다.
본래 최준호 팀 소속이었던 그는 정권 말기 천명국에 의해 그동안 저지른 범죄를 모두 사면 받았고, 최준호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대한민국 소속 초인으로 임명되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던 빌런이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초인이 된 것이다.
명예까지 얻었음에도 버서커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녀석은 돌아올 거다. 그것도 멀쩡한 얼굴로.”
“돌아올 거라 믿지만 믿음이 확고하군요.”
정주호의 표정이 묘해지자 버서커는 확신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신조차 거슬린다는 이유로 치워버리려는 녀석이지. 승산이 없었으면 무모하게 부딪치지도 않았을 거다.”
“저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기다리려고 합니다.”
“현명하군.”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지도자가 확신을 갖고 있는 거랑 헷갈리는 건 차이가 큰 법이지.”
대통령 당선인에게 조언하는 빌런 출신 초인이라니.
이 구도가 황당하면서 재밌어서 정주호는 미소지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다현의 출장을 허락한 건가?”
“가만히 두면 문제가 생길 거 같아서 말이죠.”
질색하는 정주호를 보며 버서커는 낮게 웃었다.
“나도 이해하고 있지. 어찌나 들들 볶던지.”
“이런 녀석인 줄 몰랐는데.”
“마냥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니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실전 경험도 쌓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
국가 공인 초인인 정다현은 얼마 전부터 외국 출장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이 사라지면서 곳곳에 남은 광신도들이 활개치고 여전히 리그의 후예를 자처하는 빌런들이 준동하면서 전력의 열세를 겪는 국가가 늘어났던 것이다.
정다현은 앞장서서 빌런들을 진압하면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실상은 그러면서 최준호를 찾고 있었다.
“녀석이 숨으려면 찾지 못하겠지. 못 찾을 거다.”
“저도 헛수고라 말하지만 고집이 워낙 강하니. 그러지 말고 버서커님이 말려주시는 건…….”
“사양하지.”
“그래도 스승인데.”
조카가 제멋대로 날뛰는 걸 막아줄 수 있는 건 버서커밖에 없다.
간절한 눈빛을 받은 버서커가 쓰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녀석이 날뛰기 시작하면 나도 벅차.”
*
* *
최준호가 사라지고 3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계에는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었다.
신을 믿던 광신도들도, 리그의 후예를 자처하던 빌런들도 차례대로 토벌되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하지만 인류는 각기 현존하는 위험에 맞서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바로 마물의 위협이다.
지난 3년 동안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은 무려 여섯 번이나 나타났고, 플러스 단계 마물은 서른두 번 나타났다.
확연히 강해진 마물의 등장에 각국이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남중국의 경우 티베트 고원을 아예 마물의 영역으로 내어주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고, 한동안 태평양 전체가 막혀 물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중 여섯 번 나타난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은 넷은 토벌했지만 둘은 여전히 토벌하지 못한 채 인류에 지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최준호다.
“그 인간은 대체 뭐하자는 건지.”
윤희는 하얀 입김을 내보내며 옷깃을 여몄다.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날씨는 이례적인 한파라 불릴 만큼 매서운 추위를 자랑했다.
이 또한 시베리아에 나타난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의 소행으로, 러시아는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였다.
추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 마물은 시베리아를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지옥으로 몰아넣었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만주와 한반도로 확장해나갔다.
일각에서는 토벌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럴 때 그 인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꼭 필요할 때 없다니까.”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최준호가 죽었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인류는 구원을 바라고 있다.
최준호에게 구원을 바라는 게 우습기도 하면서 그만한 초인이 없다는 걸 모두가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최준호는 단 한 사람이다.
그만한 실력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닌가, 나만 지친 걸지도.”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처럼 지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사람의 인내심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오빠가 없는 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3년이나 나타나지 않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끊이지 않는 근심과 걱정을 안고 본가로 향했다. 이럴 때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맥주 한 캔 마시며 푹 쉬는 게 최고였다.
“나 왔어.”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거실 소파에 앉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턱짓으로 식탁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설마?”
윤희는 재빨리 식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3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된장찌개를 한 큰 술 떠먹고 있는 오빠가 보였다.
“왔냐.”
“…….”
“왔으면 앉아. 밥 먹어야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된장찌개 국물이 담긴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역시 이 맛이지.”
“이, 이! 미친놈아! 3년만에 나타나서 된장찌개가 넘어가냐!”
반가운 반, 울분 반을 담은 윤희의 외침이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왜? 맛있는데.”
*
* *
[세상이 난리가 나겠네.]“난리가 날 것까지야.”
난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지만 용용이의 말대로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반응이 심상치 않잖아. 네가 얼마나 무섭겠어.]“난 잘 모르겠는데.”
[원래 가해자는 잘 모르더라.]“그래?”
딱히 내가 가해자라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죽을 짓 한 놈들 죽이고 해야지.”
[변한 게 없네.]“그게 나였으니까.”
[신도?]“어.”
자칭 신도 결국 죽을 짓을 한 녀석이었을 뿐이다.
상대가 강하고 약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죽을 짓을 했다는 게 중요할 뿐.
“네가 부탁했던 것도 들어줘야지.”
[그치! 기억하고 있네.]“네게 신세를 졌으니까.”
지난 3년 동안 나는 균열이 간 혈중섭식의 코어를 파괴하고 새로운 코어로 대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마 용용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테지.
신세를 졌다면 갚아야 한다.
“슬슬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됐는데.”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졌다.
[힘을 가지고 싶나?]“…….”
[날 따라라. 널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지.]낯설면서 익숙한 목소리.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녀석의 등장에 난 웃었다.
“오랜만이다.”
[뭐?]“일단 좀 맞자.”
심상 세계니 팔다리를 꺾고 머리를 부숴도 괜찮겠지?
해보고 소멸되면 어쩔 수 없지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