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허억… 허억….”
마루스는 정말로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끔찍한 고통에 더해서 이만한 공포를 느껴본 적은 수십 년 동안 없었다.
휑한 왼팔을 보며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페넥스를 다시금 맞닥뜨린 순간, 별 탈 없이 관문을 지나가는 것은 어렵겠다고 느꼈다.
당연히, 팔 하나쯤 내어줄 생각까지도 했다.
악마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게 여겼다.
‘…방심했다.’
페넥스의 기운이 생각보다 미약했기에, 또한 전투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각오가 약해졌다.
어쩌면, 아무런 피해 없이 악마의 방해를 뿌리칠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절단된 팔과 얼굴의 화상이다.
정당한 값이라 치부해도 될 정도의 수준이다. 다행히 아직 싸울 수 있고 혹시 모를 비장의 수단 또한 남겨두었기에.
“후우… 후우우….”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이 앞은 그가 수십 년 동안 바라온 결과의 문턱이다.
“전부… 되갚아주마.”
이 고통도, 이 분노도.
전부.
관문 끝에 도달한 그가 일전에 한 번 열어젖히려 했던 그 문 앞에 섰다.
첫 번째 방문에서는 여유만만이었지만, 재차 방문했을 땐 만신창이라 할 만큼 부상을 입은 상태다.
마루스는 어쩌면 모든 게, 이 문 너머의 마족이 계획한 일인 것만 같아 불쾌했다.
쿠우웅-!
끼이이이이이이…
드디어, 심처의 문을 열어젖혔다.
“…….”
…그곳에 그리 대단한 풍경은 펼쳐져 있지 않았다.
깔끔하지만 휑한 느낌의 공간.
덩그러니 놓여 있는 옥좌가 보였다.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다.
자세히 보니, 파우스트였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건, 그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처음 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이군. 조롱의 의미인가?”
“조롱이라니, 무장이다.”
“……무장이라고?”
마루스가 의문을 표한 이유는, 파우스트가 쓴 가면이 흔히 생각하는 무장과는 그리 관련이 없어 보여서다.
“이쪽 나름의 각오다.”
무장은 각오라고 늘 말하고 다니는 누군가처럼, 파우스트도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가면을 착용했다.
사탄을 형상화한 염소 두개골 가면을 쓴 파우스트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스윽…
그가 칼 쿠르소를 가면에 뚫린 눈구멍으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왔군.’
칼 쿠르소라는 존재는 어쩌면,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솔라리아라는 세상이 칼 쿠르소를 이용해 그를 미워하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냥 그렇게 느꼈다.
“네가 계획한 모든 것들은 소용없었다. 결국, 여기까지다.”
“그런 것치고는 몰골이 흉하군.”
“큭큭… 이 팔 말이냐?”
“한쪽 팔로도 날 이길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칼 쿠르소가 웃음을 뚝 그치고 품에서 뭔가를 뒤적거린 후, 꺼냈다.
은빛으로 빛나는 두루마리.
“…설마.”
“알아보는 것이냐? 이 두루마리 하나가 앞서 죽은 녀석들보다도 값어치 있겠지.”
찌이이익-!
[칼 쿠르소가 연금술 두루마리: 수은 신체를 사용합니다.] [부서지거나 큰 충격을 받기 전까지, 수은으로 신체를 재형성합니다.]휘오오오오…
쩌저저저저적…
두루마리에서 풀려난 기운이 마루스의 왼팔을 감쌌다.
눈 깜짝할 사이, 왼팔이 사라진 자리에 신비로운 빛깔의 새로운 팔이 생겨났다.
“자, 어때? 이러면.”
“…준비성이 철저하군. 그 흉한 얼굴까지도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지만.”
“준비라… 그래….”
마루스가 웃었다.
“수십 년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나다. 넌 그런 자와 맞서려는 거다.”
“…….”
“내 관심은 오직 악마뿐이다. 네게 선택권을 주지. 당장 악마와의 계약을 해지해라.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나. 그렇다면 목숨은 보전해주마.”
“친절하군. 악마를 꽤 좋아하는 것 같고. 그래서 그간 그런 짓들을 벌여온 건가?”
“…그런 짓?”
“네가 조카에게 저지른 짓 말이다.”
방금 건 순수한 궁금증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어떤 생각으로 칼 쿠르소는 그런 짓들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지.
그리고 그걸 안다면, 파우스트의 안에 있는 김서진 역시도 태연하게 인간을 죽일 수 있게 되는지.
“조카라… 그래, 마웬. 그 철부지 녀석.”
마루스가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문제지?”
“…….”
“그보다도 넌 특이하구나. 사고방식이 말이지.”
“…뭐?”
“어째서 마족이 인간의 죽음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거지? 너희 마족들에게 있어 인간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일일 텐데도.”
김서진은 그의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챘다. 마루스의 말에, 정답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패권전쟁 이후 두 종족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지.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무언가로 정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루스는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는지, 진중한 원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그의 본모습일지도.
“형님의 죽음에서 난 느꼈다. 그 인간은 마족을 도살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륜을 벗어난 고문도, 끔찍하게 저질스러운 행동도 서슴없이 해왔었다. 그런 자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도 웃겼지만, 내가 웃음을 참을 수 없던 순간은 바로 그 인간이 죽은 직후다.”
그에게 앞날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김서진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마루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모두 분노하더군! 영웅을 죽인 빌어먹을 마족 녀석들이라며! 하하하! 웃기지 않나? 상대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죽임당하는 건 낯선… 마치 슬프고 억울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스운 사실이군.”
“실체기도 하지. 이게 모든 종족 중 최상위종인 인간의 본색이다. 수십, 수백 명 마족의 죽음보다 자신의 목숨이 가치 있다고 말할 인간이 몇이라 생각하지?”
“…….”
“모두다.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건 너희 마족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너는 어째서 마족임에도 인간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냐? 마치….”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김서진은 마족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마족이 아닌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그를 망설이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마족임을 인정하는 것.
어쩌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그게 김서진의 앞에 놓인 길이었다.
“뭐, 이는 내가 악마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 자유롭거든! 죄의식, 규율, 도덕과 같은 하찮은 인간이 만든 하찮은 가치들을 모조리 무시하잖아? 그들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존재들이지. 난… 그렇게 되길 원했다.”
파우스트이자 김서진.
어쩌면 이 둘의 이름이 혼용되는 일은 앞으로 좀처럼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김서진 본인이 하고 있었다.
‘그런가….’
파우스트임을 받아들이는 것.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거기까지.”
“어떠냐? 내 제안은.”
“거절이다.”
“어리석군.”
철컥…
처음 보는 검집에 손을 올리는 김서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마루스.
“그 검… 전에도 차고 있었나?”
마루스는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했다.
“그보다 검을 다룰 줄 아는 것이냐? 전에는 분명….”
그런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분명, 나약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던 사내다.
그런데 검집에 손을 올리는 순간, 기묘하게도 그의 기운이 지독하게 차분해졌다.
아니, 무겁게 가라앉는다고 해야 할까.
스으으으…
아니, 바뀐 건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공간 전체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이미 숨을 내뿜을 때 입김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누구에게 검을 배웠지?”
마루스, 그 자신을 긴장하게 할 정도의 검술이라면 분명 대단한 자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김서진은 그 별거 아닌 질문에 회상한다.
– 파우스트는 말이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두지휘해 만든 캐릭터야! 그러니까….
승아.
현승아.
그녀에게 받았다.
“이 세상의 신에게.”
철컥-!
기이이이이이-
[던전: 썩은 뿌리 최후의 전투가 진행됩니다.] [위기일발! 적이 던전의 심처까지 도달했습니다.] [파우스트가 던전 코어를 조작해 퇴로를 차단합니다.]* * *
무과금 절단기 칼 쿠르소.
에피소드 1장의 최종 보스다.
오래된 악마 추종자이자 과거에 성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역임한 재야의 실력자.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이 세계에서 제대로 된 첫 실전 상대가 바로 그 살인자 칼 쿠르소라니.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몸은 떨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녀석의 공략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
– 칼 쿠르소 파티의 난이도는 의도된 것이며, 모든 유저가 상대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주어진 것을 활용하라 말했던 개발사의 전언.
주어진 것.
모든 유저에게 주어진 것.
‘파우스트.’
이 게임의 주인공인 파우스트.
그 자체로 칠죄종의 피를 물려받은 실패작이자 괴물이며, 탐욕의 피에 잠재된 힘을 이용해 시작부터 모든 전용 무기를 휘두르는 게 가능한 마족이다.
거기다 전투에 한정해서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존재.
칼 쿠르소를 쓰러트릴 수 있는 열쇠는 결국, 파우스트 자신이다.
스릉…
검을 뽑는다.
[파우스트의 강점: 탐욕이 발동합니다.] [파우스트는 모든 악마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파우스트는 실패작입니다. 악마의 무기를 사용할 때 가끔 반발이 찾아옵니다.]스르르르르…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치고는 너무도 소름 끼쳤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며 온 시야를 검은빛이 뒤덮었다.
‘이게 크로셀의….’
호수.
파우스트가 탐욕의 권능을 사용할 땐, 전용 무기의 주인이 가진 초월기를 제외한 기본 스킬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
휘오오오오오오…
호수가 검은 기운을 짙게 풀었다.
그 응축된 악의 첫 번째 능력.
[파우스트가 구덩이를 사용합니다.] [구덩이는 검은 호수의 형상을 가집니다.] [구덩이는 매우 넓은 영역을 장악하며, 영역에 놓인 적의 시야 범위를 제한하며 최대 5명의 대상으로 하여 능력치의 15%를 빼앗아 옵니다.] [구덩이의 영역에 놓인 대상은 모든 체력 재생과 치유량이 50% 감소합니다.] [구덩이는 전투 동안 유지되며, 사용자의 위치를 기준으로 중심 범위를 옮겨갑니다.]마치 영수증처럼 주르륵 길게 이어지는 내용들.
크로셀의 호수가 가진 사기적인 첫 번째 능력이다.
‘지옥석으로 이 무기를 선택한 이유지.’
하나뿐인 지옥석으로, 내가 보유한 유일한 6성 악마인 페넥스의 전용 무기 작약을 뽑지 않은 선택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당장에 페넥스에게 전용 무기를 던져주는 것보다, 파우스트가 즉시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얻는 게 더 나은 판단이기에.
호수는 내가 생각한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무기였다.
그 조건은 첫째, 초월기 의존도가 낮을 것.
고등급의 사역마는 초월기를 사용할 수 있는데, 기본 능력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게 보통이다.
초반부의 파우스트는 안타깝게도 탐욕의 권능을 사용했을 때 전용 무기에 잠재된 초월기를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최대한 초월기의 비중이 낮은 무기를 선택하는 게 좋다.
둘째, 기본 능력의 구성이 균형 잡혔을 것.
마땅한 전투 스킬이 없는 파우스트에게 있어 전용 무기에 달린 기본 스킬셋이 당분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의 전부이니, 어디 모난 데 없어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두 번째 조건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능력의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을 것.
대표적으로 피해량이 절대 계수로 정해져 있는 기본 기술을 가진 무기는 무조건 피해야 했다.
이런 조건들을 전부 만족하는 무기는 꽤 있었지만, 그중 지금의 내게 가장 훌륭한 무기는 호수였다.
[칼 쿠르소가 길잡이의 등불을 사용합니다.] [일정 범위를 밝힙니다.]후우우우웅…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숨바꼭질인가? 재밌군. 좋다, 술래 역할이라면 얼마든지 해주지.”
마루스는 빛으로 주변을 밝혔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간이.’
구덩이의 어둠은, 빛과 관련이 없다. 녀석은 지금 자신의 보폭보다 조금 더 넓은 정도의 시야 범위인 상태다.
후웁…
파아아앗-!
쒜에에에에엑-!
“거기냐!”
카아아아앙-!
마루스가 그 좁은 범위만을 보는 눈으로, 잘도 내가 있는 곳을 똑바로 찾아냈다.
다급한 와중에도 검에 실린 경력이 대단했고.
“큭큭큭… 고작 수를 낸 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거라니. 그마저도….”
“…착각하지 마라.”
팟-!
스르륵…
검을 떼고 물러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술래는 나다.”
“…뭐?”
후우웅…
파아앗-!
내 손에서 만들어진 검은 물줄기가 마루스에게 날아갔고 녀석은 그 와중에도 재빠르게 수은으로 만들어진 왼팔을 휘둘러 물줄기를 쳐냈다.
하지만…
분명 물줄기에 닿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파우스트가 사무치는 부패를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