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41
제41화
“멀어졌네요.”
“그래요, 다음은 없다는 듯이 서로 멀어졌네요.”
“…성녀님.”
카자리를 비롯하여 알론과 메리, 아델리아 휘하의 성기사들은 모두 말을 꺼내길 망설였다.
스윽…
“모두 잠깐 물러나 있어.”
“알겠습니다.”
지원을 나온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내는 메리. 그녀는 천방지축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입지가 있는 성기사였다. 적어도 병사들을 하대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메리가 슥 눈치를 보더니, 동료 성기사인 카자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카자리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우락부락한 인상을 한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아델리아 님. 이 무지렁이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하나, 그림할 남작의 배후가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군요.”
“배후는… 아직 밝혀진 바 없죠?”
“그림할 남작에게 베스 교에 침투를 지시한 명령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다만, 당대의 그림할은 형편없는 놈이었기에 사건이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된 거고요.”
아델리아와 파우스트는 서로 숨긴 정보가 있었다. 파우스트는 그의 던전과 이름을, 아델리아는 그림할 남작 사건의 뒷배경을.
사실, 랜포드 그림할이 참을성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발톱을 숨기고 오랫동안 베스 교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급사한 전대 가주를 대신해 가문을 물려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새끼 늑대, 발톱을 숨길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그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도 가늠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힘을 조급하게 뽐내고자 했다.
아마, 이번 사건의 소식을 접한 랜포드 그림할의 배후는 지금쯤 화병이 나 쓰러졌을 수도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교단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그림할의 전력을 이번 기회를 통해 손쉽게 분쇄했다고요.”
“그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더불어, 하나의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죠.”
“…그렇겠군요.”
그림할의 배후를 명백히 밝혀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다. 자칫하다간 목숨이 위태로웠을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다시 하나, 랜포드는 얼간이였지만 한 영지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아마 저택에서 벌어진 일이 귀족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끌지도 모르겠군요.”
아델리아는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이곳은 아슬란 제국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에요. 대수림의 이권이 있으니 개입하려 하는 자들이 있겠죠.”
“그 점이 염려됩니다.”
“오히려 그래서 괜찮아요.”
“네?”
“중앙의 힘이 한없이 약화한 지금, 그들의 질서는 사실상 무너져 가고 있어요. 오히려 그림할의 영지를 노리는 자들이 많을수록 그들의 혼란은 심화될 거예요.”
“혼란이 가중될수록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림할이라는 승냥이가 힘을 가진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에요. 후에 승자가 정해질 때쯤, 베스 교가 손을 내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으음…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틀린 말은 아니군요.”
아슬란은 솔로몬의 승천 이후, 썩어가고 있었다. 군벌을 비롯하여 부유한 호족들이 몸을 일으켜 아슬란이라는 퍼석한 케이크를 포크로 마구 찍어 자기 접시로 퍼 담는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델리아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될 거기에 혼란이 벌어진 원인보다 혼란 그 자체에서 제 잇속을 챙기려는 승냥이들이 더 많을 거라는 얘기. 적당히 승냥이들의 머리를 때려 물러나게 하는 건, 베스 교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건은 아마도 염려한 것보다는 수월하게 묻힐 것이다. 베스 교가 정계에 가진 은밀한 힘까지 동원한다면.
“마지막 하나… 이건 말씀 안 드려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폰… 말이군요.”
“맞습니다. 마족이자, 악마를 거느린 자죠.”
“으음….”
“아델리아 님. 저희는 장막의 신 베스를 섬기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앙인입니다. 베스 교의 교리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에 닿아 있더라도, 악마와 손을 잡는 건….”
옆에서 메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못 참고 끼어들었다.
“맞아요! 악마는 예로부터 이 땅에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였는걸요.”
“…….”
“성녀님?”
아델리아가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우리를 짐승의 아가리에서 구원했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악마예요! 악마라고요!? 거래도, 타협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그건 누가 정한 건가요?”
“그야….”
베스 교의 교리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다.
“아슬란의 국교인 루베르 교의 교리… 아닌가요?”
“…맞아요.”
“과거에 베스 교가 무장을 결심한 이유는 다들 아실 테죠.”
“마족… 학살이었죠.”
“네. 그들은 솔로몬의 깃발 아래 모여 무려 솔라리아 대륙의 수천만 마족의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죠. 아슬란의 국민이자 교도인 인간들은 그 모든 학살에 동조하거나 침묵했고요.”
“…….”
“이들이 과연 악마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메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악마는 과연, 선의 반대편에 선 존재일까? 아니, 애초에 누가 선인가?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그날 우리를 구한 건 악마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죠.”
“…맞아요.”
“억지로 그자를 끌어안을 필요는 없어요. 애초에 스스로 품을 빠져나갈 자이니. 다만….”
성녀는 웃었다.
“언제 또, 베스께서 제 꿈에 찾아와 주실지 모르는 일이죠.”
“악마에 대한 얘기는… 그때로 미루는 편이 좋겠군요.”
* * *
리우디라에서 한 차례 보고를 받고, 던전으로 떠났다.
정보원의 말에 의하면, 내가 암시장에 방문한 사이 대수림에 진입한 자들은 극소수였으며 그마저도 별 볼 일 없는 자들이었다.
던전이 습격당했을지 몰라 리우디라에 오는 내내 긴장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마차는 대수림에 진입할 수 없었고, 막대한 무게의 궤짝은 아몬의 기계 손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다.
빌과 모리가 리우디라에 남아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힘이 없는 루시퍼나 금방 지치는 내가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고블린들이나 오크가 마중을 나와준다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그 모습이 노출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 마음에만 담아둬야 했다.
‘던전 밖에서 사망하면, 정말로 죽는 거니까.’
던전 코어가 통제하는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했다.
첩보 활동에 강자만 동행하는 이유가 애초에 그 때문이었으니.
아무튼, 대화가 오고 가지 않으니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경치를 구경하는 것이나 사색뿐이었다.
사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암시장에서 있었던 거래의 내용이나, 성녀와의 접촉 등에 관해 되돌아봐야 했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성녀와의 접촉은 꼭 돌이켜봐야 한다.
그녀와의 만남이, 내가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증명했으니까.
‘베스 교와의 접점이라….’
성녀 아델리아와의 조우?
첩보 활동 중 이런 사건을 경험한 유저는 없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알고 이해하는 범주의 첩보 활동이 아닌 다른 차원의 첩보 활동을 했다는 얘기다. 기껏해야 정보 좀 얻고 던전을 더듬는 추격을 늦추는 정도를 가정했는데, 전혀 의외의 수확이었다.
난 새로 알게 된 정보가… 파멸의 씨앗인지 혹은 새 시대로 향하는 길목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명백히 후자 쪽이다. 특히나 지금은.’
던전 이외에 마석의 수급처가 존재하며, 그 위험성을 고려해 봐도 보상이 크다. 이게 나쁜 일일 리가 없잖은가?
‘물론, 아델리아를 만난 건 운이 좋은 편이겠지만.’
다른 인물, 그러니까… 배신을 할 만한 인물과의 교류였다면 조금 꺼려졌겠지.
‘첩보 활동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어. 가챠 계획도 말이지.’
최대한 자원을 아끼고 아껴, 그나마 확률이 높을 때 전력을 증강한다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초기에 자원을 투입해 첩보 활동의 기반을 쌓고 마석을 긁어 모아 다시 자원을 회수하는 청사진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돌아가면….’
사색의 와중에 어느새, 흔들다리 위에 올라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흔들다리는 비 오는 날 한 차례 붕괴한 적 있지만, 흑요정 여왕 아리엘의 힘으로 수복되었다. 나무와 숲의 힘을 다루는 그녀였기에 이 정도 일은 손짓 한 번에 이뤄졌다.
흔들다리에 왔다는 건, 던전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 안 가,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노을처럼 붉은 머리칼.
멀리서도 보인다.
페넥스, 그녀였다.
“나아리이이이!”
두 손을 모아 외치는 그녀.
“…페넥스, 마중인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 멀리서부터 나리의 냄새가 났거든!”
순식간에 페넥스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녀왔다.”
그녀는 배시시 웃는다.
“응! 어서 와.”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 * *
자리를 비운 동안, 큰 문제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행적을 놓친 모험가 일행 하나가 던전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는 했지만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말하는 아리엘.
‘운이 좋았군.’
심장을 집에 두고 다니면서 문단속을 소홀히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추후에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전력을 늘려야 해.’
이번 일의 교훈은 결국, 전력 증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극한의 쥐어짜기를 통해 원하는 악마를 저격하여 뽑는다는 건, 그만큼 던전이 수월하게 굴러갈 때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내가 던전에 머무는 동안에는 가능한 일이지만, 첩보 활동에 나갔을 시 던전의 전력이 한없이 약해진다.
이 부분을 보강해, 내가 없어도 던전이 굴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은 마석의 수급처도 확인했으니 불안에 떨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 와 있는 곳이 바로 지옥문, 아제룹의 앞이었다.
“그래… 제물이 있다면, 얼마든지.”
오랜만에 찾아왔음에도 평상시와 똑같아 보이는 아제룹의 모습.
‘마석을 얼마나 사용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다.
원하는 것을 뽑을 때까지다.
자, 그럼 원하는 건 무엇인가?
이번 픽업인 악마 포르세우스?
‘그래도 좋지. 성능은 뭐… 필드만 갖춰준다면야.’
바다의 악마 포르세우스.
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수 정도의 필드만 갖춰주면 제 역할을 해내는 악마다.
특히 보스전은 초창기 레메게톤의 악마임에도 상당한 수중 난전을 유도하기에 유저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그러나, 사실 기대도 하지 않는다.
현재 가진 마석을 생각했을 때, 60연차 조금 넘게 가능한 수준. 마석을 다 퍼붓는다면, 악마를 뽑을 수도 있겠지만 적당한 양의 마석은 남겨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악마를 필수적으로 뽑을 건 아니라는 얘기.
‘중요한 건… 새로운 구역인가?’
아리엘이 맡고 있는 숲이 아닌, 새로운 구역. 숲 속성이 아닌 다른 속성의 필드가 필요했다.
아몬이 가진 뇌전 속성이나 페넥스가 가진 화염 속성이 적당하겠지. 필드가 갖춰지면, 악마를 우두머리로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필드의 구성원인 일정 숫자의 사역마와 함정이 필요했다. 저주나 사역마가 착용할 수 있는 쓸 만한 장비가 나와도 되겠지만 솔직히 사역마 쪽이 훨씬 급했다.
‘일단 만들어야 하는 필드에 해당하는 사역마를 모으는 것부터가 강요되니까.’
최소 다섯.
뇌전이든 화염이든 다섯의 사역마가 필요했다.
뭐 이외에 급하다고 할 만한 건….
‘엘리트 사역마가 필요하겠군. 5성급의 인간형.’
첩보 활동에 쓸 만한 인재가 더 필요했다. 현재는 빌과 모리가 있지만, 이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거느리고 있는 외부 병력 대부분을 내 사역마들로 교체하는 게 맞으니까.’
신뢰할 수 없는 외부 집단을 운용하는 건 언젠가는 관둬야 하는 일.
그럼, 대강 정리된 것 같으니…
“시작해라.”
“클클클… 좋아….”
휘오오오오오오…
마석이 가루가 되어 아제룹에게 빨려 들어갔다. 궤짝 하나 분량의 마석이 통째로 사라졌으니, 10연차다.
파츠즈즈즈즛…
10연차를 했을 때, 아제룹의 눈에서 처음으로 흘러나오는 빛은 10번의 뽑기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소환물이 발하는 빛과 동일했다.
츠즈즈즈즛…
“…음?”
찬란한 주황색.
‘…5성이다.’
첫 10연차에, 5성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