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45
45. 흐르는 것은 멈추지 않으니.
1.
모두가 돌아가고 있다.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를 비롯한 강호무림의 모두가 다시 돌아간다.
그들이 머물렀던 곳, 강호행성엔 흔적이 남았다.
피와 시체들, 그러나 그 흔적들도 지워지고 있다.
‘어찌될까······’
복잡한 심회를 품은 눈으로 전륭은 바라봤다.
강호행성이라고 불렀지만 대운표국이었던 곳, 강호무림이 모여 죽고 죽여 결판을 낸 곳이다.
밤이 지난 이제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피를 밟고 새 날을 맞고 있다.
‘황제의 머릴 가졌으니 결국 저들은 목적을 성취한 것인가······’
양일청 대신이 확전을 막았다.
어림군은 병기를 내리고 물러섰고 농민군도 그랬다.
황병기와 양일청이 황제의 머릴 주고받으며 만든 결과다.
팽가가 갈라졌지만 내각대학사측에선 궁극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혼란을 수습한 후에······ 그렇게 이뤄질까······’
황병기와 양일청이 주고받은 밀담의 내용이 그것이다.
황병기와 장운은 그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저들과 같이 갈 것이다.
태웅호와 왕정도 함께다.
이후에 저들이 어떠할지 알 수 없지만, 변혁은 진행되고 있다.
‘모두 뜻을 이루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한 전륭은 멀어져 가는 철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다시 청해로, 그 너머로 돌아가는 저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아니 더듬고는 있다. 형제들을, 모든 걸 잃은 자의 심정이란 다를 게 없다.
‘이미 비워낸 마음.’
가슴 속에 남은 심회의 잔재까지 전륭은 털어냈다.
서령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그리했다.
설호귀 현산과 돌아온 이곳에서 대도를 휘두르고 싸웠지만, 이겼지만, 다시 담을 것은 없다.
이곳의 기억마저 버리고 갈 터다.
‘설호귀처럼.’
홀가분한 미소를 입가에 피워낸 전륭은 설호귀라는 이름도 밀어내며 돌아섰다.
그 발길을 찬연히 솟아오른 해가 비춰주며 굽어보고 있었다.
* * *
스산한 바람이 집을 더듬고 있다. 그 바람을 맞으며 현산은 기억을 더듬었다. 저 작고 퇴락한 집에서 살아내던 어린 시절, 눈앞에 그려진다.
‘할아버지.’
떠날 때 얼굴조차 보지 못한, 할아버지는 저 집에 계시지 않는다.
그 누구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등지셨다.
그렇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집은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온 게 분명하다.
‘재범이······’
어릴 적 그 얼굴을 떠올리며 현산은 허리춤의 단도를 더듬었다.
떠나던 날 재범이 건네준 단도······ 천귀산과 가혹했던 현청에서의 일이 생생하다.
마치 어제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어제의 그 사람들은 이제 없다.
“거기 누구요?”
등 뒤에서 부르는 경계 가득한 소리에 현산은 천천히 돌아섰다.
들일을 하다 온 행색의 사내가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이 불편하다. 다리를 전다.
저 얼굴, 어릴 적 그 얼굴, 재범이 눈을 치뜬다.
“사, 산이?”
현산은 미소를 피워냈다.
저절로 생겨나는 미소, 초승달 같은 눈매로 급히 다가오는 재범의 뒤로 그녀들을 봤다.
재범이처럼 다리를 저는 아낙, 아주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곁에서 밝은 웃음을 짓는 여인, 진소향이다.
진소향, 저 여인이 여기 있다.
아주처럼 들일을 하고 온 행색, 이 마을의 여인 같다.
아주도 진소향도 아직 자신을 보지 못했다.
둘이 즐거운 웃음을 나누고 있다.
이제야 이편을 본다. 본 순간 경직하며 멈춰 선다.
“산아!”
재범이 와락 달려들어 안는 순간 현산은 그녀의 눈을 봤다.
진소향, 얼어붙어 버린 그녀가 주저앉는다.
스르르 힘이 풀린 것처럼 앉아 울기 시작한다.
그 등을 아주가 쓰다듬어 주며 같이 운다. 재범이도 울고 있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눈물 흘리는 재범을 마주 안고 현산은 웃었다. 하늘을 보며 웃었다.
* * *
문무백관들이 도열한 정양문 앞에서 황제는 개선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왕 신호를 물리치고 사로잡은 포로들 수천 명을 결박하여 놓은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간다. 가짜 황제,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허수아비다.
‘알아볼 자는 없지만, 안다 해도······’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며 황병기는 지켜봤다. 황제는 이제 궁으로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은 후 봉천문에 나와 오문성루에 올랐다. 때를 맞춰 북과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퍼진다. 문무백관들은 만세소리로 축하한다.
‘이제 끝인가, 아니 시작이지.’
어금니를 사려 문 황병기는 이제부터의 일을 더듬었다.
영왕 신호의 반란군을 정벌하고 개선한, 환호 속에 있는 저 황제는 이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것이다.
서른한 살, 아들도 없다. 다음 황제는 주후탱이 된다.
‘이 나라의 기틀을 바꿔야 해. 같은 일이 반복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돼.’
가슴속에 품은 의지를 곱씹으며 황병기는 장운을 돌아봤다.
태웅호와 왕정의 눈을 봤다.
자신을 따른 저들에게 실망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지 발길을 돌리고만 싶다.
설호귀처럼 가고 싶다.
‘현제, 보고 싶으이······’
홀로 떠나간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병기는 만세를 불렀다.
* * *
거친 마의를 벗어던진 사마경은 새로 산 청의를 입었다.
십년이나 기른 수염도 밀었다.
이처럼 단정하게 차림을 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안하던 짓, 하지만 그래야 한다. 이제 만날 이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변했을까······’
상상하며 사마경은 객관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지 않다. 하루 전에 도착해서 심신을 가다듬고 나선 길, 평화로운 마을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용정현.’
그의 고향, 그가 사는 곳이다.
이제 십 년 만에 그를 보게 된다.
가슴은 뛰지만 다른 감정은 없다.
복수, 원한, 십년동안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며 버렸다.
이제 그를 찾아온 이유는 하나, 승부를 내기 위해서다.
아니 승부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빚을 갚기 위해서도 아니다.
와야 했기에, 그래야 하는 길이기에 왔다.
이 마음과 발이 찾아온 길, 이 길이다.
“설호귀 현산.”
몸과 마음에 새겨 넣은 그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사마경은 걸음을 냈다.
설호귀 현산이 부인과 딸과 같이 산다는 집을 향해 갔다.
그런데 저만치 앞에 누군가 가고 있다.
외팔이다. 아무래도 방향이 같은 것 같다.
‘저 자는······’
미간을 좁힌 사마경은 앞서가던 외팔이가 멈추는 걸 보고 같이 멈췄다.
이젠 사마경 자신을 인지할 터인데 외팔이는 돌아보지 않는다.
칼을 지닌 무인, 아무런 기운도 흘려내지 않는 무연의 기세, 강자가 분명하다.
‘설호귀 현산을 찾아왔구나······!’
자신도 모르게 검을 잡은 사마경은 외팔이 사내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판이다. 논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여름 해를 맞아 파랗게 자란 벼의 물결 사이에 사람들이 박혀 있다.
그중에 그가 있다.
‘설호귀 현산!’
그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들일을 하고 있다.
정겨워 보인다.
저 손에 묵빛 장도를 쥐고 휘두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저 모습이다.
잡초를 뽑아내고 물길을 내고 막는 모습, 농부의 모습으로 저기 있다.
“아저씨.”
곁으로 다가오는 걸 알았지만 지나쳐 가리라 여긴 아이, 열 살쯤 된 예쁜 여아가 올려다보고 있다. 초롱한 눈망울이 왜 그런지 아주 낯익다.
“나무그늘에서 쉬고 계시래요.”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사마경은 미간을 좁혔다.
“응? 뭐라고?”
“아이,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일하는 동안은 짬을 낼 수 없다고요. 그러니까 저기 저 나무그늘에서 기다리시라고요. 먹을 것도 준비해 뒀어요.”
여아가 가리킨 나무그늘로 시선을 돌린 사마경은 황당한 깨달음을 삼켰다.
‘설호귀 현산의!’
그의 자식, 딸이다.
사마경 자신에게 기다리라는 전언을 줬다.
자신 올 것을 어찌 알았는지, 이 전후가 무엇이든, 그가 기다리라고 했다는 거다.
“아저씨.”
여아, 설호귀의 딸은 어느새 저만치 갔다. 외팔이에게 말한다.
“나무그늘에서 기다리세요.”
외팔이는 여아를 보고 들의 설호귀를 본다. 그를 올려다보며 아이는 또 말한다.
“팽가 사람이죠? 팔 하나 없는 사람이 찾아올 거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저기 저 아저씨 말고, 또 다른 사람도 올 거라고, 기다리라고요.”
외팔이, 팽가 사람이라고 아이가 말한 자가 이제야 쳐다본다.
그 시선을 받으며 사마경은 알았다.
저자가 팽무혁이란 것을, 자신처럼 왔음을.
‘또 다른 자······’
그게 누굴까 더듬던 사마경은 팽무혁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아이가 가리킨 나무 그늘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커다랗고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박주산채일망정 음식이 차려 있다.
“당신, 사마경인가?”
특 건너온 물음, 외팔이 팽무혁을 응시한 사마경은 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팽무혁은 잔에 술을 따라 마셨고 달리 다른 말이 없었다.
사마경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술을 따라 마셨다.
그렇게 두 사람은 들판을 봤다.
그 말없는 정경 속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설호귀 현산을 바라본다.
“또 다른 자로군.”
다시 입을 연 사마경의 한마디 보다 더 자세한 내막을 팽무혁은 말했다.
“목철강.”
또 다른 자, 세 번째로 등장한 사내의 정체를 사마경은 이제 알았다.
‘맹호광웅검.’
저자는 동창을 이끌던, 바로 그자다. 혈왕지검비급으로 사마경 자신을 미끼로 사용한 자, 강호행성의 싸움판에서 도망친 자, 살아서 찾아왔다.
“아저씨.”
설호귀의 딸이 또 다가간다. 사마경 자신과 팽무혁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건넨다. 하등 두려움이나 머뭇거림 없이, 재잘거리듯 할 말을 한다.
그런 아이를, 설호귀의 딸을 말없이 응시하던 목철강이 걸어온다.
“순서를 정해야겠군.”
잔을 내리며 팽무혁이 말했고 사마경은 들로 시선을 돌렸다.
뜨거운 여름 해 아래서 일하고 있는 설호귀를 봤다.
목철강이 곁에 와 앉아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설호귀만을 바라봤다.
그러다 일어서 팔을 걷었다.
“놀면 뭐하나.”
사마경은 다리도 걷고 논으로 들어갔다. 그런 사마경을 팽무혁이, 목철강이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 각기 다른 길로 온 기다림, 그런데 팽무혁이 뒤늦게 일어섰다. 목철강도 일어서 팔다릴 걷었다.
사마경의 뒤를 이어 팽무혁과 목철강도 논이 들어갔다.
세 사람이 앉았던 그늘자리엔 세 사람이 놓아둔 도과 검이 바람을 맞으며 놓여 있었다.
“아저씨들! 거기 아니고 저쪽이에요!”
설호귀의 딸이 소리쳐 알리는 곳으로 움직이며 세 사람은 논일을 해나갔다.
해는 뜨겁게 내리비쳤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땀을 식혀줬다.
세 사람은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 * *
약초행낭을 등에 지고 산을 오르던 이결은 뒤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놈이 어느새 저렇게 커서 뒤를 따르고 있는 게 마음 뿌듯하다. 이제 열두살이지만 제 어미를 챙기고 아비를 대하는 마음이 대견하다.
“호야, 힘드냐?”
헉헉거리고 올라오는 아들 이호에게 이결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호는 고개를 젓고 홀로 등성에 올라섰다. 산바람을 맞으며 와하고 소릴 지른다. 그러더니 수통을 물을 마시고 주저앉더니 간절하게 바라본다.
“또 그 이야기를 해달라고?”
“네 아버지. 듣고 싶어요.”
“지겹지도 않으냐? 설호귀 현산이란 이름이 네 귀에 딱지로 붙었겠구나.”
“해주세요.”
재촉하는 아들놈의 머릴 쓰다듬으며 곁에 앉은 이결은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를 아비가 처음 만난 것은 중원으로 네 어머니를 구하러 가서다······”
정말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고 들은 이야기, 부자는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설호귀 현산, 그 이름을 바람이 싣고서 멀리멀리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