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101
제101화
지프 드릭만.
현재 말라시스의 모병관이자 수석 훈련 교관인 지프가 막 군에 몸담았을 때의 일이다.
웨커 가문의 자제와 함께 임무에 나섰다가 지프와 웨커 가문의 자제를 제외한 모든 부대원이 전멸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 칠 가문의 일원이었던 질투의 웨커. 임무의 책임자는 웨커 가문의 자제였지만, 어째선지 부대 전멸의 모든 책임은 지프 드릭만에게로 향했다.
이 위기를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아르칸드 가문의 가주였다. 당시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평민 출신이자 뒷배조차 없던 지프에게 유일한 살길을 내려준 은인.
그 아르칸드 가문이 탐욕의 심기를 거슬러 멸문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의 지프는 얼마나 자책했던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를.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르칸드 가문을 향한 탐욕의 시선이 누그러졌고, 알 역시 별 탈 없이 말라시스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가문의 복수보다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도련님과 대련이라니… 허허….’
지프가 그저 오랜 인연이 멀쩡히 살아 있었고, 그 인연이 장성하여 자신과 실력을 겨루어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해하며 복도를 나섰다.
저벅…
저벅…
칠흑빛 머리칼이 가지런히 정리된 생도가 똑바로 마주 걸어왔다. 입술 오른쪽 아래의 작은 점이 인상적이라 기억에 남을 만한 외모.
“교관님, 특작대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자네로군. 당장에는 면담이 조금 어려울 것 같군. 대련이 예정되어 있어서 말이야.”
“…대련 말씀이십니까?”
사리야 로제르.
로제르 가문은 말라시스를 다스리는 일곱 가문 중 하나다. 최근, 가주이자 칠죄종인 오만이 행방불명되면서 가문의 위세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원래는 차기 마왕에 가장 근접했던 가문이었다.
그 로제르 가문에서 재능으로는 손꼽히는 후계 중 한 명이, 바로 이 사리야 로제르다.
그녀의 머리칼과 비슷한 색의 동공이 슬쩍 움직여 지프의 뒤편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참관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음? 아아… 그렇지. 물론이다. 어쩌면 자주 보게 될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말을 당장엔 이해하지 못한 사리야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건물에 딸린 연무장이었으니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갖출 건 전부 갖춘 장소다.
연무장에 들어선 지프와 파우스트, 그리고 사리야. 그리고 요마족인 척 정체를 숨긴 파우스트의 악마들.
“진검으로 하시겠습니까?”
사리야는 지프가 파우스트에게 존댓말을 하자 눈을 끔뻑끔뻑 뜨며 놀라워했다.
평소 큰 훈련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지프는 교관들의 교관인 느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어린 남자에게 경어를 쓰다니.
“목검으로 하지.”
“설마 두려우신 건 아니겠지요?”
“그게 괜찮다고 생각되면 그 핑계로 해두지.”
“하하하… 뭐, 좋습니다. 목검이라도 저라면 얼마든 실력을 판가름할 수 있으니까요.”
휙-!
지프가 파우스트에게 목검을 건네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길래…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에….’
지프는 검을 쥐는 자세만으로도, 상대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프가 특별히 대단한 무위에 올라서가 아니다.
말라시스에는 지프만큼 강한 자가 수도 없이 있다. 지프는 그저, 많이 보았을 뿐이다.
온갖 귀족 가문들이 애지중지해서 육성한 괴물들과 평민이라는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개화한 인재들을. 그들과의 대련 횟수 역시도, 수천에 달한 지 오래된 일이다.
‘어디 보자, 어떤 느낌일까나….’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린 생도들을 보면 검을 쥔 모습에서 한 줄의 문구를 떠올릴 수 있다.
어설프다, 다 드러난다, 잘 배웠다 등. 상대가 가진 무력의 결에 따라 그 평가는 늘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불편하다?’
파우스트를 알 아르칸드라고 알고 있는 지프에겐, 그가 검을 쥔 모습이 영 불편했다.
그러니까… 검술을 잘못 익혔다거나 그런 하찮은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느낌이 딱 그러했다. 뭔가 부딪히기 전부터, 심장이 서늘한 그런 느낌.
‘후후… 재밌군.’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지.”
파앗…
가볍게 파고들어 찌르기.
따아아아악-!
‘호!’
파우스트는 찌르기를 정확하게 검날로 막아냈는데, 이는 굉장히 난도 높은 동작이었다. 자칫하단 상대의 검이 미끄러져 예상치 못한 일격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동작이다.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군.’
팟…
디딤발과 뒷발을 순간적으로 바꾸며 세 번의 찌르기.
따아악, 딱! 딱!
‘역시… 막아낸 건 우연이 아니었어.’
파우스트는 같은 자세로 모든 찌르기를 아무런 타격 없이 막아냈다.
‘그럼….’
휘릭-!
고속으로 회전하며 횡으로 긋는 베기.
따아아악-!
단단하다.
검술이 빈틈이 없었다.
단순히 검을 막아내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지프가 느끼기에, 검과 검 사이에 박투술을 섞는 등 어떤 변칙을 더하더라도 파우스트는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쓸데없는 동작이 없었다. 마치, 그 몸이 전투만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오신 겁니까….’
분명, 가문의 복수를 위해 갈고 닦은 힘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게 가슴이 아팠다.
후웅-!
이번엔 파우스트가 공세로 전환했다.
사선에서 올려 긋는 베기.
휘이이익-!
따아아아아앙!
예측보다 더 빠른 검이다.
파우스트는 마력을 일체 쓰고 있지 않음에도, 마력을 써서 움직이는 다른 생도들과 흡사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후우우웅-!
지프는 이번의 찌르기를 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흘려내고는 파우스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타하아앗-!”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것처럼.
‘…내가 뭔가 실수를 저질렀나?’
파우스트의 검에서 순간적으로 살초가 그려졌다.
그리고는…
따아아악-!
그 험악하던 기세는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그저 알맞게 지프의 검을 쳐낼 뿐이다.
지프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이제 알겠습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아직 검에 쓸데없는 온정이 달라붙어 있군요.”
파우스트는 일부러 살초를 피하는 것이다. 마치 지프를 앞에 놓고 적당히 맞춰주는 것처럼.
“오랜 친우를 만났으니, 죽이기 위한 검은 잠시 내려놓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지프의 눈에 처연함이 맺혔다.
살기 위한 검이었을 것이다.
죽이고 짓밟기 위해 익혀온 검이기에, 지프에게는 그것을 감추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 나가면 그런 안일함이 결국 동료의 죽음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
“이곳의 생도들은 대부분 수개월 전부터, 가장 짧은 훈련 과정인 자들 역시 이미 보름 전부터 합을 맞췄습니다.”
지프는 분명, 파우스트를 훈련 도중 합류시킬 만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지프가 합당하다고 납득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도련님께서는 제게 그 성취가 특출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기수를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모병은 반기별로 하고 있으니, 적어도 반년 후다.
“인내심이 많은 편은 아니니, 다음 기수는 무리겠군.”
“하면….”
“반드시 막도록, 지프 경.”
“허허허….”
양쪽 다 마력을 쓰지 않는 싸움.
지프의 전투 경험은 적어도 그가 도련님이라 부르는 자보다 몇십 배는 많을 것이다.
막지 못할 건 없다.
파아아아앗-!
연무장을 박차고 지프에게 달려드는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이 순간, 잠시 고민했다.
‘어느 정도로 힘을 써야 하지? 생도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턱이 있나….’
가진 무위를 다 꺼내 보인다면 지프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렇게 지프를 몰아붙인다면 앞으로의 활동에 제약이 따를 게 뻔한 일이다.
‘적당히… 힘을 뺀다.’
후우웅-!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종 베기.
따아아아아악-!
지프는 파우스트의 검을 받아내자마자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무슨 힘이….’
손목이 탈골될 법한 힘이다.
휘릭-!
갈비뼈를 노리는 횡 베기.
쩌어어억…
2번째 공격을 막자 목검에 금이 갔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후에 이어지는 세 번째 검이다.
별다른 전조 없이, 곧장 사선으로 올려 긋는 동작. 보통의 생도라면 이 동작에 힘이 실리지 않아 걱정할 것 없지만, 파우스트는 다르다.
후우우웅…
‘…어마어마한 살기다!’
으그그극…
이를 꽉 깨문 지프가 검을 끌어당겨 일격에 대응했다.
빠지이이익…
지프의 목검이 부러져 연무장에 떨어졌다.
‘…도련님께서 조금만 더 노련했다면, 내가 여기서 크게 다쳤을 수도 있겠군. 과연… 천재적이라 할 만한 재능이다. 마왕군에 필요한 인재이건만… 어쩔 수 없나.’
입맛을 다신 지프는 파우스트에게 인사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걱정할 필요 없었나… 지프, 전부 막았군.”
“돌아오셨군요, 도련님. 훌륭하신 실력입니다.”
지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숙소를 배정받고 정규 훈련에 돌입하실 겁니다. 도중에 투입되는 것이니 밀린 부분은 제가 따로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 * *
“봤어요?”
“뭘 말인가요?”
“교관님 대련이요!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라던데! 사리야 님도 그 자리에 계셨다는데요?”
“…맞아요.”
“박빙이었다던데? 정말이에요?”
“그건….”
사리야가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자, 그녀와 같은 시기에 임무에 투입될 생도 한 명이 한마디 했다.
“어차피 승부는 상관없었을 거야. 도련님이라 부른다던데? 지프가 봐줬겠지 뭘.”
“신기하군. 고작해야 특작대를 낙하산으로 들어올 생각까지 하다니. 아카데미라면 몰라도 말이야.”
“그게 나도 이해가 안 돼. 정규군도 아니고 특작대… 거기다 자리가 난 곳은 여기밖에 없잖아?”
“사리야 같은 괴짜가 또 있었다니.”
사리야가 배속된 부대는 정규군에 속하는 마왕군이 아니라 칠죄종 직속의 특작대였다.
말만 직속이지 사실은 그냥 칠죄종이 맡은 봉토에서 벌어지는 임무를 대신 처리해 주는 자들에 불과했다. 다만 마왕군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규모로 편성되며, 맡은 임무에 따라서는 승급도 굉장히 빨랐다.
그만큼, 임무 중 사망확률도 만만찮았지만 말이다.
“나 같은 평민이야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건데 사리야나 그 귀족 나리는 참….”
“염병, 지가 받은 성적은 쏙 빼놓고 말하네.”
“내가 검술이 약한 건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해서야! 나도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면 바로 네 몸에 바람구멍을 뚫었어.”
“그런 건 같은 평민인 나부터 이기고 말하든지.”
“너… 너 일부러 내 속 긁는 거지?”
“신세 한탄만 잔뜩 하는 놈, 입 좀 다물라고 하는 소리다!”
“흥….”
특작대는 임무에 파견되기 전부터 훈련을 함께 수행한다.
생도들은 모두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지만, 임무의 훈련은 따로따로다.
스윽…
사리야 옆에 그녀보다 덩치가 족히 2배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의 마족이 다가왔다.
“사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뭘 말인가요?”
“곧 이곳에 배속될 아르칸드 남작 말이야. 그대가 그자와 지프 교관과의 대련을 지켜봤다고 하던데.”
벌써 지프 교관과 대련을 벌인 자가 누군지 생도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그런 와중, 누구보다 발 빠르게 정보를 입수한 건 바로 이 근육질의 사내다.
칠죄종 중 분노인 마르퀴스 가문의 자제. 정보 수집의 속도가 다른 평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력은 모르겠지만… 검술 실력은 상당했어요.”
“그런가? 그대가 그리 평할 정도니 대단한 실력자겠군. 알 아르칸드라… 붙어보고 싶군.”
얘기에 전혀 관심이 없던 생도가 알 아르칸드란 이름이 나오자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엥 로데릭, 그게 정말이야? 알 아르칸드라고?”
“그렇다고 들었다만.”
“이야아… 시끌시끌하겠네. 아르칸드 가문이라면 거기잖아? 아카드 님에게 멸문당한….”
“뭐? 그게 정말인가?”
“하하하! 로데릭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너는 모르는구나? 한때 말라시스의 모든 마족이 알 정도의 사건이었는데 말이지.”
“그런 사건이 있었다니… 이유를 알 수 있나?”
“말 못 해. 정보 통제거든. 나도 짐작만 할 뿐이고.”
“다소 충격적이군….”
다른 여생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요. 홀로 남겨졌는데도 굳이 군이라는 선택을 한 이유도… 탐욕이신 아카드 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자….”
“으음… 일리가 있어. 언제 한 번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내로다!”
파우스트가 모르는 사이 그의 평판은, 지위를 이용해 특작대에 합류한 몹쓸 귀족과 슬픈 사연으로 군에 투신한 귀족 사이를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