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29
제29화
“으… 으으으….”
흐릿하던 초점이 제대로 잡히며 상이 맺힌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건지 눈꺼풀이 뻑뻑했다. 가볍게 차오른 눈물은 마치 접착제처럼 눈을 뜨기 어렵게 했다.
몸이 무겁다.
그보다 무거운 건, 마음에 간직한 두려움이다.
마치 여기서 눈을 뜨면, 모든 게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까 봐.
늘 그렇듯, 혼자가 될까 봐.
페넥스는 그게 무서웠다.
번쩍-!
그래도, 눈을 뜬다.
그녀는… 부활의 악마이기에.
스으윽…
몸이 재생의 화원의 넝쿨에 휘감겨 있었다. 던전이 제 기능을 한다면, 예속된 사역마는 이곳에서 부활한다. 그렇다면 던전은 무사하다는 뜻일지도.
하나, 보이는 생명은 없다.
“…아무도 없어?”
텅 빈 정원에, 페넥스만 홀로 깨어났다.
무섭다.
‘…무서워.’
제아무리 부활의 악마라지만, 지독한 전투에 타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육체에 피로처럼 누적되는 부활의 후유증, 뭐… 그것도 한밤 자면 해결되는 게 페넥스였지만.
우득…
우드득…
며칠 쯤 정신을 잃었던 건지, 탈구된 뼈가 맞춰지는 것처럼 몸이 생기를 되찾는 과정에 조금 적응이 필요했다.
좋다.
다 괜찮아.
‘모두… 무사하다면.’
저벅…
저벅…
페넥스는 천천히 걸었다.
평소였다면 쉼 없이 뛰어다니며 모두의 안부를 물으며 해맑게 웃었겠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모두가 사라졌을까 봐.
지금, 눈앞에 있는 광경이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마지막 사치일까 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던전의 적막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모두 떠나버린 거야? 또… 페넥스는 혼자 남은 거야?’
문제없을 거라 말했는데.
아무 일도 없이, 내가 열심히만 하면 모든 게 괜찮을 것처럼 굴었잖아.
모든 게… 제자리에….
‘왜 아무도 없는 거야?’
보금자리의 주인인 파우스트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계약자.
서늘한 얼굴에 가리워진 건 자신감인지 무감정함인지… 알 수 없는 마족이다.
“우으으으….”
입술이 삐죽 나와 현재의 감정 상태를 드러냈다.
불안함!
극도의 불안함!
금방이라도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았다. 상실의 아픔은 잊히지 않는다. 가시처럼 박혀, 언제든 건들면 격통을 유발한다.
‘또 혼자는… 싫어.’
마침내 그녀는 심처의 문 앞에 서서 심호흡했다.
오랜만에, 바람을 담아 문을 열었다.
이 너머에 그녀가 바라는 풍경이 있기를.
“제발… 제바아아아아알!”
쿠구구구구구궁-!
마침내 문이 열리고, 심처의 풍경이 드러났다.
심처엔… 던전의 사역마 모두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제히 문을 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고.
“…어라?”
옥좌 옆에 서 있는 악마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루시퍼가… 조금 언짢아 보였다.
“이크….”
끼이이이이익…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문을 다시 닫으려 했지만 정적을 깨는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입니다, 페넥스. 실례는 당연하고 말이죠.”
이런.
저질러 버렸다!
루시퍼가 하는 말은 전부 무서워.
위축되어 어딘가로 자꾸만 숨고 싶어지는 그녀.
그때, 구원이 찾아왔다.
“깨어났나.”
그녀가 바랐던 목소리.
파우스트다.
빼꼼!
문으로 머리를 내미는 페넥스.
배시시 웃는다.
“응-!”
우렁차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는 파우스트의 입꼬리가 살짝 미동했다.
‘…어?’
그 모습이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 파우스트가!
‘뭐지…? 뭔가… 변한….’
하지만 스쳐 지나간 순간이기에 잔상조차 남지 않았다.
“이만, 회동은 마치지.”
폐회사를 하는 그.
“모두… 애써주었다.”
이번 던전 수호는 모두 지쳐 나가떨어질 만큼 큰일이었지만, 파우스트의 그 말 한마디에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딱히 상냥하지도, 딱히 애틋하지도 않은 말인데.
정말로… 정말로 신기한 남자다.
꾸벅-!
모든 사역마가 고개를 숙였다.
“예.”
페넥스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이곳의 누구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지켜냈다.
지켜낸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의 보금자리를.
모두의 노력으로.
* * *
흐으음…
콧속으로 차의 향기가 흘러들어온다.
스읍…
차의 떨떠름한 맛도, 그 온도도.
모든 게 느껴진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이제 내게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왔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랬어야만 했었을지도. 다만, 이 색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 뿐.
내가 앉은 옥좌의 안락함도, 찻잔의 온기도, 그리고….
끔뻑… 끔뻑…
물끄러미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루시퍼의 눈동자 빛도.
이제야, 온전히 인지하게 된다.
“파우스트 님.”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문제… 그래, 문제는 많았지.
전부 하나의 행동으로 해결 가능한 것들이었지만 말이다.
김서진은 파우스트가 된다.
앞으로, 파우스트로 살아가겠다.
그것으로 이전의 모든 문제는 끝을 맺었다.
다만, 이제는 김서진이 아닌 파우스트로서 새로운 문제들에 당면할 차례다.
파우스트로 살기 위한 준비들이다.
그 준비라는 것의 이면에는 파우스트라는 존재가 행복하기 위해 세상을 멋대로 바꾸겠다는 난폭하고 거친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파우스트는 탄생한 순간부터 짓밟힐 운명에 처해있던 존재.
짓밟힐 바에는, 짓밟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이 세계에 조금 더 몰두할 필요가 있다.
‘우선… 주변부터.’
이제부턴 내게 전해지는 정보 하나하나, 모두 허투루 생각할 수 없다.
‘가령….’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루시퍼라든지.
그녀의 머리칼, 눈동자나 복장 등.
따지고 보면 모두 정보인 것들이다.
그녀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며 처음 마주한 미지나 마찬가지였으니.
‘복장이라….’
그녀는 감색과 검정색의 복장을 주로 입었다. 굳이 따지자면, 버틀러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저 장갑….’
그녀는 늘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째서지?
“한 번도….”
“…….”
“장갑을 벗지 않는군. 이유라도 있나?”
속마음이 툭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크게 의심을 살 만한 말은 아니었기에, 물흐르듯 답을 기다렸다.
“그건….”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영 수상했다.
‘약점인가? 혹은 화상의 흉터?’
어떤 아픔이나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이곳이… 불결해서….”
…엥?
“…죄송합니다. 불결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라. 본능적인 거부 반응입니다.”
…그런 성격이었나?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이후로 심처의 청소는 모두 루시퍼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 심처만 해도 그렇다.
심처에서 죽어 나간 인물이 둘이나 있었는데 그 핏자국이나 얼룩들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심처에서 묘한 향기까지 났다.
그 부분이… 거슬리긴 하지만.
뭐, 이해되지 않는 현상은 아니다.
그냥… 이해의 영역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무관심의 하나였을 뿐.
“그대에겐 이곳이 많이 불편하겠군.”
루시퍼의 표정에 약간의 일그러짐이 발생했다.
“파우스트 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다지… 괜찮습니다.”
“그대는 내게 진실만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불편합니다. 몹시 불결해 숨 쉬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었는데요.
“…빠른 시일 내에 개선이 필요하겠군.”
“부디!”
“또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지금 말씀드리면 됩니까?”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모습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 부분은 나중에 조금 정리가 되면 대화를 나누지.”
“아, 딱 한 가지. 좋은 차가 필요합니다.”
“차?”
루시퍼는 차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 숨 쉬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곳에서도 불평 없이 견디고 있는 거겠지.
“혹시 다음 외유 때는 따라나서도 될지요?”
“흐음….”
“어려운 부탁이라면, 잊어주시길 요청합니다.”
어려운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없는 던전에 루시퍼마저 자리를 비우는 게 영 마뜩지가 않아서 말이지.
누구든 옥좌는 지키고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
‘뭐… 칼 쿠르소를 쓰러트린 마당에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외부 활동은 진절머리 나는 부분이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으니 조만간 다시 나갈 생각이다.
그 전에, 정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경험한 2년의 스토리는 작 중 초반부에 불과하니, 미리부터 걱정해 봐야 의미가 없나.’
이대로라면 시간이 흐르게 됐을 때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마족에게… 파우스트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동지들을 찾는 것도 염두에 둬야겠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단두대에 함께 올랐던 실험체들.
‘단두대의 형제들.’
지금쯤 살아남은 몇몇은 어딘가에서 숨죽여 지내고 있겠지. 이들과의 접촉은 아직 먼 얘기일지도.
‘다른 자들이라면….’
역시… 그들인가.
‘칠죄종.’
솔라리아를 양분하던 세력 중 하나인 마족의 수뇌부였던 자들. 7인의 마왕이라고도 불리는 자들이다.
그 일생을 제국의 몰락에 걸고 불태우는 자들이기에, 절대 쉽게는 만날 수 없다.
‘칠죄종에 대한 정보도 따로 수집해야겠어. 스토리 상에서도 우연히 접촉했으니… 스토리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작금의 상황에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야만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외부 활동 인원을 늘림과 동시에 던전도 발전을 거듭해야만 했다.
…여유가 없던 이전엔 꿈같은 얘기였지만, 내게는 이번 칼 쿠르소를 쓰러트리며 얻은 보상이 있다.
[던전의 수준에 비해 강력한 상대를 저지했습니다.] [전리품 획득에 행운의 기운이 깃듭니다.] [던전 수호 임무가 종료되었습니다.] [임무 결과: 칼 쿠르소 외 4인(사망)] [던전 수호 임무의 보상으로 침입자의 소지품을 획득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침입자의 소지품에 마석 × 4,500을 획득합니다.] [침입자의 소지품에서 두루마리 뭉치를 획득합니다.] [크나큰 행운이 따릅니다. 침입자의 소지품에서 참회석을 획득합니다.] [행운이 잇따릅니다. 침입자의 소지품에서 숨겨둔 마석 × 1,500을 획득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침입자의 소식이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Tip: 행운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첩보망을 점검하세요.]제일 큰 보상인 참회석은 용도가 따로 있었다. 이건 원래 스테이지 1의 보스인 칼 쿠르소에게서 떨어지는 물건이 아니었을 텐데….
‘…바뀌었군.’
칼 쿠르소가 비상식적인 강함을 보유했던 것처럼, 보상도 뒤바뀐 것이다.
뭐, 이 부분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것이고 지금 중요한 건 내 수중에 마석 6,000개가 떨어졌다는 거다.
무려 20연차가 가능한 양.
다만, 이 마석을 언제쯤 가챠에 투입할지는 현재 고민 중이다.
“루시퍼.”
“예, 파우스트 님.”
“기록할 것을 가져다주게.”
“…알겠습니다.”
질 나쁜 양피지와 깃펜이 내 손에 주어지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을에 다시 방문하는 대로 필기구도 보충해야겠군.’
다 부러져가는 깃펜으로 뭔가를 끄적여 나갔다.
앞으로의 픽업 일정과, 중요한 악마다.
이 중, 유치하게 별표를 잔뜩 쳐 강조한 악마의 목록.
– 대악마 바알(중요도: ★★★★★)
– 대악마 파이몬(중요도: ★★★★)
– 대악마 아스모데우스(중요도: ★★★)
– 대악마 아몬(중요도: ★★★★★)
……
대악마의 목록이다.
대악마는 일반적인 악마보다 획득 확률이 극히 낮으며 성능 또한 뛰어났다.
모든 대악마 풀강화를 얻고자 한다면 집안의 기둥뿌리는 뽑힐 각오를 해야 했을 정도로 비싼 녀석들이다.
찍-
찍-
깃펜으로 그들의 이름에 금을 북북 그었다.
– 대악마 바알(중요도: ★★★★★)
– 대악마 파이몬(중요도: ★★★★)
……
이들을 이제부터 내 머릿속에서 지운다.
확실히 초반부터 대악마를 얻는다면 좋겠지만, 내가 그런 행운의 인물일 리 없기에 현실적인 대책을 짜내야 했다.
아스타로트나 푸르푸르 정도가 그나마 가까운 시일 내에 픽업 일정이 찾아오는 좋은 악마긴 했지만, 그마저도 픽업 일정까지 한참이나 남았다.
아마 그때쯤엔 개복치 파우스트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상태가 아닐까.
‘타협해야 해. 가챠를 미룰 수 없다.’
원기옥을 쓰기 위해 기를 모으다 터져 죽는 손오공이 될 수는 없다.
최대한,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가챠할 시간이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