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33
제33화
정체불명의 여인과 눈빛이 교차한 건 잠시였을 뿐, 여인은 곧 시선을 돌려 말에 오른 기사에게 말했다.
“메리, 그냥 규칙에 따라요.”
“으으으… 알겠어요, 성….”
“…메리.”
“아앗, …예.”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일행과 함께 움직였다. 되도록 빠르게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으니 자유 시간은 아마도 그것 중 일부를 해결한 후에야 찾아올 것 같았다.
“저 아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구나, 진정한 정체를 감췄느니라.”
“그 진짜 정체가 뭐든, 아몬… 너보다 충격적인 정체는 없을 테지.”
“뭐…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봐야 하나…. 그보다, 어딜 먼저 둘러볼 셈이지? 참고로 이 몸이 관심을 가지는 쪽은….”
“먼저, 우선해야 하는 게 있다. 그쪽부터다.”
“흐음….”
우선해야 할 건 뻔했다.
돈.
돈이다.
지금 수중에 가진 돈이라고는 접수한 산채에 축적된 자금뿐이었고 그중에서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산채 운영비를 제외한 나머지 잔돈푼뿐이다.
즉, 알거지 상태로 암시장에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쪽도 가진 걸 조금이라도 처분해야 했다.
“이곳인가?”
“예, 파우스트 님. 장물아비가 일러준 자입니다.”
음산한 천막은 다른 천막들보다 훨씬 커다랗게 보였다. 숙박용 천막이 아닌, 거래용 천막이 이렇게나 큰 것은 암시장에서도 몇 개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안에 있는 자가 평범한 자가 아닐 확률이 높아졌다.
‘과연… 첩보 활동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장되는지 확인해 볼 기회다.’
지난 첩보 활동은 그 활동 반경이 썩은 뿌리의 인근 마을인 리우디라에서만 이루어졌으며 그 범위 또한 좁았다. 기껏해야 정보 수집 정도에, 인근 조직 장악이 전부였으니.
그렇다면 이번에 그곳보다 멀리 떨어진 이 암시장에서 활동해 본다면 어떨까?
혹시 시스템적으로 제지당하는 부분이 존재할까? 구현되지 않아 공백으로 존재하는 부분은?
이 천막 너머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음?”
딱 봐도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천막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찾아왔지?”
스윽…
빌이 미리 가지고 있던 소개장을 남자에게 건넸다.
이 소개장은 빌이 리우디라를 떠나오기 전, 장물아비로부터 건네받은 것이다.
“흠… 리우디라의 손님이라. 그렇게 기대되지는 않는걸. 좀 기다려라, 안에 대화가 길어지는 모양이니….”
– 이, 이것밖에 못 준다고?
– 쓰레기를 제값 주고 사는 머저리는…
티이이잉-
…푸화아악-!
안에서 뭔가 소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천막 안에서 무언가, 피비린내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아니, 피비린내가 분명했다.
피 냄새에 내 곁에 있는 두 악마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놀랐다기보다는, 그저 피 냄새를 좋아했던 걸지도.
“어이-! 들여보내. 얘기 끝났으니.”
안에서 늙수그레하고 칼칼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예.”
밖의 사내가 고개를 까딱했다.
들어가라는 의미.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비린내에 압도당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달랐다.
저벅…
저벅…
“…….”
예상대로 장내는 초토화 그 자체였다.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엔 먼저 온 손님이 앉아 있었지만, 머리가 없었다. 아마도 저기 얘기를 나누는 다탁 위에 있는 게 저 손님의 머리겠지.
칙…
칙…
화륵…
커다란 담배를 꺼내 무는 맞은편 사내. 냄새에 찝찝한 향이 끼어있는 것이, 아마 마약 성분이 약하게라도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앞에 목이 잘린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깟 게 대수일까.
“앉지.”
“지저분한걸.”
“역시 그런가? 이봐! 여기 좀 치워. 냄새나니까.”
“예.”
그제야 목이 없는 손님의 주검이 밖으로 실려 나갔다. 어딘가에 대충 묻히겠지, 저런 시체는.
스으윽…
모리와 빌이 내 등 뒤에 서고 두 악마를 양옆에 낀 내가 의자에 앉았다.
“어디 보자… 리우디라에서 왔다고?”
“그래.”
늙수구레한 사내 근처에서 단검을 어루만지던 여인이 내 말에 심기가 거슬렸는지 슬쩍 다가오며 말했다.
“말투가 영 거슬리는데….”
그 행동에 내가 겁을 집어먹을 줄 아는 것 같았다. 아니면, 으레 하는 행동일지도?
“여기는 주인이 몇 명이지? 정리될 때 다시 와야 하나?”
“뭐? 하… 이게….”
내가 태연히 앉아 있자, 사내가 말렸다.
“얘기에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들 있어. 진도 좀 나가야 하니까.”
“……예.”
사내의 눈총에 곧바로 얌전해지는 수하.
“어디, 물건 좀 볼까?”
큰 궤짝들은 마차에 실려있었고, 빌과 모리가 금세 궤짝을 가져와 날랐다.
궤짝엔, 죽은 모험가들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짐승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모험가는 죽어 장물을 남긴다. 수중에 챙긴 건 참회석 하나와 마석뿐, 나머지 물건들은 이 궤짝에 전부 들어있었다.
“흐음… 감정해.”
모노클… 그러니까, 단안경을 쓴 멀끔한 노인이 궤짝을 가져가 감정하기 시작했다.
“감정엔 시간이 좀 걸리니 대화라도 나누자고.”
“사양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대답하며 슬쩍 천막 안을 살폈다.
기척과 살기가 사방에서 쏟아진다.
수십은 더 될 것 같은 느낌.
찌릿…
지금 딛고 있는 바닥 밑에도, 근처 천막에서도 느껴지는 살기. 말벌 집 속에 손을 집어넣은 느낌이랄까.
“내가 오래전부터 장물 취급을 해왔다는 거, 혹시 들었나?”
“아니, 듣지 못했다.”
“실제로 돈이 되기도 하지만, 이 장물 사업에는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숨겨져 있지.”
스윽…
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
“이 장물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나?”
“…모험가들이겠지.”
“반쯤은 정답이겠군. 모험가들에게 흘러가는 건 맞아. 다만, 꼬리표를 달리해서지.”
녀석이 하는 말을 곱씹다가 답했다.
“장물 꼬리표가 떨어지겠군.”
“맞아. 주인이 죽은 물건을 좋아하는 이상한 녀석은 아마 나뿐인가 봐. 이 장물들은 모두 깨끗하게 탈바꿈해 몇몇은 장인의 작품으로, 몇몇은 던전 출토품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지.”
…던전 출토품?
“던전 출토품이라고?”
“그래. 시장에 나도는 출토품 중 일부는 바로 이 장물이다.”
이건 확실히 의외인 사실이다.
“협회가 싫어할 텐데?”
“아니, 오히려 그들은 반길 거다.”
“…뭐?”
“솔라리아에 새롭게 발견되는 던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
“그렇군. 그래서….”
“그 말은 모험가 협회의 존재 이유가 점차 줄어들 수도 있다는 거야. 협회가 과연 그걸 원할까?”
어떻게든 꿈과 환상을 심어놓아 일개미인 모험가들을 붙잡아 놓는다. 그게 협회가 지향하는 바겠지.
“감정 결과입니다. 가품은 없습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스크롤의 가치가 상당합니다.”
“호….”
스크롤이라면… 칼 쿠르소가 물 쓰듯 사용하던 그 소모품이다.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발휘한다 싶었는데, 가격이 꽤 나가는 듯했다.
“장비보다도 오히려 이쪽이 값이 더 나가겠군요.”
…그 정도였어?
“하하… 좋아, 어디 그럼 가격에 관해 심대한 토론을 나눠보기 전에….”
뒤룩…
남자의 뱀같은 눈빛이 내 시선과 교차했다.
“이 물건들의 이력이 궁금한걸. 어디서 난 걸까?”
이런.
신경전인가.
‘흐음….’
장물을 넘길 때마다 이런 신경전을 거쳐야 하는지, 아니면 가격을 후려치기 위해 이런 대화를 하는 건지 아직 판단이 쉽지 않았다.
이 장물은, 내 던전에서 나온 물건들이다. 던전에 침입한 녀석들은…
‘모두 죽였지.’
어쩔까, 이 녀석.
‘죽여야 하나?’
죽여? 방금 만난 남자를?
아니, 여기 나를 지켜보는 수십 명의 불한당까지?
‘그런가….’
이런 생각은 내가 세계에 녹아든 증거다. 늘 목숨을 위협받는 마족으로서.
‘다만, 칼부림은 자주 쓸 수단이 아니야.’
칼은 뽑는 순간부터 그 칼날에 살점과 기름, 피가 엉겨 붙어 점차 파괴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무력행사는 가장 확실한 때에, 가장 필요한 때에 해야 효과적인 법.
더군다나 이 암시장엔 인근에서 방귀 좀 뀐다는… 그러니까 기침 한 번 하면 주변이 다들 돌아볼 정도의 실력자들 또한 드문드문 섞여 있다. 함부로 칼을 뽑았다간, 일이 꼬일 여지가 다분했다.
“리우디라에서 실종된 모험가들의 물건, 맞지?”
여기선, 정면 돌파다.
“호기심이 많은 걸 보니 장물을 취급하는 일과는 어울리지 않은데.”
“종종 듣는 말이야. 나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지만 어쩔 수 없어.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으려면 의심이 기본이거든.”
눈대중으로 주변을 살피자 이미 다들 양팔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허튼수작을 벌이면 순식간에 몇 개의 머리가 공중으로 뜨며 피가 난무하겠지.
어쩔 생각이냐, 파우스트.
넌 피를 보러 온 것인가?
아니.
‘돈을 벌러 왔지.’
스윽…
“그래, 그들의 물건이다.”
“호… 어떻게 얻었지?”
“잘 타일러서.”
“농담이겠지?”
“물론 농담이다.”
고오오오오…
마력을 사용해 위압감을 떨쳤다.
파우스트가 가진 군주의 힘.
마력을 사용했지만, 적들이 느끼는 건 마력. 오로지 그들을 짓누르는 듯한 위용뿐이다.
“죽였다.”
“…탈은 없을까?”
“내 앞에 있는 네가 내 첫 번째 탈이 아니라면.”
“흐으으음… 앞으로도 이런 짓을 계속할 셈이냐?”
“필요하다면.”
남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히죽거렸다.
아마 머릿속으로 내 정체에 대해 계속해서 궁리하겠지.
강도인가? 혹은 마적단의 두령?
던전을 가진 마족이라는 해답에는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모험가 협회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여기나? 무려 이만한 실종자들인데?”
“아직은.”
“어째서 확신하지?”
“변방이고 대수림에서의 실종은 길가의 모래알처럼 흔해 빠진 일이니까. 더불어… 네가 아까 했던 말도 한몫하고.”
“뭐? 아아… 협회의 입장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야. 어느 정도의 위험은 계속 존재해야 협회의 힘이 유지되는 법이니.”
쯧.
“하지만, 이렇게 리우디라에서만 계속 모험가가 사라진다면 결국 조사단이 파견될 거야.”
“…….”
“이렇게 하지.”
사내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앞으로 네 모든 장물을 내 선에서 처리해 주마. 또한… 내가 가진 힘을 동원해 리우디라로의 조사단 파견을 최대한 늦춰주지, 어때?”
이건… 구미가 당기다 못해 침이 질질 흐를 제안이다. 첩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 중 하나.
조사단 파견의 유예.
조사단은 말벌 집을 제거하기 위해 나타난 소방수와 같은 존재다.
당연하게도 내 첫 던전인 썩은 뿌리의 위치가 인간의 거주지와 밀접한 탓에 잦은 실종은 조사단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자는 그 예견된 파멸을 최대한 늦춰준다고 말하고 있었고.
이런 달콤한 제안이라니.
당연히 꿍꿍이가 있을 테지.
뭐냐, 그 꿍꿍이.
미끼는 물어줄 테니 말해봐.
“조건은?”
“이 일대에서 성가시게 구는 녀석들이 있다. 내 사업에 자꾸만 훼방을 놓는 녀석들이지.”
“녀석들을 처리해 주길 원하는가?”
“그래, 그렇게만 해주면 우린 좋은 관계가 될 것 같은데?”
“급한 일인가?”
“내 화만 좀 다스리면 그리 급한 일은 아니야. 쉽게 당해줄 녀석들도 아니라 덫을 좀 놓을 시간도 필요하고 말이지.”
“기간은?”
“3개월에서 반년 정도겠군.”
“수락하지.”
내 대답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인지 듣지도 않고?”
“지금부터 말할 거잖나?”
“큭… 큭… 크하하하하하하하!”
사내가 턱까지 젖혀가며 웃었다.
“재밌군, 너.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녀석들은 불쾌한 3인조라 불리는 놈들이야. 들어는 봤겠지? 이 근방에서 유명할 텐데.”
“…들어봤다.”
불쾌한 3인조… 에피소드 2의 보스니까 말이지.
‘어차피 부딪혀야 하는 벽이다.’
이 거래를 통해 나는 손해 보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훌륭한 조력자 하나가 생겼을 뿐이지.
“너희와 거래를 주선한 장물아비를 너희와의 연락책으로 붙여두마. 이름이?”
이름을 묻자 녀석의 주변 수하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 남자가 이름을 묻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인 것처럼.
“파우스트.”
“롬웰이다.”
그래, 롬웰.
…잠깐, 롬웰?
롬웰이라면… 무두장이 롬웰?
그런… 말이 안 되잖아? 녀석은…
‘에피소드 3의 보스인데?’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자, 그럼 장물의 값을 치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