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ho draws RAW novel - Chapter 54
제54화
휘오오오…
“던전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마난 님.”
“이 일에 더러운 오물이 묻은 것 같구나.”
혈교의 사자 마난이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눌렀다.
여기서 망설이며 물러서느냐,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느냐.
그에겐 앞으로의 모든 선택이 중요했다. 혈교를 대신하여 이곳에 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일단은 물러서는 게 어떻습니까?”
“…망설이지 않기 위해 사자가 이곳에 온 것이니.”
“…맞습니다.”
“본교는 거스를 수 없는 강물이 될지어다. 첫 행보부터 뒷걸음질이라면 웃음거리가 되겠지.”
도도히 나아가리다.
그것이 혈교의 가르침이니.
“주변 정찰이 우선이겠군요.”
“거대한 숲으로 보입니다.”
파아앗-!
순식간에 불쾌한 3인조 중 1인인 백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주변을 관찰했다.
“온 숲이 나무로 가득합니다. 다만… 저기 뭔가 보이는군요.”
“무엇이 보이더냐.”
흐으읍…!
백이 기를 눈에 모아 멀리 떨어진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흙더미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좀 더 가까이 가봐야 알 것 같군요.”
“흙더미? 흐음… 알겠다.”
혈영강시 2구를 필두로 진영을 유지한 채 이동하는 무리. 이곳에 왔던 다른 이들처럼 몇 시간이 지나도록 걷기만 하자 백이 말했다.
“사자님, 기이합니다.”
“나도 느끼고 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밤낮이 밖과 다른 듯합니다.”
“…….”
“잠시 휴식을 취하시죠.”
“그러자꾸나.”
마난이 이곳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만일 이 던전엔 아무것도 없고 누군가의 계략으로 이곳에 갇힌 거라면?
사실, 잠시 갇힌다고 하여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이곳에 있는 강시는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 없었고 무인들 역시 수중에 있는 식량만으로 족히 몇 달은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기에 달통한 자들이다.
화르륵…
순식간에 불을 피워내고 밤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휘오오…
칭으로부터 이어진 붉은 기운이 끊어지지 않았다. 분명, 이 앞에 칭을 죽인 거대한 늑대가 있을 것이다.
이 연결 고리가 있는 이상 길을 잃지 않을 테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두 듣거라.”
“예.”
“말씀하십시오.”
마난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해가 뜨면 출발한다. 마지막 정비일 것이니, 기운을 가다듬어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라.”
“예.”
“저… 마난 님.”
경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확인이 되지 않은 던전은 서방인들도 답파를 꺼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전력이 강성하기는 하나….”
“나약한 소리. 혀를 삶아줘야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자리엘 남작에게는 뭐라 설명할 생각이지?”
“그건….”
“칭이 밤중에 자살이라도 했다고 말할 셈이냐? 칭은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리고 본교가 그것을 묵과했다고 알려졌다가는 그 즉시 서방에서 발을 빼야 할 것이다.”
아마도, 동방에서의 평가 역시 내려갈 것이다. 아무도 혈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미래가 그려진다.
“문제는 그 즉시 처리한다. 그걸 위해 내가 온 것이다.”
“예.”
“…쓸모없는 것들.”
백과 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난은 이들에게 한소리를 한 후, 잠에 빠졌다. 아마도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을 앞둔 탓인지 몸이 느슨해진 상태인 걸까, 꿈까지 꾸다니.
– 마난, 네 능력을 증명하길 바란다.
뒤돌아선 여인의 목소리가 심장을 떨리게 했다.
‘예, 교주님.’
– 본교가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웅지를 펼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하라.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충심을 다하여 본교의 숙원을….’
– 키히히히…
‘…교주님.’
– 키히히히히히히히히!
갑자기 미칠 듯한 광소와 함께 여인이 뒤돌았다.
분칠한 광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뭔가를 건넸다.
초대장이다.
[산토의 기본 능력: 유랑극단이 찾아왔어요! 가 발동합니다.] [광기의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12시간의 제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에 초대에 응하기 전까지 각종 정신 피해에 노출되며 이 효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집니다.] [불과 가까이할수록, 정신 피해 효과가 강해집니다.]“크아아앗!”
누군가의 비명이 잠을 깨웠다.
눈을 뜬 셋이 시선을 교차했다.
아마도 모두 같은 꿈을 꾼 듯했다.
“칭이… 칭이 꿈에 나왔습니다.”
“정신 차려라, 환각이다.”
“그, 그런… 허억… 너무도 생생하여 그만….”
“기이한 힘이로군.”
차분한 듯 보이는 마난 역시도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몽술일까요?”
“다르다. 저주도 아니고 술법도 아니로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마난.
“일종의 정신 충격과도 같은 현상이군. 아마 이 분야에 정통한 자가 있을 법하지만, 그리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리 확신하십니까?”
“규칙을 명시한 힘이다. 이런 힘은 그 효과가 강한 대신 규칙을 준수하기만 하면 대부분 큰 탈 없이 벗어날 수 있다.”
“…적들은 그것을 방해하겠군요.”
피식…
마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무리겠지요, 교의 힘은 무적입니다.”
“본교의 행사를 방해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우리가 있다.”
혈교의 무리는 이전까지의 모험자들과는 달리, 섣불리 이동하지 않고 던전 안의 시간이 낮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들로서는 급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적은 이곳에 있고, 그들을 해치울 무력은 차고 넘쳤으니 말이다.
스으윽…
낮이 되어, 이동을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보였던 흙더미가 토성이었다는 걸 알아챈 순간부터 일행은 긴장을 유지했다.
밤이었다면 토성의 고지대가 위협적으로 다가왔겠지만, 시야가 훤한 낮에는 크게 압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 크르르륵…
“고블린이군요.”
“금방 정리를… 으윽….”
머릿속으로 유랑극단 단장 산토의 환영이 스며들었다.
“…골치 아프군. 강시들을 먼저 보내도록 하지.”
파아아앗-!
두 구의 강시가 토성으로 뛰어올랐다. 이렇게 단박에 접근할 줄은 생각지 못했는지, 고블린들이 당황하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부우웅-!
까아아아앙-!
철퇴에 얻어맞은 칭의 강시는 마치 피부가 쇳덩이인 것처럼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도리어 손을 밀치듯이 내밀었다.
파아아아앙-!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이 우수수 떠밀려 갔다. 그중 앞에 있던 몇은 목숨을 잃었고.
“저희들도 나서겠습니다.”
“그래, 방심하지 말라.”
“예!”
백과 경이 토성에 합류해 기를 흩뿌렸다.
[백이 쌍룡타를 사용합니다.] [일시에 두 번을 타격하며, 대상이 생명체라면 내부에 출혈을 일으킵니다.]퍼벅-!
– 킥…
[경이 파문각을 사용합니다.] [발로 지면을 내리찍어 넓은 범위의 적에게 공격력의 80%의 피해를 주며 건물에는 500%의 추가 피해를 줍니다.]콰아아아아앙-!
경의 진각에 토성의 한 축이 무너져 내렸다.
손짓과 발짓만으로 적들을 제압한다는 동방의 무인들에 대한 소문은 이곳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이들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보기 흉한 생물들이군.”
“전부 쳐 죽이겠다!”
콰아아앙-!
그때였다.
경이 또 토성의 한 축을 무너트렸을 때, 소름이 끼쳐온 것은.
눈.
토성의 성곽 뒤에 숨어 있던 커다란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멈칫하는 사이, 그에게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곤봉. 여지없이 직격했다.
“흐으읍!”
콰지이이익-!
기를 집중시켜 몸을 보호하자, 도리어 부러지는 곤봉.
경을 공격한 건 트롤이었다. 적의 정체를 확인한 백이 경에게 이어질 후속 공격을 방비하고자 트롤에게 뛰어들었다.
“죽일!”
팟-!
그리고 경의 반대편에서 백과 교차하며 날 듯이 뛰어오는 그림자.
“죽어라, 인가아아안!”
본인의 거구만큼 커다란 둔기를 휘두르며 날아오는 고블린 킹 쟈킴이었다.
[쟈킴이 장대한 기습을 사용합니다.] [대상이 쟈킴을 인식한 후 5초가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형 무기를 착용한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게 공격력의 330%에 해당하는 물리 피해를 줍니다. 2배로 증가된 치명타 확률을 가지며 치명타 피해가 50% 증가합니다.]“안 돼, 경!”
“이런….”
아직 트롤의 일격으로 받은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경. 꼼짝없이 쟈킴의 둔기에 절명할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파박-!
그의 앞으로 뛰어드는 칭의 강시.
콰아아아아아앙-!
그가 경을 대신해 쟈킴의 둔기에 짓이겨졌다.
“이… 이….”
뻐어어억-!
경이 쟈킴의 복부를 발로 차 밑으로 추락하게 했다.
“커헉….”
쿠우우웅…
바닥으로 추락한 쟈킴.
[쟈킴의 기본 능력: 약자의 싸움이 발동합니다.] [최대 생명력의 절반을 잃은 경우, 피해 감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단 한 번의 공격으로, 약자의 싸움이 발동했으니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쿠우우우웅-!
백이 트롤의 목을 부러트린 후 유유히 쟈킴의 곁에 내려섰다. 쟈킴은 바닥에 누운 채로 키득거렸다.
“킥킥킥… 인간 놈들… 여기가 네놈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칭을 죽인 자가 이곳에 있나?”
퉤에엣-!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는 쟈킴.
“내 다리만 멀쩡했다면 네놈들 모두 바로 이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허풍이 심하구나.”
마난이 손을 휘저었다.
퍼어어억-!
백이 쟈킴의 가슴을 강타했다.
“끄윽….”
주르륵…
검은 피가 흘러내리며 쟈킴이 재생의 화원으로 되돌아갔다.
다소의 위기는 있었지만, 엄청난 속도로 숲 필드를 클리어한 마난 일행.
휘오오오…
마난의 허리춤에 있는 붉은 호리병에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칭의 강시를 되살렸다.
빠직…
호리병 하나가 부서지고, 허리춤에 남은 건 3개의 호리병뿐.
“너희 둘의 방심 때문에 소중한 혈청이 이제 셋밖에 남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크윽….”
“주의해라, 강시인 칭이 이 이상 목숨을 잃으면 온전하게 부활하지 못하고 백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마난이 무너진 토성을 흘겨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악몽령도 그렇거니와 이 녀석 역시… 밖에서는 보기 드문 강자인 듯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 * *
대단하다.
마난을 포함한 혈교 일행의 무력이?
아니, 바로 쟈킴의 분전이다.
“쟈킴이 예상보다 오래 버텼군.”
오래 버틴 것으로 모자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혈청까지 사용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다니. 굉장히 쓸모가 많은 녀석이다.
– 너희 둘의 방심 때문에 소중한 혈청이 이제 셋밖에 남지 않았다.
마난이 한 말을 곱씹으며 앞으로의 상황을 그렸다.
혈청은 마난처럼 육대 사자 이상 가는 자가 보유한 혈교의 보물이고, 많은 원념과 희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녀석의 허리춤에 남아있는 혈청은 세 개. 말하자면 저 무리의 예비 목숨 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혈영강시는 강시가 된다고 하여 본래의 능력이나 전투 지능이 사라지는 게 아니기에 더더욱 까다롭고.
‘언데드 아닌 언데드라고 해야 할까… 음.’
아무튼, 그런 혈청을 저만한 무력을 가진 무리를 상대로 하나라도 소모하게 만든 것 자체가 훌륭했다.
‘문제는 그보다 마난이군….’
혈교의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나는 그 끝을 알지 못한다. 애초에 혈교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법하다가 조사단을 피해 먼 길을 떠나는 게 원작의 흐름이었으니까.
아마 한참 뒤에는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 전에 서버가 종료됐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이후에 원작의 첩보 활동을 통해 알려진 혈교의 혈청이나 마난 그리고 혈청에 대한 정보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속도라면… 확실히 위협적이군.’
칼 쿠르소 이후에 던전을 찾은 자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들.
에피소드 2막의 보스인 불쾌한 3인조, 그리고 이후의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혈교의 육대 사자 마난이 힘을 합해 돌파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던전을 방문한 이들 중 가장 빠른 속도.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이라고? 내가?’
실감이 들지 않았다.
“아… 그런 거군.”
두렵지 않은 건 마음이 무뎌져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오늘 죽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이 던전에 머무는 그 누구도 내 죽음이 순순히 찾아오게 둘 리 없다.
녀석들이 이제 마주하게 되는 건, 평범한 사역마가 아니다.
악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그들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나는 어쩌면 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존재로.