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35
제35화
암시장이 폐장하는 날인 대망의 3일째가 다가왔다.
사실 나는 2일 차에 암시장에 온 목적을 대부분 달성했지만, 굳이 일찍 떠날 이유까지는 없어 이곳에 남아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3일 차의 가장 큰 이벤트인 유물 경매는 생각보다는 식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변방인 점과 더불어 진귀한 물품이 있더라도 제값을 치러줄 구매자가 없을 테니 다들 제대로 된 물건을 내놓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물건은 제도로 흘러들 테고 말이지.’
척박한 변경백의 영지보다도 더 척박한 게 바로 이 근방이다. 그럼에도 경매 목록을 굳이 확인한 이유는, 혹시나 목록에 있을지 모르는 최상급 마석 때문이었다.
역시라고 해야 할지, 안타깝게도 최상급 마석은 목록에 없었다.
‘뭐… 그나마 루시퍼와 아몬이 원하던 것은 전부 손에 넣었으니 다행인가?’
내 입장에서도 그리 나쁠 게 없는 외유였다. 어찌 됐건 귀중한 정보들을 여럿 얻었고 아몬이 더는 태업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슬슬….”
빌과 모리가 마차의 준비가 끝났는지,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무리를.
‘어디선가 본….’
제일 선두에 서서 마차로 다가오는 여인은 분명 전에 본 기억이 있다. 암시장에 처음 온 날, 경비병과 말싸움을 벌이던 여인이다.
‘그럼 다른 자들도….’
그녀의 일행으로 보였던 자들이겠지. 과연, 눈에 익은 자들이 좀 있었다. 이쪽 일행은 다섯, 저쪽 역시 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듯했다.
“정지! 정지!”
양팔을 휘적이며 다가오는 여인.
그 안엔 은갑이 번뜩이는 것이 여인이 기사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게 했다.
스윽…
흑요정 빌이 여인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누구시기에 떠나야 하는 여행자들을 가로막으십니까?”
우리 중 가장 사회성이 높은 건 아마도 빌이 아닐까. 정중하게, 무해한 말투로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흠흠… 우리 쪽 성… 그러니까, 음… 아무튼 나눌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다.”
빌이 황당해하면서 내 쪽을 바라봤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겠지만, 내 속마음의 표정도 황당함으로 일그러진 상황.
‘누구길래 이렇게 배짱을 부리는 거지?’
이런 여인을 선봉장으로 내세울 정도라면 일행 내에 어지간히 인물이 없었나 싶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내 빌의 시선을 따라 내게로 향했다.
‘정체를 숨긴 자들이니 주의해야 한다.’
정체를 너무 티 나게 숨기긴 했다만…. 그래도 만난 장소가 떳떳하지 못한 암시장이기도 했으니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용건이 있나?”
“아, 당신이 여기 패거리의 두령? 두목? 뭐 아무튼….”
스윽…
내가 로브의 후드를 슬쩍 내리자, 메리라는 여자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읏….”
메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어째선지 눈을 피한다.
“용건은?”
메리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내비치자, 뒤에 있던 여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이곳에 오자고 부탁했어요.”
“당신이… 내게?”
“예.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건 들어볼 필요도 없다.
난처한 영애를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님 포지션을 지금 같은 때에 굳이 맡을 이유가 없으니까.
“돌아가라.”
“거래를 위해서 왔어요.”
“거래?”
“…분명 당신에게도 이득이 될 만한 거래일 거예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말하는 여인.
‘무슨 속셈이지?’
아니 여기서 시간을 더 소모할 수도 없었다. 까딱했다간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는….
“들어보지 그러느냐?”
“…뭐?”
아몬이 조용히 내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어떻게 한 것인지, 신묘한 재주였다.
“너의 몸 상태가 걱정인 것 아니더냐?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이 몸이 누구인지 잊었단 말인가? 그 무엇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느니라.”
루시퍼가 아몬의 대화를 엿듣고는 속삭였다.
“아몬은 이래 봬도 잘 속는 편입니다.”
“끼, 끼어들지 말거라! 아무튼!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느니라.”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후에 설명해 주마. 제법 복잡한 내용이니까 말이지. 우선은 손님 대접이니라.”
“음….”
“손님을 앞에 두고 있잖느냐? 다음에 얘기해도 될 것을.”
“그러지.”
아몬과의 대화는 이후로 미루고 뒤돌며 말했다.
“마차에 오르도록, 물론 혼자.”
“기, 기다려 봐! 서… 아니, 혼자서 보낼 수는….”
“메리, 이곳에 있어요.”
“하지만….”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해요.”
“…긴 시간은 안 됩니다. 1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아시죠?”
“예.”
10분이 지나면 깽판을 놓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끼이이익…
쿵.
여인이 마차 문짝 닫고 들어오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뭐랄까… 실시간으로 내 체면이 깎여나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야 하나? 귀족들이 품위 유지를 위해 돈을 물 쓰듯 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왜 날 보자고 했지? 또, 나를 어찌 알고? 너는 누구인가?”
“궁금한 게 많군요. 하나씩 설명 드릴 테지만 10분이 넘어가면 메리가 화를 낼 거예요. 그러니, 사소한 부분은 더 나은 날에 말씀드릴게요.”
하.
이 여자는 우리가 이후에도 또 이렇게 대면하는 기회가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
‘거슬려… 거슬린단 말이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여인에게서 느껴졌다. 여인이 강해서라기엔, 또 그런 느낌과는 달랐다.
‘꼭…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아직은 느낌뿐이지만 말이다.
“저는 아델리아라고 해요.”
“아델…리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였더라.
‘당연히 게임 속이겠지만 말이지… 어디서였을까….’
파우스트로 살아가기로 다짐한 후로는, 게임에서의 기억이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언젠가는 그런 기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까.
“베스 교에 몸을 담고 있는 신자랍니다.”
이런.
‘베스 교라고?’
솔라리아 세계의 강대한 제국 아슬란.
아슬란의 국교는 단일교인 루베르 교이며 태양신을 섬긴다.
이외의 종교는 모두 이단 취급하며, 그것을 믿는 자는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다.
루베르 교의 규율은 꽤 자유로운 편이지만, 이단과 관련해서는 엄격하다.
제정일치이자 정교일치인 아슬란.
당연하게도 황제이자 교황인 솔로몬이 있기에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솔로몬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일 거다.
“내게 말해도 되나? 이단 심문관이 두렵지 않은가 보군.”
“눈앞의 당신이, 이단 심문관은 아닐 것이고… 이단 심문관에게 일러바칠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는걸요.”
“섣불리 사람을 믿는군.”
“신께서 사람을 믿으라 하셨으니까요.”
“…이단의 신자께서 날 왜 찾아오신 거지?”
엮이면 피곤해질 게 뻔했다.
마족도 차별??학대, 사냥의 대상이지만 이단도 그에 비등한 대우를 받는다.
‘피차 아슬란 입장에선 도둑놈들인데 본거지가 겹치면 안 되잖아?’
“신께서… 어젯밤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포교할 속셈이라면….”
“아뇨, 신탁입니다.”
“…무어라 말하던가?”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가라고.”
“…뭐?”
이런, 젠장!
철컥…
절로 허리춤의 검에 손이 갔다.
이걸 뽑는다면, 저 아델리아라는 여인의 몸쯤은 순식간에 썩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놀라셨나요?”
“…….”
“검은 머리는 마족의 상징이니까요. 지금의 당신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요.”
“위장쯤이야 다들 하잖아? 특히나 이런 곳에서. 당신도 그럴 텐데?”
“그래요, 마찬가지죠.”
스르륵…
여인의 얼굴이 뒤바뀌고 있었다. 정확히는, 더 아름다워지고 있다고 말해야 하겠지.
뾰족한 귀에, 깊은 눈.
찬란한 머릿결까지.
경외심이 들 정도의 외모다.
“전… 베스 교의 성녀이자 차기 교황 후보로 지목된 사람 중 한 명이에요.”
그녀의 진짜 정체는 요정이었다.
겉보기에도 기품과 성스러움이 흘러넘치는 것이 신도들이 왜 그녀를 따르는지 알 것도 같았다.
“…왜 그걸 나에게 밝히는 거지?”
“신께서 어젯밤 제게 찾아와, 당신에게 도움을 구하라 했으니까요.”
“그 신도 엉터리로군, 난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말이지.”
“좋은 거래가 될 거라 말하지 않았었나요?”
“…….”
인상을 찡그리고 그녀의 얘기를 기다렸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이 암시장의 후원자인 그림할 남작과 관련된 일 때문이에요.”
“그림할 남작….”
이야기는 모리에게서 들었던 암시장의 장소가 이곳으로 선정된 이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 암시장에 거액을 후원하는 후원자 한 명이 이번 장소를 지명했다고 합니다.
아마 암시장의 후원자가 그림할 남작인 듯하고… 한데 그것과 무슨 상관일까?
‘…아!’
설마?
“그림할 남작이 베스 교의 신도였던가?”
“눈치채셨군요.”
“근데 그것과 당신이 여기에 방문한 게 무슨 상관이지?”
“차기 교황 후보들은 현재, 수행이라는 의식을 치르고 있어요.”
“수행?”
“후보자들이 교단에 필요한 일을 직접 행하는 과정입니다. 사소한 일부터 위험한 일까지, 본단에서 주어지는 임무는 무엇이든지요.”
“그림할 남작에게 뭔가 있나 보군.”
“정확히는 남작이 속한 영지에 교구가 세 곳 있는데, 그중 한곳에서 연달아 실종이 발생하고 있어요.”
실종이라…
‘위험한 냄새가 나는데?’
꺼림칙하다, 상당히.
“그림할 남작의 소행이라 추정하는 건가?”
“실종된 이들 모두 남작과 접촉했던 기록이 있어요.”
“심증은 있다는 거군.”
“교구 순회 겸, 방문한다는 명목으로 약속을 잡았죠.”
그래, 거기까지 진행했다는 거지?
“거기까지 진행했다면, 내 도움이 필요할 이유가 없을 텐데? 난 교회 내부 암투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말이야.”
“그림할 남작과 관련된 소문, 혹시 들어본 적 없으신가요?”
“그림할 남작이라….”
모리가 했던 말 중에, 그런 게 있기는 했다.
– 그게 좀 괴이한 부분인데, 타계한 부친… 그러니까 전 남작이 뒷세계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유력 귀족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며 얻어낸 작위라는 소문까지….
알겠다.
뭣 때문에 날 찾아왔는지.
“수행단을 믿지 못하는 거군.”
“아뇨, 믿어요. 하지만, 믿음과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는 걸 이해할 나이쯤은 되었어요.”
“성녀라 불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
“저도 그렇게 불리는 걸 원하지는 않았답니다.”
요약하자면, 성녀 아델리아는 그림할 남작의 범죄를 의심해 심문 혹은 조사하기 위해 파견을 나왔지만 그림할 남작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들이 아델리아의 수행원들보다 강할 수도 있다고 염려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힘에서 밀린 아델리아 측은 임무 수행에 차질이 생기거나 혹은…
‘제거되겠지.’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내가.
“호위가 필요한 거로군.”
“맞아요.”
“돌아가라.”
“…….”
“결국엔 내부 문제고 내가 끼어들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그 한 가지, 이제 생길 거예요.”
달그락…
그녀의 소맷자락에서 떨어진 건, 손가락만 한 크기의 돌멩이였다.
그래,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돌멩이.
“최상급 마석, 찾고 계시죠?”
“…….”
“궤짝 하나를 가득 채워드리죠.”
궤짝 하나에 3,000개다.
마석 3,000개.
[첩보 활동 중 조력을 제안받았습니다.] [보상은 최상급 마석 3,000개입니다.] [Tip: 첩보 활동의 보상은 직접 건네받기 전까진 확실히 정해진 게 아닙니다.]10연차.
가챠…
가챠라고?
가챠다!
“그림할 남작의 저택이 이 근방이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