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44
제44화
저벅…
저벅…
아몬을 따라가는 와중에도 반신반의했다.
‘재밌는 걸 보여준다니….’
외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아몬은 그간 두문불출했다. 좀처럼 모습을 비추지도 않았고, 식사는 고블린을 시켜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거처로 주문했다.
아니, 이젠 거처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했다. 남는 공간에 만들어진 그녀의 거처는 돌아온 즉시 해체 분해되어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했다.
[아몬의 비밀 연구소 건축을 완료합니다.] [아몬의 비밀 연구소에 아몬을 투입할 경우, 모든 생산 및 연구 시설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아몬의 비밀 연구소가 가동하면 일정 확률로 발명품이 탄생합니다. 발명품은 사역마, 함정, 저주 부적 등 다양합니다.] [발명품은 획기적인 발명품, 기막힌 발명품, 놀라운 발명품, 쓰레기로 분류됩니다.] [Tip: 특정 사역마를 보유할 시 아몬의 비밀 연구소와 같은 특수 시설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아몬의 비밀 연구소.
대악마 아몬이 인권캐 아닌 인권캐라고 불렸던 이유다.
너무 비싼 인권이긴 했으나, 이 연구소 하나만으로도 본전을 뽑는다는 말이 허다했으니….
‘아몬 본인의 무력을 제외하고서라도 말이지.’
이 비밀 연구소는 특수 시설 중에서도 꽤 좋은 편에 속했는데, 일단 지형 조건을 타지 않았다. 뭐, 지열이 흐르는 곳이나 자원이 존재하는 곳 등의 조건이 달리기 마련인 특수 시설을 그냥 공터에 냅다 박아버리는 게 가능했다.
당연히 필드에도 속할 수 있고 실제로 번개 필드 구축을 고민하는 지금, 그녀의 연구소가 딱 새 필드가 들어설 그 위치에 있었다.
기이잉-
기이이이잉-
아몬의 연구소에 방문하자, 그녀의 기계 손들이 이상한 빛을 뿜어내며 날 탐문했다.
“이거 어떻게 못 하나?”
“아, 내버려 두도록. 이번 방문까지만 등록해 두면 설령 네 도플갱어가 와도 가려낼 수 있으니까.”
“이 기계 손들은 모두 어디서 난 거지?”
“궁금한 것도 많구나. 그것까지 네게 말해줄 거라 여긴 것이냐?”
아, 그러고 보니 이건 아몬의 캐릭터 스토리와 연관된 부분이지. 페넥스의 캐릭터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친밀도를 비롯한 캐릭터 성장이 이뤄져야 공개되는 캐릭터의 정보다.
…솔직히 당장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건넨 것뿐인 질문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참, 그건 알고 있느냐?”
“뭘 말이지?”
“페넥스, 그 식충이 말이다.”
“…식충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악마에게 이보다 나은 호칭이 있을 것 같으냐? 나름 자비로운 호칭이라 생각하느니라.”
“흐음….”
아몬은 철저히 능력주의인 것 같기도.
페넥스가 식충이가 아니라 주장하기엔, 대체제로 쓸 수 있는 다른 악마들을 떠올려 봤을 때 현재의 그녀는… 식충이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너와 나눈 얘기가 생각나 자세히 살펴봤더니, 아직 이름조차 계승하지 못했더구나.”
“…….”
“진명을 계승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알고 있었느냐?”
알고 있었다.
애초에 페넥스에게 계속해서 실패를 안겨주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알고 있었군. 잔인한 주인이로다.”
“잔인하다?”
“차라리 당장 그녀를 해방하는 건 어떤가? 네 취향이 애 보기가 아니라면 말이지.”
아몬이 뒤돌아서 설명했다.
“악마의 힘은 대부분 이름에서 온다. 지옥에 가득한 악마 중에서 진명에 힘이 담긴 건 72명뿐. 때문에 그 72개의 이름은 강하다.”
아몬의 말대로다.
레메게톤에 이름이 수록된 악마들은 모두 그 이름에 힘이 있다.
아마도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기억되며 쌓아온 그 힘이 이름에 남은 건 아닐까… 아직 풀리지 않은 설정이라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때문에, 녀석은 반쪽짜리다. 아직 제 스승에게서 이름조차 넘겨받지 못했으니.”
아니, 틀렸다.
이름은 분명 페넥스에게 넘어갔다.
‘아직 그 이름을 짊어지지 못한 것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고민하는 중이다. 과연 후에 내가 생각한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게임에서 알고 있던 지식 일부가 현실에서 달라졌듯 이것 역시 그렇게 달라진 부분이라면…
“되었다. 그보다… 이런 얘기나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니라. 네 던전 코어에 관한 얘기부터 나누도록 하자꾸나.”
“영혼에 관한 얘기군.”
이미 한차례 얘기를 나눴던 부분이다. 자세히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겠지.
“일전에 꽤 쓸 만한 영혼을 거두긴 했겠지만, 갈 길이 멀구나. 네가 불안정한 녀석이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물론.”
“넌 조각나있다. 정확히는 균형이 맞지 않아 깨져버린 상태다.”
체력이 저질인 것도, 던전 코어와 공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겠지.
“이대로라면 던전 코어와 연결이 끊어지는 즉시, 네 숨이 다할 것이다.”
“던전 코어가 무사하면 괜찮다는 건가?”
“쯧… 던전 코어라는 건 이 땅의 모두가 탐내는 물질이니, 이곳도 언젠가 발 디딜 틈 없이 침입자들로 가득할 것이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지?”
“더 많은 영혼, 더 강대한 영혼이 필요하니… 더 많은 침입자들을 불러와야 할 것이다. 네 던전 코어가 진정한 강자들에게 노려지기 전까지 말이다.”
“역설적이군. 강자들에게 노려지기 전에 강자들을 불러와야 한다는 건.”
언제쯤, 누군가의 영혼을 흡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꺼려지나?”
“…이 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지 생각 중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생각일지니.”
“어째서지?”
“모든 존재는 다른 생명을 짓밟고 서 있느니라. 공존만이 삶의 방식이라는 건 너무도 투박한 생각이다. 사자는 태어나면서 죽는 날까지 다른 생명의 고기를 먹지.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하느냐?”
“난 사자가 아니니까.”
“사자로 살기로 결심한 거 아니었나?”
아.
이 녀석…
아몬이 히죽 웃었다.
“넌 저택에서 이미 수십의 생명이 내 손에 으스러지는 걸 방관했다. 아무런 감정적인 동요가 없었지. 기억하느냐?”
…그랬었지.
이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인가?
“사자로 살기로 했다면, 사자로 살도록 하여라. 어설프게 토끼의 꿈을 꾸며 살지 말고.”
아몬의 말이 맞다.
어설프게 연민을 품을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제안이 있다.”
“제안?”
“얼마 전, 이 일대의 지형을 조사했느니라. 꽤 재밌는 수확이 있었지.”
“수확이라… 무엇이지?”
광물? 마석?
“공간 균열이다.”
“공간 균열이라면….”
아, 설마?
“앞으로 이 썩은 뿌리에서 솔라리아 대륙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말이지.”
일명 차원문이다.
던전의 핵심 시설 중 하나인 이건, 건설되면 대륙 곳곳에 썩은 뿌리로 통하는 차원문을 연다.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이 던전의 주인이었던 자가 설정한 좌표로만 이어진다.
“공간 균열을 이용한다면, 침입자를 유혹해 네 둥지로 이끄는 것도 가능하다.”
“앞서 한 얘기는 그 때문이겠군.”
“눈치가 없지는 않구나. 지금 네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다. 다행히 기반 시설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위치니라. 다만….”
당연히 문제가 있겠지.
아니었으면,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뭔가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느니라.”
…찾았다.
‘두 번째 구역 보스.’
절름발이 아그네아라는 거대한 거미를 사냥한 지도 꽤 되었다.
녀석의 영토는 대부분 흡수했지만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던전과 두 번째 구역 보스의 영토가 맞닿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지금까지는 다행히 별일이 없었지만, 공간 균열을 원한다면 이제는 녀석과 부딪혀야만 했다.
“…제거해야겠군.”
썩은 뿌리의 2차 대청소, 시작이다.
* * *
아그네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제 던전의 전력은 크게 올라왔다.
던전의 영역을 넓히고 기반 시설을 돌려가며 얻어낸 성장 재화는 사역마들을 성장시켰고 밖에서 얻은 마석은 다양하고 질 좋은 사역마들을 충원했다.
믿을 거라고는 1레벨의 페넥스밖에 없던 아그네아 때와는 천지 차이.
토벌대는 침입자의 파티 구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입맛대로 골라 넣어볼까.’
일단 페넥스.
이 녀석은 넣고 본다.
‘본전은 뽑아야 할 거 아니야….’
미래를 위해 적금 붓듯 페넥스에게 성장 재화를 투입하고 있으니, 그녀가 강세를 보이는 토벌에서라도 알차게 써먹어야겠지.
“다음은….”
솔직히 누굴 데려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페넥스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도 조금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을 꼽자면….
‘쟈킴… 그 녀석을 데려가 볼까?’
아, 아니다.
이참에 새로 얻은 5성급 사역마들을 산토 빼고 싸그리 집어넣어야겠다.
광기의 유랑극단 단장 산토를 굳이 빼는 이유는, 이 녀석은 토벌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돌발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
애초에 사역마 특성부터가 토벌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튼, 산토를 제외한 3명의 5성급 사역마와 페넥스를 심처의 옥좌 앞에 불러들였다.
“알아들었겠지?”
“응, 나리! 큰 녀석 찾아서 치우면 되는 거잖아.”
“…정확하다.”
– 구우우우…
“맡겨주시길, 이 쟈킴이 해내어 보이겠나이다.”
“따분한데 잘 됐어. 다녀올게.”
“좋아! 루비, 나만 따라와!”
“좋지, 페넥스! 같이 패주자!”
…빨리 저 둘을 떨어트려 놔야 하는데.
유적 수호자 모암, 늑대인간 루비, 고블린 킹 쟈킴과 부활의 악마 페넥스로 이루어진 토벌대가 이렇게 출발했다.
공간 균열을 틀어막고 있는 존재를 토벌하란 명 외의 모든 세부사항은 그들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끔 했으니, 이제 나는 지켜볼 뿐이다.
토벌대가 어두운 곳을 향해 점점 멀어졌다. 난 심처의 환영으로 그들의 모습을 뒤쫓았다.
* * *
– 구우우우우…
– 구우우우…
“자꾸 뭐라고 하는데, 모암 녀석?”
“자기 몸에 횃불 꽂지 말라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
“횃불을 가리키잖아. 그보다 횃불 들기로 한 거 쟈킴 아니야? 쟈킴!”
“무슨 일인가?”
“횃불 네가 들기로 했잖아!”
“클클클… 닥치거라, 어찌 됐든 앞만 보이면 되는 것 아닌가?”
시작부터 싸우는 넷.
페넥스가 하품하며 말했다.
“싸우면 못 써.”
움찔….
페넥스가 별로 기운을 싣지 않았는데도, 악마의 말에는 기민하게 반응하는 쟈킴.
“생각해 보니, 제가 드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심려를 끼칠 생각은 아니었지요.”
“그것 봐! …응?”
갑작스럽게 느껴진 기척을 루비가 경고했다.
“…움직임!”
파밧!
이미 대비하고 있던 페넥스를 필두로 다른 셋 또한 순식간에 대비를 마쳤다.
키이이이이-!
발갛게 오염된 쥐가 루비를 노리고 달려들자, 그녀가 팔을 휘둘렀다.
까드득…
늑대의 털로 뒤덮인 손이 발톱의 잔영을 뿌리자 그 결대로 쥐의 육체가 조각났다.
– 구우우우우…
으지지지직-!
모암이 팔을 슬쩍 옮기자, 머리가 반쯤 부서진 쥐가 아예 고깃덩이가 되었다.
“다들 앞을 보시게.”
“…많기도 해라.”
쟈킴의 말에 루비가 화답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 수십 개가 번뜩였다.
지루한 공방이 예상되는 찰나…
[페넥스가 고통 분담을 사용합니다.] [페넥스가 부채꼴 형태의 화염파를 발사합니다.] [화염파는 전투력의 200%를 범위 내의 적에게 나누어 입힙니다.]화르르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아-!
페넥스의 검 끝에서 화염파가 뿜어나와 적들의 진형을 그야말로 초토화했다.
일전이었다면 서서히 체력을 갉아먹는 게 전부였을 테지만, 성장한 그녀였기에 화염파의 기본 데미지 자체가 던전의 중립 몬스터 정도는 순식간에 고열로 녹여버릴 정도가 된 것이다.
“…와하.”
– 구우우우우…
“과연… 악마의 힘이군요. 눈알이 타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페넥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해맑게 웃으며 뒤돌았다.
“갈까?”
휙-!
쟈킴이 흉악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