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32
제32화
썩은 장화.
리우디라에 심어둔 산채의 말단들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그 녀석들 덕에 산채에 이름 모를 괴물이 방문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자는 너무도 손쉽게 산채에 스며들어 와 산채의 식구 몇을 살해하고 채주의 자리마저 빼앗았다.
반항?
혹은 반란?
분명히 생각해 볼 법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녀석이 그 괴물이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채주 자리를 되찾자고 말했다. 나는 난색을 표했지만, 몇몇은 그 의견에 동조했다.
그리고 다음 날, 동조한 인원은 전부 죽었다. 반란을 입에 담은 녀석은 멀쩡히 숨을 쉬었고.
나는 녀석에게 물었었다.
‘너… 어째서 멀쩡한 거냐? 너와 함께한 녀석들은 모두 죽었는데?’
돌아온 녀석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괴물 놈의 지시로 암시장에 다녀왔었는데?
괴물이다.
녀석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산채가 녀석을 받아들인 순간, 이미 이 괴물의 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일로 인해, 마지막 남은 반발감마저 사그라들었다.
괴물은 산채의 정당한 주인이다.
아주 간악하고 음흉한 자.
녀석을 상대로 그 어떤 힘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게 됐다.
바로 지금…
‘그 괴물이… 긴장하고 있어?’
약간의 불안.
약간의 기대감.
그런 게 괴물에게서 보였다.
오늘 산채에 오기로 한 괴물의 개인적인 손님.
“모두 고개를 조아려라.”
산채는 힘이 전부다. 괴물의 말에 절하듯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이 바닥에서 몇 번이고 보금자리를 옮겨 본 녀석들이기에 눈치는 기가 막혔다.
저벅…
저벅…
좋은 향기와 묵직한 향기가 섞여서 났다.
발소리는 총 세 명. 그중 하나는 체구가 작은 자의 발소리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리, 기대 이상이구나.”
“과찬이십니다.”
누군가의 서늘한 시선이 목뒤로 닿았다. 오직 시선만으로 이런 섬?함을 느끼게 할 수 있다니….
“…이만 치워라. 나눌 얘기가 있다.”
위대한 분이라는 자의 목소리는, 깊고 어두웠다. 괴물이 섬기는 자다운, 칠흑이었다.
대체 위대한 분이란…
저 지독한 괴물이 섬기는 존재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 * *
“쓸 만한 녀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당장 필요한 소모품들을 원했을 뿐.”
“과연… 그 정도라면 충분히 제가 맡은 소임을 해낼지도요.”
모리와의 대화는 한결 편해졌다.
난 어째서 이런 대화가 편해졌다고 느끼는 거지?
‘파우스트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인가?’
이전까지, 모리와의 대화에서 내 태도는 배우나 마찬가지였다. 파우스트를 연기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체성을 가진 배우.
당시엔 모리에게 허세를 부리거나 하는 식의 대응을 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야 이제 정말 파우스트가 됐으니까.
“…눈빛이 변하신 것 같군요.”
“나쁜 의미인가?”
“당연히 좋은 의미지요. 아마 산채의 벌레들이 파우스트 님과 눈을 마주쳤다면 오줌을 지렸을 겁니다.”
“아부가 심하군.”
“히히히… 뭐, 제 감상은 그렇습니다만… 그보다….”
모리의 시선이 내 옆의 두 여인에게 향한다.
“…새로운 기운… 악마로군요.”
“느낄 수 있나?”
모리가 아몬의 존재감을 눈치챘다면, 이건 앞으로 일이 곤란해진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뻗어나갈 도시에는 모리보다 강자인 자들이 수두룩할 텐데 모리가 아몬의 존재감을 눈치챘다는 건 그들 역시 눈치챌 거라는 의미였으니까.
‘음? 잠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몬의 존재감이 비대해져 있었다. 이건 비단 모리가 아니더라도 눈치챌 법한 힘.
“…약속을 어길 셈인가?”
“잠시 시험해 본 것뿐이니라. 으흠….”
아몬은 던전을 나서기 전 나와 한 가지를 약속했었다. 절대로, 내 허락 없이는 힘을 드러내지 않기로. 약속을 어긴다면, 소환 계약의 파기를 고려하겠다고.
‘파기하는 법 따위… 아직은 모르지만 말이지.’
그래도 엄포를 놓은 게 효과는 있었는지, 그 커다란 자아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여기 오는 동안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
– 꽃이로구나, 꽃. 지옥에선 이렇게 화려한 종은 좀처럼 보기 힘드니 기억에 담아 두겠다.
– 확실히 시대가 몇 번은 지났구나. 이 몸이 기억하는 인간들은 저렇게 멀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패키지 관광을 온 아주머니처럼 중얼중얼하던 아몬. 그런 그녀가 산채에 도착하고 나서야 불안감을 조성했다.
“나름 노력은 하고 있다만? 낯선 이 풍경이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다.”
음흉하게 웃는 그녀.
‘신경 써봐야 나만 골치 아프겠네.’
아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모리에게 물었다.
“암시장의 규모가 생각 이상이더군?”
“맞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장이 리우디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렸지만, 원래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열리던 거대한 암시장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째서 이번만?”
“암시장에 거액을 후원하는 후원자 한 명이 이번 장소를 지명했다고 합니다. 토지 역시 그자의 사유지였으니 주최 측에서도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나 봅니다.”
“중소 상단 3개 규모의 물자가 오고 간다고?”
“개인 거래까지 합치면 대강 그렇다고 합니다.”
야시장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양옆의 두 여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좋은 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있어야 마땅합니다!”
“재밌는 물건들도 많이 흘러들 테지. 조금은 기대를 채워주기를.”
놀러 온 게 아닌데, 어째 소풍을 나가는 모양새다.
“그런데, 그 후원자라는 사람은 누구지?”
“아인데일 지방에서 최근 남작 위를 세습한 자라고 하는데,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아무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남작이 그만한 금력을 갖추고 있다?”
“그게 좀 괴이한 부분인데, 타계한 부친… 그러니까 전 남작이 뒷세계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유력 귀족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며 얻어낸 작위라는 소문까지….”
“흐음….”
디테일하다.
상당히.
감탄한 부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 암시장과 관련된 배경 전부다.
허투루 조성된 것이 없다.
후원자의 비사나 암시장의 위치 선정까지도.
게임에서는 흘려 지나가는 부분이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그저 게임처럼 생각하고 움직인다면, 심장에 비수가 꽂힐 때까지도 인식하지 못하겠지.
“일정은?”
“여유…는 사실 없습니다.”
“그래….”
스윽…
“출발하지.”
* * *
푸르르…
달그락…
달그락…
마차에 탄 인원은 나와 루시퍼, 그리고 아몬. 마부석에는 모리가 앉아 이동하고 있었다.
모리는 용케도 마차를 준비했는데, 마차 자체는 산채의 창고에서 뒹굴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고 말 두 필은 인근의 목장에서 구매했다고 말했다. 훔치거나 약탈한 게 아니냐는 물음에는 껄껄 웃으며 앞으로는 마차를 사용할 일이 종종 있지 않겠냐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했다고 답했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움직이는 게 모리의 진짜 무서움이다.
“슬슬… 여기쯤일 텐데요.”
마차가 잠시 정지했다. 인적 드문 숲길 한복판에서 정지하는 건 조금 불안한 행동이었지만, 곧 모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밝혀졌다.
휘이익-!
누군가 마부석에 오르는 기척.
“빌.”
흑요정 암살자인 빌이었다.
“파우스트 님, 무탈하셨군요.”
빌은 마차의 안쪽으로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이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모리, 출발하지.”
착석하자마자 지시를 내리는 빌에게 모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흥,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고.”
달그닥…
“빌.”
“말씀하십시오.”
“암시장의 주요 품목이 뭐지?”
“제도권에서 열리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적과 인접한 탓에 유적 출토품들이 주로 흘러듭니다.”
“또?”
“막대한 양의 장물입니다.”
장물. 이 마차에도 실려있는 그것이다.
던전 안에서 모험가 파티가 여러 차례 쓰러졌고, 그들의 장비와 소지품들은 주인을 잃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에는 비싼 값을 주지 않아도 제 몸을 지키는 장비에는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게 모험가들이다.
고철로만 팔아치워도 솔라리아에선 제법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비싼 스크롤을 물 쓰듯이 사용했던 칼 쿠르소의 유품 또한 남아있었기 때문에 여비 이상은 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산채의 정보원들을 통해 리우디라에서 대수림으로 향하는 모험가들을 체크하고 있었으므로 암시장에 방문한 사이에 던전이 위험해질 일은 없다.
달그락…
마차로 꼬박 하루.
출발을 산채에서 했으니 실제로 던전과의 거리는 좀 더 있겠지만, 어쨌든 암시장이 열리는 장소에 당도했다.
달그락…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이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숲이었다. 저것은 나무요, 저것은 넝쿨이니….
‘산림욕을 하러 온 게 아니라면, 불빛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온 숲이 조용할 뿐만 아니라 야생 동물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나무와 나무 사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이질적인 풍경을 집중해서 바라보니 곧 유리가 부서지듯 환상이 깨져나갔다.
화아아아악-!
숲이 불빛과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로 가득해 보였다.
암시장의 경비병들은 소매가 길쭉한 로브를 입고 창을 들고 서 있었는데, 그중 둘이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방문하셨습니까?”
“여기.”
빌이 내 지시로 거래를 튼 장물아비의 소개장을 내밀었다.
“인원이 많군요, 마차를 확인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스으윽…
기분 나쁜 눈빛이 마차 안을 휘감았다. 이미 빌이 변장을 끝마쳐 두었기에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다만, 루시퍼와 아몬의 경우엔 누구든 혹할 만한 미모의 여성으로 보일 테니 이 부분은 조심해야 했다.
“어, 어흠… 머무르는 동안 무슨 문제가 생기신다면 저희 쪽에 방문해 주시길.”
“감사하네.”
씨익-
아몬의 고리타분한 말투에 이상함을 느낄 법한데, 경비병은 헤실헤실 웃으며 창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통과아!”
달그락…
달그락…
문이 열리는 순간, 별천지가 열린다.
밤을 수놓는 빛. 수십 개가 넘는 천막은 마치 유랑 서커스단이 방문한 것 같은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꺼져! 그 가격엔 안 팔아!”
“이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값을 후려치길 후려치나?”
“거기! 노예에 손대지 마!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못된 손가락을 자를 줄 알아!”
암시장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오늘이 장이 열린 첫날이라 그런지, 모두 목청 높여 활동했다.
“장물아비가 따로 연락해 둔 숙소가 있습니다. 거기로 가겠습니다.”
“…그래.”
달그락…
숙소에 도착하자 마차를 끌고 여기까지 온 말들을 축사로 데려가 콩 껍질을 섞은 여물을 먹이는 빌.
“후아-! 인간의 찐득한 체향이 가득하구나.”
“불쾌하지만, 참겠습니다.”
두 악마의 불평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암시장 대로의 한가운데서 말다툼 중인 다른 무리에 관심을 가졌다.
“영내에서 말을 타고 다니실 순 없습니다.”
“어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귀족의 여식인 게 분명한 여인.
아직 얼굴에 개구쟁이티를 못 벗어서 그저 어리게만 보이는, 머리를 말총 형태로 묶은 귀여운 여성이 경비병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말 위의 여성도 귀티가 흘러나오는 여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시선은 그녀가 아닌 무리에 섞여 있는 로브를 쓴 누군가였다.
슬쩍 횃불의 불빛이 그 여인에게로 향하자,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선 그녀의 이목구비가 전부 드러났다.
입이 헉 벌어질 정도의 미인.
피부는 눈에 띌 정도로 하R으며 눈동자의 색이 특이했다.
그녀와 시선이 교차했다.
암시장의 첫날, 기묘한 마주침.
옆에서 아몬이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체를 숨긴 건 저쪽도 마찬가지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