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43
제43화
지금 내 옥좌 앞에 모인 이들은 모두 주황색 띠를 감고 태어난 아이들이다.
그래도 나름 첫걸음마를 뗀 이 던전에서도 희귀하기 그지없는 5성급 자원. 각 필드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해도 충분한 녀석들이다.
내 시선이 처음으로 꽂힌 곳은 오늘 처음 뽑은 5성급 사역마인 유적 수호자였다.
– 구우우우우…
녀석은 몸을 제대로 굽히지 못하겠는지 양팔로 바닥을 지지하고 서 있었다. 이족보행과 사족보행을 오가는 형태인 것 같다.
‘이 녀석은 당분간 이대로 둬야겠군.’
대지 필드가 약식이라도 갖춰지지 않는 이상, 녀석의 최대 쓸모는 아마도 던전을 가꾸는 일이겠지. 건축은 던전 코어가 가진 마력이 알아서 해내겠지만, 지반을 다지는 일이나 구조를 변경하는 일은 이 녀석이 가장 잘 해낼 것이다.
비슷한 근력과 덩치를 가진 사역마로는 숲 트롤이 있지만…
‘그 녀석은 말귀를 못 알아먹거든.’
그나마 동료를 해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어서 다행이지, 에휴.
아무튼, 이 녀석이 활약하는 건 좀 더 나중이 될 거다.
“네게 모암이라는 이름을 주마.”
– 구우우우우…
만족했다는 거야 불만이라는 거야?
쿵…
쿵…
이목구비 쪽 암석이 웃는 듯했으니 뭐 좋은 거겠지.
‘다음으로는….’
오만함인지, 권태감인지, 혹은 둘 다일지. 기묘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는 여인. 이 여성은 평범…하지는 않은, 그러니까 매우 아름다운 외모의 인간이다.
“이름을 원하나?”
“내게 이름을 줄 거야?”
뭐 적당한 이름이 있을까?
이름을 주려는 건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날 위해서다. 앞으로 잔뜩 늘어날 사역마들을 야, 너라고 부를 순 없을 테니까.
“고향이 어디지?”
“루비토리엄, 시골 촌구석이지만 나쁘지 않았어. 아슬란의 군대가 점령하기 전까지는.”
늑대인간들 역시 솔로몬의 대륙 정벌에 희생당한 대표적인 종족이다. 늑대인간은 혈통의 힘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세력의 균형을 이뤘었는데, 솔로몬이 공평하게 두 파벌 모두 밀어버렸다.
때문에, 솔라리아 대륙에 남은 늑대인간 자체가 극소수라는 설정. 흑요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루비, 이제부터 너의 이름이다.”
“루비라….”
히죽 웃는 그녀.
이름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고마워, 루비! 좋은 이름이잖아? 앞으로 난 뭘 하면 돼?”
“정해진 날짜에 널 데리러 올 인원이 있을 거다. 그들을 따라가면 된다.”
“그게 끝?”
“앞으로 할 일은 그들이 일러줄 것이나,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스스로 생각해야만 하겠지.”
소풍 가는 걸로 생각할 걸 우려해 조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계약한 이유가 없으니.”
“도움이 된다라… 좋아! 보여주지.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루비는 전반적으로 페넥스와 비슷한 무투파 성격인 것 같은데….
‘둘이 붙여놓으면 안 되겠군.’
페넥스는 나 혹은 루시퍼와, 루비는 빌 혹은 모리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시너지란 건 그런 거니까.
루비가 터벅터벅 걸어가 좌우로 늘어선 사역마들 무리 끝에 가 섰다.
“호오… 으음!”
그녀는 이러한 의식 자체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사역마가 된다는 건 새로운 탄생이나 마찬가지니,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
‘자 그럼 다음은….’
화르르르륵…
순간적으로 주변에 불길이 치솟았다가 누군가의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킥킥… 킥키킥….”
[★★★★★ 광기의 유랑극단 단장을 소환합니다.]……
전형적인 광대와 닮아있는 사역마.
얼굴은 하얗게 분칠을 해두었지만, 그가 발산하는 불길이 그 얼굴을 지나칠 때마다 화상을 입은 불탄 얼굴로 뒤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
좀 기분 나쁜 모습에, 의사소통도 원활하진 않지만 대체로 내 말귀는 알아먹는 편이다.
“푸힉! 푸히히히히힉!”
…웃는 거밖에 할 줄 모르냐고 너.
하긴, 예전에도 대화 스크립트가 그것밖에 없었던 것 같았지만.
이 녀석은 굉장히 특수한 사역마다. 꿈, 그리고 화염, 거기에 정신 속성을 가진 녀석.
초반부에 이 녀석을 손에 넣었을 때, 거기다 셋 중 하나라도 필드를 구축할 수 있을 때는 무조건 집어넣는 게 좋다.
이 녀석은… 그러니까, 우두머리 역할도 할 수 없고 필드 대부분의 사역마를 치워버리고 혼자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다. 쉽게 설명하면, 필드로 공급되는 마력은 잔뜩 가로채는 주제에 우두머리 역할은 할 수 없는 존재.
이건 단점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장점이기도 했다.
‘특히나, 필드 구축에 필요한 일정량의 사역마가 부족한 경우에 말이지.’
…이 녀석이 곧 필드다.
그건 유랑극단 단장이 가진 특수한 지속 효과와 능력 때문이다. 당장에 줄줄이 나열하는 것보단, 직접 체감하는 편이 빠르겠지.
‘덕분에 페넥스에게 필드를 만들어 줄 수 있게 됐군.’
안 그래도 제 스승의 작약 대신 크로셀의 호수를 선택했으니 무시 받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합류한 악마인 그녀에게 제대로 된 구역 하나 내어주지 않는 건 명백한 차별이라 느낄 것이다.
페넥스는 강하다.
앞으로는 더욱 강해지겠지. 그러나 그걸 위해선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적당한 채찍질이다.
악마는 모두 결핍되어 있다. 페넥스는 늘 버려져 온 악마기에 누군가의 인정을 바랐으며, 아몬의 경우엔 대악마라는 지위와 걸맞지 않은 이상한 결핍이 있었다.
내가 파우스트로서 그들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해선 그 결핍을 이용해야 한다.
뭐,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라는 얘기다. 우선 이 사역마부터 자리로 돌아가게 해야겠지.
“산토, 너의 이름이다.”
“후히히히히히히!”
…기분 나쁜 녀석.
화르륵…
유랑극단 단장 산토는 이상한 화염 공에 올라타 걸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
“내게도 이름을 다오.”
등이 굽었지만 덩치가 상당한 자.
매부리코에 머리에는 녹이 슨 왕관을 쓰고 바닥을 쓸고 다니는 왕의 망토를 두른 녀석.
[★★★★★ 고블린 킹을 소환합니다.]……
숲 속성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고블린 킹이다.
숲 속성은 나름 꽤 탄탄하게 쌓아 올리기도 했고 현재 우두머리도 이미 존재하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숲 속성의 우두머리 하나가 늘어난 것은 그다지 반길 상황은 아니었다.
효율을 따져보면 다른 속성의 우두머리가 차라리 나을 테니깐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우두머리를 필드에 박아두면 새롭게 뽑는 우두머리는 전부 필요 없는 거 아닌가? 라는.
결과만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레메게톤에는 히든 보스라는 시스템이 있다. 침입자가 별다른 문제 행동을 하지 않고 정해진 길만을 따라간다면 절대로 히든 보스를 마주치지 않지만,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거나 필드를 샅샅이 뒤진다면 히든 보스를 종종 마주한다.
‘뭐… 만약 플레이어가 침입자였다면 일부러 히든 보스를 만나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던전의 씨알 한 알까지 훑어 먹으려는 건 침입자의 오래된 전통이니까, 나름의 개연성이 있다.
덕분에 필드에 여러 보스가 존재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정규 루트로만 간다면 만나지 않는 게 히든 보스들이고 이들은 대부분 던전 공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말이다.
“쟈킴.”
“쟈킴? 쟈킴이라….”
고블린 킹이 고개를 꾸벅꾸벅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은 당분간 히든 보스로서 숲 필드에 존재하겠지.
“이보시게, 계약자. 그렇다면 그대의 이름은? 알려줄 수 있나?”
“파우스트다.”
“파우스트… 좋군. 파우스트,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 되지?”
글쎄… 지금은…
“당장엔 없다.”
“…그런가.”
그래, 이만 자리로 돌아가.
……
“파우스트, 한 가지 청이 있네.”
“…뭐?”
이건, 놀라움이다.
명령보다도 우선하여 의사를 말하다니.
“…….”
루시퍼 역시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싸늘한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청이라… 말해보도록.”
“내게… 증명할 기회를 주게.”
“…증명?”
“그래, 증명. 내가 파우스트 그대에게 쓸모 있는 존재라는 증명 말이야.”
“…재밌군. 계속해 봐.”
“사역마 계약은 굴종이나 마찬가지지. 계약자의 의사에 반할 수 없으니. 그런데도 강자가 사역마 계약을 굳이 자진하여 맺는 이유를 아는가?”
사역마 계약을 맺는 존재들은 이미 죽은 영혼을 비롯하여 솔라리아 대륙을 살아가는 생명도 있다.
흑요정 여왕 아리엘이나 암살자 빌 같은 경우가 살아있는 상태로 사역마 계약에 응한 대표적인 예다.
파우스트로서 그들을 지옥문의 계약에 얽매이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돌아갈 고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정복 전쟁에 휩쓸려 갈 곳 잃은 자들이니….
절뚝…
고블린 킹이 한쪽 다리를 절뚝였다.
그는 절름발이다.
“재도약일세. 이전의 나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계약자에게 쓸모 있는 존재로 활약한다면 말이지.”
“흐음….”
요컨대, 그는 내게 힘을 제공하고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성장하고 싶은 거다.
‘틀린 말은 아니야. 자주 쓰는 사역마는 던전의 주인인 내가 재화를 퍼먹여 성장시키니.’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들은 야생에 머무를 때보다 훨씬 강해진다.
“내게… 기회를 다오. 나는 분명 쓸모가 있다.”
슬쩍, 아리엘과 시선을 교차했다.
아리엘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 치맛자락을 살짝 끌어올리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뜻대로 하세요. 제가 숲을 돌볼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클클… 아량이 넓은 여인이로군.”
고블린 킹의 번들거리는 눈이 아리엘에게 감사를 표했다.
끄덕…
“좋다, 다음 전투를 기대하지. 쟈킴.”
“흐흐흐….”
“다만 다음부터는 나에 대한 태도를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
“네 자리를 대체할 녀석들은 많으니 말이다.”
없다. 아니 있어도 절대 많지 않다.
그래도 거드름을 피우며 내 앞에 서는 모습을 보는 게, 영 거슬렸다.
내 말에 쟈킴이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지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를 제외한 사역마들은 모두 내게 복종하고 있다.
“각별하게… 조심하겠나이다.”
* * *
“그는 위험한 자예요.”
사역마들 대부분이 물러난 자리에서 아리엘이 내게 말했다.
“그를 아나?”
“사역마가 되기 전에, 소식을 접한 적이 있거든요.”
“솔라리아가 그렇게 좁았었나?”
“아뇨, 흑요정 대부분은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 솔라리아 전역의 숲에 우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몇 곳 없기 때문이에요.”
“위험하다라…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쟈킴…이라 이름 붙여진 그자는 처음엔 그저 작은 고블린 중 하나였어요. 다른 고블린과의 차이점이라면… 욕심이 분에 넘치게 많았다는 것.”
“그래 보이더군.”
“여태껏 그를 품었던 모든 족장은 그에게 살해당했어요.”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래, 고블린 왕 시해자 뭐 이런 거겠군.
“다리는 왜 절게 된 거지?”
“그가 여태 행동한 그대로, 되돌려 받은 거라고 들었어요. 떠돌이가 된 지 꽤 오래되었을 거예요.”
“흐음… 알았다, 물러가 보도록.”
“예.”
아리엘이 자리를 뜨자, 개구쟁이 두 녀석이 나타났다.
“쟈킴이 누구야?”
“고블린 있잖아. 큰 놈!”
“아하!”
한 녀석은 당연히 페넥스고 다른 한 녀석은 늑대인간 루비다.
둘은 어느새 통했는지 서로 가까워져 있었다.
“나리! 걱정 마! 수상하면 내가 패줄게!”
“좋지! 나도 팬다!”
이 황당무계한 발언에 내가 되돌려준 것은 싸늘한 눈길이다.
“…….”
“…그만 밥 먹으러 갈까?”
“그, 그럴까?”
심처의 문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둘.
녀석들 대신이라 해야 할까, 둘이 빠져나가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아몬?”
“아, 파우스트여.”
걸어오던 그대로 반쯤 몸을 돌려 다시 나가는 아몬.
“따라오거라, 재밌는 것을 보여줄 테니.”
…재밌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