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84
84화
보고서를 보는 대통령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9단계 마물 등장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인가?”
“파급력이 강하다고 해서 투뿔로 칭하기로 했습니다.”
“응?”
“플러스 플러스를 귀엽게 부른 겁니다. 정식 명칭은 플러스 플러스가 낫지 않은가 싶습니다.”
천명국이 말을 보탰다. 나는 투뿔이 더 귀엽지 않냐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다.
“그게 더 나을지도. 9단계라고 하는 순간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종말 안 오던데.
미래를 살아 보고 온 입장에서 여전히 세계는 복작복작 잘 돌아갔다.
단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마물 숫자가 늘어나서 힘겹게 버텨 낼 뿐.
생각해보니 내가 혈종일 때 마물을 잡은 게 웬만한 대형 길드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미쳐 있었지만 나름 세상에 기여하고 있었다.
“일단 이 정보를 일본에서 발표하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일세. 발표했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졌을 거야.”
정확히는 덤비는 놈이 있어서 깜빡했던 거다. 두들겨 패 주다가 타이밍을 놓쳤지만 다 의도가 있던 걸로 하기로 했다.
“타국에서도 예상은 하고 있을 텐데요.”
“당장 우리도 그 가능성이 제기되었네. 플러스 단계 마물은 포스 운용과 기프트 개방이 된 ‘새로운 단계’에 오른 다른 종이라고. 하지만 최준호 초인이 확신을 실어 얘기하면 의미가 다르겠지.”
“그럴까요.”
“여태까지 말해 온 것들 중 틀린 게 없으니까. 마치 미래를 겪어 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
역시 대통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내가 미래를 보고 온 걸 아는 걸 보면.
“농담이야. 하지만 기프트 중에 예지가 있으면 알려 줄게. 다음 주 복권 당첨번호가 궁금하거든.”
“찍어 볼까요?”
“부탁 좀 하지.”
대통령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상태로 얘기를 끝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투뿔 마물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나도 직접적으로 상대해 본 개체는 없다. 워낙 희귀하기도 하고, 영리해서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을 치곤 했다. 그래서 지능이 높다고 판단되고, 사냥 성공 사례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엄청 강하기도 해서 기프트를 개방하면 방어 기프트를 깨부술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소수정예 각성자로 사냥팀이 구성되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똑똑한 양반들이 알아서 대책을 세울 거다.
그나저나 차가 덜덜거리는 게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다. 조만간 차나 바꿔야지. 중고차 중에 괜찮은 게 있으려나? 새로 사기에는 차에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
그 사이 나는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출장에 다녀왔으니 밥을 차려 주겠다고 하셨다.
제법 오랜만에 뵌 부모님의 얼굴은 잘 지낸 티가 나서 마음이 놓였다.
“요즘 어떠세요?”
“아주 좋다.”
“다행이네요.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그래, 아직 네 부모가 멀쩡하니 너무 걱정 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이 편안함은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과거에 돌아와 있음을 실감했다.
내가 미쳤다면 이 시간도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했다. 언제 어느 순간 미쳐 버릴지 몰랐다.
그걸 위해 만독불침을 얻었던 건데 오작동이나 하고.
잘 관리된 아파트 단지와 최근 어울리게 된 반상회 인원에 대해 얘기하시던 어머니가 돌연 조심스럽게 물어오셨다.
“근데 우리 아들 얼마나 부자인 거야?”
“잘 모르겠어요. 용돈 필요하세요?”
1조 정도 드리면 걱정 없이 쓰시지 않을까?
내 말에 어머니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아니, 괜찮아. 청주에서 정리한 돈도 넉넉하고.”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역시 아들딸 잘 둬서 좋다니까.”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얼마 전에 윤희한테 용돈을 받으셨단다. 녀석, 나한테 말을 하지 않다니. 졸지에 나만 불효자식이 될 뻔했다.
근데 아이돌 덕질하면서 부모님에게 드릴 돈이 있나? 나중에 시집가려면 돈도 모아 둬야 할 텐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부모님이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하실 말씀이라도?”
“이거 말해도 되나?”
“해도 돼요.”
“그, 신성 그룹의 아가씨 있잖니.”
“이세희 팀장이요.”
“그래, 이 팀장. 혹시 둘이 자주 만나니?”
“자주 만나죠.”
어머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디가 좋은 포인트지?
“그럼 사이도 좋겠네?”
“나쁘지 않죠. 좋은 편이 맞겠네요.”
“어머어머! 좋은 관계로 이어지는 걸 기대해도 되는 거니?”
어머니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지금 이걸 왜 물어보시는 거지?
“이미 좋은 관계인데요.”
“뭐? 정말?”
“준호야, 윤희 엄마 말은 사귀는 사이를 말하는 거다.”
지켜보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애들 청춘사업을 왜 그리 직접적으로 말해요.”
“안 사귀는데요.”
여태까지 서로 다른 걸 묻고 대답하고 있었구나.
내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일그러졌다.
“방금 좋은 관계라고 하지 않았어?”
“비즈니스 관계를 얘기한 거죠. 이세희가 비즈니스 능력이 아주 뛰어나거든요. 덕 좀 보고 있어요.”
“하아!”
내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고, 아버지는 어머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내가 뭘 기대한 건지.”
“···그러니 준호한테 기대 버려. 불효자 녀석.”
“······.”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졸지에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 * *
일본 총리 요청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 신성길드를 방문했다.
빅뱅 시리즈 물량 증가와 합작 회사 언급에 이세희의 눈이 잠깐이지만 번뜩였다.
“아쉽네요. 제가 직접 갔으면 더 알뜰살뜰 뜯어냈을 텐데. 아! 준호 씨를 탓하는 게 아니에요. 아마 절 상대하기 싫어서 수작을 부린 걸 테니까요.”
그러면서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왜 섬뜩하게 보이는 걸까.
차관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건지 궁금했지만 안 묻는 게 낫겠지?
나머지 협상은 이세희가 맡기로 하고 화제를 다음 걸로 넘어갔다.
“정부에서 플러스 플러스 단계 마물에 대한 협력 요청이 들어왔어요. 이게 유해 9단계급 위력을 발휘할 거라면서요? 아직 플러스 단계도 상대하기 벅찬데······.”
그러면서 신성 길드에서도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다. 플러스 단계 마물 연구에 상당 부분 진척이 이뤄져서 다음 플러스 단계는 자신들이 입찰하겠단다.
나로서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자신은 있고?”
“그럼요. 철저하게 연구했고, 방심도 없어요. 곧 등장할 거라 생각해요.”
대한민국 최고 길드라고 불리니 대책도 확실하게 세워 놨겠지.
한번 어떻게 사냥하는지 구경이나 갈까.
이세희에게 그리 말하니 흔쾌히 수락해 줬다.
든든한 보험이 생겼다는데 난 구경만 할 건데?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단다. 난 잘 모르는 포인트가 있나 보다.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던 대화 분위기는 갑자기 이세희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나저나 서운해요.”
“뭐가?”
“다현이만 훈련 봐주고요.”
“아아, 그거?”
이세희가 지나가듯 몇 번 말하긴 했었다. 난 그때마다 흘리듯 스쳐 지나갔고. 딱히 무시하려던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고,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서다.
왜냐하면.
“내가 가르치는 재능이 없더라.”
“네? 왜요?”
“꽤 강도 높게 가르쳤는데 좀처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질 못해서. 다현이는 열심히 하는데 벽을 넘지 못하면 가르친 사람의 탓이지.”
“이상하다? 내가 들은 거랑 다른데.”
달라? 뭐가 달라?
고개를 거듭 갸우뚱거리던 이세희가 말했다.
“전 상관없으니 다음에 시간 한번 내서 저도 지도해 주세요.”
“많이 힘들 텐데,”
“그럼요. 플러스 마물 상대하려면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 놔야 하거든요.”
“죽어라 굴릴 거야.”
“저 그런 거 좋아해요.”
주변에서 전부 띄워 줄 텐데 굴리는 걸 좋아한다고? 립서비스인지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이세희가 의욕을 보이니 가르쳐 줘야겠지.
하지만 정다현이 레벨 7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재능은 없나 생각하던 차였다.
아무래도 나와 다른 사람의 기준이 다르기도 하고, 내가 강해졌던 게 혈중섭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있으니까.
좀 더 강하게 굴려 봐야겠다.
“기대해.”
* * *
최준호가 돌아가고, 이세희는 조금 전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본 총리 요청. 준호 씨가 일단락 시켰지만 더 우려낼 게 있을 테니 협상단을 파견하기로 하고······.”
일본은 돈이 많은 국가다. 다 우려낸 사골이라고 해도 우려내면 더 우려낼 수 있을 것이다. 굵직한 부분을 최준호와 협상했다고 해도 주변을 노리면 콩고물이 떨어질 것이다.
그 외에 플러스 플러스 단계로 명명될 새로운 단계 마물을 대비해야 한다. 여기에 플러스 단계 마물 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까지.
최준호가 지도해 주겠다고 한 건 월척이었다.
사냥에 옵저버로 나서겠다고 한 것도.
보험으로는 최고 보험인 셈이다.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접점을 만들어 가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근데 다현이랑 준호 씨랑 말이 다르네. 삼촌이랑 말도 다르고.”
이세희는 백군서가 얼마 전 정다현을 보고 극찬했던 걸 떠올렸다.
놀라울 정도의 발전이라고 했던가.
정다현을 제자처럼 생각하기에 허튼 말을 하지 않는 백군서다.
그런데 정작 최준호와 반응이 다른 걸 보면 뭔가 어긋난 점이 있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다음 날, 플러스 단계 마물 사냥 회의에서 백군서에게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
“최준호가 어떤 식인지 몰라도 마법을 부렸더군. 가르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준호 씨 말이랑 다른데요. 자기는 가르치는데 전혀 재능이 없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재능이 없는데 정다현을 레벨 7로 올려놔?”
“네? 다현이가 레벨 7이 됐어요?”
이건 몰랐던 얘긴데?
놀란 이세희의 반응에 백군서가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저번에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충격받을까 봐 그랬다. 그래, 다현이가 레벨 7에 올랐더구나. 시간상 갓 레벨 7이 되었을 텐데 기도가 상당히 안정되었어. 이 모든 것이 최준호의 가르침 덕분이겠지.”
“···가르치는데도 그 재능이 있을 줄 몰랐어요.”
“그런 팔방미인이 또 없지. 더 웃긴 건 다현이도 스스로가 레벨 6으로 알고 있더구나.”
“왜 그런 걸까요?”
자신이라면 좋아서 사방팔방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실력을 감추는 겸양도 좋지만 자신 같은 사람은 드러낼수록 유리했다.
“스스로 엄격한 면도 있고, 최준호도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거겠지.”
그러는 최준호도 정작 정다현을 레벨 6으로 알고 있던데.
풀리지 않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아무튼 대단한 성과였다.
비록 훈련 시간보다 업무 보는 시간이 더 길지만 이세희 또한 천재로 불리는 재능.
어린 시절부터 정다현과 라이벌이었던 만큼 앞서 나가는 걸 마냥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쪽쪽 빨아먹어야지.”
이세희가 주먹을 쥐며 굳게 다짐했다.
* * *
정다현은 최근 성취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쩍 강해진 걸 체감했지만 문제라면 상대가 최준호라는 점이다.
지도 대련이 이루어질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하는 걸 느꼈다. 모든 걸 쥐어짜내더라도 잠깐 방어해 내는 게 전부였고, 결국 매 맞듯 얻어맞았다.
어제 만남도 그러했다. 오늘 임무가 있어 살살 다뤄 줬지만 정다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닥만 굴러야 했다.
“아직 멀었어.”
스스로 생각해도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언제 레벨 7에 도달할 수 있을지, 천재라 불렸던 자기 재능이 너무나 모자라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자괴감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정다현은 임무를 상기했다.
오늘은 오랫동안 인신매매를 일삼던 빌런 조직 기습이 예정되어 있었다.
“가죠.”
은밀히 서울을 벗어난 빌런전담팀은 부천의 한 창고에 도착했다.
수도권에 속하면서 인천과 가까워 이곳에서 빌런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정보였다.
“저격수는 모두 제거했습니다.”
“보초도 제거했습니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보고에 정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동료를 발견한 듯 창고는 소란에 휩싸여 있었다.
적이 혼란에 빠진 틈에 들이쳐야 한다.
정다현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익숙한 차가운 촉감에 정신이 차분해진다.
스스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이라면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을 종료하고 싶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지금은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 빌런을 거칠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라도 많은 빌런을 처리해야 동료가 안전해지니까.
예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던 생각이다. 하지만 최준호를 만난 뒤 자신이 가진 ‘정의’라는 단어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길이 옳다. 한 명의 빌런이 사라지면 천 명의 시민이 안전하게 삶에 종사할 수 있다.
나찰녀라는 이명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지만 자신의 정의와 일치한다.
“제가 앞장 설 테니 모두 따라오세요.”
정다현이 앞장서고, 예비대가 퇴로를 가로막았다.
창고 안으로 진입한 정다현이 앞장서서 검을 휘둘렀다. 반달 모양의 포스 블레이드가 뿜어지며 빌런들의 다리를 갈라 버렸다.
피보라가 공장 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끄아아!”
“아악! 내 다리!”
“사, 살려······.”
말과 달리 품에서 총을 꺼내 드는 빌런의 목을 친 정다현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저항하면 죽여도 됩니다!”
정다현의 외침과 함께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총을 쏘는 빌런도 있지만 저격수가 정다현의 집중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팀장의 성향을 따르듯 빌런전담팀 헌터들도 가차 없이 빌런을 죽였다.
창고 안에 있던 80여 명의 빌런이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무렵이다.
주춤거리던 빌런들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버티면 둘 중 하나였다. 뒷배가 있거나 절대 포기하지 못할 물건이 있거나.
그리고 창고 안에서 울려 퍼진 섬뜩한 웃음소리가 둘 중 전자임을 드러나게 했다.
“끌끌끌. 거기까지 하도록.”
그와 함께 165cm 정도의 초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부팀장 엄경영이 비명을 터뜨렸다.
“팀장님, 혈겁마(血劫魔)입니다.”
“혈겁마?”
정다현은 잊고 있던 옛 빌런의 이명이 떠올랐다.
혈겁마 하광일.
20년 전, 중국에서 건너와 악명을 떨친 빌런이다. 당시 새로 떠오르던 초인 백군서에게 오른팔이 잘리고 중국으로 도망쳤다고 알려졌다.
대한민국이 좁다 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빌런이다. 심심하다고 사냥팀을 습격해서 죽여 버리고, 민간인이 심기를 거슬렀다며 일가족을 죽이고, 유망하다는 각성자를 찾아다니며 죽이고. 갓난아기를 죽여 피를 마신 범죄는 대한민국 전체를 분노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열거하기 힘든 기괴한 악행들을 저질렀다. 백군서가 아직도 하광일을 놓친 걸 아쉬워 할 정도였다.
2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하광일은 오른팔이 멀쩡하게 달려 있었다.
다소 왜소한 체구와 달리 두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네가 백군서의 제자렷다? 널 잡아 그놈의 팔 하나를 요구하면 오래 묵은 원한이 조금 희석되겠어.”
하광일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왔던 것이다.
바로 앞에 있는 만큼 피할 수 없다. 자신이 상대해야 한다.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정다현이 빌런전담팀에게 외쳤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모두 후퇴하세요.”
“티, 팀장님?”
“명령입니다!”
“···지원군을 요청하겠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부팀장 엄경영이 팀원들을 이끌고 창고 밖으로 나가고, 정다현이 입구를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광일을 막겠다는 의지였다.
검을 든 그녀는 혈겁마의 구석구석을 쫓았다.
20년 전부터 악명을 날린 레벨 7의 악명 높은 빌런이다. 초인이 아니더라도 그 기량은 절정에 도달했을 터.
···그런데 왜 직감은 평온한 걸까.
“카카카캇!”
괴상한 웃음과 함께 하광일이 달려들었다. 그와 검을 맞대는 순간, 포스가 얽혀 들며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걸로 여파를 가볍게 해소한 정다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강하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할 만했다.
쩌엉!
불똥이 튀며 찰나의 순간 십여 번의 검격을 교환했다. 정다현은 하광일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반격까지 해냈다.
전혀 어렵지 않았다. 최준호가 훨씬 강하고 빠르며 괴상망측하고 무서웠다.
오히려 반격할 공간마저 보였다. 함정일까? 함정일 수도. 진짜 혈겁마라면 이런 틈을 드러낼 리가 없을 거다.
“제법 하는구나, 애송이.”
음산한 웃음과 함께 하광일이 달려들었지만 모조리 막아냈다.
설마 의도된 틈이 아니었던가.
정다현은 한 번 빈틈을 파고들어 검을 휘두르자 하광일의 견갑이 날아갔다.
과거 악명을 쩌렁쩌렁 울렸던 빌런의 검이··· 고작 이 정도라고?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하광일이 부상이 심해서 레벨이 낮아지기라도 한 걸까.
검을 든 정다현이 물었다.
“당신, 무슨 의도로 혈겁마를 사칭하고 있죠?”
“뭐, 뭐? 네년!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거짓말 하지 마세요. 혈겁마는 레벨 7 빌런, 당신처럼 약할 리가 없어요.”
대체 무슨 수작이지? 진짜 혈겁마가 따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후퇴한 팀원들이 위험하다.
“빨리 사칭범을 정리하고 가야······.”
대놓고 무시받은 하광일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네 이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