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16
제16화
“그럼, 수고들 하라고!”
트로아처럼 행세하던 모리가 우리에게 쪼르르 달라붙어 중얼거렸다.
“키킥… 완전 머저리들 아닙니까?”
경계가 허술할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말을 조심해, 모리.”
“빌, 인간이란 생물은 어쩜 이렇게 단순할까? 자신들이 만든 규칙을 지나치게 신뢰해. 이깟 통행증이 뭐라고.”
뭐, 모리의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변방에서 제도의 경계 수준을 기대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너무 얕보진 않는 게 좋을 거다. 루시퍼 님께서 파우스트 님을 모시는 데 티끌만큼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고 당부하셨으니.”
“알고 있다고, 그저 오랜만의 외출이라 신이 났을 뿐이야. 너도 좀 즐기라고?”
“그럴 여유까지는 없다.”
그래, 놀러 온 게 아니니까.
“파우스트 님, 어쩐지 마을이 조용하군요.”
“평소의 분위기일 거다. 시골 변방의 마을이니.”
“그렇군요. 그래도 인간들이 이렇게 바글바글한 걸 보는 건 오랜만입니다.”
“…인간을 좋아하나?”
“그 반대입니다. 증오하고 경멸하지요. 지금도 임무만 아니었다면 모조리….”
인간은 솔라리아 대륙 대부분을 손에 넣을 때까지 어마어마한 악업을 쌓았다. 그 악업의 피해자 중에는 흑요정도 속해있었다.
이 대륙에서 그들을 증오하는 종족이 비단, 마족뿐인 건 아니라는 얘기다.
“묵을 곳을 찾아라.”
“예.”
“빌, 저기가 좋겠어.”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모험가 3인방이지만, 한 명은 마족 다른 둘은 마물로 분류된 존재다.
끼이이익…
“아까 그 둘과 일행인가? 위층이오.”
끄덕.
빌과 모리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내려가 있어라. 잠시 후에 호출할 테니.”
“예.”
“예.”
스윽…
녀석들이 내려간 후, 괜히 방 안에 있는 탁자를 만졌다.
얘기를 나눌 탁자가 있는 방을 원한다고 했더니 또 찰떡같이 알아듣고 적당한 방을 구했다.
‘일머리가 있군.’
물론 빌쪽이.
모리는 조금 걱정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애초에 도플갱어의 개성이기도 하니까.’
아무튼.
밑에 있는 녀석들과 얘기를 나누기 전에 생각과 할 일을 정리해야 했다.
던전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리우디라에 온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첩보 활동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한 후에 내가 예측한 것과는 달리, 던전 수호 메시지를 제외한 다른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에피소드 안내가 표시되지 않았어.’
모바일 게임이었던 레메게톤에서는 유저가 버튼을 눌러 모험가의 침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습격을 당하는 입장이지만, 그 결정권이 오히려 던전의 주인인 유저에게 있었던 것.
‘하지만 역시 현실은 달라.’
모험가들이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예측하지 못한 규모로 던전을 습격해온다. 첫 번째 습격을 받은 후에 곧바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모험가 쪽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래선 안 되지. 절대로 안 돼.’
어떤 순간에도 주도권은 이 파우스트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첩보 활동 기능이 개방된 직후에 바로 첩보망 구축에 나선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장엔 직접 정보를 얻어야만 해.’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
그 말은, 내가 알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갈 수도 있으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플갱어인 모리와 흑요정 암살자인 빌이 없었다면, 아마도 혼자 이곳에 왔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첩보에 재능이 있는 빌의 변장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눈 깜짝할 새에 내 모발과 눈썹을 흑발에서 금발로 바꾸었으니까.
마족의 상징인 흑발 그대로였다면 통행증이 있어도 방책을 통과하지 못했을 테지.
인간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선 그들과 비슷해야 한다.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던전에 남겨둔 그린스킨이 우리가 통과한 저 허술한 방책을 통과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아무튼.
첩보의 기본은, 정보 수집과 정보 조작이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 첩보 활동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선 게임의 초반부를 벗어나야 한다.
‘초반부에는 그냥 가십을 수집하거나 마을에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는 정도지.’
그렇다고 느긋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게임과 현실의 차이점 중 가장 큰 건, 아무래도 내 노력 여하에 따라 결괏값이 무한히 증대한다는 것 아닐까.
던전에도 몇 안 되는 4성급 마물을 수호에 쓰지 않고 외부로 돌린 이유다.
“모리, 올라오도록.”
녀석들이 어디에 있든, 내 얘기를 듣고 있을 거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끼이익…
“따로 부르신 이유라도?”
스윽…
탁자 위에 줄곧 끄적이고 있던 양피지를 밀었다.
“흐음?”
“임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곳을 장악해라.”
“간단한 약도와 단체 이름이군요.”
“뜨내기들이다. 반쯤은 도적단이고 반쯤은 부랑자들이지. 실력은 볼품없지만 필요한 손과 귀는 채울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네가 수완만 있다면 손쉽게 장악할 수 있겠지.”
“…….”
…어라?
반응이 어째 좀?
…알겠다.
반항심인가.
“흐음…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고 계신 걸까나… 조금 궁금해해도 됩니까?”
경박한 태도.
어떻게 대응할까, 음.
‘아, 그게 있었지.’
파우스트의 능력 중 하나가, 이 상황에 매우 적절할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발휘하냐인데…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원래부터 할 줄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기운이 풀어졌다.
스으으으으…
고오오오…
“으윽….”
엄살은.
“…모리.”
“……예.”
“이 순간부터 네 모든 의문을 불허하겠다.”
팍…
기운에 잠식된 건지, 모리가 머리를 바닥에 찧고 간신히 대답했다.
“예… 아, 알겠습니다.”
“연락은 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스윽…
양피지 하나를 더 건넸다.
“한동안 연락이 없을 거다. 기본적인 행동 수칙을 적어두었다.”
꿀꺽…
“날 실망하게 하지 마라.”
“예! 그럼….”
“떠나라.”
끼이이익…
모리 정도면 맡긴 일을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실력은 일단 4성급의 마물이니까. 파우스트에겐 빌빌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4성급 마물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시종일관 건방졌던 모리를 무릎 꿇린 힘을 살폈다.
[파우스트의 강점: 군주의 자질을 확인합니다.] [파우스트는 타고난 마력을 이용해 위압감을 떨칠 수 있습니다.] [Tip: 파우스트는 군주의 위용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협상과 통치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사실 이 군주의 자질이란 강점은, 유저들 사이에서 왈가왈부 말이 많았던 것인데 게임상에선 굉장히 수동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선택지나 친밀도 작업을 할 때 써먹었던 정도였지. 효과도 체감이 어려웠고.’
실제로 사용해본 결과는.
‘괜찮은데? 의외로 써먹을 수 있는 구석이 많겠어.’
그럼, 일단 이곳에 온 이유 중 한 가지는 해결 됐고.
‘이제 두 번째인가.’
리우디라에 온 이유 그 두 번째는, 얼마 전부터 고민하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마석과 기타 재료 수급이 안 되고 있어.’
게임과 현실의 차이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기 이전의 레메게톤의 초창기 컨셉은 마왕의 자리를 노리는 파우스트가 던전을 운영하며 꾸준히 모험가 파티를 분쇄해 성장하는 것이다.
당연히 유저들은 접속하자마자 피로도를 녹여 던전에 침입자들을 방문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애초에 던전으로 끝없이 쏟아지는 모험가 파티는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던전에 들어온 모험가 대부분은 죽는다. 당연히 누군가는 근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의문을 표시할 거고 모험가 파티 수십 개가 갈려 나가는 일은 진작 방지될 것이다.
던전을 찾는 모험가 파티의 개수가 게임보다 대폭 줄어든다면? 당연히 자원 수급에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무과금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고.’
이 때문에 마석과 자원의 공백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마석을 수급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툭…
방금 탁자 위에 내려놓은 건 전멸한 트로아 일행이 남긴 짐 중 일부다. 대부분 부피가 작고 가벼운 것들로만 가져왔다.
이른바, 유품이다.
부족한 마석량을 채우기 위해 내가 주목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장물.
던전에 머무는 내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쓰레기지만, 인간들에겐 다르다. 값비싼 보석이나 파티원들 몰래 꼬불쳐둔 비상금은 분명 인간 사회에선 높은 값어치를 가질 테지.
“빌.”
“부르셨습니까.”
“들어와라.”
“그럼.”
끼이이익…
아까와 같이, 탁자에 양피지를 내밀었다.
“이름이군요.”
“이 자를 찾아가라. 리우디라의 장물아비다. 취급하는 건 싸구려가 많지만, 당장엔 이 자를 통해야만 하지.”
“인간과의 거래라면… 저희의 정체가 노출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해질 때까지만이다. 머지않아….”
“머지않아…?”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모리와 달리 빌은 내 말에 순순히 따랐다. 이후엔 모리에게 전달한 것과 같은 행동 수칙을 똑같이 전달한 후 그를 떠나게 했다.
이 둘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테지.
“자, 그럼… 리우디라를 찾아온 또 다른 이유를 확인해볼까.”
* * *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듯 굴었지만, 이번 이유는 앞선 것들과는 달리 개인적인 것이다.
확인하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와하하하! 그래서, 그 영감이 칼 쿠르소에게 죽어 나자빠졌다고?”
“이 사람아, 목소리 좀 줄여.”
“여기 듣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안 그래 형씨?”
불콰하게 취한 녀석이 괜히 근처에 앉은 내게 말을 걸었다.
“난 신경 쓰지 마라.”
“거봐, 괜찮다잖아.”
“크흠… 아무튼, 말한 대로야. 루데인에 칼 쿠르소가 나타났다는군.”
“……확실해?”
아까까진 웃던 남자가 칼 쿠르소라는 이름이 재차 언급되자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뭣 하러 거짓말해? 그 악독한 살인마 자식이 워낙 유별나야 말이지.”
“그… 시체 눈을….”
“그래, 날카로운 걸로 훼손했다는군.”
“저런… 죽일 놈이 다 있나. 가만 보자… 그럼 어쩌면 이곳에도….”
“아무리 그래도 그 작자가 그렇게 한가할까? 루데인하고 이곳은 거리도 꽤 멀잖아. 제도에서도 추살령 때문에 파견된 인원도 있을걸?”
“하긴, 희대의 살인마도 이런 변방까지는….”
끼이익…
자리를 벗어나는 내 귓가로 취객들의 얘기가 전해진다.
“그것 봐, 불편해하잖나.”
“끄응… 진짜 불편했나?”
휘오오…
밤바람이 차가웠다.
맥주는 텁텁했고 보리의 쓴맛도 느껴졌다.
맛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겐 이곳에서 여흥을 즐길 정도로 심적 여유가 있지 않았다.
이곳에 온 이유 중 또 한 가지, 파우스트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현재로선… 큰 제약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
외부 활동에 제약이 없다면 던전을 내팽개치고 생존만을 위해 숨어 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심장병만 해결한다면 말이지.’
한차례 죽을 위기에서, 간신히 버려진 던전인 썩은 뿌리의 던전 코어와 감응해 살아남았다.
이미 일이 이렇게 흘러간 이상 던전이 파우스트고, 파우스트가 곧 던전이다.
그러니 던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은, 절대 원칙 같은 거다.
‘아직까지 활동은… 리우디라 정도인가.’
레메게톤의 파우스트는 그렇게까지 자유롭지 못했다.
일단 마족의 신분인 이상 에피소드가 급물살을 타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해 봐야 근방 마을까지였다.
거기다, 던전 코어와 멀어질수록 심장병의 증세가 나타난다는 듯하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뭐, 아직 시험해 본 건 아니지만 조금 느슨하게 생각하면 근방의 대도시까지 넘어가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정체가 들키지 않는다는 가정에서지만.’
거기다 단발적인 이벤트도 발생할 수 있으니, 그리 깊게 생각해볼 만한 일은 아니다.
레메게톤에서도 그러했다. 첩보 활동에 재미를 붙인 유저들이 선을 넘어 오랜 시간 활동하면, 추격대나 마족의 정체가 드러날 만한 이벤트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죽을 뻔한 걸 가까스로 구출했다며 얼버무려 던전에서 깨어나는 연출로 넘어갔지만, 만약 그 상황이 현실로 벌어진다면 꼼짝없이 죽겠지….
“뭐, 당장은… 가장 중요한 일에 매달려야 하니까.”
리우디라에 첩보 활동을 나선 마지막 이유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
‘칼 쿠르소.’
에피소드 1장, 최종 보스에 대한 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