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15
제15화
도적 블렛이 맞이한 뜻밖의 죽음으로 인해 모험가 일행은 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블렛의 죽음 따위는 이제 더는 중요치 않을 정도의 시련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것이다.
“배고프다아아아….”
“수, 숲 트롤….”
“도망쳐야 해….”
마물의 정체를 알고 대처법도 알았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전사 갈렉이 나불댔다.
“브, 블렛은 어쩔까.”
“죽었어. 버리고 간다. 녀석의 시체로 눈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도 늙은 궁수의 판단은 정확했다.
뒤적뒤적…
궁수 트로아가 도적의 품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냈다.
“하나 둘 셋 하면 뒤로 뛰어라. 표식을 남겨뒀다. 낙오되면 버리고 갈 테니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표식을 찾아 밖으로 나와라.”
그는 꼼꼼했으며, 냉철했다.
아마도 이곳이 평범한 던전이었다면, 그의 대처가 정확히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하나… 둘… 셋!”
퍼어어어엉-!
연막탄에서 치솟은 연기가 숲에 흩어졌다. 그 순간, 연기의 틈새로 모험가 일행이 도주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우웅!
“그으으어어어어!”
숲 트롤이 방정맞은 자세로 뛰어 그들을 쫓았다. 그 걸음걸음마다 지축이 뒤흔들렸다.
“으아아아아!”
“달려! 뒤돌아보면 죽는다.”
콰지이이이익…
숲 트롤이 블렛의 시체를 밟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내달렸다.
트로아는 예상보다도 빠른 추격에 잠시 고민했다.
흩어지자는 신호를 보낼까?
하지만 그건 뒤처지는 마법사와 신관에게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표식을 찾아야 한다.
일단 표식을 찾고…
“…망할.”
“트로아?”
“아까부터 표식이 보이지 않아.”
“그게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표식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새긴 표식도, 바위에 새긴 표식도.
심지어, 직접 박아넣은 말뚝도.
전부 사라졌다.
아니, 이건 표식이 사라진 게 맞을까?
“이 풍경은… 본 적 없어.”
“…뭐?”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다.”
트로아의 이 말은 곧 선언과 같았다.
단시간에 출구를 찾아 빠져나가는 행운은 없을 거라는.
살아남는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방법은….
“살아서 보자!”
“제기랄! 트로아!”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숲 트롤과 전투를 각오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셋이 죽고 하나가 살았을 것이다.
그럴 바에, 도주를 택해 하나를 내주고 셋이 살아남겠노라고 각오했다.
파티가 삽시간에 단결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던전에서 진영이 무너진 이상, 노려지는 건 걸음이 굼뜬 신관과 마법사.
즉, 후위들이다.
“헉… 허억….”
“같이… 같이 가요!”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마법사 레미와 신관 실론이 짝 맞추어 낙오되었다.
“그어어어….”
숲 트롤의 얼굴이, 나무를 부러트리며 나타났다. 그 기괴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공포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다.
“읏….”
“레미! 손을!”
“다, 다리가….”
숲 트롤은 지척.
마법사 레미는 신관 실론의 손을 잡아당겨 일어났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 마력을 흘려 넣어 실론을 무너트렸다.
“…아?”
“미안해… 미안해, 실론.”
“거…짓…말….”
실론이 마비된 몸을 부르르 떨며 저주했다.
“이 뱀 같은 년이!”
“나 대신 죽어줘. 미안해! 살아가며 갚을게.”
“죽일 년! 날….”
괴성은 멀어졌다.
레미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으적…
뿌드득…
지독한 피 냄새와 함께 실론이 남긴 소리가 레미를 바짝 추격해왔다.
“허억… 허어억….”
“레미! 여기다!”
동굴.
동굴이다.
트로아와 갈렉이 손짓했다.
“여기야! 얼른!”
“서둘러라! 뒤에 녀석이!”
“허억… 허어어억….”
그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앙…
숲 트롤이 땅을 울리며 나타났다.
“손을 잡아!”
파아앗!
동굴로 뛰어드는 3명.
파티는 이제 단 3명뿐이다.
“실론은?”
“…….”
“……그래.”
트로아가 동굴을 노려보는 거대한 동공을 향해 침을 뱉었다.
“퉤! 녀석이 가기 전까진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있겠군.”
“흑… 흐흑… 내가 뭘 잘못했다고….”
“레미, 정신 차려라. 일단은 살았다.”
갈렉이 트로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표식은….”
“움직였다.”
“…표식이?”
“숲이.”
“농담이지?”
“아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야? 난생처음 듣는….”
그가 말을 멈추었다.
숲을 움직일 수 있는, 전설로 남은 존재를 떠올렸기에.
“흑…요정?”
“맞겠지. 달리 떠오르는 게 없으니.”
“그럴…수가. 멸종한 거 아니었어?”
“누가 알겠나? 나는 보고 배운 만큼만 안다.”
“흑요정이라면….”
레미가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칠죄종….”
“……레미.”
“칠죄종의 영역에 발을 들인 거야… 우리.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아….”
트로아가 보충했다.
“레미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트로아!”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가 칠죄종을 토벌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그럼 방법이 있어?”
“날이 밝으면 생각해보자고. 일단 휴식을 취해둬라.”
이미 시간은 한참 지나있었고, 숲 트롤이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꼼짝할 수 없으니 휴식을 취해야 했다.
“동굴 내부는….”
“정찰도 당장은 무리다. 밖에 있는 녀석이 떠나야 도주로가 생기니. 경계석을 꺼내두고 최대한 소란을 피해야 해.”
“그래, 조용히 지내면 별문제 없겠지.”
마법사 레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잠들 수 있냐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긴장이 풀린 후에는 고삐를 부여잡아도 수마를 이기기 어려운 법이다.
…와줘-!
삐이이이이이-!
콰지이이익-!
괴상한 꿈이었다.
경계석의 경보와 뭔가가 쪼개지는 소리가 꿈속에서 들렸다. 불쾌한 소음에 눈을 뜬 레미.
그녀는 방금 그 소음이, 갈렉의 머리가 쪼개지는 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갈…렉?”
– 크르르륵…
– 크르륵…
동굴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
“오, 오크… 오크가….”
그녀 혼자서는 장성한 오크 두 마리를 상대할 순 없었다. 적어도 곁에 트로아는 있어야…
부스럭…
레미의 시선이 동굴 입구로 향했다.
트로아다.
트로아는 파티 중에서 가장 노련한 인물답게 단숨에 어떤 상황인지 판단을 내렸다.
그가 숲 트롤의 감시망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고가 발생했다.
남은 건 레미와 트로아 자신.
둘이 힘을 합쳐도 동굴같이 좁은 지형에서 오크 둘을 상대하기엔 버거웠다.
그 순간, 레미와 트로아의 눈이 마주쳤다.
“…….”
파아아앗-!
트로아는 레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도주했다.
“아, 안 돼! 나도 데려가!”
파티가 분쇄된 이상, 걸음이 느린 마법사는 짐 덩이다.
트로아는 그렇게 판단하고 레미와 떨어졌다.
“오, 오지 마! 오지….”
콰지이이익-!
“허억… 허어어억….”
트로아도 지쳤다.
홀로 남은 궁수는 무력하다.
하지만 도주에는 걸어볼 만했다.
“죽을 줄 알고… 내가 여기서… 저 병신들처럼 이딴 곳에서 죽을 줄 알고!”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풍경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가 달리는 만큼, 아니 어느 순간부터 그것보다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이상한 감각이었다.
풍경이 뒤바뀌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내가 이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자신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지금 이런 고초를 겪고 있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우뚝.
“…맙소사.”
드드드드…
그가 멈추었음에도,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숲이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었다.
나무가 움직이고, 기존에 있던 길이 끊어지고 새로운 길이 났다.
“하하….”
숲이 움직인다.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보는 건 달랐다.
실없는 웃음으로는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나무가 양쪽으로 밀려나 만들어진 오솔길에 구릿빛 피부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귀가 뾰족하고, 눈은 에메랄드빛으로 빛났다.
전설로만 남겨진, 흑요정이다.
사망 선고.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끄덕…
“이곳은 혹시, 칠죄종의 땅입니까?”
흑요정 여왕이 물끄러미 트로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 떠나세요.”
“잠….”
푸슈우우욱-!
어느새 뻗어 나온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트로아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서걱-!
그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곧, 1-1장 신출내기 모험가들이 종료됩니다.] [던전 수호 임무가 종료되었습니다.] [임무 결과: 트로아 및 5인 사망] [던전 수호 임무의 보상으로 침입자의 소지품을 획득합니다.] [침입자의 소지품에서 마석 × 2,000을 획득합니다.] [침입자의 소지품에서 칼헤일 대수림 통행증을 획득합니다.] [첩보 활동이 개방됩니다.]……
* * *
또각…
또각…
흑요정 여왕이 트로아의 수급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명하신 대로, 이루었어요.”
끄덕.
아리엘이 한쪽으로 물러났다.
내가 에피소드 1-1에서 얻고자 했던 것 중 하나는 확신이다.
‘이 정도 스쿼드라면… 나쁘지 않군.’
4성급과 5성급.
이들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했는데, 모험가 파티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박살이 났다.
‘아리엘의 힘은 조금 더 확인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리엘의 전투력은 5성급 라인 중에서는 약한 편에 속했다. 그 대신 전장 전체를 아우르는 기괴한 특성 덕에 채용률이 높았다.
‘숲의 지형이 시시각각으로 뒤바뀌는 건… 확실히 무섭긴 했어.’
부디 다음에 찾아올 모험가들은 조금 더, 강하기를.
“모리.”
도플갱어 모리가 내 부름에 다가왔다.
“예.”
“의태하라.”
“누구 말입니까? 저 늙은 시체로 말입니까?”
“그래.”
“흐음… 알겠습니다.”
꾸드드드드득…
모리가 죽은 트로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스읍… 피에 젖은 장비들은 조금 눈에 띌 텐데 말이죠.”
“상관없다.”
“그렇다면야.”
“내일 아침, 이곳을 나선다.”
“누구… 저….”
“셋. 나 그리고 빌과 모리 너다.”
“…킥킥, 재밌겠군요. 어디로 말입니까?”
내일은, 아마도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자극적인 날이겠지.
“리우디라.”
“그곳이 어디입니까?”
“인간의 마을이다.”
“호오…….”
루시퍼가 곧장 끼어들었다.
“파우스트 님, 저도 함께….”
“그만.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루시퍼 그대는 이곳에 남아 던전을 수호하라.”
그녀가 입술을 살짝 짓깨물었다.
표정 변화는 극히 잠깐이었다.
“알겠습니다.”
회의를 끝마치고 자리를 파한 후에, 내일 있을 일에 대해 생각했다.
‘첩보 활동 덕분에 자리를 비울 구실이 만들어졌군.’
첩보 활동은 레메게톤 오픈 당시에 이미 업데이트되어 있던 기능으로, 첫 번째 에피소드를 끝마치면 자동적으로 오픈되었다.
이 기능은 유저가 느끼는 레메게톤 세계를 보다 거대하고 입체적으로 느끼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기능이었다.
‘겸사겸사 이런저런 활동도 하고 말이지.’
바로 내일, 던전에 온 후 처음으로 밖을 나서게 된다.
* * *
“하아아아암….”
“이 사람 뭔 하품을….”
“숙취가 가시질 않네. 어으… 너무 마셨나?”
“태평하기도 해라.”
마을의 경비병 둘이 티격태격하며 이야기했다.
경비병들이 시선을 향한 곳에서, 3명의 모험가가 나타났다.
대수림 방향이다.
“음? 자네….”
“아하하….”
“한 열흘 됐나? 여기서 떠난 지.”
“그쯤 됐으려나? 아무튼, 허탕을 친 김에 마을에 좀 들르려고 합니다. 이것저것 보급해야 할 게 좀 있어서요.”
스윽…
경비병이 트로아의 곁에 선 둘을 살폈다. 마을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간뿐.
다행히 검은 머리나 검은 동공은 보이지 않는다. 눈대중으로 보기엔 마을에 별로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이 둘은? 못 보던 사람들인데?”
“약초꾼들인데, 도중에 잘못 흘러들었다는군요. 마을까지 호위해주는 조건으로 개인 의뢰를 받았습니다.”
“흐으음… 통행증은 있겠지?”
나란히 주고받는 통행증.
죽은 레미와 블렛의 유품이었다.
“…좋아. 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