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55
55화
55화
제임스 리드의 말에 안나 크리스틴이 반박하고 나섰다.
“그가 말소자인 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죠?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말소자의 행적을 보면 간단해요. ‘안산에서 암약하던 빌런 조직을 증발 시킨 뒤 자취를 감춤. 이후 비슷한 모방 범죄가 일어났으나 말소자가 아닌 걸로 추정됨.’ 말소자가 등장한 건 한 번밖에 되지 않고, 그마저도 빌런 조직을 소탕한 것에 불과해요. 설마 부시장을 죽인 거 때문에 그런가요? 애초에 빌런 조직과 함께 있던 걸 질타해야죠. 말소자를 빌런이라 칭하는 건 성급한 행동이에요.”
“안나, 국가의 통제 밖에서 제멋대로 구는 걸 우리는 빌런이라고 합니다.”
“저는 생각이 달라요. 세계 추세가 점점 각성자를 옥죄고 있어요. 이게 리그의 사상이 활개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고요. 넓게 봐야 돼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고 하면 결국 빌런밖에 남지 않게 될 걸요? 이건 리그가 활개치라고 장려하는 행동이에요.”
“리그는······.”
“자자, 우리가 얘기하는 건 리그에 대한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통령의 시기적절한 개입에 안나 크리스틴과 제임스 리드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크리스틴은 최준호를 영입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겁니까?”
“오히려 더 데려와야죠. 헤드 브레이커와 말소자, 전혀 다른 두 개의 이명은 그가 듀얼 기프트 사용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니까요.”
“···그 재능에 이견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최준호 영입에 반대 스탠스를 취했던 제임스 리드마저도 재능에 대해서는 극찬을 남겼다.
그 재능만큼은 진짜라는 의미리라.
하필 최강이 될 수 있는 재능이 미국 출신이 아니라니. 부통령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가상 적국에 등장하지 않은 걸로 위안 삼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한 부통령이 말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국은 넓고, 지켜야 할 곳들은 많습니다. 우리는 한 명의 시민을 더 지키기 위해 재능있는 각성자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설령 과거가 조금 껄끄럽더라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준호는 재능을 가진 각성자입니다. 그가 설사 말소자라 하더라도 더 많은 마물을 죽일 수 있다면 우리는 끌어들여야 합니다. 만약 말소자가 아니면 더더욱 끌어들여야 하고. 빌런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그리 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은 싱크탱크의 몫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
“제임스.”
“저는 단지 우려하는 점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부통령님의 결정에 불만 없습니다.”
“좋습니다. 최준호와 접촉은 크리스틴에게 맡기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교통정리를 마친 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내일 대통령과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
다음 날,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미국 부통령은 독대를 가졌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감탄했습니다.”
“이 좁은 땅에서 내세울 수 있는 건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본분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교류전도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양은 미래에 유망한 인재가 될 것 같더군요. 이번 교류전에 온 학생들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세계의 벽을 실감하고 더 분발할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마저도 꾸며진 내용일 뿐, 물밑에서 치열한 노림수가 오가고 있었다.
‘속내가 뭐냐?’
대통령은 부통령이 갑자기 만남을 청해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가벼운 신변잡기 이야기가 오가다가 부통령이 먼저 속내를 꺼내들었다.
“일전에 레벨 8에 해당하는 빌런이 등장했다고 들었습니다.”
“버서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행히 큰 위협이 되는 빌런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고 이레이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말로 말소자라 했던가요?”
대통령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은 빌런입니다만, 언급하시는 이유라도?”
“대한민국처럼 촘촘한 경계망을 가진 곳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이 우려가 되어서입니다.”
“첫 등장 이후 잠잠해서 괜찮습니다.”
“그 말씀은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걸로 들어도 될지?”
“그래서 함께 말소자를 찾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맞습니다.”
등장도 하지 않은 말소자를 왜?
부통령의 행동이 오히려 의심을 부채질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말소자는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게 저희 측 분석입니다.”
“허허, 아무리 그래도 레벨 8이라 추정되는 빌런입니다.”
“최근에 등장한 레벨 8 초인이 있지 않습니까.”
“······.”
대통령의 표정이 굳은 것과 달리 부통령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저희 측 분석으로는 최준호 초인이 말소자일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 분쟁이 날 수 있는 사안입니다.”
“아직 의심만 하는 단계입니다. 그에 따른 분석 내용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심없이, 순수하게 알고 계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거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결심이 서면 말씀해주시길. 동맹국으로서 최선을 다해 협력하겠습니다.”
대통령은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미국의 호의 잊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우방 아닙니까.”
“그렇지요. 영원한 우방이지요.”
서로 칼은 숨긴 채 둘은 미소 지으며 대화 자리를 마무리했다.
*
“······.”
대통령의 부름에 불려온 천명국은 부통령과 나눈 대화 내용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일리 있는 가정입니다. 대통령님께 올린 보고서도 있습니다.”
“그랬었지. 그래서 내가 농담처럼 얘기하기도 했고.”
“진심이신 거 같아 많이 놀랐었습니다.”
“그랬나? 아무튼 미국이 냄새를 맡은 걸 보니 보통 탐이 나는 게 아닌가 보지?”
“말소자의 위험보다 그 무위에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면 듀얼 기프트에 두 가지 방향으로도 레벨 8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증명이 되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말해보게.”
“최준호를 레벨 9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보고 작업이 들어온 걸지도 모릅니다.”
레벨 9.
아직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경지다.
그 강함이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만 오가는 단계다.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어떻게 측정해야 할지 감도 못잡은 미지의 경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레벨 9 초인을 보유한 국가가 세계의 패권에 가장 가까운 국가가 될 것이란 걸.
설마 거기까지 보고 있던 건가.
대통령은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말소자인 게 드러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체포해야 하나?”
“진심이십니까?”
“농담이지. 당연히 묻어둬야지. 설마 죽은 부시장이 우리 당이라고 해서 최준호를 놓을까. 가치만 봤을 때 비교도 되지 않는데.”
“······.”
“다만, 미국에서 우리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어. 그러니 물밑에서 말소자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놔. 빌런 조직을 소탕하고 인신매매 희생자들을 구해준 다크 히어로로.”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는 천명국의 뒷모습을 보며 대통령이 웃었다.
“수작 부리지 못하게 침을 잔뜩 발라놔야겠어. 아니, 아예 침을 뱉어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
미국 사절단이 마지막 행사만 남겨두고 있을 무렵, 나는 국가수호국에 방문한 이세희를 맞이하고 있었다.
“교류전은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수준 높던데.”
“세계 최강국이니까요. 우리보다 훨씬 세세하게 교육하고 일찍 실전 경험을 겪게 한다 해요. 그러지 않고서는 마물의 숫자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지켜야 할 땅이 많으니까.”
“맞아요.”
영토가 넓은 대국일수록 지켜야 할 곳이 많다 보니 각성자들도 필연적으로 실전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영토가 넓고 인구가 적은 경우 실질 지배 지역이 20% 미만으로 줄어든 곳도 있을 정도였다.
“하트워커 얘기를 하러 왔다고?”
“네. 하트워커 어머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어떤 의미로?”
“치료 시기가 늦어도 너무 늦었어요. 부산에서 치료를 받던 것도 마약류다 보니 그 부작용도 겹치고 있고······.”
사실상 연명치료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세희의 설명이었다.
너무 늦었나.
이에 대해 별 감흥은 없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설령 오종수가 같은 경우였어도 같은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게 최선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김종현 그분에 대해서 말인데······.”
“편하게 말해.”
“근무 태도가 좋지 않아요.”
이세희가 말하길, 하트워커는 근무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상사의 지시에 전혀 따르지 않는 둥, 연구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걸 만회할 수 있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지만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겠어요.”
“문제로군.”
“네.”
하트워커를 내가 데려왔기에 순전히 내 눈치를 보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녀석을 데려온 건 그 눈썰미랑 손재주, 그 두 개가 좋아서야.”
“재능은 확실해요.”
“하지만 도움보다 방해가 된다면 쓸 필요가 없겠지. 이득보다 손해가 커진다면 나한테 연락해.”
“네, 감사해요.”
그제야 이세희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면서 신약의 진척도를 설명하다가 가공법으로 넘어갔다.
내가 하트워커를 데려온 것이 효과가 있는지 눈에 띄게 진척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무지막지한 양의 포스로 밀어붙이는 나와 달리 녀석은 섬세함과 감각을 바탕으로 한다. 이걸 보편화 시키는 것이 이세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하트워커가 만든 표본을 바탕으로 상당 부분 진척이 이뤄어져 상용화를 앞두고 있단다.
“곧 단단히 각오하셔야 될 거예요.”
“무슨 각오?”
“어마어마한 빌런이 준호 씨를 찾아갈 거거든요.”
“죽이면 그만이지.
”절대 죽일 수 없거든요.“
이세희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세금이라는 빌런이거든요.”
가공법이 대중화 되면 세계 각국으로 라이센스가 팔려나갈 테니 내 몫으로 떨어지는 돈이 엄청날 거란 게 이세희의 설명이었다.
신성 그룹은 더 대박일 테고.
이세희는 나더러 절세 방법으로 법인 회사 세울 것을 권유했다.
내 생각이랑 다르다.
“다 내면 그만이지.”
“네? 그래도 절세는 해야······.”
“굳이? 됐어.”
이미 평생 써도 모자람이 없는 돈이 있다 보니 절세를 위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고 싶지 않았다.
그거 고민할 시간 있으면 마물 하나 더 잡는 게 내게 이득이다.
오히려 세금 낼 거 다 내면 떳떳하게 빌런을 때려잡을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면 어쩔 수 없죠.”
“오히려 다른 부분이 고민인데.”
나는 하트워커에 몫을 좀 떼어줘야 하는 게 아닌지 물어봤지만 이세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른 거 같아요. 매출이 발생하는 걸 지켜보고 천천히 결정을 내리는 게 어떨까요?”
“그렇다면야. 근데 그게 그리 돈을 많이 벌 수 있나?”
“네.”
마물의 심장 효율을 높여줄 수 있는 가공법이니 누구나 원할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안나 크리스틴이었다. 어떻게 국가수호국에 들어왔지?
그 의문이 풀린 건 뒤에 히죽 웃고 있던 정주호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더니 돌아간다.
“하이, 준호. 프린세스 리가 있었네요.”
“여길 어떻게?”
“준호 보러 왔더니 국장님이 안내해주지 뭐에요?”
히죽 웃은 안나 크리스틴이 냉큼 내 옆에 앉았다.
이세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거기 앉는 거죠?”
“준호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리고 프린세스 리 옆에 앉으면 시선이 분산될 것 같아서요.”
“···마음에 안 드네.”
“어쩜 저랑 마음이 같을까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둘이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내가 교통정리에 나섰다.
“이쪽 얘기 중이니 다 끝나고 들어오면 좋겠는데.”
“아! 그러네요. 국장님이 안내해주셔서 다 끝난 줄 알고 있었어요. 프린세스 리, 쏘리.”
“······.”
딱 봐도 이세희의 기분 안 좋아보였다.
윙크를 한 안나 크리스틴이 밖으로 나가자 이세희가 한숨을 푹 내쉰다.
“휴! 저 무지막지한 걸 보다 보면 진정이 안 된다니깐.”
“마이페이스긴 해.”
“준호 씨, 저 여자는 진짜 요물이니 조심하세요.”
“어차피 사절단 떠날 때 같이 갈 거야.”
“하긴, 제가 괜한 말을 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할 걸요.”
이세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 여자는 준호 씨가 미국에 오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진다.
“처참하게 실패하겠죠.”
근데 왜 좋아죽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다.
*
미팅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나 크리스틴은 밖으로 나오는 이세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얘기 끝났어요? 일찍 끝났네요. 아니면 할 이야기가 없으셨나.”
“이미 상당히 깊은 얘기를 나눠서요. 당신이 모를 이런저런 얘기였죠.”
“그래요?”
“절대 저와 떨어질 수 없는 끈적한 얘기들이죠.”
세상에 돈으로 얽힌 관계만큼 질긴 건 없었다.
실컷 오해하라고 던진 미끼였지만 안나 크리스틴은 태연했다.
“상관없어요. 남자의 과거는 그가 매력있다는 걸 알려주는 흔적이거든요. 저도 그 흔적에 흔적을 실컷 남기고 싶네요.”
“···안나, 당신의 목적이 뭔지 알아요. 근데 쉽지 않을 걸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한없이 냉정한 남자도 결정적인 순간 다른 걸로 판단하거든요.”
“두고 보면 알겠죠.”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이세희가 자리를 벗어나고, 안나 크리스틴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미팅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초고속으로 메이크업을 점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봐도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여기에 추후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할 실력까지. 무수히 많은 대상을 상대로 허니 트랩(Honey trap)을 구사해왔지만 이렇게 탐이 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꼭 갖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네, 준호는 한국 정부와 레귤러 계약을 맺었다고 들었어요. 다음 계획은 있는지 궁금해서요.”
“아직 계약을 맺고 반년도 안 지났는데.”
“그래도 미래 계획은 세워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준호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빨갛게 된 게 보이는 게 아닐까. 메이크업을 좀 더 두껍게 할 걸.
“미국으로 오라는 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네. 저는 준호가 미국에 와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셨으면 좋겠어요.”
안나 크리스틴은 미국에 오면 좋은 점을 나열했다.
“무엇보다 자유가 있어요. 이건 준호에게 필요한 부분이기도 해요.”
“자유라······.”
“네, 자유. 법으로 상당 부분 옭아맨 한국과 달라요. 자유도, 대우도, 존경도요. 그리고 연애도.”
그리 말한 안나 크리스틴이 눈웃음을 지었다. 저번의 처참한 실패 이후 차분하게 복기하며 오늘이 오길 기다렸다.
이 남자는 절대 눈앞의 것에 혹해서 넘어가지 않는다. 차근차근 호감을 쌓아나가며 절대 무너지지 않을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짧은 기간 동안 사업 파트너로서 그 위상을 구축한 게 이세희였다. 그녀도 해낸 걸 자신이 못할 이유가 없다.
“미국도 나쁘지 않지.”
“당장 결정을 내려달라는 간 아니에요. 천천히, 계약이 끝났을 때 미국도 고려 대상에 넣어달라는 의미에요.”
“어려울 거 없군. 그러지.”
“대신 결정이 빨라지면 좋은 게 있을지도.”
안나 크리스틴이 앞섶을 잡고 살짝 열어보였다. 처음보다 노골적인 유혹이다. 넘어와도 좋고 안 넘어와도 좋다. 잔상만 남겨도 대성공이다.
시선이 느껴졌다. 성공이다. 아무리 냉정해도 남자는 남자였다.
그리 자화자찬할 때였다.
“근데.”
“네.”
“내가 계약 끝나면 넌 몇 살이지?”
“······.”
훅 들어온 나이 공격에 안나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었다.
*
미국 사절단이 돌아갔다.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의 방문은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특히 제임스 리드, 이 녀석은 어눌한 한국어로 순진한 척 했지만 영리한 너구리인 게 느껴졌다. 날 샅샅이 훑어보려고 하는데, 호기심이 목숨을 단축한다는 걸 잘 모르는 듯했다.
안나 크리스틴의 제안은 나중에 쓸모 있는 패가 될 것 같았고.
그 외에 부통령이나 상원의원을 보면서 상당히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란 게 느껴졌다.
교류전에서는 양주혁이 두각을 드러냈는데, 녀석이 완전 개과천선했다면서 연신 감사 인사를 남기던 고명학으로 인해 얼떨떨함을 느꼈다.
“이 다음이 문제로군.”
“중국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과 천명국은 그리 얘기를 나누다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국 다음은 중국의 방문이다.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요구사항을 덕지덕지 덧붙였는데, 그중 하나가 나더러 마중을 나오라는 요구였다.
난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어떤 녀석들인지 보고 싶긴 했다.
“부탁하겠네.”
“예.”
중국 사절단 방문 시기는 미국이 떠나고 사흘 뒤였다.
규모는 미국보다 훨씬 더 컸다.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중국의 초인이자 동북 3성의 수호자인 장쯔둥이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보다 늙은 외모에 각진 스포츠머리,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내 손에 죽을 때 딱 저 모습에서 20년 정도 늙었을 때다. 그때도 꼬장꼬장하더니 지금도 보통이 아니다.
앞장서서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대뜸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했다.
“네가 그 미숙의 초인인가.”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로 지껄일 것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도 주변 표정이 바뀌는 것만 봐도 의미는 알 수 있었다.
난 피식 웃어주며 말했다.
“변경에 유배된 놈이 도시 공기 마시더니 환장했나 제멋대로 날뛰네.”
가감없이 통역하라는 내 지시에 통역이 그대로 전달했다.
“감히······!”
제대로 전해졌는지 장쯔둥이 표정을 굳히며 눈에 살기를 띠더니 손이 먼저 나왔다.
작심한 듯 순식간에 면전에 도달한 손이 할퀴듯 쓸어왔다.
고개를 살짝 꺾어 피하자 손이 궤도를 꺾어 목을 노려왔다.
난 왼손을 들어 녀석의 손목을 틀어쥐려 했지만 바로 쳐냈다. 반발력을 무시하고 손목을 쥐려 했다.
사납게 폭주하는 포스가 충돌하며 공방이 오갔다. 뱀처럼 집요하게 노려오는 손을 나는 끈질기게 따라갔다. 결국 다섯 번의 공방 끝에 장쯔둥의 손목이 내 손에 붙들렸다.
카드득!
장쯔둥의 포스가 내부로 파고들려는 기뢰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기뢰가 파고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상대를 파괴하는 기프트 중 기뢰만큼 끈질긴 건 없다.
결국 기뢰가 피부 안으로 파고들려는 순간, 장쯔둥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자취를 감추더니 사절단 가장 뒤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기프트 전이였다. 내가 갖고 있는 전이는 저번 생에 녀석을 죽이고 얻은 것이다.
난 굳이 쫓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프트 구경 잘했다고 전달하세요.”
내 말을 들은 녀석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기왕 붙는 거 여기서 끝장 봐도 상관없는데.
쫄았냐, 안 쫄았으면 덤벼보시지.
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일정을 소화한다.”
아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