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78
78화
78화
간신히 오해를 풀긴 했지만 뭐랄까, 억지로 풀어낸 느낌이 강했다.
애써 납득해주는 느낌?
사람을 어떻게 보고 저러는 건지 몰라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도 나름 문명물 먹은 초인인데 보이는 족족 시비 거는 빌런 취급하고 있었다.
버서커 같은 녀석이 얼마나 흉악한데.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만독불침 얻고 정신공격을 받았나?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대통령님이 기다리십니다.”
이찬택은 실무진과 좀 더 얘기하러 자리를 벗어났고, 나는 천명국을 따라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다.
“어서 오게.”
날 맞이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천명국의 표정도 처음과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보다.
난 그게 뭘까 생각하다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국 사절단이 방문할 때 비슷한 분위기였지.
“누굴 죽이면 됩니까?”
“그런 거 아닐세.”
“아닙니다.”
대통령과 천명국이 서둘러 부인한다.
아니라고? 대통령이 직접 말을 꺼내기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가.
내가 천명국을 보자 고개를 저었다.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장쯔둥과 같은 경우는 아니야. 이번 행사에 사람도 많이 오는데 대놓고 누굴 죽여 달라고 청부할 수 없지.”
“말만하면 가능합니다.”
“진짜?”
“예, 제가 만만하게 생겨서인지 시비가 잘 걸리더군요.”
“···하긴, 얼굴만 보면 대학 졸업반 같이 생겼으니. 그러다 잘못 걸려서 몇 명 골로 가겠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건 대통령을 살짝 떠본 거였다.
장쯔둥이야 국익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녀석이었으니 제거했지만 다른 초인들은 아니었으니.
나라는 칼을 손에 쥐면 대통령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
난 협상이 통하는 상대를 원했지, 자기 이익을 위해 날 부리려는 사람의 손을 잡은 게 아니니까.
“욕심이 생기긴 하지만 그 용건이 아니야.”
“표정이 어두우셔서 제가 오해했네요.”
“나랏일하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거든. 대통령하고 얼굴이 반질반질해지면 일을 대충했다는 거야, 잔뜩 상해서 임기를 마쳐야 열심히 일한 게 되지. 하하!”
확실히 대통령이란 인물은 다르구나 싶었다. 아니, 이건 전한철이라는 인물 자체가 대단한 거겠지. 부산시장이나 서울시장은 기대 이하였으니.
한참 웃던 대통령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청문회가 어떻게 보였나 싶어서 부른 거야. 국회의원들이 자네 심기를 많이 거스르지 않았나. 정 청장도 그렇고.”
내가 나쁘게 생각할 거 같아서 그랬던 건가? 그걸 보면 내 생각을 많이 해준다 싶었다.
근데 왜 사람 관리 느낌보다 폭발물 관리하는 느낌이 들지?
“상관없습니다. 그냥 머릿속에 누가 어떤 말을 했나 기억만 해두고 있거든요.”
“···그게 문제인 거 같은데.”
“이번 건으로 문제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이야기 핀트가 많이 어긋나있군.”
대통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피식 웃었다. 심각해질 뻔한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화제는 도쿄에서 열리는 행사로 옮겨갔다.
“이번 행사는 꽤 다사다난할 거야. 일본에서 건재한 걸 과시하기 위해 작정하고 벼르고 있거든. 그리고 각국에서는 새롭게 명명된 유해 8단계 플러스 마물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려 하고 있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유해 8단계 플러스 마물에 대한 논란이 뜨겁단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유해 8단계 마물은 초인이 포함되면 큰 위험없이 사냥할 수 있었지만 플러스는 초인 하나가 더 있거나 받쳐주는 전력이 2배 이상 동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첫 사례라 할 수 있는 누리 사냥 과정으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플러스 단계 마물을 상대한 곳 중 몇 곳은 큰 피해를 입고 나를 비난하고 있다고 한다.
지들이 약한 거 가지고 왜 나한테 그러지?
뭐, 내 욕을 하는 건 자기들 자유니까.
다만 내 앞에서 그러면 참지 않을 뿐이다.
분명 대통령은 자중하라고 말하려는 거 같은······.
“가서 시비 걸면 참지 말고 지르게.”
“···생각했던 거랑 다른 말인데요?”
“어차피 의심만 하는 녀석들이 우리한테 뭐 도움이 되겠나. 사냥한 정보를 알려줘도 의심하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게 좋겠지. 호의를 베풀었으면 적어도 비난은 하지 않아야지. 그래서 준비했네.”
대통령의 눈짓에 천명국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초인과 소속 국가, 출신 국가, 나이, 성별, 성향과 나에 대해 어떻게 코멘트 했는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거 대놓고 쓸어버리라는 건가?
근데 살펴보니 죽을 소리 한 녀석은 없었다.
딱 보니 자기들이 약한 거 면피하기 위해 내 탓을 했군.
그중에 기예르모라는 녀석이 제일 심하게 날뛰긴 했다. 멕시코의 초인인 녀석은 이번 유해 8단계 플러스 마물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 한다.
자기 친구 죽인 마물을 탓해야지 왜 나한테 난리인 건지.
하긴, 원래 실패하면 남 탓하는 녀석들이 대다수이긴 하다.
했던 말을 보면 넘어가줄 만하지만 일본에서 비슷한 짓을 하면 용서는 못하겠지.
욕 먹은 걸 이렇게 정리해서 보니 새로웠다. 요약본의 위력인가.
세계 각지에서 참 이리저리 씹고 뜯고 즐겼군.
“다 죽이지만 말게.”
“누가 보면 제가 거슬린다고 다 죽이는 줄 알겠습니다.”
“······.”
설마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에이, 아니겠지.
*
마물이 등장하기 전, 인천에서 도쿄는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지만 마물이 등장하고 비행항로를 가로막아 수백 대가 넘는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마물을 피해 돌아서 가야만 했다.
우리는 인천을 떠나고 4시간이 걸려 도쿄에 도착했다.
난 이찬택과 함께 이동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일본은 훌륭한 파트너다.”
첫 인상은 무뚝뚝해보였지만 가까이서 겪어보니 이 양반, 수다쟁이다.
특히 자신이 아는 정보를 늘어놓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본래 이런 행사 참가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현재 길드가 흔들리는 형국이라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도쿄행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정부 지원이 달달하다나?
누리 사냥 직후 내게 바로 고맙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묵직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시류 파악에 능하고 태세 전환이 빨랐다.
그래도 나한테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데?
“일본과 우리는 서로 얻을 게 굉장히 많지. 필요 이상으로 강해지는 건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약해져서 좋을 것도 없다. 아, 이건 내 개인적인 견해이고 혹시 일본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나?”
“별 생각 없습니다. 나쁘지 않은 파트너 정도?”
“그건 다행이로군. 만약 나쁘게 생각했다면 우리도 관계를 재조정해야 했을 테니까.”
내 생각이 아방가르드 길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인가.
이찬택이 말하길,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 많다면서 내가 장쯔둥을 죽였을 때처럼 일본 초인과 척을 질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단다.
쓸데없는 걱정들이 참 많군.
내 반응을 본 이찬택이 툭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네가 가진 영향력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네 힘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네 의중은 앞으로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 된다.”
주변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다.
이게 체질인지 파악이 쉽지 않았다. 내 힘만큼 발언권이 세지면 그냥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내 말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할 텐데.
가끔 질문을 던졌을 때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과 비슷한 건가.
나도 농담 좋아하는데.
참 어려운 문제다 싶었다.
그 사이 우리가 탄 비행기가 도쿄에 도착했다.
첫 일정은 간단했다.
곧장 호텔로 이동해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한 뒤 행사가 개최되면 얼굴 몇 번 비추면 된다.
실무는 정부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할 것이고, 내가 할 건 누리 사냥 브리핑에 의견을 첨언하면 된다.
보통 이 기간에 다른 국가 초인들과 친해지는 기회를 갖는다던데, 굳이? 윤희가 말한 애니메이션 블루레이 박스나 살 생각이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한국과 비슷하면서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은 마물 등장 당시 최우선적으로 도쿄 광역권을 사수했고, 성공했다. 그래서 세계 최고로 꼽히는 도시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입국 심사를 프리패스로 마치고 공항 출구로 향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쩌렁쩌렁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뭐지? 마물인가?”
“마물의 기척은 아닌데요.”
“그럼?”
“귀신이라도 봤나 봅니다.”
나를 비롯해 사절단이 출구를 지나 본 것은 수백 명의 사람이 환호성 지르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들이 맞이하는 게 우리 같은데 들고 있는 피켓을 보면 적힌 말이··· 최준호? 헤드 브레이커?
···나였다고?
저 사람들이 왜 나를 기다리지?
그리고 이름 옆에 왜 하트가 붙어있냐.
내가 상황 파악을 못하는 사이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노 사마!
헤드 브레이커 사마!
“······.”
“놀랍군. 한국에서도 팬클럽이 결성된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도 이만한 영향을 끼칠 정도였던가? 최준호라는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겠어.”
그러면서 듣는 것만으로 섬뜩한 K-초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버렸다.
이찬택의 말이 이렇게 속을 뒤집는 거였나. 자기 일 아니라고 아주 편하게 얘기하시는군.
그제야 출국하기 전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진세정이 왜 내게 풀메이크업을 하고 가라고 했는지.
처음에는 국격을 위해서라고 말하던 게 이상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마지막에 지었던 의미심장한 미소가 이해되었다.
날 속였구나, 진세정!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노 사마니, 헤드 브레이커 사마니 외치고 있었다.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이찬택의 말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이찬택이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옆에서 조언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불을 붙이고 있다.
“가죠.”
난 공항을 벗어날 때까지 왠지 모를 민망함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한때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최악 최흉의 빌런이던 내가 아이돌 대접이라니.
일본에도 그 어처구니없는 세계관 같은 게 퍼져나가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나저나.
두고 보자, 진세정.
두고 보자, 이찬택.
*
호텔에 돌아와서도 휴식시간은 없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컨벤션 센터로 소수 관계자들과 내려와 일본 기자들에게 붙들려 인터뷰를 했다.
일본 기자들 성향은 우리나라 기자와 비슷했다. 자국(일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해 했고, 자국의 초인이나 유망한 헌터들에 대한 코멘트를 듣길 원했다.
나는 저번에 각성장관과 만남을 언급하면서 일본과 동맹이 돈독해지길 원하며, 일본의 초인과 유망주들에 대해 짤막하게 코멘트했다.
진세정이 이거 물어볼 거라 해서 몇 줄 훑어봤다.
그러자 일본 기자들이 좋아라했다.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는데?
가령 내가 일본 초인 한 명을 평가한 내용은 이러했다.
“일본 초인 츠요시의 고요할 정도의 부동심은 대한민국 초인들도 참고하고 중국 초인들이 비기를 연구할 만큼 대단하다. 나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정신을 유지하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츠요시는 장차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마물 전선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실력자라고 생각한다.”
···난 그냥 국뽕 썸네일을 응용해서 좀 양념을 더 쳤을 뿐인데.
물론 이면에는 츠요시의 기프트 부동심(不動心)을 내가 탐내던 것도 있었다.
이 기프트만 있었으면 내가 미쳐버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지금은 내 스스로 정신방벽을 두텁게 하고 만독불침이 있어서 필요하지 않은 기프트다. 만독불침이 오작동을 하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그런데 일본 기자들의 반응이 열광적이니 얼떨떨했다.
가급적 립서비스를 잘하라는 진세정의 조언을 받아들여 양념을 친 건데.
어째 이거 내 무덤을 내가 판 거 같다.
그로부터 두 시간 넘게 일본 기자들과 얘기를 나눠야 했다.
우리나라 관계자들이 날 원망스럽게 보던데.
원래 이런 거 맞지?
“아닙니다.”
피로에 찌든 관계자의 목소리가 현실을 깨워줬다.
···아닌가보다.
*
첫날, 기자들에게 잔뜩 시달린 뒤 조식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내려왔다.
식당에는 먼저 도착한 여러 국가 관계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국제 행사라는 것이 실감될 정도로 각양각색의 인종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역시 일본에 왔으면 일본식 된장국을 먹어야지. 토마토 들어간 건 없나? 떡도 구워서 넣어 먹던데.
구석에서 조용히 된장국을 음미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나는 익숙한 기파를 감지했다. 이건 미국의 제임스 리드의 것이다.
한국말을 졸라 유창하게 하면서 나와 대결을 원하다 유연하게 피해가던 마초맨의 모습을 떠올랐다.
기파를 쫓으니 감출 수 없는 거대한 체구의 제임스 리드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는 라틴계 중년 미남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어가 아닌 걸 보니 스페인어인가보다.
그러다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기예르모!”
날 허풍쟁이라고 떠들던 멕시코 초인하고 같은 이름인데.
그 녀석인가?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랐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둘은 대화를 멈추고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 리드는 뒷담이라도 하다 걸린 것처럼 몸을 움찔 떨었고, 기예르모로 추정되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 보는 눈에 힘을 줬다.
“준호! 졸라 오랜만이야!”
“어, 오랜만. 한국어는 여전하네. 그런데 이쪽은 누구? 친구야?”
“친구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해서 내가 대놓고 물었다.
“이쪽이 기예르모?”
“······.”
“내 욕하던 녀석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정작 내 앞에서 못하더라.”
“······.”
“내 앞에서 해봐.”
기예르모에게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를 모르겠군. 여기가 한국이 아니니 한국어 사용을 강요할 수도 없고.
“준호! 졸라 진정해!”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대화를 하고 있었지? 내 통역 셔틀로 당첨이다.
“스페인어 할 줄 알지? 통역해.”
“나 스페인어 몰라!”
“방금 스페인어로 떠들었잖아?”
“아! 들켰어! 졸라 짱나!”
실력이 뽀록난 제임스 리드가 표정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