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30
제30화
“흐음….”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건, 졸업 앨범과 흡사한 크기의 서책이었다.
다만, 그 서책이란 것의 질감은 존재하지 않았고 마치 홀로그램이나 환상처럼 붕 떠올라 있었다.
이게 어디서 난 것이냐 하면…
[사역마 도감이 개방됩니다.]……
칼 쿠르소를 격파하며 얻게 된 부산물 중 하나이다. 보통 모바일 게임이나 여타 다른 게임에서도 종종 보이는 방식인데, 스테이지 진도에 따라 새로운 기능을 선보인다. 첩보 활동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면 편하다.
이 악마 도감이 졸업 앨범처럼 생긴 이유는, 정말 졸업 앨범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파락…
사역마 도감을 펼치면, 그 안에 내가 수집한 악마의 이미지와 각주가 드러난다.
‘텅텅 비었군.’
물론, 제대로 된 도감일 리 없었다.
내가 수집한 사역마라고 해봐야 숲 속성 사역마 일부와 페넥스뿐이다.
당연하게도 그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내겐 없는 사역마라 할지라도 검정 실루엣으로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게 사역마 도감이었다.
파락…
가장 후반부에 있는 고풍스런 페이지로 넘어가자 72악마가 수록되어 있었다. 초라하지만, 페넥스도 그 페이지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외톨이군.’
도감엔, 해당 악마가 속한 파벌을 알 수 있는 기능이 있었고 해당 악마들은 따로 모여 있는 게 보통이었는데 페넥스는 혼자였다.
– 이단아.
오죽하면 이런 각주로 장식되어 있는 소녀다.
파락…
그녀가 있는 페이지를 넘겨 다른 페이지를 관찰했다. 나도 나름 이 도감에 추억이 깊었는지, 실루엣 너머의 형상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이 악마는 레라지에고… 이 악마는 가프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가자,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위용의 실루엣들이 등장한다.
‘일곱 대악마.’
레메게톤 유저였다면, 꿈에 그리던 이름들이다. 픽업이 존재하지 않기에 돈을 압도적으로 쏟아붓지 않는 이상 한 명의 대악마를 손에 넣는 것도 어려웠었으니까.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먼 이름들이지.’
파우스트가 가진 마석은 그들의 이름을 손에 넣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들은 명확하게 소위 ‘대박’에 가까운 존재들.
반면, ‘꽝’만 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게 내 현 상황이다.
턱…
도감을 접었다.
‘견물생심. 욕심만 생긴다.’
누군들 그들을 손에 넣고 싶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만 커지기에 놓아줘야 했다.
저벅…
저벅…
일부러 기척을 내며 다가오는 루시퍼.
“파우스트 님.”
“무슨 일이지?”
새로운 모험가가 당도했나?
그게 아니라면….
“빌에게서 새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빌? …소식이라.”
빌에게는 도플갱어 모리의 통제와 장물아비와의 접촉을 지시했었다.
“모리 쪽의 일인 것 같습니다.”
“…조금, 진척이 있는 모양이군.”
* * *
도플갱어 모리.
파우스트와의 헤어짐 이후,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다만, 이것을 자유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 빌, 그 녀석이군.’
이 지독하게 성실한 흑요정은 그를 감시하는 데 탁월했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반항의 조짐이 보이면 모습을 드러내 경고를 날렸다.
– 파우스트 님이 주신 기회를 헛되이 하지 마라. 그 기회마저, 사라지기 전에.
‘쳇, 빌 녀석만 아니면….’
아니면?
도망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자에게서.
파우스트에게서.
당시의 위압감을 떠올리기만 해도 위축되는 마음.
그때를 떠올리는 건 건강에 좋지 않았다.
‘아마도 도망치면… 죽겠지.’
당장 그에게 맡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도 두려웠다.
‘어쩔 수 없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야.’
인간 조직을, 그것도 그리 크지 않은 규모라면 어렵지 않게 장악할 수 있다.
“인간이란 건 대체로 공포에 무너지니 말이야.”
똑똑-
리우디라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낡은 술집의 문을 두드리는 모리. 당연하게도, 이미 죽은 모험가에게서 빼앗은 형상 그대로.
삐거어억…
문에 달린 작은 틈을 통해 취기 섞인 숨을 내뱉는 문지기.
“꺼져.”
시작부터 꼬여버린 대화지만, 모리는 차분하게 답했다.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거야.”
“…뭐?”
“다음에 내뱉는 문장에 당신 생사가 결정될 테니까.”
험악한 말이었지만, 상대는 잔뼈가 굵은 뒷골목의 왈패에겐 코웃음이 나는 문장이었다.
그들은 훨씬 더 사나운 말을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웃기는 녀석이군.”
“…그게 유언?”
“…….”
어쩐지 섬?해서 답하지 않는 남자.
그게 유언이냐고 묻는 외부인의 표정이 딱히 도발도, 비아냥도 아닌 것 같아서다.
정말로, 단순한 질문을 던진 것과 같은 표정.
“날 안으로 들여보내.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콰지이익-!
“켁… 케에에엑….”
문지기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두꺼운 나무 문을 뚫고 들어온 팔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으니까.
“열어.”
문지기는 화들짝 놀라 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그사이, 문지기의 동료들이 소란이 일어난 문으로 달려왔다.
끼이이익…
툭…
“케헥… 케헤에에엑….”
손을 놓자 쓰러져 침을 흘리는 문지기. 모리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술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벅…
저벅…
험상궂은 인물들의 면면에도 아랑곳없이 적당한 테이블 근처에 앉는 모리.
“다섯? 너무 적은데.”
다섯은 이 자리에 있는 불한당들의 머릿수였다. 문지기를 포함한 숫자였다.
얼굴에 긴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물었다.
“뭐하는 녀석이냐?”
“너희 이름이… 그러니까… 음… 뭐더라? 썩은 냄새? 썩은….”
“썩은 장화다. 우리를 알고 온 녀석이라면 지금쯤 네가 처한 상황도 알고 있을 테지?”
툭…
무심하게 테이블에 박히는 서슬 퍼런 단검. 단검의 날에 잠시 모리의 얼굴이 비쳤는데, 그 형상이 인간이 아니었음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맞아! 그래, 썩은 장화. 재밌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모리가 히죽 웃었다.
“너희는 지금부터, 내 말에 따라야 할 거야.”
“…들어줄 가치가 없는 말이었군. 문 잠가라, 얘들아.”
“예.”
‘오늘 송장 하나 치우겠네’라고 투덜거리며 문 쪽으로 가는 자들.
슈콱-!
그리고, 그들이 들려온 기척에 뒤를 돌았을 때…
두목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어… 어어?”
멍청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아무렇지 않게 살인이 벌어졌다.
“이제 넷이네. 더 줄어드는 건 싫은데 말이지.”
그제야, 모리가 손을 썼음을 깨달은 자들.
팟-!
파팟!
저마다 무기에 손을 올렸지만 쉽사리 뽑지는 않았다. 그 망설임이, 모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다 시늉만 하네. 하아… 죽일 작정이었으면 진즉 뽑았을 텐데 말이야. 쓸 만한 녀석은 없는 건가?”
“왜, 왜 이러는 거냐? 어디서 온 녀석이야? 복수냐?”
“복수? 아니, 기회를 주는 거지.”
“기회?”
히죽…
“…위대한 분을 섬길 기회.”
여기서 그 위대한 분이라는 건, 파우스트를 말하는 거다.
“고, 곤란해.”
“…뭐?”
“썩은 장화는 지부에 불과해. 따로 움직일 수는….”
모리가 그 말에 오히려 기뻐했다.
“키힉… 뒷배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마, 맞아. 그러니까….”
“말해.”
“……뭐?”
취리릭…
모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방금 죽은 두목의 얼굴로 변했다.
“녀석들이 있는 곳.”
“거… 거짓말….”
……
썩은 장화의 불한당들은 모리에게 완전히 굴복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게, 깊은 두려움을 느꼈기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이 살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리가 썩은 장화의 뒷배인 산채까지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
모리에게 그곳의 위치를 알려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말하지 않았다면 모리가 썩은 장화의 머릿수를 다시 세었을 거란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모리에게 산채의 정보가 흘러 들어간 후 정확히 3일. 산채에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똑바로 말해라, 뭐?”
“마론이 데이븐을 찔렀…습니다.”
“…데이븐은?”
“…죽었습니다.”
“마론을 데려와.”
산채는 스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규모였다. 이곳에 거점을 두고 작은 마을에 산채의 세력을 흩뿌려 두어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악한들이다.
그들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이 변방에서는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 사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마론, 납득이 가게 해명해 봐라.”
“내… 내가 아니야! 내가 찌른 게 아니라고!”
“웃기지 마! 네가 데이븐을 찌르는 걸 열 명은 더 봤다!”
“그… 그건 내가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모른….”
푸화아아악-!
마론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두령이 말했다.
“산채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그랬나, 진즉 편하게 해줬을 텐데.”
“…….”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다음 날 아침이 오기까지는.
“…….”
“둘… 이번엔 둘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칼을 찌른 후, 쓰러져 있는 모습.
“…치워라.”
불온한 기운이 산채에 감돌고 있었다.
누구일까.
누구의 소행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두령님! 여기… 여기에 뭔가가….”
산채 울타리에 피로 쓰인 메시지.
– 하나로 족할 것이다.
그 문구는 곧장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였으나, 두 차례의 사건을 경험한 산채 인원들은 곧 알아챘다.
이 문구를 적은 이가 원하는 건, 오직 한 사람의 목이다.
“…쳐 죽일.”
두령이 기분 나빠하며 산채로 되돌아갔다. 산채는, 고요해졌다.
대화가 사라졌다.
앞선 두 사건 모두, 산채 식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이 공포를 끝내기 위해선, 한 사람의 목이 필요하다. 아니라면, 또 희생자가 나오겠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산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끼이이이이익…
그 문을 통해, 모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산채가 이미 공포에 잡아먹혔다는 걸.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에 열 자루가 넘는 칼에 찔린 두령의 시체가 쓸쓸히 쓰러져 있었다.
“제발… 제발 멈춰주세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제발….”
공포.
도플갱어 모리가 인간을 다루는 효율적인 도구다.
히죽…
“위대한 분께 소식을 전해야겠군.”
– 임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곳을 장악해라.
“…임무, 완료. 자! 다시 머릿수를 세어보자.”
* * *
‘예상보다 빨랐군.’
첩보 임무로 따지면, 상당히 난해한 임무였을 것이다.
게임에서처럼 임무에 투입하고 잠깐 잊으면 완료되어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현실이니까.’
모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시간이 다소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그것보다도 빠른 시기에 임무가 완료되었다. 모리의 능력에 대해 다시 평가할 정도의 수완이었다.
이로써 앞으로는 모리가 손에 넣은 인간들을 사용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직접 테스트를 해봐야겠지만.’
현재까진 청신호다.
성에 차지 않는다면, 놓아버리면 그뿐이다.
‘그럼 이제 슬슬… 나도 해야 하는 일을 해야겠지.’
스윽…
내가 벌떡 일어나자, 루시퍼가 의도를 알아챈 듯이 마석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대기했다. 지난 가챠 이후의 잔량을 제외하고 딱 20연차 분량의 두 상자.
상자 두 개를 짊어지기엔 버거웠는지, 페넥스가 따라붙어 상자 하나를 나눠 받았다.
저벅…
저벅…
지옥문의 아제룹이 기다렸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음침한 녀석.’
클클클…
“오늘은 느낌이 좋은걸?”
“부디 그러길 바라지.”
“내 은총이 지옥까지 닿기를 염원하도록! 크히히히히!”
매번 꽝인 녀석이, 언제나 자신감만은 최고라니까.
두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차분하게 끓어오르는 피를 가라앉혔다.
마치 기도문이라도 되는 듯, 시시한 문장을 끄집어내 떠올렸다.
꿈은 꿈일 뿐, 현실을 살아야 한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마음을 비운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아니기에.
살아가기 위한 싸움의 시작이기에.
드드드드드드드드드…
그래…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차분하게…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콰직…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차분하…
“파우스트 님, 뒤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우으으으… 온다… 오고 있어… 온다고!”
페넥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구석에 숨었다.
합… 효… 그…
뭐였더라? 차분하…
콰아아아아아아아-!
무지갯빛을 넘어선 기괴한 색의 빛이 아제룹의 눈으로 뿜어져 나왔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웅…
이건…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상황이다. 앞으로 걸어갈 길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을 거라는, 피어남이다.
아제룹이 무언가에 빙의한 것처럼 축 늘어진 채로 말했다.
“최초의 악에게서 비롯된….”
최초의 악…
이 문장이 흘러나온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대악마다.
지금 이 문을 넘어오고 있는 건….
쿵…
72악마 중 단 7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
“일곱 악마가 있었다.”
틀림없는… 대악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