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45
45화
45화
이찬택을 일별한 나는 누리를 바라봤다.
저번 생에서 누리는 1차 사냥팀을 돌파, 2차 사냥팀도 감당하지 못하고 3차 사냥팀이 나섰다가 어그로가 튀어 서울을 덮쳤다.
김영환은 시민의 안전을 지킨답시고 나서지도 않았고.
그래서 서울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때 누리는 다른 유해 8단계 마물과 ‘격’이 다르다는 말이 나왔다.
온전한 제 형태를 유지하며 순수성도 지키고 있으며, 브레스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기프트로 인정된 칼날 폭풍의 위력은 강렬했다.
반경 50미터를 넘게 갈가리 찢어버리는 범위 공격이었으니 재앙 그 자체였지.
그래서 나는 맹금류 마물의 공통된 단점을 노려보려고 했는데.
“대가리가 엄청 단단하네.”
무려 세 번이나 공격을 성공했음에도 누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해서 살기를 발산했다. 처맞고도 조절 안 되면 진짜 분노조절이다.
키에에!
울부짖음과 함께 하늘 위로 날아간다.
허공을 밟아 녀석에게 접근해서 전투를 벌여봤지만 그 사이 적응했는지 브레스를 뿜고 칼날 폭풍을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새대가리가 학습을 한다는 건가. 새대가리들 중 왕이라 그런지 적응력이 대단했다.
나는 직감을 발동했다. 정다현에게서 뺏은 이 정신계열 기프트는 사용방법이 무궁무진하면서 나 또한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함을 지녔다.
직감으로 나는 누리를 효율적으로 잡을 방법을 탐색했다. 지금처럼 기뢰? 그러려면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브레스와 칼날 폭풍으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니 방법을 바꿔야 한다.
그럼 기뢰가 아니라 슬래쉬겠지. 그러자 직감이 반응한다. 하지만 큰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것도 정답은 아니란 것이다. 그만큼 누리가 까다로운 마물이란 이야기겠지.
기뢰가 아니라고 해서 슬래쉬도 정답인 건 이분법적인 사고긴 하다.
“어쩔 수 없지.”
조금 전 충돌로 이찬택과 거리가 멀어진 걸 보고 손을 모았다. 슬래쉬 기프트를 발동했다.
핏빛 포스가 뿜어지며 녀석의 칼날 폭풍과 충돌을 일으켰다.
푸캉! 쾅! 콰과과광!
슬래쉬와 칼날 폭풍이 충돌하면서 무수히 많은 잔여 포스들이 비산했다. 반경 100m가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지면이 뒤집히고 자욱하게 모래가 일어났다. 나는 흙먼지 사이로 더 높이 날아가는 누리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새대가리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더 높은 곳에 있으면 유리하다고 판단하나 보다. 슬슬 짜증나는 걸 보면 사실이다.
“귀찮게 구네.”
포스를 밟고 위로 올라가던 나는 어김없이 쏟아지는 칼날 폭풍을 받아냈다.
얇게 두른 포스를 칼날 폭풍이 연이어 두드렸다. 엄청 성가신 기프트다. 폭풍에 포함된 포스 칼날 하나하나의 위력이 낮지 않을뿐더러 녀석에게 접근하면서 허공에서 몸을 유지해야 하는 걸로 포스가 쭉쭉 빠져나갔다.
바닷물을 큰 대야로 빠르게 퍼내는 느낌이다.
나였으니까 무식하게 포스를 쏟아 붓지만 다른 헌터였으면 진즉에 포스가 고갈되었을지도.
떼거리로 상대해서 마물의 진을 빼놓는 방법이 정석으로 굳어진 이유가 이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키에에에!
칼날 폭풍을 뚫고 가까이 접근하니 이번에는 브레스를 쏜다. 그걸 슬래쉬로 상쇄한 뒤 사정거리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새대가리 녀석은 내가 바로 앞에 도착했는데도 기프트를 발동했다.
콰드드득!
포스막과 부딪쳐서 균열이 일어나고 깨지고 부서졌다가 재생되길 반복했다. 녀석은 이 방식으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나는 끝끝내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손끝으로 슬래쉬를 발동해서 머리를 찔렀다.
꽈앙!
단단한 가죽과 부딪친 슬래쉬는 끝내 머리를 꿰뚫지 못했다. 말도 안 되게 질긴 가죽이었고, 무지막지한 포스 반발력이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단단하면 기뢰를 버텨내고 슬래쉬마저 뚫지 못하는 걸까.
슬래쉬가 가죽을 뚫진 못했지만 타격이 없던 건 아니다.
키에엑!
비명을 지른 누리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지면에 떨어지다가 간신히 날아올랐다.
녀석이 열 받은 게 느껴졌다. 누리의 몸이 더 붉게 바뀌면서 수증기가 일어났다.
귀찮은 게 하나 추가됐다.
칼날 폭풍에 실린 포스가 열기마저 띤 것.
염화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대기가 이글이글 타오르며 주변 온도가 끝도 없이 올라갔다.
이게 페이즈 2라는 건가? 더럽게 성가셨다. 이젠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쩌엉!
바로 앞에서 기뢰를 담아 후려쳤다. 강한 반발력은 여전했다. 하지만 전보다 강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녀석의 방어력도 천년만년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감으로 돌려봐도 기뢰나 슬래쉬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프트에 의존해서는 상황을 끝낼 수 없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더 직감에 기대다가는 밑도 끝도 없이 정신력 소모가 이루어질 것이기에 직감을 가뒀다.
그래, 처음부터 방법은 하나였다.
아무리 질기고 단단하다 해도 누리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마물. 계속 두드리다 보면 부서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슬래쉬를 접어두고 주먹에 기뢰를 실어 누리의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몸부림치며 내 사정권에 벗어났을 때 서른 번이 넘는 공격이 머리에 쏟아진 후였다.
케에에에!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 누리가 괴성을 지르며 추락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누리가 지면과 충돌했다. 아직도 꿈틀거리는 걸 보니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짜 질기네.”
기뢰를 서른 번 넘게 갈겼는데 버텨내다니. 유해 8단계 마물은 다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 기뢰조차 버텨낸 녀석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들면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적잖은 포스 소모로 공허함을 느끼며 나는 누리 앞에 섰다.
제정신으로 상대한 첫 유해 8단계 마물이다. 다음에 나타날 8단계 마물을 효율적으로 상대하려면 연구가 필요하겠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내 진심이 담긴 말을 들었는지 누리가 몸을 떨었다.
*
“흥미로운데?”
나는 쓰러진 누리에게 이것저것 실험을 해봤다. 가죽이 무지막지하게 단단해서 어떤 원리인가 싶었더니 역시 포스와 연관 있었다.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누리도 본능적으로 포스를 운용한다. 내 공격이 향할 때, 본능적으로 타격받는 부위 앞에 포스를 응집시켜 충격을 상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포스 운용도 무한대가 아니다. 내게 잡힌 뒤 여러 실험을 겪으면서 힘이 다했는지 그 단단함도 예전같지 않아졌다.
그러다 포스가 고갈되자 머리에 닿은 기뢰가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키에엑!
누리가 꿈틀댔다.
“너무 많이 때렸나?”
파들파들 떠는 누리를 보며 별 감상은 없었다. 좋다고 인간들 죽이고 다녔으면 자기도 맞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
기뢰도 써보고 슬래쉬로 가죽 강도를 실험하다가 누리가 거품을 물 무렵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바로 이 녀석을 테이밍 할 수 있는가였다.
마물을 길들여서 펫으로 사용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이다.
실제로 ‘조련’ 혹은 ‘테이밍’으로 유해 1, 2단계 마물을 길들인 전례가 있다.
두 기프트가 마물이 아닌 인간에게 많이 쓰여서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마물이 길들여지는 건 가능하다고 밝혀졌지만 그건 단계가 낮아서 가능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1, 2단계 마물은 사실 조금 흉폭한 야생동물 수준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인간을 해하는 3, 4단계 마물을 길들인 전례가 없으니 길들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마물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인류에 갖는 적대감이 강해지고 정신력도 단단해진다. 전문가들은 이 정신 방벽을 허물어뜨리면 길들이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방벽을 무너뜨리는 걸 브레인워싱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백치가 될 수 있었지만.
“어차피 새대가리랑 백치랑 차이가 클 것 같지도 않고.”
멍청한 건 똑같을 것 같은데.
나는 브레인워싱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이 기프트의 원리는 사용자의 의식에 내 의지를 심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를 꺾고 내가 원하는 키워드를 주입하는 이른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핵심이다.
나는 이걸 사용하던 사이비교주만큼 섬세하게 풀어내지 못했다. 녀석은 환경 조성, 분위기, 언변 등으로 대상을 광신도로 만들었다.
얼마나 브레인워싱이 철저했냐면 나중에는 사이비교주의 한 마디로 신도들을 단체 자살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사이비교주처럼 섬세한 브레인워싱이 불가능하니 내 방식대로 해야겠지.
나는 누리에게 브레인워싱으로 ‘복종해.’라는 키워드를 주입했다.
키엑!
아직 의식이 남은 녀석이 저항했다. 머릿속에 기본 탑재된 인류를 향한 적대심과 나를 향한 적개심이 저항의 원동력이 되었다.
끈질긴 녀석이다.
우선 이 원동력을 꺾어야 한다.
난 누리의 반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브레인워싱을 썼다. 이번에는 키워드를 중첩해서 주입했다.
‘복종해복종해복종해!’
캬아아악!
간헐적인 저항만 하던 누리가 발악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저항인가? 꽤 강렬했다.
콰드득!
머리에 기뢰를 한다발 심어줘서 움직임이 잦아들게 만들었다.
힘없이 쓰러지는 녀석의 머릿속으로 브레인워싱 키워드를 몇 번 더 주입했지만 버텨냈다.
이거 사람 오기 생기게 만드네.
나는 키워드를 끝없이 주입했다.
‘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복종해.’
포스가 끝없이 빠져나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면 포기하고 복종할 만도 한데. 녀석도 꽤 끈질겼다.
발악하면 기뢰로 때려눕히고 브레인워싱 키워드를 주입하고.
세 번 시도하면서 키워드를 300번 정도 주입하자 누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키르르!
간헐적인 꿈틀거림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더니 그대로 눈동자를 뒤집으며 움직임이 멎어버렸다.
“죽었네?”
슬쩍 머리를 두드려보니 뇌가 곤죽이 되어 있었다. 브레인워싱이 좀 과했나보다.
“길들이기 쉽지 않네.”
작게 혀를 찬 나는 누리의 심장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포스막이 사라진 가죽은 슬래쉬에 저항했지만 세 번 정도 시도하자 갈라졌다.
난 누리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방금 죽었지만 가장 신선한 녹색 피가 끈적거리며 내 손에 엉겨 붙었다. 피부에 닿자 따끔한 감각이 번져간다. 독이다. 난 주저 없이 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지독한데.”
마비부터 시작해서 착란, 환각, 중독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익숙한 현상이라 포스로 억눌렀다. 중독 현상은 마물의 기프트를 엿보려 할 때마다 겪는 현상이다.
갑자기 만독불침이 생각났다. 그게 있으면 이런 상태 이상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버서커 녀석한테 갖고 싶다고 하면 난리를 칠 테니 죽이지 않고 기프트를 복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그 사이 누리의 기프트 정보가 복사되기 시작했다. 칼날 폭풍, 불의 숨결, 고속 비행이 있었다. 예상했던 거라 기대도 실망도 없었다.
불의 숨결과 고속비행은 종의 한계로 선택이 불가능한 기프트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칼날 폭풍이다. 그걸 선택하자 기프트가 복사되기 시작하더니,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어?”
삭제할 기프트를 골라야 했는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슬래쉬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칼날 폭풍이 대신했다.
“···설마?”
이런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 하지만 드문 것도 아니다.
듀얼 기프트보다 더 자주 발생하는 현상, 그건 바로 기프트 믹싱 현상이다.
두 개의 기프트가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으로 위력이 더 강해진다고 알려졌다.
방금 칼날 폭풍으로 슬래쉬가 흡수되었다.
이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확인해봐야겠는데.”
나는 품속에서 단도를 하나 꺼냈다. 원래 슬래쉬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예기가 발산되는 검이 중요했다.
칼날 폭풍을 발휘하자, 슬래쉬 때와 확연히 다른 포스 블레이드가 뻗어나갔다. 지저분할 정도로 격렬한 회전을 일으킨 포스 블레이드는 목표로 했던 바위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기존 포스 블레이드 속에 칼날 폭풍의 회전이 포함되어 닿는 모든 걸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겉갈속갈인가.
겉도 갈가리 속도 갈가리 찢어버려 상대를 죽이기 딱 좋은 스킬이었다.
기프트 믹싱 현상으로 슬래쉬와 칼날 폭풍의 장점이 절묘하게 접목되었다.
“역시 살리는 게 제일 어려운 거였어.”
누리가 죽은 걸 확인했는지 잠시 후, 여러 대 헬리콥터와 차들이 물밀 듯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