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38
제38화
창가의 커튼을 드리운 채로 별채 방향을 내려다봤다. 싸늘하게 굳은 안색의 시종장이 저택의 집사를 옆에 세워두고 무어라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사로잡아둔 베스 교의 신도가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그들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문이 잠겨 있는 별채 지하실에 다녀간 것으로도 모자라 그곳에 사로잡혀 있던 희생자를 빼낸 건지 알 도리가 없을 테니까.
‘예상한 것보다 일 처리가 빨랐어.’
새삼, 얼굴을 훔칠 수 있는 도플갱어 모리와 흑요정 암살자인 빌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아마 이 일은 빠르게 그림할 남작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스윽…
뒤로 돌자, 모리와 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구출한 신도는?”
“제 처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질문에 답한 건 빌이었다.
“감시당할 우려는 없나?”
“감시당할 겁니다. 하지만 내부까지는 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으니 하루쯤은 괜찮을 거라 봅니다.”
지금 이 방에 있는 건 빌과 모리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일을 맡긴 아델리아 성녀 역시도 티타임을 명목으로 이 방에 와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놀랐을 거다.
나 역시도 이들의 엄청난 일 처리 속도에 놀랐을 정도니까.
“이만, 물러나도록.”
“예.”
“예.”
빌과 모리가 물러가고, 나와 아델리아만이 적막 속에 남았다.
“아델리아, 이제 어쩔 셈이지?”
“내일 마지막 만찬 일정에서 그림할 남작의 죄를 입증할 생각이에요.”
“그런가?”
그녀에게 대꾸하면서 점차 이후의 일에 관심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내가 할 일이 끝났기 때문인가.’
마석을 대가로 부탁받은 일을 모두 마쳤기 때문에 이후의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난, 약속한 마석만 받으면 그뿐이다.
“남작에겐… 베스의 심판이 내려질 거예요.”
“…행운을 빌지.”
“약속한 마석은 리우디라 인근에서 건네도록 할게요.”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네. 그만한 양은 저조차도 융통에 제한이 따르니까요. 이미 사절을 보내 놨으니 교단에서 파견될 성기사들이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알았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최상급 마석은 지금 이 솔라리아 세계에서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거기다 그 최상급 마석이 궤짝 세 개 분량이라면, 여행 중에 들고 다니기엔 과한 양이긴 했다.
일은 이렇게 마무리 되겠지.
다만, 염려되는 점은 있었다.
“그림할 남작이 얌전히 재판장에 설 것 같은가?”
“베스 교에 대항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이웃으로 두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잘못을 인정하고 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만이 남작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평화적인 해결책이죠.”
…글쎄.
내가 남작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외부인이니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역시,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자고.
“남작과 우리가 가진 정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델리아, 당신이 지하실의 베스 신도를 빼냈다는 걸 알게 된 남작이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뒀으면 좋겠군.”
“…충고 감사해요.”
“…마석을 넘겨받기 전까진, 거래 상대니까.”
* * *
만찬은 3일째 밤 저녁 일정이었다.
신기하게도 잠자리까진 허락받지 못했고 만찬을 즐긴 후에, 다시 순례길에 오르는 일정이다.
아델리아가 마차에 올라 순탄하게 마석을 넘겨받는 순간, 나도 이 베스 교와는 안녕이다.
‘그건 그렇고… 남작 쪽이 너무 조용하군.’
아델리아 측이 별채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냈다는 걸 눈치챘을 게 분명한데도, 그림할 남작은 시종일관 태평하게 웃으며 손님 접대를 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신지요?”
“과한 환대랍니다. 소녀에겐 한 그릇의 음식만 주어져도 모자람이 없는데 이 많은 음식은 남기는 게 죄스러울 정도예요.”
죄.
일부러 죄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아델리아.
그리고는 남작의 반응을 엿본다.
슥슥…
콧수염을 어루만지는 그림할.
“하하…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 가진 게 금화밖에 없는 철없는 귀족의 호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혹, 마음만 앞섰다면 서툴러서 그런 것이라 넘어가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저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를 뿐이에요. 탓하는 건 아니었답니다.”
“아무렴, 성녀님이 저 그림할을 탓하시지 않겠지요.”
탓하지 않는다라….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성녀도 그림할도 일부러 특정 단어를 강조해 상대를 떠보고 있었다.
‘베스 교는 어째 음침한 녀석들 뿐이군.’
이 살얼음판 같은 상황을 깬 건, 내 옆에 앉은 여인이었다.
하아암-
누가 보란 듯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아몬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따분하구나, 언제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느냐?”
“조금만 참아, 곧 결론이 날 듯 보이니.”
“흐음… 글쎄. 이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만.”
“어째서….”
그때, 아몬이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나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기척이….’
저택을 경계하는 인원의 기척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뿐이었다면 성기사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기척이 줄지어 저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창가로 슬쩍 시선을 옮기자, 횃불을 매단 마차가 계속해서 저택의 정문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그림할의 수작이 분명해 보였다.
마차 행렬을 눈치챈 건, 성녀 쪽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델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재잘거리는 것을 보면.
분명,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
…가만, 나한테는 오히려 좋은 일인가?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채 귀를 열었다.
* * *
아직 마차 행렬을 눈치채지 못한 성녀가 성기사 중 한 명에게 말했다.
“메리.”
“예.”
“데려오세요.”
“하, 하지만….”
“어서.”
“…예.”
메리는 잔뜩 움츠러든 모양새로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이 자리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성대한 만찬이었지만 음식을 먹지도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메리가 데려오는 이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직 피딱지가 채 마르지 않은 수인족 남자였다.
늑대의 귀와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남자는 비틀거리며 걸어와 만찬장 한켠에 자리했다. 그림할 남작의 표정은 도화지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성녀 아델리아가 수인족 남자에게 말했다.
“이 저택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저… 저는 베스 교를 믿는 자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림할 남작 또한 마찬가지죠….”
얘기가 시작됐다.
“남작과의 교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괴한들로부터 납치당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그곳은… 지옥이었습니다.”
담담하게 얘기를 이어가는 남자.
“모두… 사지를 절단당하거나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감금된 다른 자들은… 대부분 죽었습니다.”
“이 일에 개입된 자는 누구인가요?”
남자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눈앞에 있는 그림할 남작입니다.”
“…….”
“…….”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기력이 다했는지 휘청이며 쓰러지려는 남자를 메리가 부축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쓰러진 남자를 한쪽에 눕히는 메리.
아델리아가 말했다.
“그림할 남작, 당신은….”
그림할이 껄껄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성녀님,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제 얘기를 들어보시죠.”
“…….”
“저는 베스 교를 사랑합니다. 종족을 넘어선 사랑을 실천하라는 교리는 이 그림할의 뜻과 일치합니다.”
“그런 당신이 어째서….”
“그저, 조금 괴팍한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누군가는 가학적이라 말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셔야 할 건….”
그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그림할이라는 것이고, 또한 이곳이 그림할의 사유지라는 겁니다.”
“…….”
“교단 내의 알력 다툼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성녀님께서 진실하시다 하여 모두가 그 뜻을 기리는 건 아닙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이 그림할이 성녀님의 후원자가 되도록 하지요.”
“…뭐?”
“금전이면 금전, 병력이면 병력… 이 그림할에게 부족한 건 딱히 없습니다. 아! 그저… 사랑이 부족할 뿐이지요. 모자란 사랑은… 성녀님이 채워주시면 될 테지요.”
쿠당탕!
메리와 다른 성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했다.
“이 무뢰배가…!”
“감히!”
바로 그때, 아델리아 일행이 그제야 마당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마차 행렬을 눈치챘다.
워낙 긴박하게 오고 가는 대화였기에, 살기를 품지 않은 마차까지 신경을 쏟지는 못했던 모양.
“그림할 남작, 이게 무슨 행동이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저희를 위협하는 건가요?”
“위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 마차들은 다 뭐죠?”
“하하! 성녀님이 떠나시면 이후에 맞이할 손님들입니다. 제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저들은 마차에서 내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림할의 눈이 샐쭉해졌다.
“성녀님과의 대화가 예기치 않게 길어진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요.”
“…….”
아무도 검에 손을 올리지 못했다.
검을 뽑는 순간, 틀림없이 유혈사태다. 그것도, 아델리아 측이 심각하게 불리한.
“어떻습니까? 성녀님은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 부족한 힘을 얻고, 전 조금의 인정을 얻는 겁니다. 자… 말씀해보시지요.”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는 그림할 남작.
“이 저택에, 혹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
치욕스럽다.
아델리아는 분명, 이 상황이 치욕스럽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그게 표정으로도 드러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림할 남작에게 죄를 묻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러설까?
물러서야 하나?
그녀의 갈 곳 잃은 동공을 바라보는 그림할은 그 동공의 방황마저도 즐거운 듯 누렸다.
물러나면… 어떻게 되지?
한 번의 물러섬은 곧 수천 번의 물러섬이다.
그녀의 신앙은 그렇다.
“베스 신이시여… 제게 어째서….”
이런 시련을 내렸습니까.
그렇게 물으려던 아델리아는 퍼뜩, 꿈에 나타났던 베스 신의 말씀을 떠올렸다.
–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가거라.
아델리아가 깜빡 잊고 있던 인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를 감춘 남자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그는 창밖의 일에 더 관심을 가졌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지루한 얘기는 끝났나?”
“…….”
파우스트가 아델리아의 질문에 답했다.
“마차를 세고 있었다.”
“…뭐라고요?”
“14채군.”
그 헤아림의 의도를 눈치챈 아델리아가 환희로 가득 차 물었다.
“14채의 마차에게 위협을 받으면 당신은… 곤란한가요?”
“곤란하지.”
“얼마나요?”
“글쎄….”
입꼬리가 올라가는 파우스트.
“궤짝 두 개만큼 곤란하군.”
값이 매겨진 곤란함.
“그 곤란함, 제가 해결할게요.”
“그럼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
파우스트는 아델리아를 떠민다.
“어서 이 지루한 대화를 끝내지 않고.”
아델리아가 벌떡 일어나 그림할에게 악을 지르듯 선언한다.
콰앙-!
“랜포드 그림할! 이종족 차별 및 끔찍한 살해 혐의로 그대를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다! 베스의 천벌을 받으리!”
“……후.”
그림할 남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큭… 크하하하하! 웃기는군. 누가 내게 벌을 내릴 수 있지?”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마차의 인원을 포함한 그림할의 사병들이 저택으로 들이닥쳤다. 머릿수로만 따지면 족히 수 배가 넘는 전력 차이.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린 파우스트가 아델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델리아, 하나 묻지.”
“네.”
“이곳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나?”
“책임…?”
“모든 것은 네가 벌인 일이며 불문에 부친다. 또한, 네가 본 것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 이것을 베스에게 맹세할 수 있나?”
“…맹세해요.”
“그대들도?”
아델리아가 고개를 까딱하자, 심각한 표정의 성기사들이 끄덕였다.
“맹세하지.”
“매… 맹세해요. 어쩌려는….”
대답을 듣고는 검집에서 손을 내려놓는 파우스트.
“누가 내게 죄를 물을 텐가! 신은 여기에 없다!”
파우스트가 아몬에게 말한다.
“아몬.”
“지루한 대화를 끝낼 때가 온 것이냐?”
“그래.”
스르륵…
아몬이 로브의 후드를 벗자, 그녀의 뿔이 드러났다.
“모두 눈을 감아라.”
후우욱…
장내의 모든 불이 꺼졌다.
“아몬이 이곳에 있느니라.”
지상에 강림한 대악마가 양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콰르르르으으으응-!
아까보다 더한 굉음의 천둥이 쳤다.
[아몬이 비무장: 일손을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