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34
제34화
롬웰과의 거래 결과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둑이 넘겨받았다.
– 첫 거래기도 하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으니 값을 후하게 쳤다. 가져가.
– …빚을 지워둘 생각인가?
– 빚? 당치도 않아. 뭐, 투자라고 생각해 둬.
스크롤의 가격이 꽤 나간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인데…
수중에 갑자기 거금이 모이자 당혹스러웠다. 예상한 금액보다 족히 2배는 많았으니 말이다.
“롬웰이라… 죽이지 그랬느냐? 그럼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 되었을 텐데.”
아몬이 괜히 옆에서 슬쩍 나를 떠보는 눈치였다.
‘누가 대악마 아니랄까 봐… 끔찍한 상상은.’
그래도 성심성의껏 답했다.
“폭력은 효율 좋은 수단일 뿐이지.”
히죽-
아몬이 아이와 같은 해맑은 미소로 대꾸한다.
“좋은 말이구나. 다만 그 효율 좋은 수단이 거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폭력 예찬론자다, 이 녀석.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는걸.
“아몬, 약속을 잊지 마라.”
“…물론!”
내 허락 없이는 날뛸 수 없다.
녀석이 이런 곳에서 함부로 날뛰었다간 리우디라 인근에 대악마가 강림했으니 여기 와서 꼭 잡아 죽여주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날뛰더라도 목격자 없이, 혹은 피치 못할 상황에서만 날뛰자고.
그보다, 롬웰과의 대화에서 받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에피소드 2, 3의 보스가 한꺼번에 발자취를 드러내다니….’
사실 에피소드 1의 최종 보스인 칼 쿠르소가 사망했으니, 에피소드 2의 보스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무두장이 롬웰과의 만남이었다.
롬웰은 에피소드 3막의 최종 보스로, 일대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실력자다.
그런 존재와 선행 에피소드가 진행되기도 전부터 마주친 것으로 모자라 긍정적인 관계까지 형성하다니.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에피소드 3막의 보스로 롬웰이 등장하기는 하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어차피 당장엔 롬웰은 커녕 불쾌한 3인조를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해야 할 테니까. 또, 다른 문제도 잔뜩 쌓여있으니 너무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어쨌든 수중에 거금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 그럼 이 많은 돈으로 뭐부터 할까.’
그런 생각을 채 꺼내기도 전에 소맷자락을 누군가 잡아끌었다.
“…루시퍼.”
“차! 차를 사주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약속… 하셨잖습니까?”
약속까지 했던가?
“…가지.”
기분이 묘한 것이, 마치 데이트하는 듯한 포지션이라고 생각이 들다가도…
‘이 녀석… 두 손가락으로만 날 잡아끌고 있잖아.’
그녀는 엄지와 검지만으로 내 소매를 끌어당긴다. 그것도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이거, 은근 열받는다.
“여기입니다.”
“간판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은은한 차향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다만, 정말로 은은했기 때문에 암시장의 다른 냄새와 뒤섞여 헤맬 수도 있는데 루시퍼는 잘도 여기까지 헷갈리지 않고 찾아왔다.
‘개코인 건지… 차 향기에만 유독 반응하는 건지 원….’
“차, 좋은 차….”
강아지처럼 애원하는 눈동자.
“다음은 당연하게도 이 아몬의 연구 재료겠지? 암,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느니라.”
아몬까지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재잘거리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스으윽…
“아, 어서 와.”
얼굴에 흉이 있는 젊은 미남이 맞이했다. 차 상인의 예상치 못한 비주얼에 조금 놀랐다.
“처음 보는 느낌인데… 소개? 아니면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을까?”
“차를 파는 곳 아닌가?”
“…맞아, 마음껏 구경해도 좋아.”
루시퍼가 상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큼성큼 걸어가 차를 살폈다.
흐으으읍…
흐으으으으읍…
한껏 말린 찻잎의 향을 음미하는 루시퍼. 시각적 정보가 차단된 상태로 이 소리만 들으면 굉장히 음흉한 존재가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너, 그 고리타분한 취향은 도무지 변하지 않는구나.”
아몬이 말하자 루시퍼가 찻잎을 살피며 대꾸했다.
“아몬도 긴 세월 그대로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던가?”
“여기로 소환당한 이유만 해도….”
“그, 그만. 부정하지 않겠노라.”
차를 파는 상인은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엿들을 우려는 없었다.
대신, 아몬이 옆에 와 속삭였다.
“아는 곳이더냐?”
“아니, 전혀.”
“…으음.”
“왜 그러지?”
“영 꺼림칙해서 말이다. 이곳 주인장이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구나.”
그 말에 가만히 눈을 감고, 상인의 마력에 집중했다.
‘과연….’
고요하지만 음험한 흐름. 상인은 내가 단박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강자였다.
‘암시장엔 전부 이런 녀석들투성인가?’
이런 힘을 가지고서 찻집 주인이라니….
‘이런 곳에서 함부로 행동했다간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겠군.’
뭐, 어쨌든 우리는 차를 사러 온 것뿐이다. 루시퍼가 일행 중 유일하게 본래 목적에 집중하고 있기도 하고.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서성거렸다. 나는 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질이 좋은 편인지 가격이 꽤 나갔다.
아마 그 때문에 망설이는 듯했다. 그녀가 찻잎을 고르는 뒷모습만 보고는, 누구도 그녀를 악마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
그녀가 슬쩍 뒤돌며 물었다.
“이쪽은 브라뉴 산 밤그늘 차, 이쪽은 시시란 고원의 꿀이슬 차. 어떤 게 좋겠습니까?”
“내게 묻는 것인가?”
“예.”
“무슨 차이가 있지?”
관심 있는 분야에 다른 이의 질문이 더해지면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지금 루시퍼의 볼이 발그레해지며 열변을 토하는 것 역시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밤그늘은 그 첫 만남은 쓸 것이나 뒷맛이 깔끔할 것이고 꿀이슬은 달큼하지만 쉽게 질릴 수 있어요.”
흐음…
“그대는 어떤 것을 선호하지?”
“저는….”
루시퍼가 고장 난 것처럼 정지했다가 답했다.
“꿀이슬… 쪽으로 하겠습니다.”
“그런가, 나는 밤그늘 쪽이 좀 더 나아 보이니… 어쩔 수 없군. 둘 다 사도록 하지.”
“하지만….”
루시퍼는 입술을 삐죽 내밀뿐, 내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내심 두 찻잎을 모두 가지고 싶었을 거다.
“흐음… 제법이구나.”
아몬이 히죽 웃으며 내 옆구릴 쿡 찔렀다.
“무엇이?”
“넌 어떤 것이든 루시퍼의 선택과 반대인 선택지를 점했겠지.”
“…굳이?”
“처음부터 둘 모두를 사겠다고 말했다면, 루시퍼가 어떻게든 거부했을 테니까. 그렇지 않나? 으흠흠… 확실히 쌀쌀맞은 거에 비해 눈치가 제법이구나.”
“…좋을 대로 생각하는군.”
내 대충인 대답에 아몬은 돌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 아몬에게는 절대로 통하지 않을 수작이니라. 아몬은 선물로 마음이 흔들리는 일 따위는 결단코 없을 것이니!”
…단호하기도 하셔라.
차의 결제를 마치고, 천막을 나서기 전에 상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으응?”
“이름을 알 수 있나?”
서늘해지는 공기.
“내 이름이 왜 필요하지?”
“다음번에도 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이지.”
그 즉시 헤벌쭉한 얼굴로 응대하는 상인.
“피요라고 해. 다음번에도 찾아주면 고맙겠어!”
“…피요. 알았다.”
아무튼, 첫날의 일정은 이것으로 마쳤다.
암시장은 총 3일 동안 진행되며 이제 겨우 첫날이 지났을 뿐이다. 우리는 이곳에 3일 동안 체류할 생각이었으니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 * *
2일 차에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마석을 사고파는 마석 상인이 있는 곳이었다.
마석은 던전에 있어 가장 신용도 높은 화폐나 다름없었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최상급 마석인데?”
“최상급 마석?”
내가 내민 마석을 보고 곧장 답을 내놓는 상인.
마석에 등급이 있다는 것도 방금 처음 알았다. 그럼 왜 게임의 모험가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최상급 마석만을 들고 다녔지?
“여기선 취급 안 하는 물건이야. 아니, 이 일대에선 대부분 취급하지 않을걸?”
“어째서지?”
“그야 희소하니까. 최상급 마석은 채굴량도 얼마 되지 않는데 대부분 채굴되기 전부터 계약된 곳이 있거든. 제국 마도 쪽 기관이나 유력 귀족들과 말이야.”
“개인은 구할 수 없다는 말인가?”
“지금은 그렇지.”
상인의 천막을 빠져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최상급 마석이기에 구할 수 없다고?’
이는 꽤나 중차대한 문제다.
게임처럼 모험가들이 몇 트럭씩 찾아와 알아서 갈려 나가주거나, 현금을 사용해 마석을 구매할 수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지금은 둘 다 어려운 상황.
던전이 존재하기 위해선 새롭게 마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이번 외유가 그 실마리를 얻기 위한 외출이기도 했는데 벽에 부딪혔다.
‘모험가들은 그럼 어째서 전부 최상급 마석을 가지고 있었지?’
이 의문 역시 당장엔 풀리지 않을 거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역시 칠죄종과 접촉해야 하나?’
칠죄종은 파우스트 이전부터 악마와 계약해온 자들. 마석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마녀가 있는 천막이었다.
“뭘 찾으시나요? 미래를 알 수 있는 점괘? 독을 잔뜩 품은 개구리? 말을 알아듣는 까마귀?”
“둘러보겠느니라.”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건, 아몬이었다.
‘아몬이 필요로 했던 게 이곳에 있을까?’
다시 떠올려보자면, 그녀는 대악마다.
던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파우스트에게 막대한 혜택을 주는 존재.
또한 각 대악마마다 가동할 수 있는 고유의 시설이 존재했기에, 이로 인해 많은 화학작용이 발생한다.
‘욕 많이 먹었지… 과금을 강제한다고.’
레메게톤은 욕을 많이 먹은 만큼, 빠르게 사라진 게임이니 굳이 그 잘못된 점을 더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아몬의 고유 시설은… 연구실이었지.’
이 연구실 자체의 효과도 크긴 했지만, 연구실에 아몬이 존재할 때 가끔씩 벌어지는 일이 더 기막히다.
‘그래서 되도록 이곳에 아몬의 흥미를 끌 만한 소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내 미래를 위해 나태해서는 안 된다.
“으음?”
한참을 둘러보던 아몬이 어떤 화분 앞에 섰다.
“오호라… 한 번쯤 다뤄보고 싶었던 녀석이 여기 있었느니라.”
다행히, 아몬이 관심을 가지는 물건이 있었다. 슬쩍 그 물건의 가격을 물었다.
“아, 만드라고라? 자생 식물이라 가격이 좀 나가. 한… 이 정도?”
…말도 안 돼.
남은 전 재산이랑 비슷하잖아?
겉으로는 경악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아몬에게 물었다.
“만드라고라가 필요한가?”
제발 다른 거!
제발 저기 옆에도 비슷하게 생긴 게 있는데.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은데.
“아아… 영감이 떠올랐느니라. 뭔가가 파바밧! 하고 이 손에서 탄생할 것이니….”
“…….”
“그런데, 가격이 좀 나가는 모양이구나. 되었다, 아몬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런 걸로 떼를 쓰거나 할 일은 없느니라.”
라고 말하며 뒤돌아선 그녀는 고개만 돌려 만드라고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윽…
고민하지 않고 주인에게 값을 치렀다.
“조심히 다뤄야 해. 만드라고라는 뿌리를 뽑은 사람을 저주해 죽이는 식물이니까.”
“유념하지.”
만드라고라를 작은 궤에 담아 건네는 마녀에게서 넘겨받아 다시 아몬에게 건넸다.
“자.”
“으흠… 그렇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만? 너무 과한 지출은 아니더냐?”
“선물이라 생각해도 좋겠군.”
“선물? 푸흡… 이 아몬을 한참 잘못 이해하고 있구나.”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이런 선물 따위에 휘둘릴 내가 아니다. 명심하거라.”
[우레의 대악마 아몬의 파우스트를 향한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친밀도: ♥♡♡♡♡♡]……
아마도, 겁나게 흔들렸다.
이것으로 그녀의 나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흠흠… 돌아가면 연구해볼 만한 주제가 기다리고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