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85
85화
혈겁마 하광일은 전신에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두 눈은 경악으로 부릅뜨여 있었다.
“내, 내가 백군서도 아닌 이런 애송이 년한테!”
치욕과 절망으로 얼룩진 옛 기억이었다.
대한민국이 좁다 하며 활개 치다가 백군서에게 패하고 쫓겨난 뒤, 하광일은 복수의 날만 기다리며 검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초인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이가 60이 넘고 노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백군서에게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직접 복수가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주변에 있는 것들을 망가뜨리겠다. 하광일의 목표는 백군서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백군서에게 있어 목숨보다 소중한 건 신성그룹이다.
오늘 이 자리도 백군서가 아꼈던 제자 정다현을 잡으려고 왔다. 천재라 불리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애송이를 잡는 건 손쉬운 일일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정다현의 검은 빠르고 현란했다.
무엇보다 하광일을 놀라게 만든 건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움직임이었다.
그걸 위해 정다현은 자신이 부상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악랄한 검격을 구사하는 빌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놈들도 자기 목숨은 소중하게 여기기 마련인데 정다현은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너만큼은 죽이겠다는 살기를 드러냈다.
이게 빌런이 아니고 공무원 헌터라고?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수십 년간 쌓아 온 자신의 실전경험이 무색해지고 있었다. 현란함에 실린 살기에 집요함이 가미되니 예측하기 힘든 온갖 검로가 그려졌다.
찬란하게 피어나는 재능 앞에서 노쇠한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해져 갔다.
결정적으로 열 받게 만드는 건.
“가짜 혈겁마님, 진짜는 어디로 갔죠?”
“크아아아!”
혈겁마로 쌓아 온 자신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 태도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자신을 혈겁마를 사칭하는 사람으로 몰고 있었다.
자신의 이명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던 하광일로서는 절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하광일은 남은 포스를 아끼지 않고 퍼붓기 시작했다. 육체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 대가로 속도가 더 빨라졌고 변화가 늘어났지만 정다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모조리 튕겨 냈다.
하나하나에 살기가 묻어나오는 검격을 다 막아낸다고?
녀석은 두려움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거란 말인가.
무수한 변화를 눈으로 모조리 캐치하는 모습에서 하광일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이 얼마나 빛나는 재능이란 말인가.
그 앞에서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졌다.
“사칭하더라도 다른 분으로 하지.”
급기야 존재마저 부정당한 하광일의 눈이 뒤집혔다.
“너만은 죽인다!”
그것이 하광일이 한 마지막 말이었다.
섬전처럼 파고든 정다현의 검이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가 눈을 부릅뜬 채 땅을 뒹굴었다.
“가짜라서 여태까지 살려 둔 건데.”
정다현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죽은 하광일의 눈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가짜가 아니라 진짜란 말인가?
그런 것치고 너무 약해도 너무 약했다.
부팀장 엄경영은 빌런에 한해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혈겁마 하광일을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럼 자신이 이긴 건 뭘까.
레벨 6이 레벨 7을 이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거였나.
“모르겠네.”
하광일이 보여 준 반응을 볼 때 진짜일지도.
끝까지 가짜라 부른 건 도발하기 위함인데 생각보다 쉬웠다.
오히려 빌런이 도발에 더 쉽게 걸려드는 느낌이다.
“욕을 배워 볼까?”
거칠게 욕을 하면 멘탈을 더 흔들어 놓을 수 있을지도.
그로 인해 듣는 나찰녀라는 이명이 이젠 싫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빌런을 많이 죽이고 시민이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봉사했다는 증거니까.
고민을 뒤로 미뤄 둔 정다현이 빌런들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히익! 사, 살려 주세요!”
“항복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나찰녀님!”
사색이 된 빌런들이 팔을 들고 빌고 있었다.
* * *
“고마워요. 전부 의도하셨던 거죠?”
“어, 응.”
정다현이 감사 인사를 하자 얼떨떨한 마음이다.
이번 작전에서 오랫동안 악명을 날렸던 혈겁마 하광일을 잡았단다.
혈겁마는 유명한 레벨 7 빌런.
버서커, 인형술사, 사형집행인, 검은사신으로 대변되는 최악의 빌런 이전 세대 빌런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정다현은 그런 거물 중에 거물을 잡았다. 벌써 냄새를 맡은 뉴스가 난리 났다.
이제 20대 중반에 접어든 레벨 7의 등장이었다. 이 추세면 10년 이내에 초인이 될 거라며 벌써부터 ‘K-각성자 육성 시스템’ 홍보가 이뤄지고 있었다.
거기에 왜 나는 끼워 넣는 건지.
“어려운 건 없었어?”
“네, 오히려 너무 쉬워서 상대가 레벨 6인 줄 알았어요. 오빠한테 배워서 레벨 6 어떤 상대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거든요.”
말 한번 예쁘게 하는군.
그 속에 담긴 진심과 믿음이 담겨 있는 걸 나도 알았다.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난 여태까지 내가 굴리는 방식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레벨 7에 도달해 있었다니? 내 기준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레벨 평가에 있어 너그럽게 기준을 적용하는 것 같았다.
정다현은 내가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굳이 의문을 풀어 줄 필요는 없겠지.
“잘했어.”
“네. 방심하지 않고 열심히 할게요.”
“그래.”
정다현은 앞으로 더 많은 네임드 빌런들을 잡을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자세, 보기 좋았다.
나도 혈종의 광기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기에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지.
이런 걸 보면 나도 가르치는데 꽤 소질이 있는 거 같다.
마음 놓고 윤희를 굴려야겠다.
* * *
새로 명명된 플러스 플러스 마물에 대한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존에 등장한 플러스 단계 마물이 좀 더 능숙하게 포스를 운용하고 기프트를 자유롭게 사용하면 얼마나 강할지 가정하는 것이다.
결과는 재앙 그 자체.
플러스 플러스, 그러니까 투뿔 마물은 인간으로 치면 초인의 경지였다. 레벨 7에서 초인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볼 때 유해 8단계와 투뿔의 차이는 현격함을 보인다.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던 전문가들은 이런 마물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며 강경하게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각성자 전력이 아무리 강해져도 마물들이 사는 곳을 밀고 존재조차 불분명한 투뿔 마물을 찾아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현재 인류가 마물 생태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구축한 것도 아니고.
“돌고 돌아 결론은 더 강한 각성자를 보유한다는 거에 이르게 되었어요.”
“당연한 이야기네.”
“좀 더 그쪽으로 투자할 명분이 되는 거죠. 각성자를 양성하는 것도 결국 돈이거든요.”
“다 돈. 돈 좋지.”
어딜 가나 돈이긴 하다. 아닌 척 포장해도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돈 이야기고.
내게 돈은 수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된다.
자기 능력껏 가지면 되는데 주제넘게 훔치다가 목숨을 재촉하기도 하고.
“네, 돈이면 많은 걸 할 수 있거든요. 가끔 못하는 것도 있지만.”
이세희가 은근한 눈으로 본다.
“그게 뭔데?”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싱긋 웃는 이세희의 옷차림은 평소와 달랐다. 메이크업도 연하게 하고 옷차림도 검은색 트레이닝복에 흰색 경갑옷을 걸쳤다.
오늘은 이세희 훈련을 봐주기로 한 날이다.
정다현이 레벨 7에 오르면서 제대로 의욕이 붙었다고 내게 밝혀 왔다.
확실히 승부욕은 정다현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플러스 플러스 마물의 등장이 현실화 되면 다현이처럼 젊고 뛰어난 재능은 더 값어치가 오를 거예요. 한때 우리 길드 출신이라 더 배가 아픈데요?”
“다현이가 뛰어나긴 하지.”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되면 되니까. 준호 씨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죠?”
“내가 만드는 건 아니고 네가 받아먹는 거야.”
“좋은데요? 저보다 욕심 많은 사람은 본 적 없어요. 아마.”
재벌가 로열패밀리인 이세희는 훈련에 어떤 태도를 보일까.
만약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바로 손을 털 것이다.
욕심만큼 맷집이 되면 좋겠는데.
“저처럼 독한 사람은 처음 볼 거예요.”
이세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 *
바람 소리와 함께 목검이 대기를 가른다. 목검임에도 그 위력은 강맹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빠르고 궤적이 자유자재인지 조금이라도 놓치면 어김없이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아!”
이세희는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땀이 흘러내렸지만 최준호의 목검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목검을 피해 다시 바닥을 굴렀다. 땀에 푹 젖은 몸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곳에 조금이라도 주의가 기울어지면 어김없이 검격이 쏟아졌다.
마치 검에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자신을 쫓아오는 느낌이다.
‘···이건 지독해도 너무 지독하잖아!’
그래서 싫냐고?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오히려 좋아!’
최준호는 손을 씀에 있어 조금의 자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판단을 잘못하면 목검이 강타했다.
그때마다 이세희는 전신의 기력을 쥐어짜내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탈력감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날카롭게 벼려지는 걸 느꼈다.
진짜는 그 다음이다. 최준호는 적응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적응한다 싶으면 귀신같이 기어를 올렸다.
이세희는 자신이 한계라 생각하다가 최준호의 검에 얻어맞고 더 끌어낼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구조였다.
퍽!
“흐윽!”
방금 전 검격도 피했다 싶은 순간 어깨를 강타했다.
어깨가 산산조각 날 것 같은 통증 속에서도 이세희는 허리를 숙였다. 날카로운 검풍과 함께 목검이 스쳐지나가는 게 목덜미로 전해졌다.
그마저도 한숨 돌릴 틈 없이 배를 찔러 오는 검을 피해 뒤로 굴러야 했다.
육체, 정신, 포스 모든 걸 쥐어짜내어 괴롭히는 공격이다.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최준호의 공격에 휘둘리며 굴러다니던 이세희는 자신이 포스를 평소 사용하지 않던 곳으로 골고루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맞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리하고 있다.
전신의 감각을 활짝 열고 원하는 곳으로 포스를 운용하는 것. 이세희가 여태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이다.
마치 제3자가 되어 자신의 몸을 관조하는 느낌이었다. 새로 태어나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되자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과부하 걸렸는지 파악이 되었다.
‘···이거야.’
불현듯 느낀 깨달음에 이세희는 희열로 몸을 떨었다. 최준호는 단순히 막무가내로 굴리는 게 아니었다. 대상이 가진 모든 여력을 쥐어짜내게 만듦으로써 한계를 뛰어넘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토록 검을 휘둘러도, 포스를 소모해도 느낄 수 없었던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이 느껴졌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오직 상대를 말살하겠다는 최준호의 순수한 적의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걸 동원하게 만든다.
생존에 유리함은 적응이고 적응은 진화를 의미한다. 아직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다현의 뒤를 쫓겠다는 경쟁심을 불태웠다.
어린 시절부터 둘은 동갑에 미모로, 재능으로 앞서거니 뒤처지거니 했다. 그런 라이벌이 이번에는 자신보다 확실히 앞서 나갔다.
이 좋은 걸 앙큼하게 홀로 독점하면서!
무엇보다, 이세희의 취향은 자신을 신성그룹 회장 딸로, 신성길드 총괄 팀장으로 대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손을 쓰는 점이다.
오직 이세희라는 개인이 되어 모든 힘을 쥐어짜내 버티고 있었다.
“좋아······.”
오랫동안 이런 걸 원했다.
더 굴려 줬으면 좋겠다. 더 독하게 손을 쓰면 좋겠다.
어깨에 얹힌 짐을 벗어던진 해방감을 느끼며 최준호의 검에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체력과 포스에는 한계가 있는 법. 찰나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어김없이 최준호의 목검이 이세희의 전신을 두드렸다.
“아악!”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공격을 허용하고도 수습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최준호는 비명 소리를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려치기를 했다. 바로 옆으로 구르지 않았다면 배를 강타 당했을 것이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최준호의 검격에는 공정함과 비겁함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간신히 거리를 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세희가 휘청거렸다.
“끝?”
“아뇨!”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선 이세희가 눈에 힘을 줬다. 귀기가 감돌고 있는 눈빛과 달리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이 찢겨 나간 자리에는 선명한 붉은 멍 자국이 가득했다.
“더 해요!”
멍 자국이 늘어날수록 이세희의 표정은 환해지고 있었다.
* * *
이세희를 첫 지도한 소감은 충격과 공포였다.
일부러 강도를 높였는데 희열에 젖은 모습은 새로웠다. 설마 고통을 즐기는 그런 부류는 아니겠지?
버서커 녀석까지 포함하면 어째 내 주변에 정상인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정상 같던 정주호나 천명국도 컨디션에 따라 히스테리가 장난이 아니고.
비정상 사이에서 나 홀로 정상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보다 머네.”
현재 나는 경북 안동에 나와 있다.
투뿔 단계 마물의 등장 가능성이 제시된 이후, 정부에서는 각국 정부에 주의를 요하며 매뉴얼을 배포했다.
그러던 중 거대한 포스 파동이 감지되었고, 이를 유해 8단계 마물이 나타날 수 있는 징후라 판단해서 대통령이 직접 부탁,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새로 등장하게 되면 마물의 이름은 ‘가람’이 될 것이다.
참 귀여운 이름이다.
이걸로 마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좋지만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마물의 서식지로 진입해서 이곳저곳 둘러봤다. 처음에 감지되던 징후는 점점 희미해지더니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잘못된 관측이거나 마물이 자리를 이동했을 수 있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하나?”
내가 고민할 때였다.
끼엑?
낮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칙칙한 녹색의 동체를 가진 날개 달린 도마뱀이 날 보고 있었다.
어스 드래곤(Earth Dragon)이다.
중국에서 나타난 적 있는 유해 8단계 마물이다. 날지는 못하지만 질긴 가죽에 뛰어난 회복력을 지녔고 강력한 어스퀘이크(Earthquake)를 구사한다.
근데 내가 본 녀석은 불과 3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크기다.
어스 드래곤 헤츨링이었다.
대충 유해 5단계에 해당하는 힘이 느껴졌다.
“얘 때문이었나?”
녀석은 파충류 특유의 눈으로 날 보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어린 것이 앞뒤 분간 못하는 건 사람과 마물을 가리지 않는군.
난 녀석에게 가차없이 칼날폭풍을 시전했다.
까아아악!
헤츨링이지만 제법 단단했는지 가죽이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며 녹색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지만 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가라.”
난 헤츨링을 놓아줄 생각이다.
내가 무슨 마물 새끼 보호주의자거나 그런 건 아니고.
상처 입은 새끼를 보면 성체인 부모가 눈이 뒤집혀서 여기로 오지 않을까.
“부모님 모셔와야지?”
캬아악!
근데 녀석이 가지 않고 흉성을 드러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사람이나 마물이나 왜 이리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녀석이 많은지.
대놓고 달려드는 몸통박치기를 피하며 발에 기뢰를 실어 머리를 차 줬다.
말을 안 들으면 적당히 교육을 시켜 줘야지.
근데 힘 조절을 잘못했다.
내 발차기를 맞은 녀석의 머리가 홱 돌아가더니 좀 많이 돌아가서 360도가 돌아가 원위치로 돌아왔다.
“어?”
혀를 내뺀 녀석이 바들바들 떨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죽어 버린 것이다.
얘야, 부모님 모셔와야지?
살릴 수 있으려나? 어려워 보인다. 실수했군.
“뭐 이리 약해.”
실패했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실 때였다.
이런 내 걱정이 기우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강렬한 피어가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만독불침이 있는 나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 피어, 유해 8단계 마물의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어스 드래곤 성체겠지.
난 헤츨링 사체에 칼날 폭풍을 시전했다. 곳곳이 베이며 피가 흘러내린다. 피 냄새를 맡고 오라고 하는 것이다.
“부모가 오긴 했네.”
잠시 후, 어스 드래곤 성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이 피 흘리며 쓰러진 새끼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길래 나는 발로 차서 건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